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 2000년을 여는 젊은 시인 20인

 

김수영 金秀映

1967년 경남 마산 출생. 199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이 있음.

 

 

 

오동나무 장롱 6

가위

 

 

가만히 있어도 그 긴 입으로 쟁강쟁강 소리를 낼 것 같은 가위는 장롱 속 반짇고리에 언제나 모로 뉘어져 칼잠을 잤다. 마름질하다 잠시 할머니 손이 쉴 때만 반듯하게 눕는 것도 꼭 할머니를 닮았다.

한번도 녹이 슨 적 없는 가위는 할머니가 비단옷감을 자를 때마다 두런두런하는 할머니 말에, 그 말이 맞다는 듯 쟁강쟁강 맞장구를 쳐댔다. 녹이 슬지 않는 것은 공단 양단 본견 일본비단 좋은 것만 두루 입맛에 맞게 걸쳐서 그렇다고……

바느질을 할 때면 할머니는 내게 비단의 한쪽 끝을 잡게 하고 쉬익 입김을 내뿜으며 가윗날 지나가는 소리를 냈는데, 기다렸다는 듯 가위는 긴 날로 그 넓은 폭을 좍 순식간에 갈라놓곤 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속 한번 시원타고 손장단을 치고, 더이상 손장단칠 거리가 없는 저녁 늦게야 베개도 없이 모로 누웠다. 

 

가윗날을 시퍼렇게 숫돌에 갈 때도 있었는데, 그러면 부엌 큰 솥에는 물이 설설 끓고, 국솥도 올려져 있는 날이다. 

아버지와, 작은할머니의 자식인 삼촌 둘, 셋째할머니의 핏줄인 고모 둘과 삼촌 하나, 나와 내 동생들의 질긴 탯줄. 모두 이 박복한 교두각시가 끊은 것이어서, 그런 날이면 할머니는 가위를 비단보자기에 싸서 장롱 속에 반듯이 누인 뒤 며칠 동안 찾지 않았다고……

이 묵직한 무쇠가위는 일찍 홀몸이 된 할머니의 어머니가 쓰던 것인데, 전생의 인연 이것으로 끊어지라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지는 순간 힘을 주어 끊었다던가.

 

 

 

물 속의 달

 

 

늙은 아버지가 철새나 보면서

저물어가고 싶어한 조그만 연못

갈대밭을 서걱이던 오리들도 자고

잔물결도 자고……

 

달은 물에 젖지도 않고

이지러지지도 않고

연못 속으로 들어간다

 

이런 밤이면

연못 속에서 찌륵찌륵 울던

늙은 잉어, 아버지가 놓아준

그 잉어

아버지의 잠을 빌려

만월 속을 헤엄치는 꿈

그 환한 꿈을 꾸느라 은비늘들

고요히 떨릴 것이다

 

달이 높이 떠오를수록

점점 넓고 깊어지는 연못

 

먼산, 그 아래 작은 마을

마을 앞의 갈대밭, 갈대밭의

늙은 아버지

물 속에서 더 환한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