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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강인철 姜仁哲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한국전쟁 50주년에 즈음하여
1. 50주년을 기념하기
한국전쟁 발발 50주년과 휴전 47주년이 되는 금년 6월에 김대중 대통령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적군’의 최고 통수권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지난 반세기의 불화와 갈등을 화해와 협력으로 바꿔놓을 역사적 회담을 갖는다. 거의 같은 시기에 한국 정부는 대대적인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을 시작한다. 이 기념사업은 전쟁 발발 50주년인 2000년 6월 25일부터 휴전협정 조인 50주년이 되는 2003년 7월 27일까지 3년 동안 계속되며, 이 기간중에 무려 52개의 크고작은 사업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 행사들을 주관하는 범정부적인 ‘6·25전쟁 기념사업단’과 민간부문까지 포괄하는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는 50주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부여하고 있다. “(1)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참전용사들은 노령으로 그들에 대한 명예 고양이 필요하고, (2) 70% 이상의 전쟁 미경험 세대에게 6·25전쟁의 교훈을 상기시켜, 안보의식을 고취시켜야 하는 한편, (3) 참전국을 포함, 망각되어가는 6·25전쟁의 의의를 새롭게 하여 평화 제고 및 우의 증진을 도모해야 한다. (4) 즉, 세계의 마지막 냉전지대로 남아 있는 한반도의 냉전구조 해체에 대한 공감대 확산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전쟁 미경험 세대에게 6·25전쟁의 교훈을 ‘상기’시킨다든지, ‘망각되어가는’ 6·25전쟁의 의의를 새롭게 한다든지 하는 표현에서 잘 확인할 수 있듯이, 이 기념사업의 촛점은 ‘망각과의 투쟁’ 혹은 ‘기억의 재생’에 맞추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전쟁의 기억’ 자체와 무관하거나 타자의 편집과 해석을 거친 간접적 기억만을 갖고 있는 전후세대를 위해, 기념사업단은 특별히 완전군장 행군, 6·25전쟁시 음식 재연 시식, 전적지 및 기념관 순례, 휴전선 방문 및 탈북자 강연, 전쟁관련 독후감·글짓기·그리기 등의 다채로운 프로그램들을 준비해두고 있다. 정부는 앞으로 3년 동안 전쟁관련 자료들의 추가적인 발굴과 편찬, 참전용사들의 체험담을 토대로 한 증언록 편찬사업 등 전쟁과 관련된 ‘기억의 창고’를 확장하는 일에도 의욕적으로 나서고 있다.
몇가지 지역적인 차원의 기념사업도 추진되고 있다. 예컨대 경상북도와 칠곡군은 이 지역이 ‘세계 전쟁사상 최대의 격전지’였음을 내세워, 금년 6월 23일부터 전쟁 발발일인 6월 25일까지 제전의 정화(첫째날), 한국전쟁 희생자의 위령·진혼·천도(둘째날), 인류평화를 축원하는 어울림 한마당(셋째날)으로 구성되는 ‘낙동강 세계평화대제전’을 준비하고 있다. 또 강원도와 원주시, 제1야전군사령부는 강원도가 6·25로 인해 ‘세계 유일한 분단국의 유일한 분단도’가 되었음을 강조하면서, 한국전쟁 참가국의 군악대들을 초청하여 금년 10월 3일부터 10일까지 8일간 ‘2000 세계평화팡파르’라고 명명된 일련의 행사를 열 예정이다. 아마도 금년 현충일은 전국 여러 곳에서 어느 때보다 뜻깊은 기념행사들이 이어질 것이다. 또 한국전 개전뿐 아니라, 마찬가지로 50년째를 맞는 유엔군 참전, 낙동강 반격작전, 인천상륙작전, 서울수복, 장진호 전투 등 전쟁의 주요 고비들도 전례없이 화려한 조명 아래 놓일 것이다.
이런 일들을 보면, 이미 반세기가 지난 전쟁을 기억하거나 기념하는 일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것 같다.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그로부터 미래지향적 교훈을 이끌어내는 데 필수적이다. 망각이 개인적·집단적 삶에 필수적인 요소이긴 하지만, 망각에서 역사적 교훈이 나오는 법은 없으며, 더욱이 망각에 기초한 화해는 깨지기 쉽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반세기 전의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할 것이며, 거기에서 어떤 교훈을 이끌어낼 것인가? 무엇보다도 현재 진행되고 있는 많은 일들이 폭넓은 사회적 합의 위에서 진행되는 것 같지는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거의 같은 시기에 진행되는 남북정상회담과 전쟁 50주년 기념사업도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은 정부 차원에서 진행되는 노근리사건 진상조사와 대책마련을 위한 일련의 움직임과도 어울리는 것 같지 않다. ‘노근리사건 대책 자문위원회’와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의 위원장이 동일 인물(백선엽)이라는 사실도 어색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중앙정부의 행보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경상북도나 강원도와는 대조적으로, 광주시와 전라남도는 한국전쟁 50주년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올해로 20년이 되는 광주민중항쟁의 기념사업에 몰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도 비슷하다. 제주도 사람들은 재작년에 4·3 50주년 기념행사들을 치른 후, 금년 1월 12일에 제정 공포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의 후속작업에 진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행정자치부장관 명의로 공고된 4·3특별법 시행령 입법예고에 의하면, 이 법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사태로 인하여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희생당한 주민들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하여” 제정되었다. 다시 말해 제주도민들의 희생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작업에는 전쟁기간중의 한국군에 의한 범죄행위 또한 그 대상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광주항쟁 20주년 기념사업을 통해 이른바 ‘광주정신’ 혹은 ‘5·18정신’을 계승하자는 것이나, 제주도에서 금년 5월부터 본격화된 희생자와 유족 신고 및 조사·확인, 진상조사, 명예회복과 보상, 4·3위령공원 조성 등의 작업은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이 그 성과 중 하나로써 추구하는 ‘국군의 존재이유와 정당성’을 오히려 잠식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베트남전에서의 양민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공개사과를 촉구하는 캠페인이 확산되는 것도 국군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미군의 양민학살을 추궁하는 노근리사건의 진상조사와 대책마련을 위한 노력도 ‘우리편의 정당성’을 실추시키는 것으로, 안보의식의 고취에는 별 도움이 안될 것이다.
이런 몇가지 사실들의 대조를 통해 다음과 같은 주장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선, 한국전쟁에 대해 동질적이고 지배적인 기억(혹은 일련의 기억들)을 보존하고 유포하는 데 일차적인 관심이 있는 사회집단(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집단(들)은 국가권력을 동원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그러나 이들과 정부의 행동에도 상당한 모순과 불균형이 내재되어 있다. 한편 동질적인 지배적 기억을 보존·유포하는 일에는 아예 관심이 없거나, 나아가 이에 저항하는 이들도 상당히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은 단수가 아닌 ‘복수’이며, 적어도 집단적 기억 속에서는 여러 개의 ‘한국전쟁들’이 실재한다. 메모리칩의 성능을 개선하기 위한 경쟁이 ‘기억의 경제학’을 지탱한다면, 여기에는 동질적인 지배적 기억을 창출하고 유지하려는 측과 그에 저항하려는 측의 경쟁으로 구성되는, 일종의 ‘기억의 정치학’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2. 기억의 정치학
단순화하자면, 기억의 정치학은 ‘기억들의 투쟁→기억의 정형화→망각 및 무기억과의 투쟁→지배적 기억의 균열과 위기’라는 일련의, 때로는 중첩적인 과정들로 구성된다. 앞에서도 암시했지만, 우리는 현재 이 가운데 ‘지배적 기억의 균열과 위기’ 국면을 겪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상쟁하는 기억들
기억의 정치학은 ‘상쟁하는 기억들’의 존재에서 출발된다. 전쟁이나 혁명과 같은 역사적 사건은 그것이 전개되는 영토 내의 주민들 모두에게 강렬하고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참여자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기억들을 낳기 마련이다. 그 기억들은 과장된 무용담일 수도 있고 한 맺힌 사연일 수도 있는 수백만 가지의 체험담을 통해 살아 숨쉰다. 전쟁에 참여한 동기와 강도, 가담한 편, 전쟁으로 입은 피해 혹은 이득의 정도 등에 따라 전쟁에 대한 기억의 내용이나 선명도 등에도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양한’ 기억들이 반드시 ‘상쟁하는’ 것은 아니다. 갈등은 단편적이고 때때로 충돌하는 기억들을 하나 혹은 소수의 ‘거대담론’으로 인위적으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바로 여기서 기억의 맥락을 재구성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투쟁이 전개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특정한 기억들의 맥락(들)이 선택적으로 강조되는 반면, 이와 모순되거나 대립되는 기억의 맥락들은 체계적으로 은폐 내지 억압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투쟁은 전쟁 ‘이후’가 아니라, 사실상 전쟁 ‘발발과 함께’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전쟁 초기에 이 투쟁은 그에 연루된 사람들에게 급작스레 출현한 파국적인 상황에 대해 설득력있는 상황정의와 설명체계를 제공하는 문제로 다가온다. 전쟁이 지닌 ‘일상성의 조직적인 파괴’로서의 성격, 전쟁 특유의 고통과 잔혹성, 부조리함, 심지어 악마성 등은 거기에 휩쓸린 개인들에게 극심한 긴장을 일상화하며, 이 긴장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설명과 의미의 문제’를 제기한다. 전쟁은 또한 인구의 급격한 이동과 뒤섞임으로 인해 전통적인 공동체적 규제가 급격히 이완되면서 개인들의 고립감을 증폭시키는 한편, 다양한 가치관들의 무질서한 조우를 통해 기존 가치체계의 위기를 초래하는 경향이 있다. 전쟁이 강요하는 가족과의 예기치 않은 이별, 가족과 친지의 상실, 신체의 부분적 상실, 살아남은 자로서의 죄의식, 극도의 궁핍, 불투명한 미래 등은 개인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집단적 차원의 우울증을 초래할 수도 있다. 전쟁은 당대의 과학기술 발전 수준을 극대 동원한 형태로 진행되며 인간이 만들어낸 가공할 인간 파괴력을 웅변으로 보여주는 장이기도 하므로, 인간 자체에 대한 회의를 조장하는 측면 또한 갖고 있다. 그러므로 설득력있는 상황정의와 설명체계를 제공하는 것은 전쟁의 효과적인 수행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과연 어떻게 죄의식 없이 살인을 감행할 수 있으며,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전선으로 진격할 수 있으며, 참호 속에서 함께 싸우던 전우의 처참한 죽음이 주는 심리적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불확실한 미래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도래와 승리에 대한 확신은 어떻게 가능한가? 요컨대 전쟁의 상황에서는 개인 혹은 집단적 수준에서 겪는 심리적 고통과 좌절을 위무하고, 아노미적 상황에 빠진 이들에게 상대적으로 안정된 질서감각을 되찾아주고, 과감한 전투행위로 병사들을 동기화하기 위해 설득력있는 상황정의와 설명체계를 제공하는 과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이 과제는 전쟁 초기부터 제기되며, 그 성과에 따라 전후에 전개될 이데올로기 투쟁의 귀추는 대부분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기억의 정형화
전쟁 기억의 맥락을 재구성하기 위한 투쟁은 특정한 기억의 맥락이 지배적인 기억으로 자리잡는 것으로 종결된다. 그와 함께 특정 정치-사회집단(들)의 전쟁 기억이 보편성을 획득하고, 그들에 의해 전쟁 기억이 전유되고 독점됨으로써 전쟁을 ‘우려먹고’ 사는 일도 가능해진다. 지배적인 기억의 맥락은 이와 대립하거나 모순되는 다른 맥락들이 제거된 것이므로 비교적 동질적이고 통합적이다. 전쟁에 대한 다른 잡다한 기억들은 이 거대담론을 중심으로 선택적으로 재편성되며, 그 과정에서 전쟁에 대한 ‘전형적인’ 기억들이 사회성원들에 의해 수용되고 내면화된다. 이런 과정을 ‘기억의 정형화(혹은 전형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정형화된 기억의 실체는 전쟁에 대한 기억들을 ‘공식적인 역사’로 편집하고 통합하는 과정에서 더욱 분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남한에서는 군을 중심으로 하여 1951년 10월과 1952년에 각각 『전란 1년지』와 『6·25사변사』가 간행되었고, 전쟁 직후인 1955년 6월에는 『한국전란 4년지』가 추가로 간행되었다. 여기에서 당면한 혹은 직전의 전쟁은 그것의 불법성과 책임 소재 등을 강조한 ‘전란’ 혹은 ‘사변’으로 정의된다. 오늘날에도 매년 6월 25일은 ‘6·25사변일’로 공식화되어 있다. 한국 정부와 역사가들은 이 전쟁에 더욱 심오한 의미를 부여했다.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단에 따르면, 이 전쟁은 “한국 국민과 UN군이 공산권 국가들의 세계공산화 의도를 저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다. 반면에 북한 정부와 역사가들은 한국전쟁을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고 한반도 민중을 노예화하기 위하여 미제국주의자들이 일으킨 침략전쟁”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그들의 관점에서는 이 전쟁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존망과 한반도 민중의 생사, 조국의 자유와 독립의 운명을 건 엄혹한 투쟁”으로, 다시 말해 ‘조국수호전쟁’ 혹은 ‘조국해방전쟁’으로 이해된다.1 이 양극단의 이념형적 유형들 사이에 수많은 기억의 맥락이 존재할 수 있고 실제로 존재했지만, 전후에 이 두 가지의 거대담론에 의해 억압되거나 종속적인 에피쏘드들로 포섭당했다고 볼 수 있다.
기억의 정형화는 ‘기억의 성화(聖化) 혹은 신화화(神話化)’를 동반한다. 전쟁이 처음부터 신성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 과정에서 전쟁 자체도 ‘성화’된다. 한국전쟁은 예컨대 ‘반공 성전(聖戰)’이 되며, 적군과 아군의 경계선이 바로 선(善)과 악(惡)의 경계선과 일치하게 된다. 이와 거의 동시에 전쟁과 연관된 부끄럽고 죄스런 기억들, 때문에 파괴적이고 자멸적일 수도 있는 기억들이 자랑스런 기억들로 탈바꿈한다. 또 격렬했던 아픈 기억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바뀌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기억의 정형화는 일종의 ‘기억의 몽상화(夢想化)’를 동반한다고 할 수 있다.
망각 및 무기억과의 투쟁
기억의 정형화와 함께 곧 새로운 투쟁이 개시된다. 이 투쟁의 대상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망각’이고 다른 하나는 ‘무(無)기억 혹은 기억의 부재’이다. 우선 ‘망각과의 투쟁’은 주로 ‘전쟁세대’의 문제로, 일상성 및 시간의 힘에 맞서 지배적·전형적인 기억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것이 일상성과의 투쟁인만큼, 일상성으로부터 주기적이고 의례적으로 탈출하는 것이 이 투쟁의 핵심 국면을 이룬다. 투쟁의 또다른 측면은 ‘무기억 혹은 간접기억과의 투쟁’인데, 이는 주로 ‘전후세대’의 문제로서 지배적·전형적 기억의 세대간 전승이 목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연좌제라는 굴레에서만 자유롭다면, 전후세대는 전쟁의 복잡다단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지배적·전형적인 기억을 더욱 잘 받아들일 수도 있다. 공산주의자를 빨간 피부와 뿔을 지닌 사람으로 그릴 전쟁세대는 없는 것이다.
죽어가는 기억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기억의 ‘재생’을 위한 집요한 노력은 ‘기억 재생의 씨스템’을 통해 수행되고 관철된다. 이러한 기억 재생장치들에는 주요하게 학교·군대·정보기관·언론·교회·전쟁기념관과 국립묘지 등이 포함된다. 문학과 영화, 미술 등 예술부문도 ‘전쟁의 미학’을 대규모로 창조하고 유포함으로써 전쟁 기억의 재생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또 간첩사건, 미군의 존재, 시민적인 군사훈련, 통금제도, 민방위훈련 등도 유사한 기억 재생의 효과를 발휘한다. 이 장치들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주입되는 레퍼토리는 바로 이런 것이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오던 날을/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했던 날을.” 전형화된 기억들이 다양한 재생장치들을 매개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내면화된다는 점에서, 이 기억은 사실상 ‘강제된 기억’이기도 하다. 망각 및 무기억과의 투쟁에는 분명 ‘세뇌’(brainwashing)의 요소가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망각과의 투쟁은 곧 망각의 묘약인 일상성과의 투쟁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일상성과의 싸움은 그것으로부터 주기적·의례적으로 일탈함으로써,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상성과 초월성의 변증법적인 긴장관계 속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망각에 대한 투쟁에는 초월적인 계기, 범상한 세속성과 구분되는 종교적인 차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쟁은 다분히 종교의례의 분위기 속에서 주기적으로 기억되고 기념된다. 이 의례(예컨대 매년 6월 6일 국립현충원에서 거행되는 현충일 행사)에 참여한 이들은 잠시나마 일상성의 태도나 윤리와는 다른 감정과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로 빠져든다. 그런데 (이 예식을 행함으로써) ‘나를 기념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이는 도대체 누구인가? 기념해야 할 ‘나’는 누구인가? 전몰자인가, 전쟁영웅인가? 이것은 부분적으로만 맞는 말이다. 명령하는 주체는 국가요, 더 정확히는 ‘반공주의’이다. 국가와 반공주의(혹은 그 결합체로서의 반공국가)가 교주이자 신이고, 전몰자와 전쟁영웅은 신을 호위하는 천사 혹은 성인(聖人)이고, 국민은 그 숭배자인 셈이다. 여기에는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 들도 있다. 반공의 성소(聖所)는 예컨대 국립묘지, 전쟁기념관, 격전지와 전적기념관, 승전비, 위령비, 충혼탑 등이고, 살아있는 전쟁기념관으로서의 휴전선과 판문점, 자유의 다리, 땅굴 현장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뒤르켐(E. Durkheim)의 말대로, 이런 성스런 공간들은 속된 공간과 분리되어 있고, 금기를 통해 접근이 차단되어 있다. 반공적으로 성별(聖別)되거나 정화된 이들만이 이 공간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으며, 세속의 일상인들에게는 특별히 정해진 성스러운 시간에만 개방되기도 한다. 반공주의가 숭배대상인만큼, 공산주의와의 모든 접촉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공산주의자와의 대화는 물론이고, 공산주의와 접촉한(월북한) 작가들의 소설은 읽어서도 안되며, 그들이 작곡한 노래를 불러서도 안된다. 바로 이 반공의 의례, 성인, 성소 들이 반공주의라는 시민종교(civil religion)의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다.
3. 반공주의라는 시민종교
일부 연구자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반공이데올로기가 다분히 ‘종교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나는 이런 관찰이 매우 정확한 것이라고 본다. 더 나아가서는 이 시기의 반공주의를 냉전적 세계질서관, 자유민주주의, 친미주의, 근대화 열망 등과 결합된 독특한 이데올로기 복합체로 볼 필요가 있으며, 이 이데올로기 복합체가 다시 국가적 의례체계와 나름의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 인물 등을 창출하고 그와 긴밀하게 결합하는, 하나의 총체적인 제도와 과정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강조해야 할 점은 이 시기의 ‘냉전적 반공-친미-자유민주주의’에는 이른바 ‘시민종교’의 특성이 풍부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20세기에 나타난 가장 주요한 형태의 유사종교(quasi-religion)는 ‘근대 민족국가’로부터 성장해왔는데, 이것이 종종 사회구성원들에게 정체성의 촛점을 제공하고 문화적 에토스의 기초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는 측면에서 전통적 종교제도들을 대신하게 되었다.2 시민종교는 유사종교적 형태로 민족과 국가를 성화하며, 개별화된 시민들을 종교와 계급, 출신, 신분을 뛰어넘어 민족 혹은 국가라는 거대한 집단과 도덕적으로 결속한다. 또한 시민종교는 고유한 신념체계와 의례, 성인, 성소, 성스러운 대상 들을 갖고 있다. 시민종교는 주로 문화적인 차원에서 작용하면서 국민적·국가적 통합을 표현하고 강화한다.
국가를 성화함으로써 국민의 도덕적 통합의 구심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이미 1948년 8월의 정부수립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집권세력의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통합은 여전히 취약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새 정부의 민족주의적 구호와 활동은 뒤르켐의 용어를 빌리면 국민들의 ‘집합적 열광’(collective effervescence)3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지배이데올로기로 부상시키고자 했던 민족주의가 그들 자신의 행동에 의해 부정된 데서 찾을 수 있다.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전쟁 이전에 혹은 전쟁과정에서 자가당착적인 것임이 판명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반공’을 제외하고 첫 집권세력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내세울 만한 자랑스러운 전통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더욱이 반공 역시 사회성원들의 능동적이고도 광범위한 동의를 얻어내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그럴수록 통치는 노골적인 폭력에 더욱더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의 중요성은 바로 이 점에 있다. 즉 전쟁을 통해 지배자들은 자신들만의 주기적으로 기억하고 축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과거, 자신들만의 빛나는 전통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전쟁은 오로지 민족 혹은 국가를 위해 초인간적인 용기를 발휘한 수많은 전쟁영웅들과 함께 그들의 피와 죽음으로 성화된 전투현장들을 탄생시킨다. 바로 이같은 맥락에서 지배자들은 전쟁을 거치면서 비로소 자신들만의 성스러운 사건과 성스러운 장소, 성스러운 인물 들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성스러운 시민적 의례와 상징으로 치장되었다. 그와 함께 건국부터 전쟁까지의 기간 동안 창출된 많은 시민종교적 요소들의 상당수가 이전에는 갖지 못했던 대중적 호소력과 생명력을 부여받게 되었다. 한국전쟁은 집권세력에게 상당한 정도의 헤게모니적 지도력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간헐적 혹은 주기적으로 국민들의 집합적 열광을 동원해낼 사회·문화적 기초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은 일시적으로 계급적 대립감정을 대중 사이에 되살리고 증폭시킴으로써 국민적 통합을 위협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상당한 신앙적 열정마저 불러일으킨 국민적 통합의 시멘트로 작용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국가를 신성화함으로써 국민의 도덕적 통합의 구심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전쟁기간 동안 또한 전쟁 이후 더욱 체계화되었을 뿐 아니라, 강조의 중점이 변화되었다. 변화의 촛점은 ‘민족주의’로부터 ‘반공주의’로의 전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쟁 이전의 국가이데올기가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하고 부차적으로 반공주의를 결합시킨 것이었다면, 전쟁 이후에는 ‘반공주의’가 그 중심을 차지하고 여기에 부차적으로 민족주의·자유민주주의 등이 결합된 구조를 갖게 되었다. 한국전쟁은 사회 성원들에게 ‘냉전적 세계관’을 내면화시킨 결정적인 계기였다. 냉전주의적 국제질서관의 핵심은 ‘양 진영관’(two-camp image)이며, 그것은 먼저 “적(敵)과 우(友)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에서 출발한다.4 냉전적 세계관에 나타난 이원론은 다시 양 진영간의 전쟁을 선-악의 대립으로 묘사하는 ‘윤리적 이원론’으로 발전한다. 적(敵)과 우(友)가 분명히 구분되고 적에게 사악한 속성이 일방적으로 귀속될 때, 이들간의 대립은 다분히 ‘종교전쟁’의 성격을 띠게 되고, 따라서 적과의 공존이나 타협, 심지어 접촉조차도 ‘금기시’된다.
그렇다면 냉전적 반공주의가 강화됨에 따라 전쟁 이전의 민족주의는 완전히 사라졌는가? 그렇지 않다. 전쟁 후 시민종교적 신념체계의 ‘전면으로’ 냉전적 반공주의가 부각된 대신, 민족주의는 냉전적 반공주의의 ‘내부로’ 침투해들어갔다. 다시 말해 그것은 반공주의의 내부로 들어가 부단히 작용함으로써 반공주의에 강한 민족주의적 색채를 덧씌우며, 일종의 ‘반공적 선민의식’으로 발전한다. 전쟁을 계기로 한국은 전세계적인 규모의 냉전적 대결구도에서 반공진영의 중심역을 맡은 것으로 간주된다. 전쟁을 거치면서 지배자들은 대한민국이 ‘자유진영의 보루’라는, 세계사적인 의의를 지닌 ‘성스러운 사명’을 부여받은 것으로 내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공보처장이었던 갈홍기(葛弘基)에 의하면, 한국은 전쟁으로 인해 멸공투쟁 혹은 멸공위업의 ‘선봉선구국(先鋒先驅國)’이 되었다.
일즉이 서양의 사가들은 말하기를 세계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해 있었다고 한다. 로마는 힘이 강대함으로써 세계의 중심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현하 세계의 모든 길은 우리나라 한국으로 통해 있다. 이는 위치의 중대함으로써이다. 이 위치라는 것은 지역적인 것과 아울러 역사적인 것이니, 오늘날 우리 한국은 공산진(共産陳) 타멸(打滅)의 선봉국으로서 가장 중대한 위치에 처해 있는 것이다. 6·25동란을 계기로 하여, 우리 국내에서 전개되어온 민주진(民主陳) 대 공산진의 투쟁은 비단 우리 한국 혼자의 운명만을 좌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로 양 진(陳)의 전체적 존망의 숙명적인 관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은 자국의 운명과 아울러 민주진 전체의 ‘삶’을 양견(兩肩)에 걸머지고 멸공투쟁의 선봉으로서 혈투에 혈투를 거듭해온 것이다. 이 선봉이란 것은 곧 멸공위업의 선구자라는 뜻이다. (…) 공산진을 타도하기 위한 세계의 모든 길은 언제나 우리 한국으로 통해 있는 것이다.5
한편 반공주의는 ‘자유민주주의’를 필수적인 요소로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후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또한 상당한 모호성을 드러냈다.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의 모호성은 그것이 ‘항상적인 전투와 감시’에 의해서만 보호될 수 있다는 인식과 병존하고 있었다는 점에 있었다. 이런 인식은 곧 국가보안법과 통행금지제·연좌제 등 각종 억압장치들과 결합되어 ‘경찰국가’의 형성과 발전을 조장하고 정당화하였다. 한국식 자유민주주의에 내재한 유토피아성과 억압성의 공존 그리고 이들간의 갈등은 1950년대의 정치투쟁의 촛점으로 부각되었으며, 결국 4·19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전쟁 이후 시민적 성인(聖人)들이 광범하게 창출되었다. 전쟁을 계기로 일제시대의 독립투사들과 임진왜란의 이순신이나 7의사와 같은 애국충군적 영웅들에서, 전쟁과 냉전시대의 순교자와 영웅 들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무엇보다도 3년간의 전쟁은 수많은 민족적 영웅을 양산해냈는데, 살아 있는 그들은 각종 훈·포장을 통해, 죽은 그들은 동상이나 기념비, 기념탑 등을 통해 만들어지고 기억된다. 1958년 1월 12일 현재 건국 후 훈장과 포장을 수여한 이들만 해도 19만 1716명이나 된다.6 전쟁에 희생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일단 성화(聖化)된 이들은 다른 세속적인 이해관심이나 오염 요인들로부터 격리되고 보호되어야 했다. 따라서 전쟁 도중과 전쟁이 끝난 후 이들을 보호하는 사회적 안전장치, 그리고 이들의 명예로운 신분을 유지시켜줄 여러 장치 들 역시 동시에 발전되었다.
한편 민족적 성소(聖所)의 경우, 전쟁 이전에는 해방 후 이장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이동녕 등과 건국 후의 김구 등이 모셔져 있는 효창공원이 최고의 성지였지만, 전쟁 발발 이후에는 부산의 ‘국군유골안치소’와 ‘UN묘지’, 그리고 종전 이후에는 서울의 ‘국군묘지’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국군묘지는 1954년 3·1절을 기해 시설공사에 착수하였고, 영현 안장은 1956년 1월 16일 대표 무명용사 1위를 무명용사탑에 안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국군묘지는 1965년부터 ‘국립4·19묘지’가 등장할 때까지 유일한 ‘국립묘지’의 지위를 누렸으며, 대전에도 ‘국립묘지 분원’이 세워졌다.7 일제시대에 신궁(神宮)이 위치하고 있던 남산 역시 국가에 의해 새로운 민족적 성지로 가꾸어졌다. 1956년과 1959년에 각각 이승만과 안중근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그후 이승만의 업적을 기린 ‘우남정(雩南亭)’이 추가로 들어선 것이다. 1957년에 매카서의 동상이 세워진 인천의 ‘자유’공원 역시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제1공화국이 창출해낸 마지막 민족적 성소는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자유의 집’으로서, 1960년 1월 13일에 준공되었다. 이밖에도 전쟁 후 세워진 수많은 기념관·기념탑·기념비·기념동상 등이 새로운 국가적 성소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주요 전적지마다 전적비가 세워졌다. 이들은 사회성원들이 공유하는 역사적 기억의 영구적인 저장소이자, 과거의 사건이 상징적으로 변형되어 자랑스러운 역사로 화하는 성스러운 장소가 된다. 한국전쟁의 영웅들과 관련된 기념조형물을 건립하는 과정은 5·16 이후에도 계속되어, 1950년대 이후 1960년대 말까지 전국에 세워진 동상만 해도 150개가 넘는다고 한다.8 또한 1980년대에 대표적인 민족적 성소의 하나로 떠오른 독립기념관의 ‘대한민국관’(제7전시관)에 ‘6·25의 실상’ 및 ‘UN참전’과 관련된 각종 자료들이 전시됨으로써, 한국전쟁은 뒤로는 독립운동, 앞으로는 민족통일과 연결되는 ‘민족사적 정통성’의 흐름 속에 안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4년에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국립묘지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동 종류의 기념관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인 전쟁기념관이 개관했다. “전쟁에 관한 자료를 수집 보존하고 전쟁의 교훈을 통하여 전쟁의 예방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는 데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삼은 이 기념관은 1964년부터 추진된 일련의 노력들의 결실로서, 6개 전시실을 갖춘 1만 9백여 평의 실내전시실과 옥외전시장에 8500여 점의 전쟁관련 자료들을 집대성하고 있다.
한편 전쟁을 거치면서 시민종교의 각종 의례가 만들어지고 기념일이 새로이 제정되었다. 1956년부터 6월 6일이 ‘현충일(顯忠日)’로 제정되어, 그 이전에는 주로 군대 내부의 행사로 치러졌던 3군합동위령제가 전 국민적 행사로 격상되었다. 같은 해부터 매년 10월 1일이 ‘국군의 날’로 제정되었고,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사건을 기념하여 11월 3일을 ‘반공학생의 날’로 정했다. 또 그 이전인 1952년 무렵부터는 벌써 6월 25일에 ‘6·25기념식’이 행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쟁 당시 적군에 함락된 수도 서울을 탈환한 날을 기념하는 ‘9·28수복일’이 또 하나의 전쟁기념일로 추가되었고, 1959년에는 9·28수복기념 ‘제1회 국제마라톤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1965년에는 ‘재향군인의 날’이, 그리고 1973년에는 ‘경찰의 날’과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이 제정되었다. 같은 해에 국제연합의 창립과 ‘한국동란 중 UN군이 참전한 뜻을 기념’하기 위해 ‘국제연합일’이 제정되었다. 이로써 3·1절(3.1)→향토예비군의 날(4.1)→임시정부수립기념일(4.13)→재향군인의 날(5.8)→현충일(6.6)→6·25사변일(6.25)→제헌절(7.17)→광복절(8.15)→9·28수복일(9.28)→국군의 날(10.1)→개천절(10.3)→경찰의 날(10.21)→국제연합일(10.24)→반공학생의 날(11.3)→순국선열의 날(11.17)로 이어지는, 1년을 단위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반공적 민족주의’의 국가력(國家歷) 그리고 그와 연관된 국가적 의례체계가 완성되기에 이른다.9 이 국가력은 자연의 순환주기나 산업적 리듬보다, 전쟁의 주요 계기들을 주기적으로 재연하고 기념하는 특성을 강하게 보여준다. 이는 물론 집단적·역사적 기억의 주기적인 재생과 경축을 통해 민족공동체 의식을 증진시키고, 나아가 국가 자체의 성화(聖化)를 안정적으로 기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토대가 된다.
4. 지배적인 기억의 균열과 위기
오늘날 제주 4·3과 노근리는 전쟁에 대한 지배적이고 전형적인 기억들이 균열되기 시작했음을, 이 기억들의 동질성과 내적 통합성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들이다. 이들은 그동안 강제적으로 은폐되고 억압되었던, 전쟁에 대한 또다른 기억들을 되살려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이 추모하는 대상은 국가나 국군·유엔군이 아니라, 국군·유엔군과 맞서 싸웠거나 그에 희생당한 이들이다. 국군과 미군이 수행했던 전쟁의 추악한 부산물들이 하나씩 불거지면서, 지배적 기억들에 성스런 후광을 제공해주던 선-악 이원론적 세계관은 빠르게 허물어져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전쟁이 부분적으로 ‘성전’에서 ‘추악한 전쟁’으로 추락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 국군의 위상을 실추시키는 5·18기념사업과 베트남전 양민학살 진상규명운동이 가세하고 있는 형국이다.
정부 당국자들의 머릿속으로 스며든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도 유사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쟁 50주년 행사들 자체가 전형화된 기억의 초월성과 성스러움을 발가벗기고 있다. 서두에서 예로 든 경상북도와 칠곡군의 ‘낙동강 세계평화대제전’은 “군민통합축제의 관광자원화, 신축제 모델 개발”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있고, 강원도와 원주시의 ‘2000 세계평화팡파르’는 전쟁 50주년을 ‘뉴밀레니엄’과 결부시켰다. 이런 축제 형식의 기념행사들은 전쟁 기억의 상품화를 불가피하게 촉진한다. ‘세계 전쟁사상 최대의 격전지’, ‘세계 유일한 분단국의 유일한 분단도’라는 슬로건은 일종의 관광상품 브랜드로서,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한 홍보전략의 일환으로 활용되고 있다. 휴전선 일대에서 각광받고 있는 국가안보와 관광산업의 불경스런 결합(이른바 ‘안보관광’)과 마찬가지로, 이런 세속적이고 타산적인 태도 자체가 국민들로 하여금 반공을 과거보다 덜 심각하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공산주의·공산주의자와의 접촉 금지 터부를 먼저 깬 것도 정부였다. 알다시피, 정부 주도의 대북 접촉은 1970년대부터 개시되었지만 1990년대에 급진전되었다. 1990년대에 정부는 접촉 자체를 금지하기보다 북한주민접촉 승인제를 통해 선별적인 접촉 허용으로 전환했고, 이제 금강산관광을 통한 대북 접촉의 대중화를 거쳐 대통령이 적의 수괴와 만나기로 함으로써 남북 접촉사의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 수많은 간첩사건들은 물론이고, 문익환 목사나 문규현 신부, 임수경 등의 방북이 일시적이나마 접촉금지 터부의 위력을 증폭시키고 공고화한 데 비해, 정부 차원의 대북 접촉은 반공주의의 종교적 색채를 걷어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불고지죄로 상징되는, 혈연적 유대보다 우위에 섰던 이데올로기의 힘은 존폐 위기에 처한 이 법조항의 운명처럼 이제 크게 약화되었다. 북한과의 접촉은 그 폭과 강도가 증가되고 있을 뿐 아니라, 접촉의 내용도 점점 탈이데올로기적이고 세속적인 경제논리에 감염되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베버(M. Weber)의 표현을 빌리면, 한국사회는 ‘탈마법화’의 과정, 즉 반공주의라는 시민종교의 주술로부터 서서히 깨어나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분단체제가 점차 이완되고 있고, 경제 위기와 식량난으로 인한 ‘적의 약체화’ 현상은 너무나 뚜렷해서 적에 대한 공포 또한 거의 사라졌다. 반공주의적 시민종교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군부독재도 무너졌고, 그 사회적 기반이었던 전쟁세대의 노령화와 소수화도 현저하다. 예비군훈련장의 극도로 이완된 군기에서 준(準)전시체제의 위력을 실감하기는 어려우며, 이에 발맞추듯 ‘적의 공습’에 대비한 민방위훈련은 재난 대비훈련으로 변질되었다. 전시체제의 또다른 축이었던 주한미군들은 이제 흉악스런 범죄를 통해서만 언론매체에 소개될 정도가 되었고, 미군부대들은 개발 바람에 떠밀려 도시 외곽으로 이전되고 있다. 통행금지의 해제에 따라 방범대원들의 호루라기 소리가 사라진 것도 꽤 오래 전이다.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하고 노래하면서 자란 젊은 세대는 괘씸하게도 통일무용론을 운운하고 있다. 울산에서는 금년 총선에서 진보정당이 최초의 당선자를 낼 뻔했고, 후보를 낸 다른 지역들에서도 비교적 선전했다. 민간정부나 진보정당처럼 현대 한국사회의 풍경에 새로 등장한 것들도 있는 반면에,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풍경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도 별로 없다. 국가보안법과 미군도 건재하고, 이름이 변하기는 했지만 정보기관은 여전히 최고 권부에 속하며, 예비군훈련이나 민방위훈련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또 많은 정치범들이 아직도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다. 그러나 반공주의를 감싸고 있던 ‘성스런’ 덮개가 어느정도 벗겨지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고 모든 것을 설명해내는 반공주의의 ‘전지전능함’도 상당부분 사라지고, 그 결과 그것이 여러가지의 유력한 ‘세속적’ 담론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가고 있음도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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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일 『침략의 역사 항전의 역사』, 한 1991, 205면.↩
- Lester Kurtz, Gods in the Global Village (Thousand Oaks, Cali.: Pine Forge Press 1995), 187면.↩
- 에밀 뒤르켐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 노치준·민혜숙 역, 민영사 1992.↩
- 남궁곤 「1950년대 지식인들의 냉전의식」, 『1950년대 한국사회와 4·19혁명』, 태암 1991, 129면.↩
- 갈홍기 『대통령 이승만 박사 약전』, 공보처 1955, 83〜85면.↩
- 동아일보사 『동아연감』, 1975, 84면.↩
- 국립묘지의 정치·문화적 기능, 그리고 거기에 내재한 긴장과 모순에 대해서는 김종엽 「동작동 국립묘지의 형성과 그 정치·문화적 의미」, 『한국의 근대성과 전통의 변용』,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참조.↩
- 김영나·홍선표 「해방 이후 한국현대미술사 전개」, 『광복50주년 기념논문집7: 문학·예술』, 한국학술진흥재단 1995, 179면.↩
-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이 ‘국경일’로 제정된 것은 1949년 10월 1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