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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관찰과 해석, 또는 어떤 세대의 시쓰기

김선우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창작과비평사 2000

송종찬 시집 『그리운 막차』, 실천문학사 1999

이선영 시집 『평범에 바치다』, 문학과지성사 1999

 

이희중 李熙中

시인. 문학평론가. 전주대 국어교육과 교수.

 

 

1. 하나의 문학적 인격이 다른 분야에 비해 느리게 성숙한다는 사실을 수긍한다면, 문단은 이제 바야흐로 ‘386세대’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세대는 양적·질적으로 풍성한 역사경험과 인적 자원을 보유한 채 이 사회의 각 분야에서 영향력을 넓혀왔다. 문학에서는 창작예술의 특성상 개인차가 더 부각되기 마련이지만, 이 세대에 속하는 문인들의 성향이 한가지 색깔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아내기란 어렵지 않다. 이 세대의 개체들은 극단적인 경우 10년 가까운 시차를 갖지만 유사한 정체성을 지닌다. 이는 그들이 상징적인 의미에서 같은 학교를 같은 시기에 다녔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난 세기 우리 역사의 칼날 위를 맨발로 걸어온 막내 세대로서 어른이 되기 직전에, ‘보이는 저것은 무엇이며, 보는 나는 무엇인가’를 여러모로 뼈저리게 고뇌한 기억을 공유한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사물을 개괄적이며 구조적으로 파악하려 한다. 더러 그들의 시선은 지나치게 비판적이며 정치적일 때도 있으나 대체로 그들은 무엇을 성실하고 진지하게 보고자 하는 열망과 습성을 가지고 있다. ‘보다’는 소극적인 뜻에서 ‘구경하다’ ‘관망하다’로 바꿔 읽을 수 있으며, 적극적인 뜻에서 ‘지켜보다’ ‘응시하다’로 다시 읽을 수 있다. 나아가 ‘알다’ ‘깨닫다’ ‘반성하다’로 읽어도 좋다. 눈으로 본 것을 말이나 글로 드러낼 때 우리는 ‘─이 있다’는 식의 간접전달 형식을 택하거나, ‘─을 보다’ 식의 직접전달 형식을 택한다.

 

107-367

 

김선우, 송종찬, 이선영 세 시인이 새로 펴낸 시집들은 저마다 개성적인 목소리를 자랑한다. 그러나 비슷한 역사경험을 가진 한 세대로서 특징적인 눈길도 아울러 보여준다.

 

2. 김선우(金宣佑)는 시를 쓰면서 자신이 여성임을 좀처럼 잊지 않는다. 글로만 판단하자면 그의 삶도 그럴 것 같다. 언젠가 나는, 어떤 문명에서 모든 물고기는 하나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런 방식으로 말하자면 김선우는 여성들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암컷들, 가끔은 무생물들조차도 하나의 영혼을 가졌다고 믿는지 모른다. 무생물까지는 아니더라도, 과학자들은 지구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들이 애초 하나의 근원에서 나누어졌으며, 진화의 핵심고리는 어머니들의 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김선우의 상상세계가 황당무계하다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물속의 여자들」에서 그는 ‘바리공주’와 ‘명성황후’와 ‘황진이’와 ‘허난설헌’을 하나의 시공에서 본다. 그는 여성들, 암컷들의 세계를 그의 시집 가득 끌어들여놓았다. 특히 그가 ‘어머니’에 주목하는 까닭은 자신의 몸과 살을 통해 직접 경험하는 모녀관계가 이 세상의 원리를 드러내는 가장 구체적인 물증이기 때문이다.

‘몸’보다는 ‘살’이 더 어울릴 법한 김선우의 시에서, 사랑 또는 육체적 교섭은 그러므로 선정적이기보다는 신성한 분위기로 감싸여 있다. 그에게 잃어버린 낙원은 어머니의 둥근 뱃속인데, 이제 다시 누군가를 위해 스스로도 ‘둥근 배’를 갖고 싶다고 쓴다. 「무덤이 아기들을 기른다」와 「숭고한 밥상」 등의 시에서 엿보이는 근친상간의 기미나, 「술잔, 바람의 말」과 「산청여인숙」 등의 시에서 엿보이는 동성애의 냄새도 특유의 아름다움과 상징성을 잃지 않고 있다.

 

몸져누운 어머니의 예순여섯 생신날

고향에 가 소변을 받아드리다 보았네

한때 무성한 숲이었을 음부

더운 이슬 고인 밤 풀여치들의

사랑이 농익어 달 부풀던 그곳에

황토먼지 날리는 된비알이 있었네

─「내력」 부분

 

에서 그가 본 것은 잦아들어가는 어머니의 육신에 그치지 않고, 시간에 떠밀려 사라져가는 뭇 생명들이 겨우 붙잡은 한 가닥에까지 이른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 몸을 닦아드리다 온통 내가 젖는데”라고 쓰게 되고 “열매가 꽃으로 씨앗으로 흙으로/되돌아가는 소슬한 평화를 보았네”라거나 “어머니의 비알밭은 어린 여자아이의/밋밋하고 앳된 잠지를 닮아 있었네/돌아갈 채비를 끝내고 있었네”라고 쓰게 된다. 이처럼 김선우는 자신이 본 것을 글로 우리에게 전한다. 그의 시선은, 자주 우는 이웃집 여자(「그녀의 염전」), 온몸이 토막나도 꽃을 피우고자 하는 식물(「무꽃」), 이젠 주인을 잃어버린 열락의 흔적(「산청여인숙」), 귀찮게 스스로의 부패를 증명하는 곤충(「애무의 저편」), 용도 폐기된 폐품가구(「맑은 날」) 등에 주로 머문다. 하나같이 응달의 풍경이거나, 응달을 포함한 풍경이다. 응달은 세상 또는 사람이 원래 가진 것이다.

386세대의 거의 막내로서 그의 정체성은, “절망을 전유하지 않고서 어떻게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내 뒤에서 우는 뻐꾹새」)라거나, “희망을 갖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약점인지 아느냐”(「술잔, 바람의 말」) 또는 “붓다도 레닌도 맨발의 내 어머니도/아픈 날은 이렇게 온종일 방바닥과 놀다 가려니”(「포구의 방」)와 같은 구절에서 내비친다. 나아가 “보도블록을 깨다 손목 베이자 불타는 머리칼,/바리케이드 위에 살점을 널던 팔십년대”(「헤모글로빈, 알콜, 머리칼」)와 같은 구절에서 좀더 뚜렷하다.

김선우의 언어는 그가 책을 보며 살아온 세월 동안 시를 쓴 선배 여성시인들의 언어에 더러 빚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뿐은 아니다. 특히 「어미木의 자살 1」 「가을 구름 물속을 간다」 「점」 「북엇국」 같이 아름다운 시에는 기억할 만한 그 나름의 목소리가 있다. 특히,

 

길 가다 한 사내 보았는데

글쎄 낯이 익어

한 천년 된 마음은 뜨거웁고

건널 수 없던 서늘한 강은 깊어

꽃잎 한장 나부껴 떠오더라는 얘긴데

 

이생에 어긋나면 어느 골짜기 바람이 될까

만취한 사내 아랫목에 누이고

북어를 땅땅 두드렸다는데

부끄러이 내 껍질 벗고 여윈 살점 추려

더운 국물 한사발 끓여 올렸다는데

─「북엇국」 부분

 

와 같은 구절은 김선우가 말로 차린 진경을 선보이고 있다. 이렇게 스스로 북엇국이 되고 “눈부신 빈 사발”이 되어 “찰랑거리”더라고 마무리하는 이 시의 선정성은 눈부시게 곱고 성스럽다.

 

3. 송종찬(宋鍾贊)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시의 장기를 잘 보여준다.

 

폭설 내린 겨울밤

서른 개의 빈 방에

불 밝히고

그대 기다린다

─「대나무 마디를 세다」 부분

 

그는 눈 내리는 밤, 불 밝힌 서른 개의 방으로 간절한 기다림을 표현한다. 서른은 아마도 이 시를 쓸 당시 시인의 나이일 것이다. 밝은 서른 개의 창은 광활한 시공(時空)을 향한 시인의 애끊는 절규처럼 보인다. 송종찬은 한폭의 그림을 독자에게 보여주려 한다. “맑은 눈동자처럼 빛나던/일요일 오후/소읍의 텅 빈 학교 운동장”(「소나기」), “산 아래 멀리 기적소리가 울렸다/일요일 밤/옷가방을 건네주고 돌아서는 아내의/발길 위에/함박눈이 내렸다”(「주말부부」), “옥수수 단내가 깨알처럼 쏟아지는 저녁”(「작은 전쟁」)과 같은 구절에서는 삶의 단면을 날카롭게 도려내 시각화하고 이를 농축된 정서로 채색하는 장기가 거듭 확인된다.

풍경을 각별히 아끼는 송종찬의 화자가 과거의 기억 속에서나 현실의 체험에서 뜻깊은 풍경을 찾아 세상을 떠도는 일은 자연스럽다. 그는 여러 곳을 다니며 무엇을 찾아내고 이를 자주 ‘─을 보다’라는 직접전달의 형식에 담아 표현한다. 그는 산속 바위에 눕거나, 나무 뒤에 숨어 ‘하늘’을 보기도 하고(「가을산」 「직소폭포」), 바닷가에서 밀물에 지워지는 자신의 발자국을 쓸쓸히 보기도 한다(「등대」). 그러나 송종찬이 독자들에게 전하는 풍경은 과격하거나 격렬한 전언을 담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는 사람들의 삶이 가끔 연출하는 소중하고 애틋한 장면을 가려내고 거기서 효과음을 배제하려 한다. 이는 그가 고전적이며 정통적인 서정시의 품격을 잇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로부터 시는 풍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송종찬의 시는 풍경 그 자체를 충분히 드러내면서 나아가 그 속에 자신의 체취와 숨결을 묻혀둔다.

젊은 시인들 가운데서는 드물게 말을 아껴 쓰는 편인 송종찬은 중간쯤에 위치한 386세대이다. 그는 “개혁이냐 혁명이냐 끝없는 논쟁에 막차를 놓치고 강당에 들어가 잠을 자던 밤”(「모닥불 앞에서」)을 기억하는 세대이다. 험난한 시대를 관통한 그의 젊은날은, “난 오랫동안 理念에 갇혀/떠나는 뱃고동 소리를 듣지 못했고/다시 抒情에 갇혀/울부짖는 그대 목소리를 보지 못했네”(「가지 않는 날들을 위해 6」)와 같은 구절에 드러나 있다. 그래서 뜻깊은 풍경을 구하던 그의 발걸음은 때로 우리가 몸담은 세상 전체를 걸러낸 냉엄한 풍경 앞에 머물기도 한다. 이를테면,

 

날마다 하늘이 누는 노란 똥을

가끔 오줌발을

받아 먹으며

하루에 세 번

냄새나는 허공을 향해

고개를 쳐든다

넘어설 수 없는

욕망과 본능의 널빤지 위에

쪼그리고 앉아

하루에도 몇 번씩

엉덩이를 들이미는 거대한

하늘

─「경제」 전문

 

과 같은 시에서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독자는 당연히 사람의 똥을 먹이로 사육되는 집돼지의 생태를 떠올리게 된다. 이는 우리 모두가 연루된 먹고사는 일의 비유이다. 여기서 시인은 짐짓 그림만을 보여주려 하지만 독자가 되새기게 되는 것은 사람살이의 구차하고 절박한 국면이다. 송종찬이 아름답고 고운 그림만 그리고 있지는 않음을 이 시는 알려준다. 살펴보면 「나목」에는 추운 겨울 반생명적 상황에 처한 헐벗은 가지와 뿌리가 나누는 착잡한 대화가 있다. 또한 송종찬은 “어떻게 하면 혼자서도 사람이 되고 누군가를 향해 마음쓰지 않아도 되는 걸까”(「꿈꾸는 마을」)라며 길을 찾는 젊은 구도자이기도 하고,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를 생체실험하는/내 나이 서른 둘”(「별의 노래」)이라며 자신의 삶을 차갑고 어둡게 바라보는 삼십대이기도 하다. 나는 「시소를 보며」 「어느 비오는 날」 「벼랑 위의 집」 등의 시를 따로 기억하고 싶다.

 

4. 새 시집에서 이선영(李宣姈)이 보여주는 세상은 “버려질 엄마 아버지 남편 그리고 나/버려지기 전까지는 손발 닳도록 살아간다”(「버려진 냉장고」)와 같은 구절에 요약되어 있다. 게다가 “뜨고 지는 해와 달의 계주를 따라/우리 목숨,/날마다 숨차게 저문다”(「순장」), 또는 “그리운 것은 늘 바깥에 있다”(「63빌딩에 갇히다」)와 같은 구절까지 참고하면 그가 그리는 세상은 훨씬 또렷해진다. 이런 유의 허망함과 권태로움은 반복되는 일상에서 말미암는다. ‘나’뿐만 아니라 부모와 가족들은 사회라는 거대한 구조물 속에서 한낱 소모품처럼 존재한다. 소모품들은 쓸모를 인정받는 동안만 소임을 다할 수 있다. 이선영은 이렇게 소모품으로 기능하는 삶을 순순히 받아들인 상황을 ‘평범’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평범하다’는 ‘다른 흔한 것들과 다르지 않음’ ‘흔한 것들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다. 새 시집에 제목을 빌려준 「평범에 바치다」라는 시는 그런 점에서 인상적이다. 이 두 마디만 따로 두고 읽으면 흔쾌히 일상의 삶에 헌신하여 이를 수긍하고 찬미하는 듯하지만, 시의 문면은 꼭 그렇지 않다.

 

세월로부터 한살 한살 근근이 수확하는 나이를 평범에 갖다 바치다

소작농이 그의 지주에게 으레 그리하듯

그러나 나의 나이여, 평범의 지주에게 갚는 빚이여, 지주의 눈을 피한 단 한 줌 이 손아귀 안의 움켜쥠을 허락해주지 않으련

─「평범에 바치다」 전문

 

새겨 읽어야 할 대목은 끝의 간절한 부탁이다. 앞에서 화자는 삼십대 중반에 처한 자신의 삶을 토로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세월이라는 농지를 평범이라는 지주에게 빌려 소작하며, 그 소출인 청춘의 나날을 ‘평범’에 착취당하고 있다. 드디어 그는 지주에게 하소한다. “단 한 줌”의 비범함을 허락해달라고. 그는 세월의 농사를, 지주와 얽힌 인연을 아주 끊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삶과 그 다른 이름인 일상은 또다른 이유로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그러하듯이, 이선영의 저항도 어느 한도를 넘을 수 없다. 아무튼 이 ‘평범’에 착취당하며 ‘비범’을 꿈꾸는 몸짓은 시집 전체에 흐른다.

이선영 시의 화자 또한 앞서 김선우 시의 화자와 같이 좀처럼 자신이 여성임을 잊지 않는다. 다른 점은 김선우에게 어머니가 중요한 것과 대조적으로 이선영에게는 자신과 성(性)이 같은 자식, 곧 딸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성은 세습되지 않아서 이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은 여느 사회문제와 다른 길을 간다. 이를테면 인종·계급·지역의 편가르기는 대체로 세습되지만, 남녀갈등은 본질적으로 강력한 인력을 사이에 둔 채 개체적 긴장에서 비롯하여 그 총합으로 문제의 전모를 드러낸다. 이선영의 시집에서 딸과 화자의 관계는 김선우의 시집에서 어머니와 화자의 관계와 뼈대는 같다. 이는 “두 팔 벌려 너를 기다리고 있는 나의 현재를 향해/나의 미래는 자라나는 너와 키를 맞추며 위로 늘어만 가는 묘기의 스프링”(「네가 잠든 사이에 엄마는 코끝이」)과 같은 구절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386세대로서는 윗 연배에 속하는 이선영은 시의 문면에는 적극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세상을 관찰하는 버릇을 숨기지 않는다. 고른 구두를 찬찬히 “들여다보”아 이상한 상표를 찾아내기도 하고(「우연」), 누가 버린 냉장고를 “보”고는 언젠가는 자신이 쓰는 냉장고도 저렇게 버려질 것임을 슬퍼하기도 한다(「버려진 냉장고」). 또한 그도 자신의 환경을 개괄하고 구조적으로 바라보려는 성향을 같은 세대의 시인들과 공유한다. 이를테면,

 

발 밑으로 늘비하니 늦가을 나무 이파리들, 밟히고 찢기며 비에 젖는다 빗줄기는

무형무취의, 그러나 쉴새없이 내리꽂히는 비수다 악한이다

우산 밖에 나뒹구는 참담의 이파리들과 함께

비 풍경의 한 짧은 흑백 사진을 찍으며

이 이기의 우산을 접어둘 용기가 없다 나는

이미 우산 애용자인 것이다

─「비에 젖는, 젖지 않는, 자본주의」 부분

 

와 같은 구절에서 그는 자신이 몸담은 거대한 사회를 조망하려 한다. 그는 자신이 일상에서 살갗으로 느끼는 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을 ‘자본주의’라는 정치적·이성적 규정어로 추상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 의도는 다시 우산을 둘러싼 ‘소동’으로 구체화된다. 그래서 제목에만 이 낱말을 드러내고 시의 본문은 비유와 상징의 언어로 채웠다. 시에 의하면 냉엄한 경쟁논리는, 널리 동의할 만한 근거 없이 함부로 승자와 패자를 나눈다. 승자는 우산으로 비를 가릴 수 있으며, 패자는 맨몸으로 비를 맞아야 한다. 물론 이때 비는 경제적 궁핍 또는 이를 가져오는 경제적 조건이다. 이 시에서 시인이 본 자본주의의 단면은 작은 부분이지만, 그 문학적 구현양상은 이채롭고 또한 흥미롭다. 아름다운 시 「사랑하는 두 사람」을 독자들께 덧붙여 권하고 싶다.

 

5.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떠들던 ‘세기말’의 어둠과 ‘세기초’의 밝음은 바로 그 입의 주인들이 지닌 간교한 양면을 잘 보여준다. 설사 양쪽 사안에 대해 주로 입을 연 사람들이 서로 전혀 다른 성향의 인물이라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세상의 어둠과 삶의 비극성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들대로, 그 반대의 사람들은 또 그들대로 한철을 잘 이용했다. 농담처럼 말하자면, 이제 우리는 대변혁이나 파국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어쨌든 도리없이, 변함없이, 우리는 이 별과 그 위에 자리잡은 작은 우리 땅을 아끼며 살아야 한다. 신기하게도 오늘 우리의 삶은 한달 전, 한해 전과 똑같지 않은가. 이것은 다행인가 불행인가.

지금 우리가 읽은 시집들은 거의 다 지난 세기에 씌어진 것이다. 우리는 그 세기의 절망과 희망, 슬픔과 기쁨, 위기와 기회가 고스란히 오늘에 옮겨와 있음을 본다. 여전히 우리는 지난 수십만년 동안 우리의 선조들이 그래왔듯이 잠자리와 입성과 먹이를 찾아 뛰어다닐 테고 바쁜 와중에도 노래를 짓고, 함께 부르고, 즐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