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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촛점 | 타이완은 어디로
쳔 꽝싱 陳光興
1957년 타이완 타이뻬이 출생. 타이완 칭화(淸華)대학 아시아태평양·문화연구실 교수. Inter-Asia Cultural Studies 공동 편집주간.
타이완 독립운동의 종결?
이번 타이완의 총통선거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따라서 타이완 사람들은 이번 선거가 역사에 길이 남을 일전이었을 뿐 아니라, 가장 치열하고 자극적인 선거였다는 데 예외없이 동의할 것이다. 그야말로 밀고 당기는 과정의 연속이었는데, 지진(地震), 신표전략[新票案],1 리 위안져(李遠哲) 충격2 등 일련의 사건은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각 후보들에 대한 지지율에 결정적 변화를 몰고왔다. 이번 선거는 한차례의 정치선거였을 뿐만 아니라 또다른 측면에서 모든 사람들의 생활세계에 대한 개입 그 자체였다. 언론매체들은 지지후보의 불일치로 빚어진 가정불화, 친구간의 절교, 연인의 이별 사례를 끊임없이 보도했고, 선거일을 전후해 많은 사람들이 정신과의사를 찾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외없이 선거의 회오리바람에 말려들었기 때문에, 자신을 객관화시켜 이번 선거를 바라보는 일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1996년 총통선거 때는 선거일 전에 대세가 이미 결판나 리 떵후이(李登輝)의 당선이 확정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사가 지지율의 높고 낮음에 있었던 데 비하면, 이번 선거에서는 어느 후보가 승리할 것이라고 장담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 퍽 이채로웠다. 선거일 3〜4일 전에야 비로소 리 위안져와 기업가들이 쳔 슈이뼨(陳水扁)을 지지함으로써 선거국면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으며, 유사 이래 최대 규모로 치러진 몇차례의 군중집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민당(國民黨) 일색의 대세가 물건너가고 민진당(民進黨)의 정권장악을 위한 준비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느낌을 갖게 하였다. 선거의 결과는 민진당 후보 쳔 슈이뼨 39%, 무소속(원래 국민당원) 후보 쑹 츄위(宋楚瑜) 36%, 국민당 후보 롄 쟌(連戰) 23% 득표 순으로 나타났다. 국민당은 참패했고, 상대 후보들과의 격차 또한 뭇사람의 예상을 크게 벗어났다. 쳔·쑹 두 후보의 득표수도 예상치를 크게 웃돌아, 결과적으로 3인 경쟁구도에서 기보(棄保)3 전략이 확실히 주효했음이 확인되었다. 선거결과는 왕왕 블랙홀과 같아서 정확한 해석을 불허하는데, 다만 표면적인 변화의 움직임이 좀더 선명해지는 쪽으로 바뀌었다는 점은 상당히 두드러졌다.
지난 3월 중순쯤 총통선거가 클라이맥스를 향해 뜨겁게 달아오르던 시점에 장기간 남한의 민주화운동 및 사회운동에 몸담아온 친구로부터 한 통의 전자우편을 받았는데, 타이완의 선거분위기에 우려를 표명하는 내용이었다. 그에 따르면 87년 한국의 대통령선거에서 당초 김대중(金大中)은 4인 경합구도에서는 자신이 대표로 있는 재야세력의 반정부운동의 전통으로 인해 능히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전망했는데, 사실상 그런 예측은 근거없는 낙관임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집권당이 계속 통치하게 됨으로써 민주화운동의 퇴보를 초래했으며, 김대중은 장장 1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것도 타협을 거쳐, 정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만일 민진당의 쳔 슈이뼨이 무소속 쑹 츄이와 연합한다면 국민당을 격파하고 타이완의 민주화운동을 성큼 앞당길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한국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국민당의 롄 쟌이 당선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나는 쳔·쑹 두 후보의 연합 가능성이 왜 희박한지를 갖은 말로 설명해야만 했다. 쑹이 대표하는 것은 옛 국민당이자 지금의 신국민당인데 사실은 상당히 보수적이며, 타이완의 족군(族群, 출신지역별·종족별 집단)민족주의 분위기 속에서 장기간 작용해온 성적모순(省籍矛盾)4 이 근본적으로 쳔 슈이뼨의 망동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다행히도 그의 예측은 현실화되지 않았고, 쳔 슈이뼨이 승리하면서 타이완에서 초거대 일당독재가 종식되었다. 적어도 상징적인 측면에서 타이완지역의 민주화운동은 단절 없이 한발 더 전진한 셈이다. 그러나 반대진영간에 은밀히 축하를 주고받는 가운데서, 이런 표면적인 ‘전진’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바라볼 것인가? 다시 말해 새로운 정세는 어떠한 위기를 암시하는가?
제3세계 독립운동 및 아시아 각국의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민진당의 승리는 탈냉전 추세의 일환으로서 언젠가는 도래하리라고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근 5년 사이에 아시아 여러 지역, 즉 일본·남한·인도·인도네시아 등에서 잇따라 급격한 변화가 있었는데, 이런 지역의 일당 전제정치 혹은 거대 독재정당 구도는 고작 몇년 사이에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다. 비록 리 콴유(李光耀)의 인민행동당(PAP)이나 마하티르 모하마드(Mahthir Mohamad)의 국민전선(NF)이 변함없이 안정을 구가하는 듯하지만, 이처럼 급격한 변화는 역사적·지역적·구조적 성격의 힘이 중심이동했음을 의미할 것이므로 각국의 ‘내부’만을 떼어내 독립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번 선거결과는 바로 이러한 다원적인 힘이 안팎으로 교차하면서 작용한 영향력의 반영에 다름아니다.
이러한 지역들의 공통점은 다음에 있다. 2차대전 후 표면적으로는 반(反)식민운동으로 신속히 자주성을 갖춘 민주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으나, 사실상 세계적인 냉전구조가 이런 가능성을 가로막아버렸다(혹은 2차대전 후의 전지구적 독립운동과 냉전구조 간에 밀접한 교호관계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지역과 국가들은 모두 냉전구조 속에서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에 편입되어, 미국의 비호하에 일인 혹은 일당 독재권력이 장기집권한 곳들이다. 따라서 남한과 타이완의 전후 군사정권은 일반적 법칙의 범례이지 무슨 특수한 예가 아닌 것이다. 냉전 종식의 도미노효과의 하나는 바로 연이어 도래한 이른바 전지구화 시대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냉전 종식’이 ‘전지구화’의 선결조건이며, 이것이 없이는 곧 ‘전지구화’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전지구화된 새로운 구조가 가리키고 암시하는 바는 미국의 국가메커니즘과 자본이 이미 안정적으로 전지구적 패권을 획득한 결과, 모든 문제가 예외없이 다시 ‘내부’문제로 자리매김되었는데, 이는 더이상 과거 양대 진영간의 모순 및 지반의 분할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앞서 얘기한 지역에서 누가 정권을 잡는다 해도 대폭적인 ‘좌향좌’는 이제 불가능에 가까운 일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가장 나은 경우라 해도 의미가 불분명한 이른바 신중간노선에 지나지 않는다), 반드시 맹주의 신임이 있어야만 ‘국제적’ 승인과 지지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이런 지역 내부의 민주화·사회운동 또한 ‘주인의식’의 각성과 함께 중산계층의 지지를 얻으면서, 비록 여전히 중앙에서 국가메커니즘을 장악하고 운영한 경험이 부족하긴 하지만, 서서히 신정권의 무대 위로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바로 이런 시대상황 속에서 주도적인 이데올로기는 마치 전지구화의 하부논리를 ‘신경제’(클린턴Clinton의 신조어)로 꿰맞추는 경향을 노정했고,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전지구화를 자본주의화와 동일시한 결과, 신경제결정론하에서 민족국가의 최우선적 임무는 더이상 추상적인 국가주권과 독립의 수호가 아니게 되었다. 다시 말해 전지구적 경제구조하에서 경쟁력 순위의 상위에 랭크되는 것으로 변한바, 대내적으로 인적·물적 자원을 다시 새롭게 통합해 가장 이로운 경쟁 위치를 획득하는 것이다.5 이에 따라 모든 것이 이익 여부에 좌우된 결과, 주권과 독립 문제는 거론하기 힘들게 되고, 더욱이 헌정체제·정당정치 등의 제도적 문제는 거론할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 특히 경제규모가 매우 작고 국제적으로 정치적 힘이 약세인 지역일수록 경기 호황주기를 잘 타기 위해 장기간 유지해온 경영원칙을 아주 ‘탄력적으로’ 바꿀 수 있는데, 타이완처럼 사회운동의 전통이 일천하고 비판의 강도가 약한 지역의 경우 이같은 ‘탄력성’에도 상당한 변수가 존재하고 돌발성이 짙어, 큰 원칙이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체면이나 존엄도 드러내놓고 말할 만한 것이 없어진 격이다.
이러한 점에서 쳔 슈이뼨의 당선은 반(反)식민운동 전통 속에 존재해오던 타이완 민족주의 독립운동이 임계점(臨界點)에 도달한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탈냉전 시기의 새로운 정세를 의미한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 단순화하면 곧 국공(國共)‘내전’의 종결인 셈이다. 또한 국민당은 단지 선거에서 패배한 것 외에도 중국공산당과 전투적 대치상태를 유지해오던 지위도 두 손 들고 순순히 내주어야 할 판이 되었고, 이제는 역사적으로 한번도 중국공산당과 맞수가 되어본 적이 없는 민진당이 그것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6 따라서 민진당과 중국공산당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쌍방간의 행동을 내전의 연속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7 이런 탈냉전 대세를 분명히 보여주는 유사한 예가 남북한 관계의 파격적인 변화인데, 김대중과 김정일(金正日)의 6월 정상회담은 바로 이런 구조적 역학관계의 작용 결과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같은 맥락에서 내전의 종료가 표명하는 바는 냉전의 공식적 종결이고,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대표되던 시대는 이미 다했다는 점이다. 민진당과 공산당 간에 상호대립의 구조적 조건이 자취를 감춘 것과 때를 같이하여, 이들이 향후 어떤 방식으로 상호 대처할 것인가는 매우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정세에 대해 중국공산당은 미처 대비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고, 민진당은 더욱더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특히 선거 후 쳔 슈이뼨은 민진당의 강령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다분히 보여주며 자신의 정치역량의 부족을 실감하고 현실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벌써 이른바 ‘전민정부(全民政府, 전국민 참여 정부)’라는 구호와 실천방안을 제출하여 정당·정치세력의 재편작업을 이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것이 도대체 (민진)당과 (공산)당의 대립인지도 대단히 모호하다 하겠다.
사실 쳔 슈이뼨으로 대표되는, 역사적 짐이 비교적 적은 정치 신세대가 사회운동의 정치자산과 족군(族群) 성격의 민족주의 아래서 ‘타이완인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당선된 정당성 자체는 어쩌면 그가 김대중보다도 더 ‘급진’적으로 양안관계를 추동할 가능성을 내포하는지 모른다. 2차대전 종료 후에 출생한 무산계급8 출신의 타이완 사람으로서, 그에게는 중국콤플렉스 따위는 없으며, 통일이냐 독립이냐 하는 흑백논리 같은 것은 더구나 없는 것이다. 젊은 유권자는 물론이고 그를 지지한 많은 중년·노년층 지지자들에게 그의 당선은 오랫동안 짓눌리고 억압받은 타이완 사람들이 떳떳이 머리를 들고 명실상부한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 백년 동안의 원한과 억눌림이 마침내 해소되고 구름이 걷히고 태양이 빛을 발하는 심경이 확실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타이완의 독립·건국’은 정권을 획득해 고개들어 떳떳이 하늘을 보고 명실상부한 주인이 되는 수단인 것이지 결코 목적은 아니다. 현재 일단 정권을 획득하긴 했으나 총제적 사고 틀(mind-set)과 정서적 구조가 마찬가지로 빠르게 조정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통일·독립문제는 무슨무슨 민족의 통일 혹은 독립의 문제가 아닐 뿐만 아니라, 국공내전 문제의 연속은 더욱이 아니고, 오히려 ‘타이완’의 이익과 부합하는가의 문제이다. 그가 묻고자 하는 것은 타이완이 중국시장에 기대야만 경제성장을 지속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인데, 이런 문제인식하에서 ‘하나의 중국’은 그가 직면한 담판의 협상카드이며, 따라서 그는 이것을 담판의 ‘전제’가 아니라 ‘의제’로 견지할 것이고, 이 점에서 그는 ‘타이완 독립’을 포기한다면 무장해제나 다름없어 담판에서의 모든 협상카드를 잃어버릴까 염려하는 것이다. 그가 주요하게 고려하고 셈하는 문제는 이제 더이상 과거의 역사적인 문제가 아니며, 대륙과의 관계가 갑자기 주요한 ‘타이완’ 내부의 문제로 변했는데, 왜냐하면 중국대륙과의 관계가 왕왕 쳔 슈이뼨이 타이완 내부의 반대를 억누르고 지향하는 바의 핑계이자 도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이 어떻게 대응할지, 즉 계속해서 냉정한 언어로 대꾸할지 아니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지 현재로서는 더 두고 볼 일이다. 그렇지만 천 슈이뼨의 총통 취임은 타이완해협 양안 관계가 경제논리에 의해 주도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시기로 한껏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동아시아지역의 냉전이 종결되는 가운데 군비경쟁이 사라질 새로운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새로운 정세 속에서, 나에게 한마디 발언이 허용된다면, 쳔 슈이뼨의 등장은 바로 타이완 독립운동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대담하게 말하고 싶다. 혹여 한걸음 물러난다 해도, 타이완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열정은 이미 쳔 슈이뼨이 당선됨에 따라 급속도로 냉각되기 시작한 것이 사실이다. 지속적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타이완’의 (경제적) 이익을 최대한 얻기 위해서 새 정권은 반드시 보폭을 조정해야만 하는데, 타이완을 ‘급진·다원투기주의’의 논리에 따라 재조정해 동아시아지역 경제체제, 특히 중국대륙시장으로 편입시켜야지, 더이상 세상의 변화를 나몰라라 뒷전에 두고 냉전적 사유를 지속하거나 큰형님 미국이 여전히 반공 내지 러시아에 대한 대항‘이데올로기’의 일환으로 타이완해협의 거점을 고수해줄 것을 기대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공산당에 대항하려고 해서는 곤란하다. 선거과정에서 ‘타이완 독립운동 종결’의 징후가 상당히 두드러졌던 점을 직시해야 한다는 얘기다.
아마도 모든 정치평론가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는 과거 타이완의 주류를 이루었던 통일·독립 논쟁이 이번 선거전에서 급속도로 방향을 선회한 점일 것이다. ‘타이완 독립’이라는 주도적 논리가 반전하여, ‘어떻게 독립할 것인가’와 관련한 논리는 완전히 종적을 감추고 ‘대륙과 어떻게 우호를 다질 것인가’라는 논리가 선거의 기본멜로디를 이루었다. 유권자들의 의식 가운데 떠오른 주류 담론은 ‘우리들은 중공의 통치를 희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전쟁이 발발하는 것은 더욱더 희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체적인 토론의 틀은 독립과 전쟁의 관계에 등호관계를 설정한 것이었다. 이렇듯 전쟁을 바라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누가 타이완해협의 안전과 사회안정을 수호할 것인가가 후보자들간의 경쟁의 촛점이 되었으며, 누가 과연 노회한 공산당과 상대할 능력이 있느냐가 핵심적인 문제가 되었다. 그런 와중에, 독자적으로 출마한 쉬 신량(許信良) 후보[민진당 주석을 역임했으며, 가장 먼저 ‘대담한 서진(西進, 중국대륙으로의 진출)’과 삼통(三通)9문제를 제기한 정치인]는 일정 정도 견제작용을 발휘했으며, 3대 주요 후보들로 하여금 실제 존재하는 위기상황을 덮어두고 말 것이 아니라 전쟁문제를 직시하게끔 바싹 죄었다. 확실히 선거 전야의 타이완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전례없는 위기의식 속에서 살게 했으며, 양안관계의 팽팽한 긴장감도 96년 선거 때의 타이완해협 위기와 비교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쳔 슈이뼨은 당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타이완 독립에 목을 매는 데에서 한걸음 벗어나서 우선 양안간의 삼통 필요성을 제기하고 동시에 전쟁이 발발하지 않을 것임을 보장하는 구호를 외쳐댔다(왜냐하면 자신의 아들도 이제 곧 병역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선되더라도 독립을 선포하지 않을 것이며 그럴 필요도 없다는 입장을 재삼 표명했다. 과거 타이완 독립을 목표로 내걸었던 전략을 이제 단지 집권을 향한 일종의 수단으로 축소 변환시킨 것이다. 결전의 최후 순간에 노벨화학상 수상자이자 현 중앙연구원 원장 리 위안져의 지지를 이끌어냈는데, 리 위안져는 자신이 중국대륙과의 관계가 썩 원만하므로 만약 쳔 후보가 당선되면 평화사절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표명했다.10 동시에 리 위안져의 추진하에 쳔 슈이뼨은 이른바 국정고문단을 조직해 자본가와 학자들을 중심으로 자신에 대한 지지를 명시적으로 표명하도록 했는데, 이 두 방향의 상징적 힘의 결합은 쳔의 지지율을 급속히 끌어올렸다. 당선 후 쳔 슈이뼨은 자신이 당선된 것은 제10대 ‘중화민국’ 총통직이라고 재삼 공개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중공의 우려를 희석시켰다. 선거 후 그의 진영은 민진당의 강령 가운데 타이완 독립 조항을 삭제하려는 작업을 추진함으로써 중공에 대해 우호적 제스처를 보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장기적 집권을 확보하기 위해 쓸모없는 군더더기 포장을 제거해 민진당을 환골탈태시키고 ‘타이완 독립’ 정당의 한계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리 위안져가 그 자신 일찍이 한 번도 타이완 독립을 지지한 적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태도를 밝힌 점인데, 이는 바로 새로운 정세의 출현을 의미한다. 과거에 리 위안져와 같은 사람은 정확한 정치감각 아래서 타이완 독립 반대 태도를 공개적으로 표명할 수 없었는데, 쳔 슈이뼨은 지지하지만 타이완 독립에는 반대한다는 그의 공개적 태도 표명은 이렇듯 타이완 독립을 ‘패권’ 논리로 삼는 공식을 깨는 계기가 이미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한가지 또다른 중요한 점은 아마도 쳔 슈이뼨의 이런 선거를 전후한 정치적 공표가 아니라, 오히려 정치·사회 영역 가운데서 그 반응이 민간 역량의 전향과 변화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비교적 가장 뚜렷한 것은 정치스펙트럼 가운데 타이완 독립을 가장 급진적으로 대표하던 건국당(建國黨)과 건국진선(建國陣線)이, 선거전의 중심축이 타이완 독립·건국과는 반대 방향으로 선회했을 때 결코 쳔 슈이뼨의 타이완 독립노선 배반에 대해 목청높여 확연히 반격을 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거가 끝난 후, 건국당 현 주석, 초대 및 제2대 주석, 당비서장 등은 타이완 내부의 단결 및 중국에 대한 대항을 이유로 건국당 해산 불가론이 팽팽한 시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집단 탈당을 선포했으며, 또한 쳔 슈이뼨이 배분한 새로운 직위를 받아들일 것을 희망했다. 이러한 급격한 움직임은 급진 타이완 운동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으며, 쳔 슈이뼨의 당선이 일정한 맥락에서는 ‘타이완 사람’(의 아들)이 선거라는 수단을 통해 혁명적으로 정권획득에 성공한 것으로 읽힐 수 있고, 따라서 국호·국기의 갱신 및 유엔가입을 제외하면 ‘타이완 사람’이 명실상부 주인인 정권이 이미 형성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오랫동안 국제주의 좌파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처해온 나는 개인적으로 최근의 동아시아 정치정세의 구조적 변화에 대해 낙관적 정서를 갖고 있다. 그러나 타이완의 내부상황에 대해서만큼은 상당히 비관적이라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쳔 슈이뼨의 당선은 그가 이른바 ‘민수주의(民粹主義)’를 잘 운용한 점과 관련이 깊은데, 그의 파쇼적 성향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그는 일찍이 1994년부터 98년까지 타이뻬이(臺北)시장 재임기간 동안 ‘시민의식 설문조사 시장’으로까지 불렸는데, 설문조사 결과 수치의 많고 적음에 근거해 정책방향을 결정함으로써 중산계급의 배후 승인하에 세력이 약한 집단(공창公娼 및 가건물 거주 극빈가정)을 희생시킨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타이완의 사회분위기에서 선거식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주요한 사회세력은 80년대에 출현한 이른바 소비사회의 주력부대인 신흥 부호층11이다. 그들은 상당정도 실무적인 것도 사실이지만 다분히 이기적이며, 흔히 자신들의 집단이익을 위해 근대화 내지 국가 형상의 명목으로 사회적 약자 및 주변부 사람들에 대해 당권자가 행사하는 타격 혹은 싹쓸이를 지지하거나 오히려 적극 행사하게끔 압력을 가하기 일쑤다. 단체결사권도 행사할 수 없고 그 혹은 그녀들 자신을 대변할 변호인도 찾을 수 없는 이러한 사람들, 나아가 시민사회의 상징으로 말해지는 단체조차도 싹쓸이해버리려는 분위기 속에서, 그 혹은 그녀들은 심지어 이른바 소수는 다수에 복종한다는 ‘민주주의’의 피해자이며, 그 혹은 그녀들의 끊임없는 출현은 사실 이러한 사회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잘 드러내준다. 이와 동시에 선거 후 우리들 자신도 시민사회의 공간이 축소되어가는 위기를 느끼는 게 사실인데, 예를 들어 원래 ‘자유파’라 불렸던 단체는 그 원형이 누추해지고 ‘관장현형기(官場現形記)’12가 연출되고 있는 점 등은 주목을 요한다. 기존에 스스로 사회운동을 본연의 임무로 자임하던 많은 단체들이 지원을 얻기 위해 새 정부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작태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타이완사회 내부의 비판세력의 빈약함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운동 전통을 대표하던 세력에 의해 새로운 정권이 형성되어가는 이때에 어떻게 지속적으로 사회적 맥락의 상대적 자주성을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실상 비판세력 진영이 맞닥뜨린 새로운 정세이자 중요한 문제라 하겠다.
쳔 슈이뼨의 등장은 3월 중순 이래 지금까지 타이완사회를 여전히 일종의 유리 없는 창과 같은 감각 속에 몰아넣고 있는데, 모든 사람들은 이로써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으며, 구래의 정치담론 및 장기적인 반국민당 기치 아래 만든 정치플레이 규칙(예를 들어 ‘헌정체제’의 자유주의 어휘로 국민당의 불공정에 도전한 점 등) 역시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 더이상 어울리지 않다는 점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에 조응하는 새로운 담론과 사고방식은 마찬가지로 그리 빠른 시일 내에 형성되지는 않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새로운 현상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출현한다 해도 미처 분석할 수 없는 ‘실어증’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특히 김대중 혹은 롄 쟌 및 쑹 츄위 등과 비교할 때, 쳔 슈이뼨은 그들보다 2대 혹은 3대나 젊은 세대일 뿐 아니라, 그의 선거참모 가운데 다수는 30세 전후의 ‘애송이’였고, 또한 이들이 현재 그의 새 정부에 속속들이 진입하여 중요한 전략적 직위에 배치되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좀더 새로운 사유와 담론을 통해서만 거의 단절과 파열에 가까운 이 새로운 정세변화의 의미를 더욱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전후 동아시아 자본주의 진영에서는 주로 미국식 양당(兩黨)제 의회민주주의가 정치적 민주주의의 이상으로 생각되어왔는데, 집권당 혹은 반대당 내부를 막론하고 상층계급 엘리뜨들은 영·미의 교육을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 영미를 모방하고 학습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각 지역의 반대세력 진영은 예외없이 선거노선에 따라 정권을 획득했으나,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지역에 영미식의 양당제정치가 싹틀 어떠한 조짐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파벌만 난무하고 합종연횡(合縱連衡)을 통해 정치가 운영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파벌·계파 간에도 이데올로기의 차이가 뚜렷하지 않으며, 일본에서 한창 부활을 꿈꾸는 공산당마저도 공산주의의 원래 의미를 더이상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른바 다당제정치와는 거리가 먼 것인데, 그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한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설마 이것은 또 한차례의 식민지 근대성의 체현일 따름인가? 아니면 오리엔탈리즘의 상상 속에 보이는 이른바 동아시아적 특색을 갖춘 또다른 민주주의 형식인가? 과연 급진적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가 선거식 민주주의를 제외하고 전후 동아시아에서의 실천과정 속에서 그런 대안적 사유의 자원을 남겨놓기라도 한 것인가? 나는 ‘유가전통’이니 ‘유가자본주의’니 하는 유의 천박한 개념어를 써서 동아시아의 민주 운용의 주류 모델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관대로 모든 일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아마도 지금이야말로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식인사회가 마땅히 서로를 마주 바라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바야흐로 민족국가의 경계를 가로질러, 민족주의의 무겁디무거운 역사적 외투를 벗어던지고 서로 연대해, 상호작용을 깊이 관찰하고 세밀한 비교연구를 통해야만, 즉 일국사와 지역사를 통투(通透)하는 작업을 시작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申正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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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정후보의 흑색자금줄을 폭로하거나 스캔들을 부각시킴으로써 그 지지층을 파괴하는 선거전략. 이번 선거에서 쑹 츄위가 공금횡령 스캔들 폭로로 타격을 입고 초반 지지율을 회복하지 못한 채 낙선했다. 이하 옮긴이 주는 〔 〕로 표시함.↩
- 타이완 최초의 노벨상수상자(화학 부문)로서 타이완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리 위안져가 총통선거 닷새 전인 지난 4월 13일 민진당 후보 쳔 슈이뼨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함으로써 박빙의 판세를 쳔후보 쪽으로 기울게 한 사건.↩
- A후보의 당선이 불가능하고 C후보는 낙선희망 후보일 경우 B후보에게 표를 주어야 한다는 전략적 선거방법. 이번 선거에서 지지기반이 비슷한 세 후보 모두 자신의 당선 가능성과 정당성을 홍보하는 선거전략으로 활용했다.↩
- 타이완에는 타이완성 호적 여부를 기준으로 지역주의 정서가 존재하는데, 이는 1947년 국민당이 타이완에 진주하는 과정에서 타이완 주민과 충돌을 빚으면서 일으킨 ‘2·28사건’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후 50〜60년대의 쟝 졔스(蔣介石)정부의 백색테러로 갈등이 심화되고, 타이완성(省) 출신은 장기간 정·관·군 고위직에 진출하지 못했다.↩
-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싱가포르’는 모든 국가메커니즘의 자아 조정·전환 움직임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서, 싱가포르의 국가메커니즘 운영은 대기업 혹은 그룹 경영으로 비쳐지며, 그 최고 지도원칙은 영리(營利)에 있다. 그러나 리 콴유를 배우고자 하는 많은 국가지도자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싱가포르가 도시국가인 까닭에 이른바 중앙과 지방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 비록 세대론적 측면에서 볼 때 민진당 인사들도 국민당이 펼친 장기적인 반공교육을 받고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 당연 천 슈이뼨이 국민당적의 국방부장관 탕 페이(唐飛)를 행정원장에 기용한 의도 또한 내전의 지속을 바란 결정은 결코 아닐 것이다.↩
- 쳔 슈이뼨은 1950년 타이완 남부의 소도시 타이난(臺南) 근교의 빈농 가정에서 출생했다.↩
- 중국대륙과 타이완 간의 교류증진의 일환으로 직접적인 통상(通商)·통항(通航)·통우(通郵)를 우선 실시하자는 정책. 대륙은 3통문제를 통일의 과정으로 보는 반면, 타이완의 정치주체들은 경제교역 확대를 위한 인프라 구축으로 축소해 문제에 접근하는 차이점이 있다.↩
- 중공은 리 위안져가 쳔 슈이뼨에 협조한 데 대해 상당히 분노했으며, 이런 제안에 대해 향후 리 위안져와 교류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거절의사를 표명했다.↩
- 전통적 중산계급 개념으로는 이러한 세력을 잘 그려내기 힘든데, 상당한 소비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돈을 벌어 (자동차·주택) 빚을 갚는 데 쓴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들에게는 비교적 일치하는 이데올로기의 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 청나라 말기 관료사회의 부정부패상을 묘사한 리 빠오쟈(李寶嘉)의 장편소설. 현재는 관료사회나 관변 이익단체의 부정·부패·허위·사기·아첨·알력 등 정치스캔들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까지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