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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동물실험 반대론자들의 성서

피터 씽어 『동물해방』, 인간사랑 1999

 

이필렬 李必烈

방송대 교양학부 교수, 과학사·화학

 

 

내가 급진적 동물실험 반대론자들을 미심쩍게 보기를 그친 것은 수년 전 독일의 근본생태주의자 루돌프 바로(Rudolf Bahro)에 관한 글을 읽고서였다. 바로는 1985년 녹색당이 동물실험에 대해 보여준 미지근한 태도(동물실험의 완전 금지가 아닌, 엄격한 규제)에 환멸을 느껴 당을 떠났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타협적 태도가 인간이 모든 생물종의 중심이며 따라서 다른 종에 대한 인간의 폭력은 정당하다는 생각을 강화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인간이 과학기술을 이용해 자연을 조작하고 고문하는 데 대해 비판해왔지만, 동물실험을 전면 금지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서양인들이 애완동물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것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아온 터라 동물실험 반대자들도 대안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그 연장선에서 감정적으로 그러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었고, 또 한편으로 그러면 어떻게 유해물질을 판별하고 새로 개발한 의약품의 부작용을 알아내겠는가 하는 ‘인간중심적’인 생각에서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의 행동은 동물실험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오만한 태도, 반생명적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임을 깨우쳐주었다.

이제 동물실험 반대107-404자들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졌으니 그들의 논의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된 셈인데, 이번에도 뒷덜미를 잡는 것이 있었다. 동물실험을 반대하는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피터 씽어(Peter Singer)이니 그의 논지를 알아보는 것이 순서였겠지만, 그가 중증장애아의 안락사나 유전적 결함을 지닌 태아의 낙태를 찬성하는 반면 유인원에게는 인권에 준하는 권리를 주자는 운동을 벌인다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씽어는 오스트리아계 유태인의 후손으로 친가·외가 통틀어 조부모 셋이 나찌 집단수용소에서 살해당했지만, 독일에서 그는 장애아 안락사를 찬성하는 인물이라는 이유로 어딜 가나 학생과 시민들의 극렬한 항의공세를 받아야만 했다. 제3제국 때의 안락사를 통한 장애아 제거라는 끔찍한 역사를 지닌 독일인들이 그처럼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당연할 테지만, 장애아를 동물보다 못한 것처럼 취급하는 씽어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는 해도 동물의 권리를 논하는 책이 한국어로 처음 번역되었고(그것은 당연히 피터 씽어의 책일 터인데), 또 이에 대해 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기에 우선 알아보자는 마음으로 ‘동물해방의 성서’라는 꼬리표가 붙은 『동물해방』(Animal Liberation, 김성한 옮김)을 읽게 되었다.

씽어는 먼저 윤리학자로서 동물이 인간과 평등하게 취급되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은 고등동물도 인간과 똑같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므로, 동물의 고통도 인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능한 한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그는 인간이 동물실험을 통해 동물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가하는지를 심리학·의학·독물학 분야의 풍부한 사례를 통해서 폭로한다. 현대의 공장식 가축농장은 동물실험의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은 동물을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만드는데, 씽어는 이에 대해서도 다양한 자료를 제시하며 인간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동물을 얼마나 잔혹하게 다루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다음 단계는 그러면 동물해방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일 것이다. 씽어는 가장 효과적인 행동으로 채식주의자가 될 것을 권한다. 그는 채식은 공장식 가축생산에 대항하는 일종의 불매운동으로 동물차별을 막는 강력한 무기이며, 인간은 채식을 통해서도 필요한 영양소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으니 채식이 그다지 힘겨운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씽어는 동물에 대한 차별, 즉 종차별주의의 역사와 현재의 논의를 소개하고 이에 대해 동물해방론자로서 명쾌한 반박 논리를 제시한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도 이제는 좀더 철저하게 채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씽어의 논변은 대단히 훌륭한 편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내 가슴 한쪽에는 여전히 석연찮은 무엇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씽어는 동물실험과 공장식 농장에 대해 종종 분개한 어조로 이야기하며 읽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지만, 그의 일관된 주장은 동물과 인간이 평등하다는 데 대한 이성적인 성찰만이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것이다. 그는 아씨지의 성 프란체스꼬가 경험한 자연과의 합일을 통한 희열도 “이성적 성찰이 결여될 경우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본다(335면). 그럴 경우 동물과 바위, 동물과 나무 사이의 차이를 깨닫지 못할 수 있고, 그 결과 동물을 죽이는 것이나 식물을 죽이는 것이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디언과 같이 자신이 자연의 일부이고 야수들의 혈연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던 “고매한 야만인”의 감정도 동물해방을 위해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342면). 그의 논지에 따르면 이규보(李奎報) 같은 선인들의 생태사상도 파리나 모기를 척추동물─고통을 더 많이 느끼는─과 동등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쓸모없는 것이 된다.

씽어는 동물해방을 위해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지만, 신비적인 경험이나 영성이 들어갈 자리는 남겨두지 않는다. 그리고 동물실험을 대신할 과학적 방법이 얼마든지 개발될 수 있고, 동물의 고통도 과학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현대과학도 대체로 수용하는 듯하다. 하지만 씽어가 그토록 역설하는 동물해방이란 것도 궁극적으로는 공리주의라는 이성의 산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대 과학기술을 이용한 인간에 의해 짓밟히고 잘려나가는 자연을 보며 가슴아파하는 사람들의 ‘성스러운’ 행동─벌채에 대항해 나무를 껴안는 운동을 벌인 인도 북부의 여성들이나 「나무를 심은 사람」의 주인공 엘지아 부피에 같은─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공리주의의 이성적 논의를 따라가면, 유전적 결함을 지닌 태아보다 갓 태어난 건강한 송아지가 고통을 느낄 능력이 더 있고 태아에게는 출생 후 고통만이 남아 있지만 송아지는 남은 생애를 즐겁게 보낼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태아는 낙태시키고 송아지는 해방하는 것이 더 타당하게 보일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논리상으로는 흠잡을 데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논리로 어찌해볼 수 없는 그 무엇이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말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