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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진단 | 낙천ㆍ낙선운동, 유권자혁명의 향방
지역감정을 넘어 정치개혁으로
송기숙 宋基淑
전남대 국문과 교수, 소설가
‘민중’이란 단어를 모멸감으로 뇌면서 나대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나서고 보니 갑자기 어엿한 시민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나는 6월항쟁 뒤로는 현실 사회운동 대열에서는 스스로 제대한다는 기분으로 멀찍이 절에다 집필실을 마련해놓고 연구실과 절 사이를 오가다가 3년 전에는 집까지 아예 시골로 옮겼는데, 졸지에 운동대열에 다시 서고 보니 남의 집에라도 들어선 듯 두루 어설프기만 하다. 이런 모양새를 대충 짐작하면서도 어정쩡히 나섰던 것은 정치개혁을 하자는 시민단체의 요구도 요구지만 나름대로 생각하는 것이 있어서였다. 정치개혁을 하는 김에 전라도지역 사람들이 김대중씨 ‘맹신도’라는 오명을 씻어볼 여지가 없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그것이다. 우리 근세사에서 농민전쟁 이래 항상 민족사적 공의(公義)의 한가운데 있었던 이 지역 사람들의 자존심을 되찾자는 것이다.
그러나 잠깐 일을 해보니 형편이 옛날하고는 너무 다르다. 전에 독재자들을 상대할 때는 얼마나 거세게 대드느냐, 그것 한가지가 문제였으므로 붙잡혀갈 각오만 하면 머리 굴릴 일이 없었으나, 지금은 노회하고 염치없는 정치가들을 상대하자니 앞뒤로 눈을 번득일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를테면 공천부적격 대상자들이 요구하는 공개토론만 하더라도 언뜻 생각하면 그래야 공정할 것 같지만, 그랬다가는 토론장이 그들 선거운동판이 되어버릴 것이다. 1월 27일 어느 방송국의 시사토론 프로그램에서 자민련 대변인은 다음날치 『한겨레』 그림판 만화를 슬쩍 보이며 『한겨레』도 음모론을 인정한 것 같은 인상을 풍기는 소리를 했는데, 그건 『한겨레』를 보지 않는 사람들을 속여넘기자는 수작이었다.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큰소리치는 음모론도 그런 것일 게다. 음모란 게 있을 수가 없으니 무슨 증거가 있을 까닭이 없고, 특정지역 사람들을 상대로 김을 빼자는 속임수이다. 이런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 이번 운동이다.
전라도지역은 김대중 대통령과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다른 지역과는 사정이 또 다르다. 모두 갈아치우자는 열기는 어느 지역보다 높은데, 김대중 대통령이 총재로서 실질적으로 공천권을 행사할 것이므로 갈아봤자 그 사람이 그 사람일 것 같고, 민주당이 이번에도 싹쓸이할 가능성이 높아 의석 수에도 변함이 없을 것 같다. 누구누구를 공천하지 말라는 요구도, 민주당 처지에서는 두루 얽히고설켜 내치자 해도 내치지 못할 사람들이 수두룩할 텐데 그 판에 시민단체가 나서주었으니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일 것이며, 대상자 명단에 끼지 않은 사람들한테는 깨끗한 옷만 입혀주는 꼴이 될 것이다. 또 기권하지 말자고 호소할 경우 투표율은 높아지겠지만 민주당 지지율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므로 역시 전라도 사람들은 김대중씨 맹신도라는 오명은 오명대로 남게 될 것 같다.
결국 민주당 물갈이 폭을 넓히는 정도밖에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이곳 운동의 한계다. 그래도 그런 한계에서나마 전라도 사람들의 오명을 씻는 효과는 웬만큼 기대할 수 있을 듯하다. 전에는 김대통령이 들이대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표를 몰아주었지만, 이번에는 유권자들이 갈아치우라고 해서 바뀐 사람들한테 표를 찍게 될 것이므로 똑같이 표를 몰아주더라도 그 의미가 전과는 다르다. 이쪽의 의사가 반영된만큼 유권자들이 후보자 선정의 주체로 참여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김대통령이 시민단체의 요구를 얼마만큼 수용하느냐이다.
이런 점에서 김대통령은 이번만은 전라도 사람들 처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김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마당에서는, 맹신도라는 모멸을 받으면서까지 지지해준 이쪽 사람들의 오명을 씻는 데 협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좀 감상적으로 말하면 이쪽 사람들한테 은혜를 갚을 차례가 된 것이다. 앞으로 이런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고, 이번이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이쪽 사람들 처지에서도 오명을 씻는 데는 이만한 기회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방법은 간단하다. 김대통령이 이쪽 사람들의 요구를 거의 전부 수용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낙선운동을 벌일 수밖에 없고 그럴 경우 이 지역의 상황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복잡해질 것이다.
전라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한이 많은 사람들인데, 김대통령을 지지하다가 그의 맹신도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쓰는 바람에 한이 겹쳐 있다. 내가 오명, 오명 하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전라도 사람들이 전라도지역 단위로 투쟁했던 민족사적 사건만 하더라도 동학농민전쟁을 비롯해서 한말의병투쟁·소작쟁의·광주학생운동이 있고, 가까운 사례로는 5·18민중항쟁을 포함한 갖가지 구국·민주화투쟁이 있다. 그러나 전라도지역만의 이익을 위해서 싸운 적은 한번도 없다. 모두가 민족 단위의 절박한 역사적 요구에서 나온 것이었다.
여기에는 설명이 좀 필요할 듯하다. 예로 든 사건 가운데서 1909년의 의병투쟁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투쟁이라기보다 전라남도 사람들이 철저하게 도륙을 당한 사건이다. 일본은 ‘남조선대토벌작전’이란 이름으로 3개 연대를 동원하여, 육지는 부안에서 노령산맥을 거쳐 순천에 이르기까지 포위하고, 바다는 해군 수뢰정으로 물샐틈없이 둘러싸서 전라남도 전체를 철통같이 봉쇄한 다음 토벌작전을 시작했다. 농민전쟁 때 동원된 일본군 규모가 1개 대대였는데, 이 작전에는 10배가 넘는 3개 연대가 동원됐고 현지에는 헌병과 경찰이 있었다. 일본은 한국 병탄을 1년 앞두고 저항이 가장 거셌던 전남지역 반일세력의 뿌리를 뽑아버리려 한 것이다. 전남 한 지역을 상대하면서 ‘남조선대토벌작전’이라 이름붙인 것만 보더라도 그들의 의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9월 1일부터 2개월 동안이나 차근하게 섬까지 구석구석 뒤지며 도륙을 했다. 섬에는 농민전쟁의 주도급 인사들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윗녘에서부터 뒤지고 내려가다가 광주지역을 지날 때 그 지역 의병장 심남일(沈南一)이 포위망을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고 포위망을 한참 후퇴시켜 다시 이 잡듯이 뒤질 지경이었다. 그때 잡혀 죽은 의병장만 109명이고 수천명이 참살당했다. 그 참상은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웬만큼 기록하고 있다.
1924년 소작쟁의 때는 참여자 수가 3·1운동 때의 이 지역 참여자 수보다 많았으며, 암태도를 비롯한 전라도 사람들이 싸워서 승리하자 다른 지역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7,8할이던 살인적인 소작료가 4할로 인하되는 혜택을 보았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이 전라도가 아니었으면 어떠했겠느냐라고 한 말은 접어두더라도, 병자호란 때도 남한산성까지 올라가서 가장 치열하게 싸운 것도 전라도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싸우다가 죽고 병신이 되고 가산을 탕진하고 쫓겨다니고 숨어 사는 한만도 감당하기 어려운 판에 그런 투쟁의욕마저 없애버리는 음해까지 있어왔다. 왕건(王建)의 훈요십조(訓要十條)의 역지설(逆地說)이 그것이다. 전라도지역은 산세가 배역(背逆)하여 사람들도 배역을 한다는 것이다. 배역을 심성으로 타고난다는 것이다. 농민전쟁 때 집권하고 있던 민씨들 입에는 이 소리가 붙어 있었다.
왕건의 이 역지설은 이곳 산세가 북쪽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배역이라 한 것인데 이건 이만저만 억지가 아니다. 우리 역사에서 최대 혼란기였던 후삼국시대 이곳 사람들이 왕건과 싸운 것은 왕건이 고구려를 재건하려던 것과 똑같이 이쪽 사람들도 백제를 재건하자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인 소리를 산세에 가탁해서 풍수지리상의 근거라도 있는 것처럼 분식(扮飾)했던 것이다. 순에 역하는 것이 역이지 역에 역하는 것은 역이 아니다. 동학농민전쟁 때의 왕조나 의병투쟁의 대상인 일본은 우리 민족의 처지에서 볼 때 모두 역이다. 전라도 사람들은 그런 역에 대해서만 역을 했던 것이다. 그것이 역이라면 가만히 있었던 지역 사람들은 모두 순이라야 한다.
이쪽 사람들은 이 역지설에 내내 시달려왔고, 김대중씨 맹신도라는 비난에도 이 역지설이 뒤를 받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민주화가 절대적인 민족사적 요구이던 군사독재 시절에 이곳 사람들이 김대중씨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던 것은 그를 앞세워 민주화를 쟁취하자는 것이었지 김대중씨 개인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가 아니었다. 그게 유신정권의 지역분할 간계에 말려들어 지역보스에게 맹종하는 지역분열의 행태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인데, 김대중씨가 김영삼씨와 대통령선거에서 맞선 뒤로는 지역감정으로 굳어버린 게 사실이다. 또 김대중씨는 항상 현실정치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혀 문제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고 지금도 여러가지 실책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가 군사정권과 싸울 때 지지했던 것까지 싸잡아서 전라도지역을 지역분열의 근원지로 몰아붙임에 따라, 이곳 사람들은 억울함뿐만 아니라, 그럼 독재자들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뭐냐는 억하심정까지 겹쳐 더 거세게 지역감정을 드러낸 것도 사실이다.
어찌됐든 이 지역에서도 지역감정이 굳어버린 마당에 이렇게 묵은 고리짝을 뒤지는 것은 새삼스런 푸념을 하자는 게 아니다. 이쪽 사람들은 김대중씨를 지지했던 게 군사독재자들을 지지했던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온 터라, 이번에도 선거 열기가 높아져 지역감정이 살아날 경우 그때는 민주당 지지와 정치개혁 사이에서 혼란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걸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점에서 다른 지역보다 높은 이 지역의 낙천·낙선운동 열기가 시민운동 차원에서는 되레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광주·전남 지역은 이번에도 어느 지역보다 앞서서 어느 지역보다 많은 86개의 시민단체가 삽시간에 뭉쳤다. 1월 24일 총선시민연대가 이 지역의 공천부적격자 8명을 발표하고, 2월 1일 이곳의 시민단체가 추가로 4명을 발표하자, 이 지역 주민들은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광주사회조사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에 유권자 82%가 지지했고, 공천부적격 대상자들이 출마하면 그들에게 투표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은 77%였으며, 12명이 선정된 데는 59%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12명이 선정된 데 대해 지지가 낮은 것은 어째서 12명밖에 안되느냐는 불만이지 12명 선정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이는 그 점에 대한 부정적 반응이 5.5%밖에 되지 않은 데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뻔한 일이지만 민주당과 김대통령은 이런 반응이 민주당을 포함한 정치권 일반에 대한 불신이고, 동시에 정치개혁에 대한 열망이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식해야 한다. 광주·전남 사람들의 이런 열망에 답하고 맹신도라는 오명을 조금이나마 씻어내어 자존심을 살려주는 길은 앞에서 말했듯이 이곳에서 주장하는 공천부적격 대상자의 낙천 요구를 거의 전부 수용하는 길밖에 없다. 의석 수가 줄어들 것 같지도 않으므로 사람만 바꾸라는 것인데 그것마저 못한다면 말이 안된다. 여기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이 지역에서도 낙선운동이 일어나게 되면 배신감까지 겹쳐 운동은 더 거칠어질 것이며 그 혼란은 정치가들이 더 잘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