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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송기원 宋基元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197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선. 소설집으로 『다시 월문리에서』 『인도로 간 예수』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 『마음속 붉은 꽃잎』 등이 있음.

 

 

 

폰개 성

 

 

폰개 성에 대한 내 기억의 첫머리는 그가 큰아버지를 얼싸안고 애절하게 울부짖는 장면이다.

“아이고, 아부지이, 엉엉, 시상에 이거이 뭔일이다요, 엉엉.”

폰개 성은 금방 눈물로 범벅이 되어버린 얼굴을 하고서도, 두 손으로는 쉬지 않고 큰아버지의 팔이며 다리를 주무르고 있다. 그러나 큰아버지는 비스듬히 모로 누운 자세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팔꿈치와 무릎을 서로 잇댄 채 한껏 몸을 웅크려 새우등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큰아버지는 영락없이 세상 모르고 깊이 잠이 든 모습이다. 옆에는 눈에 익은 나무궤짝과 함께 비료부대 종이로 싼 쇠고기 한덩이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큰골 방죽 바로 아래이다. 둑길에는 동네 아이들이 길게 늘어서서 구경을 하고 있다. 내 눈길 또한 아이들과 같은 위치에서 폰개 성을 바라보고 있는 걸로 보아, 어쩌다가 나는 그만 아이들 편에 서 있게 된 모양이다. 아이들 중에 누군가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폰개 성더러 들으라고 넌지시 한마디 던진다.

“폴쎄 죽었는디……”

누군가의 말에 아이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여 동조를 하고 나선다. 그러나 서 있는 위치가 뭔가 어정쩡하고 애매한 나는 아이들과는 달리 화들짝 놀라고 만다. 폰개 성이 큰아버지를 붙들고 애절하게 울부짖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내가 쉽사리 그에게 가세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아직껏 큰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도무지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내가 열한살이 되는 설날 아침이다. 그리고 설날은 비단 나 같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넘쳐나는 음식과 세뱃돈과 화기애애한 얼굴로 주고받는 덕담만이 있어야 한다. 바로 그런 설날 아침에 하필이면 큰아버지가 죽는 일 따위는 벌어질 리 없다. 나는 눈앞에 벌어진 사태가 거의 분하기까지 한 마음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어쩐지 눈시울이 뜨거워져오는 것을 막지 못한다. 기어코 두 눈에 눈물이 고이고, 나는 얼핏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숨을 들이쉰다.

새파랗게 얼어붙은 하늘을 겨울바람이 쌩쌩, 거칠 것 없이 내달리고 있다. 겨울바람에 휘말려 어디선가 방패연 하나가 수직으로 곤두박질친다. 그렇게 방패연이 곤두박질치는 새파란 하늘 어디선가 큰아버지의 술취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몬자 큰골로 올라갈 테여? 이 큰아부지는 오랜만에 동무를 만났는디, 시방 이 자리서 하늘이 두 쪽이 난다고 해도 기냥 갈 수가 없구만. 큰아부지가 딱 한잔만 걸치고 일어설 테닝께, 지달리지 말고 몬자 올라가더라고. 가서 큰엄니보고 나가 금방 뒤따라온다고 전해라잉.”

파장 무렵이 되어 서둘러 짐을 거두어 나무궤짝을 메고 일어선 큰아버지가 동무를 만난 것은 어물전 머리에서였다. 이제 막 푸줏간에 들러 쇠고기 한근을 끊은 다음에 어물전으로 해서 장터를 빠져나가려던 참에 동무를 만난 것이었다. 이미 전작이 있던 두 동무는 서로 얼싸안다시피 부둥켜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둘러 가까운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큰아버지는 덩달아 함께 들어간 나를 구태여 등을 떠밀다시피 하며 선술집 밖으로 밀어냈다.

“공부하는 학상은 이런 곳에 들어오면 안된다는 법도 몰른당가? 여그는 학상이 배울 것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데여. 만약에 어무니라도 이 꼴을 보먼 당장에 나를 우찌께 생각할 꺼잉고?”

혼자서 시오릿길이 넘는 큰골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막무가내로 버티다가 내가 그만 선술집을 나선 것은 어무니 운운한 큰아버지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진저리를 쳐대는 어머니의 성정을 나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어머니에게 술이란, 나로서는 전혀 기억에도 없는 생부이거나 혹은 술이 취했다 하면 으레 주먹부터 휘두르고 보는 의부에 다름아니었다. 그런 어머니한테 비록 큰아버지와 함께라지만 내가 선술집에 어정거렸다는 소문이 들려서 좋을 일은 눈곱만큼도 없을 것이었다.

비단 술뿐만이 아니라 매사에 걸핏하면 어머니는 나에게 생부의 일을 걸고 넘어지기 일쑤였다. 내가 어쩌다 아이들과 싸우거나 학교수업을 빼먹어 말썽이라도 생기면 어머니는 숫제 두 눈을 허옇게 뒤집고는 했다.

“아이고, 서방복이 없는 년이 어디 자석복이라고 있을 꺼이여. 될 성부른 낭구는 떡잎부터 알어보드라고, 아직 귀싸댕이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우짜먼 그루코롬 지 애비가 허든 숭헌 짓만 골라 헌당가? 오메, 오메, 징헌 거, 허구헌 날 고주망태에다가 노름꾼에다가 쌈박질에다가 그것도 모질라서 난중에는 아편쟁이까지…… 시상에 숭악한 짓만 골르고 골라서 지 애비가 나를 골벵 들이등만 인자는 그 새끼가 나서서 기냥 내 멩줄마자 끊어놀라고 헌당께. 아나, 니 애비를 닮을 바에는 일찌감치 나를 쥑에라, 쥑에.”

선술집을 나온 내 귀에 이제 막 주모를 향해 호기롭게 외쳐대는 큰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아짐씨, 여그 막걸리 한 사발씩만 주시요잉.”

큰아버지는 오일장을 돌아다니는 신기료 장수였다. 장날이면 싸전머리에서 헌 구두며 운동화를 수선했는데, 아무리 밑창이며 코가 너덜너덜해져버린 구두며 운동화일지라도 일단 큰아버지의 손에만 들어가면 금방 새것으로 둔갑을 하기 마련이었다. 터지고 구멍이 난 구두에 가죽을 잘라붙이고 밀랍을 입힌 실로 서걱서걱 꿰매가는 큰아버지의 잽싼 손놀림을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무슨 요술을 보듯이 마냥 신기하기까지 했다.

큰아버지가 언제부터 떠돌이 신기료 장수가 되었는지는 자세히 기억할 수가 없다. 아마도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기 전부터였지 않나 싶다. 그렇듯이 나에게는 큰아버지 하면 으레 싸전머리의 전봇대 아래 까맣게 손때가 묻은 나무궤짝을 의자 삼아 깔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큰아버지에게 어린 내가 불쑥 손을 내민다.

“큰아부지.”

나의 목소리에 큰아버지는 비로소 고개를 들고 주름투성이의 얼굴 가득히 함박웃음을 담는다.

“허어, 우리 세금쟁이가 이번 장도 안 잊어뿔고 찾어왔단 말이제?”

큰아버지가 주섬주섬 감색 한복 조끼의 주머니를 뒤지고, 나는 뒤쫓기기라도 하듯이 성급하게 재촉한다.

“빨랑 줘. 꾸물대다 들키먼 나는 맞어죽는단 말여.”

“아니, 우리 귀여운 세금쟁이를 누가 감히 쥑인단 말여?”

“치잇, 바로 엄니제 누구여? 한번만 더 큰아부지한테 돈 타내먼 때레죽인다고 했단 말여.”

큰아버지가 이윽고 십환짜리 지전 한장을 건네주면, 나는 혹시나 어머니한테 들킬세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힁허케 내뺀다. 언젠가 큰아버지에게 돈을 타내는 것을 목격한 어머니는 근래에 없던 매타작까지 해가며 혹독하게 나를 혼냈던 것이다.

“아나, 차라리 문딩이 콧구녕에서 마늘을 빼묵제 큰아부지한테서 돈을 뺏어야? 지끔 그 냥반 헹펜이 우짠 줄 알고 장마다 날강도같이 버젓이 돈을 뺏는 거이냐? 그 냥반 헹펜에는 니한테 뺏기는 단돈 십환도 속으로는 피눈물이 날 거이다. 이 속알탱이 없는 새끼야.”

“오메 엄니, 나가 뺏은 거이 아니고, 큰아부지가 아이스께끼 사묵으라고 줬단 말이여.”

“아이고, 이 싹퉁머리없는 새끼가 터진 입이라고 말 둘러대는 것 잠 보소. 오냐, 좋다, 그라먼 니가 손도 안 벌리는디 큰아부지가 일일이 쫓아댕김서 니한테 돈을 주더냐잉?”

어머니로부터 예사롭지 않게 혼쭐이 났지만, 그러나 가까스로 걸음마를 익힌 어린아잇적부터 뺀질뺀질한 장돌뱅이로 호가 난 나로서는 이 손쉬운 돈줄을 호락호락 포기할 수가 없었다. 몇년을 두고 큰아버지 말마따나 세금쟁이 노릇을 톡톡히 해온 나에게, 큰아버지는 어머니의 매타작 몇번으로는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소중한 돈줄이었던 것이다.

어린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한가지는 바로 큰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태도였다. 어머니는 생부라면 혹시 꿈에라도 나타날까 두렵다는 듯이 치를 떨며 하나부터 열까지 비난으로 일관하면서도, 큰아버지에 대해서는 전혀 반대였다. 내가 보기에도 이건 두 사람을 너무 심하게 차별한다 싶을 정도로, 큰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태도는 어느 하나 없이 각별했다.

어머니의 태도 중에서도 이해가 안되는 또 하나는 바로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며 그리고 무슨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제삿날이면, 으레껏 나를 큰아버지한테 보낸다는 점이었다. 생부와 마찬가지로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할아버지며 할머니의 제사에 가야 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뚱딴지같다 못해 뭔가 억지스럽기도 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바로 나를 큰아버지한테 보내는 문제로 의부와 대판 싸움을 벌여 피투성이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년이 지금 누구 복장을 지르는 거여, 뭐여? 시방 니가 무신 맘으로 그놈 집 제사며 명절 때마다 버젓이 니 새끼를 보내는 거여? 나가 고자가 되야서 후사가 없기 땀시 죽어 귀신이 되야서도 물밥도 못 얻어묵을 거라는 것을 시방 니년이 나 앞에 우세하고 있는 거 아녀? 아나, 이년아. 지 새끼를 이만큼 멕에살레 키워논 것이 누군 중이나 알고, 시방 천벌 맞을 짓거리를 하는 거이냐? 오냐, 어디, 천벌을 맞기 전에 몬자 내 손에 뒈져봐라.”

의부가 대뜸 어머니의 머리채를 낚아채며 길길이 날뛰었다. 당시 어머니와 함께 해산물 도매상을 하던 의부는 서로간에 돈 계산이라도 틀려 시비가 붙는 날이면 곧잘 손찌검을 해서 어머니를 피투성이로 만들곤 했는데, 그런 의부의 손속도 이번에는 그 혹독함이 여느 때와는 달랐다. 일찍이 어린 나이부터 둘 사이의 싸움질을 흡사 닷새마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장날처럼 흔하게 보며 자란 나인지라 웬만하면 못 본 척했는데, 그런 나로서도 이번에야말로 어머니가 죽어나자빠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은근히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머니 또한 절대로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오냐, 때레쥑에라. 나가 이녁 손에 죽으먼 죽었제, 한나밖에 없는 내 새끼를 근본도 모르는 장갓 쌍것으로 맨들 수는 없어야.”

나로서는 무슨 근본 운운하는 어머니가 당연히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변덕을 부리는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했다. 마치 철천지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틈만 나면 생부 욕을 해대면서도 한편으로는 의부에게 피투성이가 되면서까지 기필코 나를 큰아버지한테 보낸다……

큰골은 큰아버지댁뿐만 아니라 둘째아버지며 사촌형제들로부터 당숙이며 육촌형제들에 이르기까지 거의 자작일촌으로 벌족한 집안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벌족한 집안에서 웬일인지 큰아버지댁만은 달랑 방 두칸에 부엌 한칸뿐인 초가삼간이었다. 게다가 그 초가삼간마저 아직 새 이엉을 얹지 못한 낡은 지붕이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있어서, 누가 보아도 궁한 살림이 남김없이 드러나는 정경이었다.

내가 흉내뿐인 사립문을 혼자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큰어머니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아니, 우찌께 해서 혼자 오는 거이여?”

“잉. 큰아부지가 금방 뒤따라 온다고 함서 나보고 몬자 가라고 하등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큰어머니는 손에 쥐고 있던 장죽을 놋재떨이에 쨍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아이고, 이놈의 술구신이 보나마나 그새를 못 참고, 어린 아그를 혼자 보낸 것이겄제?”

“아녀, 아녀, 큰엄니, 그거이 아녀. 나랑 함꾼에 어물전을 나오는디 동무를 만났단 말여.”

“동무는 무신 얼어죽을 놈의 동무! 헌다 헌다 헝께, 이 영감탱이가 섣달 그믐날까장 넘의 염장을 지르고 있네. 글 안해도 그놈의 술 땜시 날레뿐 그 빤닷한 집이며 논밭만 생각하먼 시방 당장에 L바닥을 물고 자겔이라도 헤뿔고 싶은 마음뿐이여. 어디 오기만 해봐라. 나가 오늘은 시상 없어도 기냥 넘어가덜 않을 테여.”

큰어머니가 본격적으로 큰아버지를 구실삼아 잔소리를 늘어놓을 낌새를 보이자, 이윽고 폰개 성이 나섰다.

“엄니, 지가 한번 싸게 장터까지 갔다와볼께라우?”

폰개 성의 말에 큰어머니는 오히려 방에서 마루로 나앉으면서까지 손에 든 장죽을 휘둘러댔다.

“냅둬라, 냅둬. 이 추운 날 니는 뭔 죄가 났다고 장터까장 가서 영감탱이 뒤치다꺼리를 맡는단 말이여? 나도 인자부터는 영감탱이가 술독에 빠져 죽든 말든 암시랑 안헐란다.”

큰어머니는 말끝에 기어코 곡성을 터뜨렸다.

“아이고오, 한나밖에 없는 우리 폰개럴 중핵교도 못 보낸 마당에, 이 속창시 없는 인사는 뭐이 좋다고 허구헌 날 술타령인고오.”

큰아버지가 밤이 깊어져도 오지 않자, 폰개 성이 그만 집을 나섰다. 줄곧 구시렁대며 큰아버지를 향해 날을 세우던 큰어머니마저도 폰개 성을 더이상 만류하지 못했다. 나는 폰개 성이 사립문을 열고 섣달 그믐밤의 깜깜한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지만, 그러나 그가 돌아오기까지 기다리지 못한 채 어느새 밀려오는 잠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어쩌다 큰아버지댁에 오면 나는 으레껏 그런 식으로 잠속으로 빠져들고는 했다. 부엌에서는 떡이며 고기들이 익어가는 구수한 냄새가 풍겨나고, 안방의 제상에는 벌써 곶감이며 사과며 북어포 같은 마른 차림들이 진설되어 있다. 큰아버지는 여느 때와는 달리 사뭇 근엄한 표정으로 묵묵히 알밤을 깎는다. 그렇듯 제사를 앞둔 달콤하고 넉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딘지 모르게 신비하기조차 한 분위기 속에서 차츰 밤이 깊어간다. 이른바 할아버지며 할머니 같은 조상의 넋들이 오는 시간이라는 자정 무렵을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그러나 단 한번도 제사를 지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채, 매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리고 제사 지낼 준비를 모두 끝낸 큰아버지가 깨워서야 일어났다.

“자, 인자 그만 인나서 할아부지한테 절을 드레야제?”

내가 선잠이 깨어 손등으로 눈을 부시고 보면, 어느새 큰아버지댁뿐만 아니라 둘째아버지며 막내 작은아버지까지 가까운 일가들이 모두 비좁은 방안에서 북적대고 있다. 미처 방에 들어오지 못한 여자들은 방 앞의 좁은 마루에서 옹송그린다. 이윽고 제사가 시작되면 큰아버지는 잊지 않고 나부터 챙긴다.

“자, 내 옆에 오니라.”

그리고는 제사를 지내는 틈틈이 어린 나에게 망자의 함자며 제사의 절차 같은 것을 자상하게 설명한다. 그런 설명 끝에 큰아버지는 비단 나에게 들으라고 하는 것만은 아닌, 엉뚱한 한마디를 빼놓지 않는다.

“어디서 어떠끄롬 살든지간에 저마둥 타고난 근본을 잊어뿐다치먼, 건 사람 노릇이라고 헐 수가 없는 거이제.”

큰아버지는 아침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뭔가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달은 일가들까지 나서서 밤새도록 몇번씩이나 장터를 오갔지만, 어디에서도 큰아버지를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침 늦게서야 엉뚱하게도 동네 아이들에 의하여 장터를 오가는 길과는 전혀 동떨어진 방죽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동네 아이들 중의 하나가 그만 줄이 끊어져 날아가는 연을 뒤쫓아가다가 바로 방죽 아래에서 큰아버지를 발견한 것이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로는 술이 취한 큰아버지는 깜깜한 밤길을 걷다가 길을 잘못 들어 방죽 아래로 들어섰고, 너무 추운 나머지 잠시 쉬었다 간다는 것이 그만 잠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큰아버지가 죽은 후 얼마 되지 않아 폰개 성은 큰어머니와 함께 큰골을 떠나 순천으로 이사를 갔다. 큰아버지의 외아들인 폰개 성 위로는 시집을 간 순자와 숙자 두 누님이 있었는데, 남편이 순천에서 순경으로 있는 순자누님이 폰개 성을 옆으로 불러들인 것이었다.

큰아버지의 제삿날이 되자 어머니는 역전에서 순천으로 가는 사람을 수소문하여 인편에 나를 맡겼다. 폰개 성 집은 법원 가까운 주택가의 한가한 골목길에 있었는데, 두어 평 될까말까 하는 가게와 그 가게에 딸린 골방이 전부였다. 이를테면 담뱃가게를 하는 셈이었다. 가게에는 비단 담배뿐만 아니라 눈깔사탕이며 센베이과자며 꽈배기 등이 담긴 둥근 유리병 서너 개가 진열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어린 내가 보기에도 귀가 빠진 것이 분명한 가게는 장사가 되는 낌새라고는 아예 없었다.

골방 안의 한구석에 있는 앉은뱅이 책상에는 무슨 통신강의록이라는 책들이 책꽂이에 꽂혀 있었는데, 아마도 중학교 과정인 듯싶었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채 큰골에 있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폰개 성이 순천에 오면서 늦게나마 나름대로 독학의 길을 찾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폰개 성과 나는 다섯살 차이였는데, 내가 새해 들어 중학교에 들어가면 서로 공부의 단계가 비슷하게 될지도 몰랐다.

 

내가 폰개 성을 다시 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거의 십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후였다. 그 무렵 얼핏 전해들은 소식으로는, 폰개 성이 철도공무원이 되어 전주역에서 역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나 또한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이제 막 대학시험을 치른 참이었다. 그런데 폰개 성이 큰골에 있는 처자에게 장가를 들게 된 것이었다.

나에게 형수가 될 처자는 지방에 있는 여학교를 다닌 관계로 어쩌다 장터에서 서로 한두 번 얼굴을 마주친 적이 있는 사이였다. 남달리 키가 작고 체격도 왜소한 폰개 성과는 달리 그 처자는 얼굴도 달덩이처럼 예쁜데다가 살집도 맞춤으로 통통하여 흔히 말하는 부잣집 맏며느릿감이었다. 또한 처자의 집안은 농토도 적지 않은 중농에다가 장인 될 이가 인근에서는 내로라 하는 대목(大木)으로 이름을 떨치는 남부럽지 않은 처지였다.

후에 알았지만, 신랑 쪽으로서는 자칫 넘쳐난다 싶은 이 혼사가 서둘러 이루어진 것은 장인 될 이가 애오라지 폰개 성의 성실성에 반한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신부집에서 혼례가 진행되는 내내, 장인 될 이는 풍채 좋은 얼굴에 싱글벙글 흐뭇한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폰개 성의 결혼식에서 나는 무엇보다 신랑측 우인대표가 나서서 하던 축사의 한 대목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신랑 판기군은 일찍이 아메리카로 유학을 하여 하바도 대학하고도 대학원을 함께 졸업하고 석사 박사 학위까지 모두 받아온 대한민국의 유능한 젊은이로서 현재는 우리나라 기간산업 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철도 현장에 뛰어들어 역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바, 가히 그 장래가 촉망되며……”

엉뚱하지만 나는 그때에야 비로소 폰개 성의 원래 이름이 판기라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 나는 큰아버지며 큰어머니가 으레 폰개, 폰개 하길래 그것을 제 이름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렇게 원래 이름을 알았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어릴 때부터 이미 입이며 귀에 익숙해져버린 폰개를 하루아침에 판기로 뒤집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판기라는 원래 이름을 알고 난 뒤에도 으레 폰개 성, 폰개 성 하고 불러 버릇했다.

철도공무원이 된 뒷배경에 대해서, 아주 훗날 폰개 성은 정색을 하고 한가지 사실을 고백했다.

“나가 평생 동안 양심에 찔리는 일이 딱 하나 있는디, 그건 바로 철도공무원이 될 때 가짜로 고등학교 졸업증명서를 만든 사실이네. 당시에 나는 보통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는디, 역시 독학으로만은 한계가 있드란 말이시. 거그다가 어무니는 차츰 나이가 드시고. 그란디 그때 나를 좋게 봐준 고시학원 선생이 나한테 철도공무원 시험이라도 보라고 권하들 안겄는가? 그람서 실력으로 따지자면 어렵잖게 합격을 할 거인디 졸업장이 문제인께 그것도 자기가 맨들어주겄다는 거이여. 우짜겄는가? 할 수 없이 그 학원 선생이 마련해준 가짜 졸업장을 갖고 시험을 봤제.”

폰개 성은 쓴웃음을 짓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란디 그 졸업장이 결국은 끝까지 말썽이드란 말이시. 전주역에서 근무할 땐디, 암것도 모르고 덜컥 승진시험을 봤덜 않겄는가. 그렇게 승진시험에 합격을 헝께 이번에도 뜬금없이 최종학교 졸업장을 요구하더란 말이시. 어쩌겄는가? 나야 국민학교 졸업장이 바로 최종학교 졸업장인디…… 아무리 생각해도 나가 급한 김에 한 번은 남을 속였지만 두 번을 속일 수는 없드구만. 그래서 그만 사표를 쓰고 말었네.”

폰개 성이 장가를 들고 나서 5,6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다. 때마침 내가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어, 양력 설날 아침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사진이 실렸을 때였다. 당시에 내가 묵고 있던 영등포 문래동의 누님 집으로 폰개 성이 불쑥 찾아왔다. 누님이 재봉일을 하고 매형이 다림질을 하며 부창부수하는 세탁소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폰개 성은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이 어떤 흥분과 감격으로 한껏 들떠 있었다.

“이건 자네만이 아니고 우리 가문의 영광이네. 인자 우리 가문도 자네 때문에 비로소 빛이 나기 시작하네그랴.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고향에 내려가 거리 곳곳마다 프랑카드라도 걸어놓고 싶네.”

폰개 성의 말에 누님이 먼저 나섰다.

“오메, 신춘무넨가 하는 거이 그르코롬 큰 베슬이다냐?”

“하문이라우. 누님은 몰르겄제만, 그거이 옛날로 치자먼 장원급제와도 같은 거이요.”

“오메, 그라먼 인자부터는 우리 엄니도 그동안 언 손발 붐서 이고 댕기던 미역 장시 보따리를 내팽개쳐뿌러도 되겄네?”

나는 누님한테서 어머니의 말이 나오자마자 대번 찔끔하여, 애~은 폰개 성에게만 속으로 눈을 흘겼다. 그런 나는 그가 나타난 것 자체가 차라리 난감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누님 말마따나 그 무렵 어머니는 장사에서만큼은 의부와 아예 갈라서서, 혼자 인근 오일장을 돌아다니며 난전을 편 채 미역이며 김 따위를 파는 보따리 행상을 하는 중이었다.

어머니가 보따리 행상을 하는 동안에, 한편 나는 흡사 수천수만 마리의 벌떼들이라도 머릿속에 들끓는 것처럼 모든 생각들이 고통스럽고 캄캄하기만 한 이십대 언저리의 문학청년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흔히 문학을 잘못 이해한 문학청년들이 으레 무슨 통과의례처럼 빠져들기 마련인 퇴폐주의며 탐미주의의 함정을 나 또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아니 벗어나기는커녕, 사물을 제대로 직시하는 길이란 오직 퇴폐주의와 탐미주의밖에 없다며 자칭 맹신도가 되어 부도덕하고 위악적인 행패를 일삼고 있었다.

바로 그런 나에게 폰개 성은 느닷없는 가문의 영광을 들고 나선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사춘기 이래 나에게 가문이란, 얼굴도 미처 알 수 없는 생부를 둔 사생아에다가 의부의 눈칫밥을 먹고 자라난 치부(恥部)이자 치욕의 근원에 다름아니었다. 그렇듯 가문 자체를 치부와 치욕으로 여기며 부도덕하고 위악적인 행패를 일삼는 나와, 그런 나에게 가문의 영광을 다짐하는 폰개 성의 관계는 어쩔 수 없이 일막의 코미디에 방불했다.

그때부터 폰개 성은 매번 나에게 난감한 존재가 되었다. 당연한 것처럼 나는 될 수 있는 한 그를 멀리하려 들었다. 그 무렵 그는 예의 최종학교 졸업장이라는 마음의 짐을 끝내 견뎌내지 못하여 철도공무원직을 그만둔 다음, 서울로 올라와 택시운전사가 되어 있었다.

그해 늦가을이었다. 광화문에서 문인들이 모여 ‘자유실천 문인선언문’을 낭독하는 일종의 데모를 하는 자리에 우연히 내가 끼여들게 되었다. 일찍이 문학청년 시절부터 동고동락해온 시인 이시영과는 당시에 흑석동 연못시장 근처 하숙집의 한방에 동숙하고 있었는데, 그가 나를 데모현장에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절반은 순전한 호기심에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친구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해서, 어디 내로라 하는 문인선배들이 자유실천이란 것을 어떻게 선언하나 구경이나 하자고 나온 자리였다. 나로서는 자신이 감히 그런 자리에 끼여들어 다른 문인들과 함께 ‘자유실천’ 운운할 자격이 있다고는 아예 생각조차 못했다.

방관자 비슷하게 나온 자리지만, 그러나 나의 가슴 한켠에서는 막연하게나마 당시의 박정희정권을 향한 분노 같은 것이 전혀 없지만은 않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해 초에 있었던 이른바 ‘문인간첩단 사건’ 때문이었다. 그때 박정권은 소설가 이호철 정을병, 평론가 임헌영 등을 간첩이라고 잡아들여 감옥에까지 보냈는데, 시국이며 역사를 보는 눈이 거의 까막눈이다시피 한 내가 보기에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호철 선생만은 절대로 간첩이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단정한 것은 대학에서 그의 강의를 받은 제자의 입장인데다가 몇번인가 술자리도 함께한 적이 있어서, 부드러운 한편 은근히 겁도 많은 그의 성정을 익히 알기 때문이었다. 나의 단순한 생각으로는 그처럼 부드럽거나 겁이 많은 사람은 절대로 간첩이 될 수가 없었다.

훗날 시절이 이상하게 변하여 이번에는 내가 걸핏하면 비밀기관에 불려 다니는 신세가 되었는데, 조서를 받다보면 으레 언제부터 불순한 사상을 갖고 반체제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가를 묻는 질문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호철 선생이 포함된 ‘문인간첩단 사건’을 예로 들고는 했다. 세상에 멀쩡한 문인들까지 간첩으로 모는 정권이라면 더이상 다른 것은 보지 않아도 그 속을 빤히 알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정해진 대답이었다.

어쨌든 아무런 마음의 결심도 없이 그야말로 방관자의 입장에서 이시영을 따라 참석한 자리였는데, 데모현장에서 어물어물하는 바람에 시인 고은 조태일 이시영 소설가 박태순 이문구 윤흥길 등과 함께 나 또한 기관원들에게 붙잡혀 종로경찰서까지 끌려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난생 처음으로 경찰서의 정보과에서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린 채 이른바 조서라는 것을 썼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대번에 고은 선생한테 핀잔을 듣는 일을 벌이고 만 것이었다.

나를 조사하는 형사는 나이가 쉰살이 족히 넘어 보이는 중늙은이였는데, 어찌나 문장이며 철자법이 틀리던지 나는 무릎까지 꿇린 상황에서도 도저히 그냥 보아넘길 수가 없었다.

“아저씨, 이건 철자법이 틀렸네요. 아가 아니라 어라고 해야 하지 않아요? 여기 시옷도 그냥 시옷이 아니고 쌍시옷이고요.”

“어어, 그런가? 역시 글을 많이 배운 문인들이라 잡범들하고는 뭔가 달라도 다르구먼.”

형사들이 잠시 쉬러 가서 잠깐 문인들끼리만 있을 틈이 나자, 고은 선생이 드러내놓고 얼굴을 찌푸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여기는 우리 문학에서 중요한 역사가 탄생하는 현장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짭새를 보고 아저씨가 뭡니까, 아저씨가? 체통을 차리세요.”

이를테면 고은 선생은 다분히 문인이라는 신분의 격을 떨어뜨리는 나의 언동과 함께 적과 아군마저 구별하지 못하는 한심한 역사인식을 나무랐던 것이다. 나는 속으로 공연한 이시영이만 욕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부터 내가 낄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대충 조사가 끝났다 싶을 무렵에 정보과의 문이 열리더니 어찌된 영문인지 폰개 성이 난데없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가죽잠바를 입은 그는 방금 뉴스를 들어서 알고 찾아왔다면서 아직도 흥분한 기색을 억누르지 못한 채, 고은 선생을 비롯해서 문인들에게 두루두루 깍듯한 인사를 건냈다.

“저는 저기 있는 사람의 집안 형이 됩니다.”

폰개 성은 문인들에게 두루 인사를 하고 맨 나중으로 나에게 왔다.

“역사는 이 일을 반드시 기록에 남길 거이네. 나는 누구보다 동생이 자랑스럽네.”

또 그놈의 역사인가 싶어, 나는 소태라도 씹은 얼굴로 폰개 성을 외면했다. 고은 선생으로부터 다름아닌 역사 운운하며 핀잔을 받은 지 불과 몇분 후였다. 다시 한번 두루두루 인사를 마친 그가 정보과 문을 열고 나서기가 무섭게, 옆에 있던 이문구 선배가 나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어이, 거기 형이라는 사람, 혹시 택시운전사 아녀?”

나는 놀란 눈이 되어 되물었다.

“아니, 어떻게 알았어요?”

“탁 들어올 때부터 첫인상에서 기름냄새가 줄줄 풍기더라니깐. 건 그렇고, 거기한테도 저렇게 예의범절이 반듯한 형이 있었던 거여?”

그때부터 다시 3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미처 마음의 준비도 없이 얼결에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는데,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혼자가 아닌 둘이란 것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이렇다 할 직장도 없어서 생활고 또한 예사롭지 않은 나로서는 하루하루가 힘든 나날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껏 남아 있는 문학청년 시절의 부도덕하고 위악적인 버릇 때문에 무슨 밥벌이를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하릴없는 파락호가 되어 밤낮없이 애~은 술이나 축내기 일쑤였다.

그날도 나는 낮술에 얼큰히 취한 상태에서 묘령의 여자와 함께 택시를 탔는데, 문득 운전사가 나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것이었다.

“손님, 보아하니 결혼도 하신 것 같은데, 이렇게 벌건 대낮에 꼭 술을 드셔야겠습니까?”

무슨 꼴같잖은 운전사가 다 있나 싶어 취한 눈을 들어 바라보니, 백미러 속에서 폰개 성이 웃지도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폰개 성은 그날 아예 영업을 포기해버린 채 자기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내 옆에 있던 묘령의 여자는 아무래도 불길한 낌새를 알아채고 미리 차에서 내린 다음이었다. 그의 집은 뜻밖에도 개포동에 있는 열평짜리 주공 아파트였다. 나는 그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기쁜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어어, 폰개 성, 몇해 안 보는 사이에 벼락부자가 됐네?”

폰개 성은 다소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벼락부자가 된 건 사실인디, 그거이 내가 번 돈이 아니네.”

폰개 성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큰골의 육촌형님 중에 해방되던 무렵 일찍이 집에서 송아지 한마리를 훔쳐가지고 여비를 마련하여 일본으로 밀항한 이가 있었는데, 바로 그가 일본에서 큰 공장을 하는 부자가 되어 일시 귀국을 했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는 금의환향한 이답게 일가들 중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꺼이 선심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런 식으로 폰개 성에게도 물경 이백만원의 차례가 돌아온 것이었다. 그 이백만원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게 딱 열평짜리 아파트 값이었다.

폰개 성을 택시 안에서 우연히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그가 일부러 내 집까지 찾아왔다. 그리고 무작정 함께 갈 곳이 있다면서 나를 잡아끄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그를 뒤따라가보니, 그곳은 당시 한창기라는 이가 발행인으로 있던 ‘뿌리깊은 나무’라는 잡지사였다. 그의 말로는 집안끼리 오래 전부터 교분이 있는 한창기라는 이와 이야기가 다 되어 있으니, 나더러 취직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의 하는 양으로 보아, 허구헌 날 술이나 마시며 파락호 행세를 하는 나를 더이상 두고 보다 못해, 그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녔던 게 틀림없었다.

폰개 성과 함께 한창기라는 이를 만나니 그는 잠자코 편집부로 나를 보냈다. 내가 편집부로 가자, 맙소사, 거기에는 평소에 서로 호형호제하며 터놓고 지내던 윤구병 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몇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폰개 성을 따라나서면서, 나는 윤구병 형이 ‘뿌리깊은 나무’의 편집장으로 있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깜박했던 것이다.

사람이 좋은데다가 남달리 특이한 용모라서 술집 같은 허물없는 장소에서 만나면 늘쌍 내 놀림을 받던 윤구병 형은 숫제 안면을 바꾸어 자못 근엄한 표정이었다. 모르긴 해도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이 역력했는데, 두꺼운 영한사전과 함께 나에게 무슨 영어 원서를 내미는 것이었다. 그의 말인즉슨 시간은 얼마든지 줄테니 원서의 한 페이지만 번역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는 평소와는 달리 나에게 깍듯한 서울 말씨에다가 존칭마저 썼다.

“천천히 하세요. 마음 푹 놓으시고요.”

옆에서 알짱대는 윤구병 형의 음흉한 속마음을 내가 모를 리 없었다. 얼핏 그가 눈앞에서 사라지자마자 나는 살그머니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고 줄행랑을 놓았다. 영어라면 고작 중학교 1학년 실력을 넘지 못할 내가 더이상 꾸물거릴 곳이 아니었다. 그후로 한동안 나는 술집 같은 곳에서라도 그를 마주칠까봐 여간만 고심을 한 게 아니었다. 만일 우연히라도 마주친다면 악동같이 짖궂은 심성으로 보아, 그날 애써 참았던 웃음을 한꺼번에 터뜨리며 나를 골탕먹일 게 분명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에도 폰개 성이 비슷한 일로 다시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도 더이상 그를 참아내지 못했다. 나는 그를 따라나서기는커녕 그동안 쌓였던 난감한 감정까지 포함하여 모진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폰개 성, 참말로 답답허요잉. 폰개 성이 정 이런 식으로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 양이면, 앞으로 나는 두 번 다시 성 얼굴을 안 볼라요잉.

어쨌든 그후로 폰개 성은 나의 취직문제 같은 것에는 더이상 관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이른바 가문의 가형으로서 동생인 나에 대한 관심마저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나와 관련된 문단의 행사는 물론이려니와 심지어는 가까운 친구며 문인들의 경조사에까지 일일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언제부터인가 폰개 성은 택시운전을 그만두고, 이번에는 무슨 전자회사 사장의 자가용 운전기사가 되었다. 매사에 원리원칙을 중요시하는 이들이 흔히 그렇듯이 융통성마저 별로 없는데다가 남들처럼 악착스럽지도 못한 그로서는 그동안의 영업용택시 운전사 노릇이 여간만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다 하소연이라도 하듯이 흘린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다른 운전사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합승이나 승차거부 같은 가벼운 범법행위마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의 수입으로는 가족들의 생활비는 고사하고 납입금을 채우기에도 벅찼을 것이 뻔했다.

폰개 성이 전자회사에 취직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전기가 된 이른바 ‘80년의 봄’이 되었다. 그때 나는 삼십대 중반의 다 늦은 나이에 복학생이 되었는데, 무엇보다도 교원자격증을 따서 어디 면소재지에 있는 농업고등학교 같은 곳에서 국어선생을 하고 싶어서였다. 대학에 진학할 학생들이 단 한명도 없는 농업고등학교에서 선생 노릇을 하면서, 입시지도 대신에 연애편지 쓰는 법도 가르쳐주고 은근슬쩍 술도 가르쳐주면서 때로는 가까운 냇가에 데리고 나가 함께 천렵도 하겠다는 다분히 낭만적인 기분이었다.

나의 낭만적인 기분과는 달리, 대학교 안에 무슨 복학생협의회 같은 것이 만들어지면서 일이 차츰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5월 어느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학생들이 서울역까지 진출하여 ‘유신잔당 장례식’을 지내는 데모대의 선두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 결과 나는 나중에 전두환씨를 비롯한 군부세력들이 조작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는 빌미를 주게 되었다.

폰개 성을 다시 만난 것은 내가 그 사건에 연루되어 10년이라는 징역형을 받고 3년 가까운 감옥살이를 하다가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다음이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아 득달같이 달려온 그는, 아니나다를까, 흥분과 감격에 겨운 얼굴로 또다시 난감한 한마디를 빼놓지 않았다.

“장하네. 비록 고생은 했다고 하지만, 역사는 반드시 이 일을 뒤집어 영광스러운 일로 기록할 것이네. 두고 보게나. 자네 때문에 또 한번 우리 가문이 빛날 거이네.”

폰개 성은 이윽고 어머니의 장례식에 대한 것으로 화두를 옮겼다.

“비록 동생이 없었지만, 작은어머님 장례식만큼은 내로라 하는 어느 누구 못지않았네. 많은 분들이 오셔서 모두 내 일처럼 거두어주셨구만. 그중에서도 영화감독 이장호 선생님과 작가 이문구 선생님이 앞장서서 궂은 일을 도맡아주셨네. 동생은 특히 이 두 분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되네.”

폰개 성의 말에 나는 하릴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어머니는 자신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죄명을 뒤집어쓴 자식에 대한 비통함을 견디다 못한 나머지 끝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 것이었다.

이러저런 말끝에 폰개 성은 문득 지나치는 어투로, 자신이 지금 전자회사의 총무과 서무주임으로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의 말이 선뜻 믿겨지지 않은 나는 긴가민가 데면데면한 눈길로 그를 주시했다. 고작 국민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운전기사 출신에게 난데없이 총무과 서무주임이라니.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요?”

나의 노골적인 물음에 폰개 성은 먼저 애매모호한 웃음부터 웃고 보았다.

“허허허, 글쎄, 그거이 말일세, 허허허……”

갑자기 말투마저 어눌해져버린 폰개 성의 설명에 의하면, 경기도 안성 등지의 서너 곳에 공장이 있어서 중소기업으로는 비교적 상위권에 드는 이 전자회사는 그 자본이 일본 계열이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사장에게 그의 한문 실력이 인정되어 총무과 서무주임으로 발탁되었다는 것이다. 사장은 그를 총무과에 서무로 근무시키면서도 출퇴근에 한해서만은 여전히 자신의 자가용을 몰도록 했다.

폰개 성의 설명을 듣는 순간, 나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회사든지 총무과 서무주임 자리이라면 무엇보다도 사장의 신임을 필요로 할 터이었다. 그렇듯이 사장은 어쩌면 그의 한문 실력보다는 거의 우직하리만큼 매사에 원리원칙만을 중요시하는 그의 올곧은 심성을 발견하고, 거기에 전적인 신임을 준 것인지도 몰랐다. 그후로 몇년이 더 흘렀을 때 폰개 성은 어느덧 전자회사 총무과장이 되어 있었다.

한편 나는 몇몇 문인들이 보다 좋은 일을 해보자면서 저마다 조금씩 출자를 하여 만든 어느 출판사의 주간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 어느날 폰개 성한테서 전화가 왔다. 한달 전에 회사를 그만두고 영등포 문래동에다가 조그만 공장을 차렸다는 것이었다.

내가 공장이라는 곳에 가보니, 불과 너댓 평 될까말까 한 가게 안에 다 낡은 선반기계 하나가 달랑 놓여 있었다. 쇠를 깎아서 각종 기계의 부속품으로 쓰이는 베어링을 만들어낸다는 선반기계에 공원인 듯싶은 청년과 함께 매달려 있던 폰개 성이 나를 발견하고는 기름때 묻은 얼굴에 얼핏 웃음을 만들어 보였다. 그러나 정작 그의 웃음 띤 얼굴을 보는 순간, 나의 눈에는 난데없이 웬 할아버진가 싶을 정도로 얼굴 가득히 자글거리는 주름살만 보일 뿐이었다.

“어서 오게.”

불과 몇달 전과는 달리 너무 수척해진 모습에 미처 할말을 잃고 서 있는 나에게, 폰개 성이 두 손에 끼고 있던 면장갑을 벗으면서 다가왔다. 그러고는 선반기계 바로 위에 다락처럼 공간을 내어 마련한 한평 남짓한 사무실로 나를 데리고 올라갔다. 책상 하나에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을 뿐인 사무실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비난이라도 하듯 물었다.

“아니, 그 전자회사에서 쫓겨나기라도 한 거요?”

“그건 아니여. 나 스스로 그만둔 거이네. 회사하고는 전혀 무관하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 것뿐이여.”

폰개 성이 잠깐 얼굴에 그늘을 만들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이야기를 하자면 길지만 한마디로 하자면, 순천 순자 누님 큰사위가 그만 사업을 하다가 망한 때문이네. 그 바람에 빚보증을 선 매형네는 풍비박산이 나고 급기야 나까지 이렇게 나서게 되었구만.”

순자 누님 큰사위의 빚잔치를 하는 마당에서 겨우 선반 하나만 건질 수가 있었는데, 폰개 성이 인수하지 않으면 그나마 놓치게 되자 결국 떠맡게 된 모양이었다. 이를테면 이 낡은 선반 하나에 순자 누님 일가의 목숨줄이 달려 있었다.

“어쩌겄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피붙이가 어려움에 빠졌는디 나만 살자고 모른 체할 수가 있겄는가? 아무리 봐도 나밖에는 나서줄 사람이 없는디 당연히 회사를 그만두고라도 나서야제. 다만 나한테 재산까지 [길 만큼 신임을 하던 사장님한테는 지금도 뵐 낯이 없구먼.”

자나깨나 공장 일에 매달리던 폰개 성은 반년을 미처 넘기지 못하여 피를 토하며 선반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병원에 가니 기관지염에다가 위암 증상까지 보인다는 진단이 나왔다. 기관지가 나빠져서 피를 토한 것은 그렇다 치고, 공장 일을 맡기 시작하면서부터 무슨 음식이든지 먹었다 하면 토해내는 식으로 식사마저 거의 못한 모양이었다. 서둘러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남달리 왜소한 체격이 급기야 40킬로그램 안팎을 맴돌아 이미 사람꼴이 허물어져버린 후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밀진단을 해본 결과 위 쪽은 암이 아니라 무슨 신경성거식증으로 병명이 나온 것이었다. 남달리 허약한 몸으로 애오라지 공장일에 매달린 나머지 무리하게 신경을 쓰다보니 급기야 그런 희귀한 병까지 얻었을 것이었다.

폰개 성이 애쓴 보람도 없이, 그가 쓰러지자 공장은 그대로 문을 닫고 말았다. 그는 병원에 입원한 지 석달이 넘어 가까스로 혼자서 몸을 움직일 상태가 되자 서둘러 퇴원을 했다. 그런 그에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개포동의 열평짜리 아파트까지 날아가는 일이 벌어졌다. 마침 그의 처남 되는 이가 대목이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전라도 광주에서 건축업을 하고 있었는데, 사업을 망해먹고 도망치는 바람에 은행에 담보로 넣어준 아파트가 하루아침에 날아가버린 것이었다.

폰개 성은 소리소문없이 안양의 변두리에 있는 다세대주택의 방 두칸짜리 반지하 셋방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아직 힘든 일에 나서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서 이번에는 부인이 남의 식당에 종업원으로 나섰다. 이때 그의 슬하에는 1남 3녀의 자녀들이 있었다.

공장에서 쓰러진 후로부터 일어난 모든 일을 폰개 성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아, 나는 아주 훗날에야 비로소 그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모르기는 해도, 남달리 고지식한 그의 성정으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누구의 일이라도 앞장서서 도와주는 식과는 달리, 정작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히는 식은 견딜 수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폰개 성이 예전의 전자회사에 복직하게 된 것은 우연하게 그의 어려운 형편을 전해들은 사장의 배려에서였다. 사장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그를 총무과장 자리에 다시 앉혔다. 그리고 그후 몇년이 지나지 않아 회사가 확대 개편되는 과정에서, 사장은 그를 총무부장 자리까지 끌어올렸다. 그때까지도 사장은 여전히 그에게 출퇴근 때의 운전기사 노릇을 맡기고 있었다.

폰개 성의 총무부장 승진 소식을 들은 내가 기쁜 나머지 농담을 했다.

“도대체 사장이 그토록 폰개 성을 신임하는 비결이 뭐요? 혹시 남달리 아부를 잘하는 거요, 아니면 뇌물을 잘 쓰는 거요?”

“동생도 알다시피 내가 남보다 잘하는 거이 뭐이겄는가? 남들보다 많이 배웠는가? 남들보다 말을 잘하는가? 그렇다고 남들보다 돈이 많은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거이 있어야 아부라도 하든지 뇌물이라도 바치든지 하제. 만약에 그런 나한테도 재주가 딱 한가지 있다면, 남의 돈은 단돈 일원도 넘보지 않는다는 것뿐이네.”

폰개 성은 바로 총부부장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일에 분주한 와중에도 불구하고 직접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거두절미한 채 다짜고짜 말했다.

“동생이 바쁜 지 알면서도 부탁허네. 나한테 이틀만 시간 좀 내줘야 쓰겄네. 아무 말 말고 나를 따라나서게. 긴히 갈 데가 있네.”

폰개 성의 기세로 보아서는 막상 내가 거절을 해도 억지로라도 끌고 갈 눈치였다. 그가 전에 없이 거세게 나오는 바람에, 나는 나를 데려가는 곳이 어딘지, 그리고 무슨 이유 때문인지 따위를 따져묻지도 못하고 말았다. 하릴없이 그를 따라 전라선 밤열차를 타면서, 나는 그의 억지로 밀어붙이는 기세보다는 뭔가 거부할 수 없는 완강한 힘에라도 휘말려들고 만 기분이었다.

밤새도록 달린 열차가 아침에 정거장에 우리를 내려놓자, 폰개 성은 플랫폼에서 비로소 나를 데려온 이유를 밝혔다.

“나한테는 셋째 작은어머니시고 자네한테는 또 한분의 어머님이기도 하신 분이 지금 세상을 뜨려 하고 계시네. 돌아가신 셋째 작은아버님에 대한 자네의 심정이 남달리 복잡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네. 복잡하기는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 분에 대한 심정도 마찬가지일 거이네. 물론 자네의 이복형제들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러듯이 가문이라거나 피붙이에 대한 자네의 유달리 냉담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도 아니네. 어쨌든 그런 것들이 자네 입장에서는 단지 상처로만 여겨질 테니까 말이네. 허지만 가문이나 피붙이가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오로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거이네. 주제넘을지 모르지만 나는 바로 자네에게 그걸 가르쳐주고 싶어서 이번에 자네를 데리고 온 거이네.”

폰개 성이 나에게 만나기를 강요하고 있는 이는 이를테면 내 생부의 본부인인 셈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나로서는 먼데서 들려오는 풍문처럼 얼핏얼핏 생부 집안의 일들을 전해들었을 뿐, 그렇게 막연히 세 명인가 되는 이복형제들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 그러나 살아생전에 생부 집안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있으리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적막한 관계였다. 그는 흘끔 내 기색을 살피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도 자네는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닌가? 만약에 자네가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라면 구태여 자네를 여기까지 데려오지도 않았을 거이네. 자네가 이번 기회마저 놓친다면, 자네는 세상을 살아내면서 가문이나 피붙이에 대해서는 끝까지 부정적으로만 생각하고 말 것 같아서였네. 나같이 못 배운 사람 생각에도, 좋은 작가라면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없애야 되는 거이 아닌가? 자, 아무 말 말고 작은어머님을 만나세. 어쨌거나 지금으로서는 살아계신 피붙이로는 자네에게 유일한 어른인 셈이네. 제발 부탁하건대, 돌아가시기 전에 얼굴이라도 뵙게나.”

나는 한동안 폰개 성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문득 그를 따라 밤열차를 탈 때 느꼈던 어떤 완강한 힘의 정체라도 발견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나에게는 그가 갑자기 나의 키를 훨씬 넘어서는 무슨 거인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나는 흡사 자포자기라도 하는 심정으로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까짓것, 그럽시다. 별별 일 다 겪은 이 나이에, 나를 세상에 있게 해준 양반의 색시 얼굴 한번 보는 것이 뭐 대수겠소.”

“고맙네.”

고백하자면, 나는 폰개 성이 내 주변을 얼쩡대며 나에게 가문의 영광 운운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난감한 한편으로 은근히 업수이 여기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가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삶의 어떤 정체성을 다름아닌 나에게서 찾고 있다는 식이었다. 그런 그가 오늘처럼 오히려 나의 키를 훨씬 뛰어넘는 거인으로까지 여겨지는 날이 오리라고는,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폰개 성이 작지만 그런대로 아담한 시골집으로 들어서서 안방의 방문을 열었다. 그는 방을 들어서며 마지막 쐐기라도 박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자, 어서 들어와 어머님을 뵙게.”

이윽고 나는 이른바 ‘어머님’이라는 이를 보았다. 풍을 맞은 지가 벌써 몇달이 넘어, 서거나 앉기는커녕 말도 못한다는 그녀는 이미 절반쯤은 시체가 된 형상으로 아랫목에서 이불에 덮여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그녀에게 절을 했다. 그러자 폰개 성이 시늉인 듯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작은어머님, 이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겄소?”

폰개 성의 질문에 지금껏 나를 향해 두 눈만 커다랗게 치뜨고 있던 ‘어머님’이 불쑥 입을 열었다.

“내, 내, 아들인디, 나가 왜 몰라!”

그러자 어느새 몰려와 방문 밖에서 기웃거리고 있던 동네 아낙네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오메, 용반떡이 말을 다 하네. 시상에, 자석이 왔다고, 시방까장 닫-던 입이 열려뿐구만잉. 이녁 배를 앓음시롱 낳은 자석은 아니라제만 그래도 자석은 자석인 모냥이네.”

한 세기가 저물어가는 연말이었다. 오랜만에 폰개 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동생, 어쩐가? 오늘 별일이 없으면 내 집에 오지 않을 텐가?”

“아니,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별일은 아니고, 내가 얼마 전에 김포 쪽에 작은 아파트 하나를 마련해서 이사를 했네. 그래서 겸사겸사 저녁이나 함께헐라고 그러네.”

“그럼 집들이인 셈이요?”

“허허, 그런 셈인가?”

“폰개 성, 참말로 축하하요. 긍께 다시 집을 마련한 거이 도대체 얼마 만이다요?”

어떤 감격 때문에 나는 그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평소에는 아예 잊고 지냈던 전라도 사투리를 거침없이 쓰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폰개 성은 도곡동의 열평짜리 아파트를 날려버린 후 십년이 훨씬 넘도록 안양 변두리의 방 두칸짜리 반지하 셋방에서 지낸 셈이었다. 그는 거기에서 네 자녀들을 모두 길러 대학을 졸업시키고, 그중에 큰아이는 결혼까지 시켰다.

내가 김포 변두리에 있는 폰개 성의 서른한평짜리 아파트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일가붙이들이 몰려와 있었다. 거기에는 폰개 성 일가를 비롯하여 사촌형제들은 물론이며 바로 나의 이복형제들까지도 끼여 있었다. 나는 그들 모두와 기꺼이 인사를 나누었다. 이른바 나의 또 한분의 어머니가 죽은 것을 계기로 나는 이미 이복형제들과 서로 자연스럽게 오가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저녁을 먹고 잠시 차를 나누는 자리에서, 폰개 성이 짐짓 지나치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사실은 내가 얼마 전에 회사에서 이사가 되었네.”

“이사요?”

“그렇네. 이사라지만, 뭐 별건 아니네. 부장으로 있으면 내가 내년으로 정년퇴직을 하게 되니까, 사장님께서 한 삼년 더 일한 다음에 나가라면서 슬그머니 올려준 자릴세. 사장님의 말씀이 그래서 할 수 없이 따랐지만 어쩐지 내가 앉아서는 안될 자리에 앉은 것같이 회사 안의 다른 사람들에게 그만 누를 끼치고 만 심정일세.”

폰개 성은 씁쓸한 뒷웃음을 남기고는 문득 말머리를 돌렸다.

“자네는 자유업이니까 잘 모르겠지만, 얼마 전부터 회사마다 국민연금제도라는 것이 시행되고 있네. 총무부에 있으면서 이 제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없는 사람들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돕는 제도치고, 이 국민연금처럼 좋은 제도가 다시 없더란 말이시. 그런디 자영업자나 젊은이들 쪽에서는 별로 이 제도를 좋아하들 않더구만. 그래서 나름대로 궁리 끝에, 내가 정년퇴직을 하면 받을 연금 중에서 그동안 회사에서 부담해온 금액 전부를 기금에 보태기로 했네. 어떻게 보면, 내가 분수도 모르고 이런 생뚱맞은 마음을 묵게 된 것에는 다 늙도록 회사에 남게 된 부끄러움도 없지는 않을 거이네.”

이야기 끝에 폰개 성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모두 거실로 모이게 했다. 그리고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왕에 우리 일가들이 모인 자리니까, 이걸 계기로 뭐랄까, 한 집안의 종손으로 평소부터 지녀왔던 몇가지 생각을 밝혀야 쓰겄구먼. 모두 알다시피 나야 배움도 없고, 돈도 없이, 이제야 겨우 늘그막에 살아낼 집 한칸 마련한 못난 사람일 뿐이네. 그러듯이 평생에 단 한번도 우리 가문에 빛을 내본 적이 없네. 그런 사람이 입이 열 개인들 무슨 할 말이 있을까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몇가지 생각만은 없지 않었네.”

폰개 성은 말을 중단하고, 무심코 부인이며 아이들 쪽을 바라보았다.

“내 식솔들에게는 미리 말해두었지만, 이 자리에서 다짐을 하는 의미에서 다시 한번 밝히겠네. 우선 내가 죽은 다음에도 자식들에게 내 유산을 단 한푼도 남기지 않을 거이네. 그리고 내 시신은 안구며 쓸 만한 장기들은 필요한 사람에게 기증을 한 다음에 화장을 하라는 것이네. 정히 뭔가 하고 싶다면 고향 동네의 뒷산에 추념수(追念樹) 비슷하게 나무나 한 그루 심으면 되네. 일가들 중에서 다른 사람들도 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얼마든지 하라는 의미에서 동네 뒷산에 몇평 안되는 땅이지만 미리 마련해두었네.”

아직도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폰개 성을 바라보며, 나는 또다시 그가 무슨 거인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가 추념수 운운한 탓일까, 그 거인은 이번에는 내 키만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이 사회에서 기왕에 이름을 떨친 내로라 하는 모든 사람들 위에 우뚝 솟은 채, 마치 커다란 거목이라도 되듯이 그들마저 한아름에 모두 껴앉는 자세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폰개 성 가문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자랑스러웠다. 그러자 어느 순간 내가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자칫 부옇게 무슨 이내 같은 것이라도 끼는 듯한 느낌이어서 나는 황급히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나의 눈길은 무심코 거실의 커다란 통유리창에 머물렀다. 이미 캄캄한 어둠이 가득히 들어찬 통유리창 속에는 일망무제로 펼쳐진 김포벌판 멀리 자연 마을의 불빛들이 점점이 붙박여 있었다.

내가 무심코 통유리창의 밤풍경을 바라보고 있자, 이번에는 밤풍경 속의 캄캄한 어둠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 뿌옇게 이내가 낀 채 비쳐왔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겹쳐, 문득 저 까마득한 어린 시절 의부에게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던 어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오냐, 때레쥑에라. 나가 이녁 손에 죽으먼 죽었제, 한나밖에 없는 내 새끼를 근본도 모르는 장갓 쌍것으로 맨들 수는 없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