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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신수정 申水晶

문학평론가.

 

 

미궁 속의 산책

한강·백민석·배수아·최근작을 중심으로

 

 

1

 

소설이 ‘길찾기’에 비유되어온 것은 ‘출구’ 혹은 ‘집’을 향한 그것의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오랫동안 소설은 혼돈을 물리치고 미정형 상태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려는 욕망의 산물로 이해되어왔다. 이러한 욕망은 혼돈이란 구획되고 정리되어야 할 과제라는 인식과 더불어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나갈 주체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전제로 한다. 온갖 유혹과 환난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오디쎄우스의 여정을 소설의 전범으로 삼는 이론이 근대의 일반적인 소설론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에게 소설은 언제나 스스로의 욕망을 규율하고 통제하는 합목적적 주체의 간지(奸智)였다.

그러나 최근 우리 문학에서 이러한 의미의 소설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일찍이 최인석은 「혼돈을 향하여 한걸음」(『혼돈을 향하여 한걸음』, 창작과비평사 1997)을 통해 우리 소설의 주류인 회귀서사를 부정한 바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과거로 거슬러올라간 사내가 본 것은 거대한 혼돈, 무한한 심연뿐이었다. 그 순간 그는 깨닫는다. 자신이 길을 잃은 지 벌써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이 혼돈이야말로 자신을 둘러싼 존재론적 조건이라는 사실을, 그리하여 그는 혼돈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대신 차라리 그 혼돈을 향하여 한걸음 나아가는 길을 택한다. 최근의 소설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길찾기’의 서사 대신 그 길의 ‘미궁스러움’과 그 미로를 가로막고 있는 괴물 미노타우로스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에게 왜 그 괴물과 싸워 물리치지 못했느냐고 추궁하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그 미궁 속에서 발견한 진실, 곧 자신들이 ‘이성’이라는 실을 가진 테세우스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과, 그들 스스로가 바로 혼돈의 주체이자 괴물 미노타우로스일지도 모른다는 자각, 그리고 혼돈이 인간을 수렁으로 내몬 것이 아니라 인간이 혼돈을 수렁 속에 집어넣고 그 위를 가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가정 등을 심대한 소설사적 전환의 기미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최근 소설에 나타난 이러한 변화의 조짐들은 이제까지 ‘소설’을 비추던 거울을 깨고 그것을 새로운 형상으로 조립한다. 한강·백민석·배수아의 최근작을 통해 그 ‘거울’의 파편을 맞춰보고자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은 미궁 속에 갇힌 소설의 욕망을 보여줄 것이다.

 

 

2

 

한강(韓江)의 두번째 소설집 『내 여자의 열매』(창작과비평사 2000)는 상처와 고통이 육화된 세계를 그리고 있다. ‘피’ ‘흉터’ ‘눈물’ ‘생리’ ‘멍’ ‘가시에 찔린 자국’ ‘음식 혐오증’ ‘시력 상실’ 등 가시적이고도 물질적인 형태로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육체적 흔적은 이 소설집이 규정하고 있는 인간존재의 근본적인 ‘틀’이다. 존재는 미정형의 진흙 덩어리이다. 그것은 그것을 빚는 자의 손놀림에 의해 ‘부처’가 될 수도 있고 흉물스러운 허물을 지닌 ‘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끈적거리고, 찢기고, 멍들고, 찔린 자국 등, 이 모든 육체적 외상이 암시하는 것은 존재 자체가 이미 근본적인 결여태라는 사실이다. ‘부처’의 형상을 내재하고 있다 하더라도 현존하는 한 그는 수성(獸性)의 허물, 그 껍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는 “뱀 지나간 자국처럼 길게 금이 벌어진 콘크리트”(287면) 벽과 같다. 그것은 자신의 균열과 허물로 언제나, 이미, 스스로, 낙원의 부재를 입증한다. 「어느 날 그는」의 ‘그’와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의 ‘아빠’가 보여주듯 『내 여자의 열매』가 마련한 존재의 초상은 언제나 “반인반수”(25면), 그 신화적인 괴물의 모습에 가깝다.

이 누더기 같은 한겹 가죽을 벗어던질 길은 없는가. 그리하여 지겹도록 우리를 구속하는 분노와 후회와 증오, 억울함과 자책과 부끄러움 같은 것들을 깨끗하게 털어버리고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날 방법은 없는가. 괴물의 운명을 벗어나고자 하는 탈신(脫身)의 욕망은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가장 강렬한 충동이다. 때로 “어두운 하늘에 닿으려고 몸을 길게 뻗어올린 나무”(71면)와 “운무에 가려 봉우리가 보이지 않는 푸른 산”(249면), 혹은 “하얀 소금가루만 남겨놓고 나를 몸뚱이째 증발시켜버릴 것 같은 뙤약볕”(68면)이나 “철길 위로 넘실거리며 다가오는 강줄기”(310면) 등의 이미지로 은유되는 이 욕망은 기본적으로 존재의 ‘허물’을 벗고 ‘본원적인 자아’로 되돌아가려는 의지에 다름아니다. 이 의지는 대개의 경우 서로 다른 두 방향을 동시에 가리킨다. 나무와 산이 상징하듯 곧고 푸르게 뻗어나가 하늘에 닿기를 바라는 초월의지가 그 하나라면, 빛과 물처럼 점점이, 흔적없이 흩어져 한점 티끌이 되기를 바라는 소멸의지가 또다른 하나다. 초월이 자기 안에 내재하는 ‘관음’과 만나는 것, 말하자면 진흙덩어리 속에 선험적으로 녹아 있는 ‘부처’의 형상을 만나는 길이라면, 소멸은 그 ‘진흙’을 다시 우주 삼라만상의 근원인 바람과 물과 흙, 그리고 햇빛으로 날려보내는 과정, 곧 자연으로 되돌려보내는 과정이다. 성화(聖化)와 무화(無化), 이 두 가지 길을 따라 탈신의 욕망은 “사람의 운명을 일시에 끝장내버리고 싶”(89면)은 무서운 죽음충동을 잠재운다. 「아기 부처」에서 가슴에 ‘칼’을 품고 살아왔던 어머니가 불화(佛畵)를 그림으로써 자기 안의 관음을 만나는 과정이나 오랜 인고 끝에 결국 남편의 ‘흉터’를 받아들이게 되는 ‘나’의 내면적 움직임이 모두 그러하다. ‘부처’와 ‘햇빛’은 그 특유의 생명력으로 존재의 살기를 잠재우고 유한한 운명을 벗어날 방도를 일깨운다.

한강은 이 ‘부처’와 ‘빛’의 행복한 만남이 ‘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터질 듯 팽팽한 물관 가득 맑은 물을 퍼올리며, 온 가지를 힘껏 벌리고 가슴으로 하늘을 밀어올리는 거예요. 그렇게 이 집을 떠나는 거예요.”(239면) ‘꽃’은 육신의 무거운 껍질을 벗고 한없이 뻗어나간 ‘정신’과 맑은 물로 녹아내린 ‘육체’의 순간적인 화합이다. 그런 점에서 꽃은 존재가 누릴 수 있는 관능의 정점이다. 꽃이 되는 순간 우리는 ‘반인반수’의 ‘괴물’에서 벗어나 비로소 세계와 화합하는 주체, 모든 것을 생생하게 감각하는 주체로 다시 태어난다. “간선도로를 거칠게 미끄러져가는 차들의 질주를, 그이가 현관문을 열고 나에게로 다가오는 발소리의 미세한 울림을, 비 내리기 전이면 비옥한 꿈에 젖어 있는 대기를, 안개를 품은 새벽하늘의 희부연 빛을”(236면) 감지하는 존재는 이미 존재의 미궁에 갇혀 신음하는 괴물이 아니다. 관능의 담지체인 꽃을 매개로 그 또는 그녀는 드디어 탈신에 성공한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점차 말수를 잃어가던 아내가 목소리를 회복하는 것도 스스로 ‘꽃’이 되면서부터다. 아내는 꽃이 되고서야 비로소 남편의 눈물을 감지할 수 있으며 남편은 그때서야 아내를 그리워한다. ‘꽃’에서 ‘열매’로 이어지는 ‘식물성’의 변신만이 두 존재의 인간적인 유대를 확인시켜줄 수 있는 것이다.

이 식물의 은유가 존재의 감옥에서 벗어나 스스로 해방된 자아를 가리키는 것임은 분명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미묘한 흔들림, 물관 가득히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가지런하게 모아진 뿌리, 햇빛에 부서지는 잎사귀의 싱그러움 등 ‘식물성’은 수동성 속의 능동, 연약함 속의 강함을 암시하는 오랜 메타포였다. “어두우나 밝으나 오롯이 거기 있었던, 늘 거기 있었던 마음 한자리”(213면)로 대변되는 식물성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육신에 갇힌 자아는 스스로의 남루를 벗는다. ‘등을 들고 가는 행자’가 있음으로써 세상이 밝아지듯 자기의 내면을 비추는 등불을 통해 존재는 마침내 자기 속의 미궁을 밝히는 한줄기 빛이 되는 것이다. 이 묵묵한 인내는 맑고 고요하고 눈부시다. 그러나 『내 여자의 열매』가 내 안의 미궁을 넘어 내 바깥의 미궁의 끔찍한 현존을 동시에 포괄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를 둘러싼 현대성의 조건을 그려내기에 한강의 탈신 욕망은 지나치게 존재론적이며 시적인 상태로 귀착된 듯하다. 우리 시대의 소설을 절망에 빠뜨린 그 혼돈의 회오리를 식물에 의지하여 건너갈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소설이 『내 여자의 열매』를 통해 ‘식물’을 욕망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무척 고무적이다. 우리 소설은 한강에 이르러 활짝 핀 연꽃의 ‘관능’을 꿈꿀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3

 

백민석(白旻石)의 장편소설 『목화밭 엽기전』(문학동네 2000)은 제목 그대로 엽기적 일탈을 일삼는 부부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어린 제자를 유인하여 감금하고 폭행하며 포르노 비디오를 제작한 다음 사체를 유기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가해/피해 관계가 일방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작가는 어떤 윤리적 판단도 배제한 채 다만 거대한 ‘동물원’에 갇힌 자들 상호간의 폭력적 원무(圓舞)를 보여줄 뿐이다. 상식인의 도덕과 양심, 소설 장르의 일반적 관습과 독자의 혐오감 따위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서술자의 무심한 시선은 이 충격적인 광태(the unnatural)를 자연적인 것(the natural)으로 반전시키는 효과적인 장치다. 작가는 납치와 고문, 암매장 등이 세탁기를 돌리고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행위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디즈니의 만화영화 ‘톰과 제리’를 보며 해머에 얻어맞은 고양이의 참상을 끔찍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워하는 것처럼 주인공들의 엽기행각 역시 그 전제가 되는 현실의 의미론적 맥락을 벗어나 거의 유머의 차원으로 변형된다. 엽기는 기의가 아니라 기표 차원의 유희일 뿐이다.

『목화밭 엽기전』은 드러내놓고, 아주 노골적으로, 스스로를 키치로 호명한다. 그것의 효과는 만화영화나 펄프픽션의 호러가 현실을 변형하고 과장함으로써 독자적인 환상공간을 창출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 소설이 불러일으키는 진정한 공포는 바로 거기에서 나온다. 키치로 분한 소설은 ‘그들만의 공간’에서 ‘그들만의 룰’에 의해 작동되는 환상적 세계를 창조해낸다. 그곳에서는 어떠한 광기나 패륜도 모두 관대하게 허용된다. 현실/환상의 경계를 유지하는 한 환상 속의 광태는 역설적으로 현실의 안정성을 입증하는 알리바이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목화밭 엽기전』에는 그 확정된 경계를 무너뜨리고 끊임없이 현실세계로 역류하려는 충동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과 실사가 뒤섞인 영화처럼 이 소설은 펄프픽션적 환상과 일상적 현실을 어느 순간 하나로 겹쳐버린다. ‘저것은 환상이야’ 하며 웃고 있던 우리의 머리가 쭈뼛해지는 순간은 바로 그때다. 한창림과 박태자가 단지 펄프픽션의 주인공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웃일 수 있음을 문득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들만의 것으로 치부했던 엽기가 사실은 바로 우리가 발딛고 있는 현실세계의 그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섬뜩해진다. 그 순간 미처 지워지지 않은 채 우리의 얼굴에 남아 있는 웃음의 흔적이야말로 진정 엽기이자 공포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도착(倒錯)은 이 소설의 내용이자 또한 형식이다. 백민석은 대중문화와 고급문화, 정상과 비정상, 도덕과 비도덕, 문명과 야만 등에 관한 상식적 구별짓기에 강력히 의문을 제기한다. ‘도착적인 것’이 실은 ‘정상적인 것’이며 ‘상식적인 것’이 오히려 가장 ‘병리적인 것’이 되는 역설적 진실. 『목화밭 엽기전』은 이러한 아이러니 효과를 극대화한 우울한 소극(笑劇)이다. 이 소극은 터무니없는 엽기담을 현대적 권력과 인간 주체에 관한 알레고리로 읽게 만드는 한편 “어떻게 호암아트홀 풍의 진부한 휴먼드라마들이 휴머니티를 결국엔 외면하게 되는 것”(33면)인지를 시침 뚝 떼고 보여준다. 일층의 세븐일레븐과 골프용품 전문점, 그리고 지하의 횟집이나 전통 비빔밥집과 마찬가지로 실재하는 공간으로 설정된 ‘펫숍’이 “이렇다 할 집물이 없어, 용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도 없”(122면)는 추상적이고 허구적인 ‘권력’의 장으로 돌변하여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 수수께끼”(123면)가 되는 과정은 작가의 전복적 상상력의 일단을 드러낸다. 푸꼬의 원형감옥(panopticon)을 연상시키는 이 ‘펫숍’은 그런 점에서 현실이자 환상이다. 그것은 작가 백민석이 마련한 허구적 유희가 자행되는 공간임과 동시에 언제나 그 경계를 뚫고 현실 속으로 역류해들어오는 실재의 악몽이기도 하다. 우리가 광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억압해야만 했던 많은 진실이 그곳에서 꿈틀대고 있다. 우리는 그 공간을 통해 우리가 무의식 저편으로 추방한 존재의 비명소리를 듣는다. ‘동물원’이 ‘정부종합청사’가 망각하고 억압한 주체의 잔여물임을 암시하듯, 한창림의 식탁 아래에는 가죽 개목걸이를 목에 걸고 비명을 질러대는 어린아이를 감금한 지하 작업실이 있고, 텅 빈 둔덕으로 보이는 그의 집 앞은 실상 ‘무덤’이다. 이 기묘한 병치에 의해 우리는 비로소 ‘주체’로 탄생된다.

펫숍의 “다중 공간”(121면)을 통해 ‘원숭이’를 ‘인형’으로 변형시키는 권력은 ‘펫숀 삼촌’으로 의인화되어 있다. 그는 그대로 내버려두면 “암컷의 배를 찢어 내장을 꺼내 먹”(172면)을 수도 있는 ‘육식 원숭이’를 적절하게 관리하고 훈육시켜 “웃는 플라스틱”(72면), 즉 ‘인형’으로 변형시키는 권력 그 자체다. 권력은 그 야만스러운 괴물을 “휘면 휘어지고 자르면 잘라지고 뽑으면 뽑혀지고, 눈엔 초점이 없으며, 속은 텅 비어 가볍기 한이 없”(72면)는 존재로 새롭게 탈바꿈시킨다. 이보다 더 끔찍한 미궁은 없다. ‘펫숍’은 이제까지의 어떤 장인이나 기술자도 생각지 못한 다양한 장치와 배치를 사용하여 그 속에 갇힌 괴물들에게 자신들이 미궁에 갇혔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신의 괴력을 얌전하게 포기하게 만든다. 그 결과 새롭게 탄생한 ‘인형’은 자신들의 주체적인 의지 자체를 완전히 상실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어떤 ‘원숭이’보다 더 기괴한 괴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어떤 감옥이나 미궁에도 권력의 사각지대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조증과 울증 사이를 급격하게 반복하는 박태자의 ‘히스테리’나 “마음속 저 깊은 데까지 밀고 들어와, 심연 깊이 가라앉아 일상에선 드러나지 않는, 그런 부분을 헤집어놓는 (수컷─인용자) 냄새”(173면)를 동경하는 한창림의 내면은 그들이 끊임없이 ‘펫숍’ 바깥으로의 탈주를 꿈꾸는 ‘변태’임을 암시하는 징조들이다. 마침내 그들이 ‘거름’을 길들이는 데 실패하고 그들 스스로 ‘거름’이 되는 대단원은 이들의 탈주가 ‘인형’이 됨으로써 억압된 주체의 어두운 심연, 즉 괴물성과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백민석이 카니발에 버금가는 이 탈주욕망을 ‘목화밭’과 연결짓는 대목이다. 『목화밭 엽기전』은 ‘목화밭’이 정작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도 명료하게 정의하지 않는다. 한창림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걸 본 적도 없”(94면)다. 다만 그것이 텅 빈 곳과 구별됨으로써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만 짐작하고 있을 따름이다. “생시멘트라는 가죽만 남고, 내장이며 눈코가 싹 비어버린”(122면) ‘펫숍’ 공간을 생각할 때 ‘목화밭’이란 기호는 일단 ‘펫숍’의 권력을 넘어서는 어떤 것, 즉 죽음과 폭력으로 얼룩진 광기와 대립되는 ‘푸르른 생명’의 공간을 가리킨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광란에 가득 찬 탈주를 인간 이성이 규정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반란으로 규정하고 싶은 독자의 욕망일 뿐이다. 의식을 잃어가는 한창림의 눈앞에 떠오른 ‘목화밭’은 “분명 까끌까끌한 감촉과 가볍긴 하지만 무게감도 느껴지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보는 것, 그리하여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그저 검은 반점들 몇개”뿐이다(280면). ‘목화밭’은 언제나 빗금 혹은 모자이크 바깥에 위치해 있다. 작가는 이 언표화할 수 없는 기호로 자신의 탈주욕망을 언표화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목화밭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언급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권력이 구별짓고 확정해놓은 의미, 그 미궁 속으로 다시 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목화밭 엽기전』의 탈주는 다만 ‘차이’에 의해서, 끊임없이 그 궁극적 의미를 지연시키는 전략에 의해서만 그 진정한 의미를 획득한다. 물론 이 의미론적 지연 작전이 그 긴장감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언표할 수 없는 기호가 기호로서의 자격을 지니고 있는지를 가려내는 것은 난제에 속한다. 그러나 “누군가 그의 입 속에 비닐 빵봉지를 쑤셔넣은 것 같았다”라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진술로 작가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진실은 우리의 입을 가로막고 있는 비닐, 그 억압적 빗금이다. 결코 걷어낼 수 없는 그것의 존재를 지시한다는 점만으로도 『목화밭 엽기전』은 충분히 ‘의미’있다.      

 

 

4

 

배수아(裵琇亞)의 소설집 『그 사람의 첫사랑』(생각의나무 1999)에는 그녀의 이전 소설들의 강렬한 탈주욕망을 기억하는 독자들에겐 다소 건조하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지루한 일상의 파편들이 사실적으로 펼쳐져 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현대적 일상의 배후에는 대도시의 거대한 빌딩이 자리잡고 있다. 지하에는 쇼핑 아케이드와 슈퍼마켓, 주차장이 있고, 일층부터 육층까지는 갖가지 정체불명의 사무실과 병원, 사우나, 당구장, 수영장 등이 입주해 있으며 육층부터는 주거가 가능한 오피스텔이, 그리고 옥상에는 인조잔디가 깔려 있는 그렇고 그런 빌딩들. 「200호실 국장」에서 특히 선명하게 제시된 이 공간은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일관된 배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흰 와이셔츠에 감색 슈트, 버버리 머플러에 속옷은 트렁크 스타일의 베네통”(203면)을 입고 있는 성공한 부르조아지와 “융통성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엷고 빈약한 입술에 거친 질감의 회색천으로 만든 웃옷을 입”(262면)고 있는 전문직 여성, 그리고 “언제나 말없이 휴지통을 비우거나 우체국 심부름”(318면)을 도맡아 하다가 시간이 되면 교복으로 갈아입고 야간고등학교로 등교하는 시골출신의 사환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세계는 이미 정교한 원리에 의해 작동되는 복잡한 미궁이자 그 스스로의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괴물이다. 이곳에서 “실체는 없거나 혹은 중요하지 않다. 충실해야 하는 것은 역할”(281면)뿐이다. 마을의 ‘왕자’였던 소년이 순식간에 ‘시골에서 온 촌놈’으로 둔갑해 사회의 ‘지진아’가 되는 세계(「그 사람의 첫사랑」), 뛰어난 엘리뜨 생화학자가 “상당히 많은 비용이 들었던 잘못된 예측의 결과”(67면)로 간단히 소거되는 공간(「은둔하는 北의 사람」). 이 세계는 ‘왕자’와 ‘엘리뜨’를 원하지 않는다. 다만 “조직 인간”(281면)을 필요로 할 뿐이다.

이 거대하고 삭막한 미궁 속에서 인간의 주체성이란 한낱 루머에 불과하다. 『그 사람의 첫사랑』은 주체성의 신화에 일관된 냉소를 보낸다. 그 “몽환에 가득 찬 고전주의”(137면)는 첫사랑에 관한 오해만큼이나 끈질기게 우리의 일상을 미혹시키지만 배수아에 의하면 “우리는 결국 모두 표면의 삶을 살 수 있을 뿐이다.”(194면) 그것이 헛된 가장에 불과하다는 믿음은 불온하고 위험하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길이 있”(49면)다고 믿은 ‘김무사’의 이타주의(「은둔하는 北의 사람」)가 그 대표적 사례다. 북에 있는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했던 그의 ‘인간주의’는 오히려 그에게서 ‘김무사’로서의 인간적 삶, 그 자체를 앗아간다. 체계는 그를 ‘공식적으로’ 부인한다. 그는 김일성의 특별한 신임을 받아 북아프리카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위대한 과학자에서 어느 순간 어떤 파일에서도 개인적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먼 북쪽 나라에서 온 벌목공이 되고 만다. 어느 누구도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모두는 권력이 부여한 코드에 의해 한 아이의 아버지, 한 여자의 남편, “金-李 인터내셔널”의 대표, 시청의 징계위원 등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의 코드를 바꾸려고 하거나 아예 그것 바깥으로 탈주하기를 꿈꾸는 것은 “동물원 안의 자유분방한 원숭이”(360면)의 행태에 불과하다. 이제 권력은 무조건적으로 윽박지르고 무지막지한 규율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곳이 없지만 그 속의 개인들을 자유롭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마취력”은 권력의 필수조건이다.

권력에 관한 이 끔찍하고도 냉혹한 인식은 배수아의 소설을 ‘프린쎄스’와 ‘바람인형’의 동화로부터 카프카적인 ‘조직 인간’의 서사로 옮겨놓고 있다. 그녀는 이제 “내 주변의 사람들의 배역이 바뀐다고 해서 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자아와 타인을 혼동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360면)고 당당히 선언한다. “무도회의 공주”라도 된 듯한 기분에 빠져 “영혼을 뒤흔드는 감정 같은 것”(281면)에 빠져드는 것은 분명 “과도한 낭만성 지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이상주의’, 이 모든 삶의 ‘미혹’을 걷어내는 순간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누추해진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온갖 종류의 생명보험과 화재보험, 상해보험과 보증보험, 분리수거해야 하는 쓰레기와 수리해야 하는 낡은 창문과 가스시설, 물이 새는 수도파이프와 다달이 오르기만 하는 집세와 세금”(98면)뿐이다. “파시스트” 같은 절대 복종을 요구하는 이 목록들은 우리의 삶을 모래사막처럼 지루하게 만든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내 눈을 뽑아서 그대를 가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102면)다고 갈망하던 사랑도 시간이 흐르면 결국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우리가 수만명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어서 그들 수만명 노예의 눈을 모두 뽑는다고 해도”(같은 곳) 우리는 결국 서로를 완전하게 소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인생의 “홀리데이”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오로지 빛 하나 없는 대정전(大停電)의 시기가 가없이 펼쳐지고 있을 뿐이다.

이 참혹한 허무주의는 『그 사람의 첫사랑』을 규정하는 기본적인 정조라고 할 수 있다. 이 멜랑꼴리한 우수는 상실과 부재의 미학을 감상적으로 그려냈던 배수아의 이전 소설에서 흔히 보이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공주’와 ‘왕자’의 ‘낭만주의’를 헌납하고 얻어낸 ‘현실주의’라는 점에서 이전의 허무와 구별된다. 그녀는 이제 단순히 어떠한 “제도나 어떤 개인의 악”으로 인해 상처입고 고통받지는 않는다. 그녀가 이 소설집에서 말하는 고통은 사악한 ‘타자’가 순결한 ‘자아’에게 가하는 ‘훼손’이 아니다. 그것은 “삶이 주는 모욕을 견딘” 다음 자신 스스로에게 가한 자발적 “향연”일 뿐이다. 따라서 고통, “그 자체가 신성”이다. 가히 고통에 관한 한 절대적인 마조히즘의 차원에 접어들었다고 할 만한 이 “자해”충동은 “그대가 태어난 것은 거룩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충만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도 아니니 그대는 행복해지고 진화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208면)라는 구절에 이르면 거의 ‘종교’의 경지로 승화되고 있으며 “정상적인 모든 삶이 불가능한 사람들”(97면)의 수용소인 ‘낙오자의 섬’으로의 추방을 꿈꾸는 대목에서는 지독히도 환상적이다. 권력의 지배를 벗어나 체계 바깥으로 탈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영원히 피터팬으로 살며 공적인 삶의 내용을 최소화하기를 원하는 소시민적 자유주의”(360면)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직 인간’은 현대인의 숙명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그대로 승인하고 ‘권력’이 규정한 가면, 그 주체의 “허영”에만 만족할 수도 없다. ‘자해’는 이러한 딜레마에 직면한 존재가 선택한 마지막 몸부림이다. “극단을 수용한 다음 나는 강해진다. 내 존재의 모든 것, 부정하지 않는다. 아름답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변명도 후회도 없이 앞으로 간다. 그리운 것이 있어도 뒤돌아보지 않겠다.”(같은 곳) 그럴 수 있을까. 그 길이 다만 자아의 해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권력은 이 ‘수동적 저항’을 과연 두려워하기는 할까. 『그 사람의 첫사랑』은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담보로 이 거대한 미궁을 필사적으로 견뎌내려는 필사의 ‘고통’이다.

 

 

5

 

존재의 미궁에서 벗어나려는 탈주욕망은 최근 소설들의 지배적인 충동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그들에겐 돌아갈 고향도, 그들을 기다리는 정숙한 아내도 없다. 그렇다고 출구가 분명하게 보이는 것도 아니다. 도처에 완강한 벽뿐이다. 그들은 이미 이곳이 아닌 저곳을 꿈꾼다는 것의 무의미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훼손되지 않은 원초적 고향이든 미궁 바깥의 어떤 곳이든 이곳을 넘어서는 다른 어떤 곳은 없다. 말하자면 미궁 바깥은 없는 것이다. 이 끔찍하고 지루한 일상적 공간은 그들의 유일한 거처다. 그것만이 그들의 역할을 규정짓고 일정한 ‘이름’을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이 공간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나는 이미 나가 아니다. 그러나 이 공간은 끊임없이 나를 괴물로 규정한다. 미궁 속에 있는 한 나는 괴물에 불과하다. 괴물에 만족할 수 없다면, 괴물의 삶을 견딜 수 없다면, 이곳 아닌 다른 곳으로의 탈주, 지금의 삶이 아닌 다른 삶으로의 전신(轉身)은 필연적이다. 자, 이제,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

한강·백민석·배수아의 최근 소설은 이러한 난제 속을 구불구불 기어간 자취들이다. 그들은 쉽사리 이곳 바깥으로의 이주(移住)를 도모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곳의 일상 속에 완전히 정주(定住)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꿈꾸는 것은 이 미궁 속으로의 가벼운 산책이다. 산책은 이주도 정주도 할 수 없는 미궁 속의 주민의 차선책이다. 그것은 여행도 아니고 일상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일상 속의 여행이며 여행 속의 일상일 뿐이다. 한강의 서사적 탐색은 정신적 해탈, 식물로의 탈신화(脫身化)로 귀결된다. 그녀의 존재론적인 모험은 잃어버린 본원적 자아를 상기함으로써 지금 이곳의 끔찍한 현존을 지워나가는 과정이다. 한강의 소설이 시적인 초월을 지향한다면 백민석은 키치적 엽기를 자처한다. 그가 택한 전략은 초월이나 전복이 아니라 교란과 분열에 가깝다. 권력이 나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이름을 부여하기 전에 재빨리 다른 형태로 변신하는 그의 교란술은 차이를 최대화하면서 끊임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기호학적 모험을 겨냥한다. 배수아가 선택한 길은 일종의 마조히즘이다. 그녀는, 다만, 견딘다, 이 미궁의 괴물스러움을.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의 괴물성에 부여한 형벌이다. 괴물로 괴물성을 벌하는 그녀의 방식은 일종의 마조히즘적 거세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미궁을 산책하는 일은 곤경에 처한 자신의 처지를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일임과 동시에 산책의 즐거움으로 그 고통을 순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갇혀 있으되 권력에 복종하지 않으며 탈주를 기도하되 완전히 그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 한강·백민석·배수아의 소설은 이러한 아이러니의 긴장력으로 가동된다. 그것은 현대적 삶의 불가피한 조건에 관한 인식을 전제로 한 현대소설의 효과적인 방법론이기도 하다. 이 모순적 파열을 다시 ‘소설’의 미궁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미궁 속의 산책은 우리 소설의 유력한 출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