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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젊은 지적 스타의 경쾌한 사유

아사다 아끼라 『도주론』, 민음사 1999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책들이 우후죽순 번역되어 나오더니 이번엔 아사다 아끼라(淺田彰)의 책이다. 이런 사람들의 책을 번역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번역과정을 보면 모종의 의구심을 버릴 수 없다. 90년대 우리나라에 불었던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의 열풍이 식어버리고, 그렇게 남은 빈터를 이번에는 갑자기 ‘일본의 탈구조주의자’들의 책이 메우는 풍경이 야릇하게만 느껴진다. 조금은 ‘만만한’ 이웃나라 일본이 난해한 프랑스철학에 대해 어느 수준의 이해를 하고 있는가에 대한 궁금증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그러려니 했던 일본사상계가 의외로 탈구조주의에 대해 깊은 이해를 내비치고 있다고 여겨진 탓일까? 아무튼 이는 일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서 비롯된 문제이지 그들의 문제는 아니며, 한번쯤 점검해봐야 할 성질의 것이다. 여기서는 아사다 아끼라와 그의 『도주론(逃走論)』(문아영 옮김)만 주목해서 보자.

아사다 아끼라에게는 지적 스타의 풍모가 있다. 그는 이미 20대 후반에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원제 ‘構造と力’)와 『도주론』 같은 책을 썼다. 전자는 프랑스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의 흐름을 간결하고 도식적으로 요약·정리했는데, 그 정리와 요약이 통상적 수준을 넘어서는 우아하고 힘있는 것이며, 그런만큼 조숙한 천재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107-398『도주론』은 일본에서 10만부가 팔렸다는데, 이런 사실은 그의 스타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의 이론적 지주가 들뢰즈와 가따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자못 놀라운 일이다. 들뢰즈와 가따리에 대한 평가야 논자마다 다르겠지만, 그들이 매우 읽기 험난한 사상가라는 데는 모두 동의할 것이며, 나로서는 그들의 『앙띠 오이디푸스』나 『천의 고원』 같은 책을 넘겨보면서 “이것이야말로 ‘학문적 컬트’이다!” 라는 느낌까지 가졌다. 그러나 『도주론』을 읽을 때, 아끼라의 스타성을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베스트쎌러를 결정하는 것은 책의 속성이 아니라 독자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책을 들춰보면 몇개의 칼럼, 그냥 그런 서평들, 긴 두 개의 대담을 대충 모아놓은 책임을 알 수 있다. 그의 말마따나 이 책은 “가짜 돈처럼 혹은 도박꾼의 칩처럼 가볍게 운동하는 지식과 장난”(131면)치는 태도로 만들어진 책이다.

하지만 그가 이런 자기비속화를 통해 책의 아우라를 파괴함으로써 독자에게 주는 상쾌함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책의 구성을 찬찬히 보면 더 그런 느낌이 든다. “남자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가정으로부터, 혹은 여자로부터. 어느쪽이든 멋지지 않으냐. 여자들이나 아이들도 서투른 만류공작 같은 걸 하고 있을 틈이 있으면, 남겨지는 것보다 먼저 도망치는 쪽이 낫다. 행선지 같은 건 알 게 뭐냐. 어쨌든 도망쳐라, 도망쳐라, 어디까지든.”(9면) 단번에 독자의 관심을 끄는 이런 식의 도전적인 말로 시작되는 1부에서 우리는 아끼라가 편집증형과 분열증형이라는 간결한 이분법에 근거해서 수행하는 자기 문화에 대한 매력적인 통찰을 보게 된다. 2부에서는 그의 ‘도주의 철학’이 맑스에 대한 새로운 독해의 전망으로 제시되고, 맑스는 그 안에 ‘편안하게’(너무 편안해서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품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1부와 2부에 각각 붙어 있는 대담이다. 이 대담들은 같이 들어 있는 다른 글에 비하면 독자들을 주눅들게 하기 충분하고, 아끼라의 반짝이는 통찰 뒤에 만만찮은 독서와 성찰이 있음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대담은 그의 글에 대한 후광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그의 책 구성은 보기처럼 어수룩하기는커녕 교활한 느낌마저 준다.

이 책에 실린 대담은 다른 점에서도 흥미롭다. 우선 우리나라 계간지의 대담에서처럼 현실의 긴박한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다. 우리는 우리가 특수하다고 생각하고, 우리의 특수성과 예외성을 해명하기 위해 깊이 골몰하는 편이다. 이 때 서구는 자주 ‘보편적’ 참조점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책의 대담에서 일본지식인들은 자신과 서구를 동일 평면에 놓고 있는 듯하다. 서구가 더이상 거울이 아니라 이미 자기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다루어지는 것이다. 예컨대 그들은 대담중에 헤겔이나 맑스, 케인즈, 프리고진, 데리다, 푸꼬, 라깡 등을 야마자끼 카오루(山崎カヲル), 요시자와 에이나리(吉擇英成), 이와이 카쯔히또(岩井克人), 하스미 시게히꼬(蓮實重彦), 카라따니 코오진 등과 아무런 차이 없이 뒤섞어 논의한다. 물론 두 가지 태도가 모두 바람직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 책의 대담이 우리와 일본 사이에 뭔가 사상적 태도의 차이가 있음을 드러내준다는 점은 흥미롭다. 생각거리를 주는 셈이다.

1,2부에 비해 3부는 느슨한 편이다. 그리고 일본사상계에 정통하지 않으면 그의 서평방식과 서평대상 선택방식에 깃들인 독서와 서평의 정치학을 짐작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나로서는 ‘심심풀이 독서술’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거기서 아끼라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괜찮다 싶으면, 곧 차트화해서 카드로 만들어버리세요. (…) 꽉 붙잡은 것은 차트화해서 이해해야죠. 아무래도 차트식 세대에게는 익숙한 경박함으로 보일 것 같지만, 상관없잖아요.”(212면) 이렇게 위악적인 태도로 자신의 사유방식을 드러내는 이 글에서 그는 우리만큼 입시지옥을 겪고 있는 일본학생들의 차트와 카드 만들기에 의한 공부법을 맑스의 정치경제학이나 들뢰즈의 철학같이 어려운 사상에 대해서도 그냥 활용해버리는 식의 ‘뻔뻔함’을 보여준다. 이런 뻔뻔함은 분명 어떤 ‘상쾌함’을 준다.

『도주론』을 읽는 것은 분명 고통스럽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상쾌한 느낌을 주는 데도 많고 가끔씩 반짝이는 문장을 낚는 재미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일독하고 갖게 되는 느낌은 모호함과 석연찮음이다. 그 이유는 아끼라가 주장하는 ‘도주’의 함의와 실천적 의의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마무라 히또시(今村均)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한다. “분열증처럼 달리면 된다고 하는 것은, 요컨대 주거지가 없어도 되는 놈, 즉 개구쟁이의 사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테고, 재생산과 지속을 필요로 하는 생활을 모르는 모험이나 놀이의 사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결코 그것에 머무르지 않는 현실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93면, 강조는 인용자) 그러나 그 ‘현실적 전망’의 분명한 모습을 이 책 안에서 찾을 수 없다. 그것이 우리를 공소한 느낌에 젖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