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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유재건 柳在建

부산대 사학과 교수

 

 

의외로 빈곤한 서구 지성의 발언

칼 포퍼 『우리는 20세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생각의나무 2000

 

 

새로 나온 칼 포퍼(Karl R. Popper)의 『우리는 20세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The Lesson of This Century, 이상헌 옮김)는 동구권 몰락 직후 그의 나이 90세 무렵에 했던 두 번의 대담(1991년과 1993년)과 논문 두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간 직후 거의 모든 신문지상에 실린 호평 일색의 서평을 보며 나는 우리 사회의 지적 지형이 어지간히 바뀌었음을 실감했다. 한때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역사주의의 빈곤』 등 그의 저서가 반공 자유주의의 전거로 전용되어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냉랭한 대접을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금석지감이 든다. 분단체제하에서 일부 극우세력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지적·사회적 구도에서 자못 아쉬운 자유주의의 미덕을 감안할 때 그의 지적 탐색이 호평을 받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해방과 구원의 메씨지에 잠재된 전체주의에 대한 그의 경계에는 공감할 수 있으며 ‘인간은 누구나 틀릴 수 있다, 우리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는 말로 집약되는 그의 비판적 합리주의에는 분명 취할 바가 있다. 하지만 이 책을 덮고 난 뒤 나로서는 그의 철학의 약점이 한층 생생하게 드러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역사주의’를 ‘역사적 예언을 주된 목표로 삼는 사회과학의 접근방법’이라 규정하는 포퍼의 유별난 정의는 진작부터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숙명론적 예언과 그 과정의 큰 흐름을 되새기고자 하는 합리적 시도 양자를 ‘역사주의’라는 용어 안에 묶음으로써 형이상학적 철학과 거시적인 역사전망 자체를, 전체주의 및 전체론적 사고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포퍼의 ‘역사주의’ 비판은 거시적 사회전망을 폐쇄적 역사철학과 구분할 가능성을 차단하여 사회변혁의 기도 자체를 전체주의로 몰고 오직 ‘작은’ 개선에만 몰두하는 태도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 포퍼의 이 대담에 나오는 황당할 정도의 발언들도 우연이 아니라 일체의 역사의 흐름에 대한 거시적 전망을 거부하는 사고방식의 폐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소련이 1962년 싸하로프(A.D. Sakharov)가 만든 폭탄을 사용하는 데 실패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했다는 발언이라든가 미란젤로(B. Michelangelo) 이후 예술이 무섭게 쇠퇴한 것은 예술가들이 역사주의자들의 영향 아래 미래에 대한 예견에 휩쓸렸기 때문이라는 발언 등은(92, 124면) 너무 ‘소박’하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소련정권의 붕괴요인을 묻는 물음에 동독인들이 헝가리를 거쳐서 서독으로 탈출한 사태라고 거듭 강조하는 대목이나 소련붕괴로 암시장에 흘러들어갈 싸하로프 폭탄을 중국 등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문명세계’가 사들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대목은 다소 엉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96, 105면).

108-405이 책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전체주의 대 민주주의’, ‘정상적인 미국인 대 비정상적인 소련인’ 같은 이분법에 깔려 있는 서구중심주의적 함의였다. 그런데 지적 식민성이나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무성한 오늘의 우리 지식계에서 포퍼의 ‘문명세계 대 비문명세계’의 구분에 깔린 이런 함의에 대한 지적이 보이지 않는 점은 의아하게 생각된다. 책의 원제목인 ‘금세기의 교훈’의 으뜸으로 그가 꼽는 것은 “전쟁은 전쟁으로만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141〜54면). 그는 오늘날 세계가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평화라고 강조하지만, 여기에서 평화에 위협이 되는 세력은 비유럽의 ‘비문명세계’, 즉 중국·이란 등 미국의 패권주의 전략에 불편한 나라들이다. 실제로 보스니아 내전에 서구가 적극 개입하지 못한 것을 나무라면서 “미국인들이 베트남에서 배운 교훈”을 살려 보스니아에서 지상전을 피하고 공중폭격을 했어야 한다는 주장(151면)은 그의 ‘지성’에 심각한 회의를 느끼게 한다. 군비축소와 평화운동에 대한 반대를 공언하며 평화를 위해서 무력과 전쟁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새로운 세기의 평화에 관한 담론이 되기에는 너무 낡아 보인다.

그가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할 때도 비슷한 함의가 느껴진다. 좌파의 원래 기능이 약자 편에 서는 데 있다고 보는 그가, 좌파의 오류는 노동자들이 더이상 약자가 아닌 경우에도 그들 편에 선 데 있다고 할 때(133면) 일견 솔깃하게 들리기도 했다. 서구 노동세계의 어떤 부문에 눈을 돌릴 때 그런 인식을 할 수 있겠구나 싶기도 하고 좌파가 새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약자집단으로 ‘어린이’를 거론할 때 계급담론에서 망각된 하위자집단을 떠올리며 무언가 귀기울일 이야기가 있으리라는 기대도 들었다. 하지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어린이’는 아동노동이나 기아에 시달리는 후진국 어린이와는 아무 관련이 없고 TV의 과도한 폭력적 영상에 노출된 서구의 어린이일 뿐이다. 이 어린이들을 “유일하게 남은 거대한 약자집단”(133면)이라 보는 그가 오늘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로 꼽는 것이 TV의 폭력물 검열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노동세계만 하더라도 서구의 외국인노동자를 비롯한 세계경제의 약자로서의 노동자들은 아예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분노는 억압과 차별 현상을 운위해 불평불만을 자극하는 지식인들을 향해 있다. 그 지식인들은 “우리(서구인들)가 지금 천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자유세계를 모욕한다는 것이다(262〜64면).

꽤 오래 전 포퍼의 책을 읽었을 때, E.H. 카의 포퍼에 대한 어떤 비판이 인상깊었던 기억이 있다. 그 요점은 포퍼의 사상에서 ‘이성’의 지위는 정부정책을 정하거나 그것이 좀더 효율적인 것이 되도록 개선책을 건의할 수 있는 자격은 있지만 “그것들의 전제나 궁극적인 목표를 의심할 자격은 없는 영국 공무원의 지위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역사란 무엇인가』 김택현 옮김, 까치 1997, 228〜29면). 하지만 이번에 이 책을 읽고 나서는 E.H. 카가 바로 그 뒤에 덧붙인 비판이 한층 생생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나를 가장 불안하게 하는 것은 영어사용권 세계의 지식인들과 정치사상가들 사이에서 이성에 대한 신념이 약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계에 대한 그 충만한 감각이 상실되었다는 사실이다.”(같은 책 229면)

끝으로, 번역에는 여러 문제점이 있었다. 뜻을 적확하게 옮겼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을 뿐 아니라 오역으로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곳들도 눈에 띄었다. 가령 공적 행위의 ‘legitimation’(정당화)을 ‘제한’(190면)으로, ‘stratification’ (계층화)을 ‘만족’으로(192면) 옮긴 것은 착오라 하겠지만, 적어도 뜻이 전혀 안 통할 때 다시 한번 돌아보는 작업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최근에야 소개되었다는 오역(207면, 원뜻은 헤로도토스 당대에 출판이 막 도입되었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책 전체를 통해서 계속 자의적으로 원저자의 강조표시를 빼고 역자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고딕체로 강조한 것은 역자의 권리를 남용한 것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