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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인종차별주의, 근대의 쌍생아

오스트리아 새 정부의 출범을 지켜보며

 

이매뉴얼 월러스틴 Immanuel Wallerstein

뉴욕주립 빙엄튼대학 사회학 교수 겸 페르낭 브로델 쎈터 소장. 1930년생. 속간중인 『근대 세계체제』(1〜3권 간행)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유토피스틱스』 등 수많은 저서와 논문이 있고, 본지에도 103호 특별대담 「21세기의 시련과 역사적 선택」에 참여한 것을 비롯하여 「유럽중심주의와 그 화신들」 등의 글을 발표했다.

 

 


□ 편집자 주

이 글은 월러스틴이 2000년 3월 9일 빈대학에서 행한 강연 원고이다. 이 강연의 직접적인 계기는 외르크 하이더가 이끄는 인종차별주의 경향의 오스트리아자유당이 선거에서 예상외의 높은 득표를 하여 새 정부에 참여하게 된 사건이다. 월러스틴은 이 사건을 실마리로 삼아 서구 인종차별주의의 역사적 뿌리와 그 현상형태를 4개의 시간틀로 나누어 추적하는 한편 이에 어떤 대응도 하지 못한 사회과학의 책임을 묻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종차별주의는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함께 탄생하여 그 구성적 일부를 이루기 때문에 향후 좀더 나은 세계체제를 창조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과 사회체제 깊숙한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인종차별주의에 저항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이 강연은 월러스틴의 투철한 역사인식, 예리한 분석력, 그리고 사회과학자로서의 높은 도덕적 책임감을 잘 보여준다. 이 강연은 ‘쓸모없는 것의 필요성에 관하여─사회과학과 사회’(Von der Notwendigkeit des Überflüssigen─Sozialwissenschaften und Gesellschaft)라는 빈대학의 강연씨리즈 가운데 하나였으며, 원제는 ‘인종차별주의의 앨버트로스: 사회과학, 외르크 하이더, 그리고 저항운동’(The Racist Albatross: Social Science, Jörg Haider, and Widerstand)이다. 원문은 페르낭 브로델 쎈터의 홈페이지 논문란(http://fbc.binghamton.edu/iwvienna.htm)에서 받아볼 수 있다.


 

 

“당신을 그토록 괴롭히는 마귀들로부터

신이 당신을 구원하기를, 늙은 뱃사람이여!─

왜 그런 표정을 짓소?”─“석궁(石弓)으로

내가 앨버트로스를 쏘았다오.”

─S.M. 코울리지 『늙은 뱃사람의 노래』 79〜82행

 

 

코울리지(Samuel Taylor Coleridge)의 시에서 배 한척이 강한 바람에 휘말려 길을 잃고 불순한 기후대로 들어갔다. 선원들의 유일한 위안은 양식을 얻어먹으러 찾아온 앨버트로스(신천옹)였다. 그러나 코울리지의 뱃사람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어쩌면 순전히 오만 때문에─이 새를 쏘았다. 그 결과 배에 탄 모든 이들이 고난을 겪었다. 신들은 이 악행을 벌주었고, 다른 선원들은 그 뱃사람의 목에 앨버트로스를 매달았다. 우정의 상징인 앨버트로스는 이제 죄의식과 치욕의 상징이 되었다. 그 뱃사람은 그 항해의 유일한 생존자였지만, 여생을 자기가 한 짓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보냈다. 살아 있는 앨버트로스는 낯설고 머나먼 땅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연 타자(他者)이다. 우리의 목에 걸려 있는 죽은 앨버트로스는 우리가 물려받은 오만의 유산, 즉 우리의 인종차별주의이다. 우리는 이것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어, 평화를 얻지 못한다.

나더러 빈에 와서 ‘이행의 시대에서의 사회과학’에 관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있은 지 1년 이상이 지났다. 내 강연은 ‘쓸모없는 것의 필요성에 관하여─사회과학과 사회’라는 제목의 씨리즈 가운데 들어갈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나는 세계 사회과학의 건설에, 특히 ‘꿈과 현실’의 시대라는 1870〜1930년(10년 전쯤에 빈에서 1870〜1930년의 빈 문화를 회고하는, ‘꿈과 현실’이라는 이름의 유명한 전시회가 열렸다─옮긴이)에 영광스런 역할을 맡았던 그 빈에 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빈은 내가 20세기 사회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믿는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본거지였다. 적어도 그가 말년에 나찌의 강압 때문에 런던으로 도망치기 전까지는 빈이 그의 터전이었다. 또한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와 폴라니(Karl Polanyi)도 그들 생애의 중요한 한 시기에는 빈이 터전이었다. 현저하게 반대되는 정치적 견해를 지닌 이 두 사람은 비록 합당한 인정과 찬양은  받지 못했지만, 내 생각으로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정치경제학자들이었다. 그리고 빈은 내 은사인 파울 라짜르스펠트(Paul Lazarsfeld)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는 마리 야호다(Marie Jahoda)와 한스 짜이젤(Hans Zeisel)과의 공동연구서인 『마리언탈의 실업(失業)』(Arbeitlösen von Marienthal)에서 처음으로 정책지향 연구와 선구적인 방법론상의 혁신을 결합했다. 내가 오기로 한 곳은 바로 이런 빈이었다.

그런 가운데 아시다시피 지난번의 오스트리아 선거가 있었고, 오스트리아자유당(FPÖ)의 정부 참여라는 전혀 불가피하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유럽연합(EU)의 다른 국가들은 이런 정권의 변화에 강력히 반응하였고, 오스트리아와의 쌍무관계를 중지했다. 나는 그래도 와야 할지 숙고했고, 망설였다. 내가 오늘 여기에 와 있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나는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대단히 가시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낸 ‘다른 오스트리아’에 대한 나의 연대를 확실히해두고 싶었다. 그러나 둘째로, 더욱 중요한 것은, 나는 사회과학자로서 나 자신의 책임을 지려고 왔다. 우리는 모두 앨버트로스를 쏘았고, 앨버트로스는 우리 모두의 목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다하여 회개하고 재건하여, 다른 종류의 역사적인 체제, 즉 근대세계를 그토록 심하게 그토록 악랄하게 괴롭힌 인종차별주의를 넘어설 체제를 창조하기 위해 고투해야 한다. 이런 연유로 나는 내 강연의 제목을 새로 붙였다. 새 제목은 ‘인종차별주의의 앨버트로스: 사회과학, 외르크 하이더, 그리고 저항운동’이다.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일들은 표면적으로는 아주 단순해 보인다. 여러 대의 의회를 거치는 동안, 오스트리아는 두 개의 주요 기간정당, 즉 오스트리아사회민주당(SPÖ)과 오스트리아인민당(ÖVP)의 거국적 연정에 의해 통치되었다. 전자는 중도좌익이고, 후자는 중도우익이며 기독교민주주의 정당이었다. 한때는 압도적이었던 이 두 정당의 연합 득표수는 1990년대를 거치면서 하락했다. 그러다가 1999년 선거에서 자유당이 처음으로 득표에서 2위로 부상함으로써 겨우 몇백 표 차이이긴 하지만 인민당을 앞질렀다. 그후 다시 한번 거국적인 연정 구성을 놓고 두 주류정당간에 벌어진 논의가 실패로 돌아가자, 인민당은 연정 상대로 자유당에게 눈을 돌렸다. 인민당의 이 결정은 클레스틸(T. Klestil) 대통령을 포함한 오스트리아 내의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샀다. 그러나 인민당은 끝까지 밀어붙였고, 그 결과 새 정부가 구성되었다.

이 결정에 다른 유럽연합 국가의 정치지도자들도 반발했는데, 놀라기도 했다는 점을 덧붙여야겠다. 그들은 오스트리아와의 쌍무관계를 중단하기로 집단적으로 결정했으며, 이런 조치의 적절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적잖게 있었음에도 유럽연합은 이 입장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유럽연합의 이런 행동이 이번에는 많은 오스트리아인들의 반발을 샀는데, 여기에는 현정부의 구성을 지지한 사람뿐만 아니라 반대한 사람도 다수 포함된다. 후자 중 다수는 유럽연합이 자유당의 정부 참여에서 기인하는 위험들을 과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이더는 히틀러가 아니다”라는 것이 이 입장의 통상적인 공식이었다. 그밖의 사람들은 하이더 같은 사람들을 유럽연합의 모든 국가에서, 심지어 어느정도는 그들의 정부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유럽연합이 그같은 행동을 취하는 것은 위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일부 오스트리아인들은 (일부 다른 유럽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유럽연합이 취할 적절한 행동이란 좀더 두고보는 것이며, 만약 오스트리아의 새 정부가 기어코 뭔가 비난할 만한 짓을 한다면, 그때 비로소 제재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는 동안 오스트리아 자체 내에서 ‘저항운동’이 출범하였고, 이것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

내가 분석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정당으로서의 자유당과 그것이 표방하는 바가 아니라, 이 정당의 오스트리아 정부 참여에 대한 유럽연합의 강경한 반응과 이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대응반응 및 저항운동이다. 이런 반응이나 대응반응이란 모두, 우리가 분석의 촛점을 오스트리아 그 자체로부터 전체로서의 세계체제, 이 체제의 현실, 그리고 사회과학자들이 이 현실에 관해 지금까지 우리한테 해온 이야기로 이동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이런 좀더 큰 맥락을 4개의 시간틀─즉 1989년 이래의 근대 세계체제, 1945년 이래의 근대 세계체제, 1492년 이래의 근대 세계체제, 그리고 2000년 이후의 근대 세계체제─속에서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이것들은 물론 상징적인 날짜지만, 이 경우 상징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 덕분에 현실과 현실의 인식을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업을 통해 내가 오스트리아의 저항운동에 연대를 표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또 사회과학자로서의 나 자신의 도덕적·지적 책임을 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1. 1989년 이래의 세계체제

 

1989년에 이른바 사회주의 블록의 국가들이 붕괴되었다. 브레즈네프 독트린(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얄따협정)의 견제를 받아오던 중·동부 유럽의 나라들이 사실상 소련으로부터의 정치적 자율성을 내세웠고, 곧 저마다 자국의 레닌주의체제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2년이 안되어 소련공산당 자체가 해체되었고, 실로 쏘비에뜨사회주의연방(USSR)이 15개의 구성 단위로 쪼개졌다. 동아시아와 꾸바에서는 공산주의국가의 행로가 달랐다고 하지만, 이 때문에 동유럽사태가 세계체제의 지정학에 초래한 결과가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1989년 이래, 이들 예전의 공산주의 나라에 세계적 이목이 많이 집중되었다. 이른바 ‘이행’에 관한 사회과학자들의 학술회의가 끝없이 이어져, 이제는 ‘이행학’(transitology)을 들먹이기까지 한다. 이전에 유고슬라비아연방공화국을 구성하던 지역과 소련의 꼬까서스 지역에서는 상당수의 아주 고약한 내전이 있었는데, 몇몇 경우에는 외부의 강국들이 적극적으로 참전하였다. 많은 사회과학자들은 이런 폭력을 ‘종족정화’와 같은 표제 아래 분석하였는데, 이 현상이 장기간 지속된 종족간 적대행위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심지어는 심각한 내부폭력에까지는 이르지 않은 체코공화국, 헝가리, 그리고 발트해 연안국과 같은 국가에서조차, 종족간 긴장이 되살아날 조짐을 일러주는 불쾌한 일들이 일어났다. 이와 동시에 가장 명백한 경우만 꼽아도, 비슷한 성격의 내전이, 저강도 내전뿐 아니라 전면적인 내전이 인도네시아는 물론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줄곧 일어났다.

이런 내전에 대해 범유럽세계(나는 이 용어를 서유럽에다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럴레이저〔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및 그 부근의 남태평양 섬들─옮긴이〕를 추가하되 중·동부 유럽은 제외한 지역의 뜻으로 사용하겠다)에서 진행된 분석의 핵심은 이 국가들은 시민사회가 취약할 것이며 역사적으로 인권에 대한 관심의 수준이 낮을 것이라는 데 있었다. 서유럽의 신문을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공산주의 이후’의 세계라고 불리는 이 시대에 예전 공산주의 지역들에 대한 관심이 사실은 얼마나 ‘문제’에 촛점을 맞춘 것인지를 놓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문제’란 것이 사실상 이 지역들에서는 범유럽세계에서 발견되리라고 짐작되는 높은 수준의 근대성이 부재하다는 사실로 정의된다.

한편 1989년 이래 범유럽세계 자체에서 무엇이 변했는지에 대한 관심─언론, 정치가들, 그리고 특히 사회과학자들의 관심─이 얼마나 미미했는가는 이 못지않게 눈에 띄는 일이다. ‘냉전’에 휘말려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국가적 논리를 구축했던 정권들은 자기들이 40년간 유지해온 합의가 이제는 유권자한테나 정치인 자신들한테나 무의미하게 보인다는 것을 갑자기 발견한 것이다. 냉전이 없다면 이딸리아에서 영원한 다수당인 기독교민주당을 중심으로 5당체제(그리고 그에 따른 뇌물정치)를 구축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이제 프랑스의 드골 정당이나 심지어 독일의 기독교민주연합을 지탱해주는 것이 무엇이 있느냐? 미국의 공화당이 왜 ‘초당적인 외교정책’이라는 속박에 계속 묶여 있어야 하는가? 이런 식의 자기의심의 결과로서, 범유럽세계의 주요 보수정당들이 새로운 극단적 경제자유주의와 이보다는 좀더 사회적인 보수주의─국가가 시민의 타락한 도덕성을 바로잡기를 바라는 보수주의든,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온정주의적 관심을 그나마 아직 지니고 있는 보수주의든─사이의 분란으로 마구 찢겨 무너지고 있다. 그리고 당내의 파벌들이 이렇게 서로 싸우는 가운데서 지지자들은 이런 분규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현재 누리는 사회적 지위와 수입이 심각하게 위협받을까봐 두려워한다.

그렇다면, 대체로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내세우는 중도좌익의 정당은 어떠한가? 이런 정당 역시 곤경에 처해 있다. 사실 공산권의 붕괴는 구좌익의 세 가지 주요 형태들─공산당·사회민주당·민족해방운동─모두에 대한 환멸, 1968년 세계혁명이 극적으로 알려준 환멸이 확산되어 절정에 이른 결과였을 따름이다. 이 환멸은 바로 이 운동들의 정치적 성공의 결과, 즉 이 운동들이 세계 곳곳에서 국가권력을 쟁취한 결과였는데, 이는 그렇게 역설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단 집권을 하자 이 운동들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자신들의 공약을, 국가권력을 쟁취하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고 또 건설하고 말겠다는 공약을, 즉 사회를 좀더 평등주의적이고 좀더 민주적인 세계의 방향으로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공약을 끝까지 실천할 능력이 사실은 없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서유럽에서 구좌익이란 일차적으로 사회민주당을 뜻했다. 그런데 1968년부터 이미 그랬지만 1989년 이후에 좀더 확실하게 나타나는 사태는 사람들이 차선책으로 사회민주당에 표를 던질 수는 있어도 이 당이 선거에서 승리할 때 어느 누구도 거리에 나와 춤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도 사회민주당이 혁명을, 심지어 무혈혁명이라도 일으키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환멸을 가장 많이 느끼는 사람들은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이니, 이들은 ‘중도세력’이라는 중도주의의 언어를 구사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러나 구좌익 정당 내의 이런 환멸과 함께 국가구조 자체로부터의 일탈이 일어났다. 예전에는 주민들이 국가를 관대하게 대했고 심지어는 잠재적인 사회변혁 기구로 칭송하기까지 했다. 이제 국가는 무엇보다 부패와 불필요한 강제력을 사용하는 기구로, 더이상 시민의 보루가 아니라 시민의 짐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 서술에서 오스트리아가 일반적인 범유럽적 유형의 또하나의 예에 불과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 이후’ 시대에 무엇 때문에 거국적 연정을 하는가? 그리고 주된 관심이 연정 내의 세력비율에 있는 듯한 정당들을 애당초 왜 찍어주는가? 이런 맥락에서 자유당은 1999년 10월 3일 26.9%를 득표한 것이다. 이는 확실히 1945년 이래 유럽을 통틀어 극우정당이 달성한 득표율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이다. 1995년 프랑스에서 르뺑(Le Pen)의 국민전선(Front National)이 15.1%를 얻었는데, 이것이 이미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두 개의 주요 보수정당이 국민전선의 지지는 어떤 차원에서도 거절하겠다고 역설하였다. 그런데 1998년 지역선거에서 보수정당들이 많은 지역에서 국민전선의 간판을 걸고 당선된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야만 다수파를 구성할 수 있는 결과가 나왔을 때, 지역 지도자 5명은 이런 지시를 무시하고 지역정부를 장악하기 위해 국민전선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이들 지역 지도자들은 양대 보수주의 전국정당인 공화국연합(RPR)과 공화국민주연합(UDR)으로부터 즉시 제명당했다. 한편 이딸리아에서는 베를루스꼬니(S. Berlusconi)가 피니(G. Fini)와 그의 국민동맹(Alianza Nazionale)의 지원으로 정부를 구성했다. 국민동맹은 하이더의 자유당과 유사한 정당이었지만 피니가 선거에 앞서 이 당의 신파시스트적 과거와의 절연을 명확하게 선언했다는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다수의 오스트리아인이 주장하듯 왜 유럽연합은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일을 두고 그토록 강경한 입장을 취한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사실은 아주 간단하다. 유럽연합의 나라들은 바로 자기들이 오스트리아와 그렇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모두 두려웠던 것이다. 이 나라들은 가까운 미래에 오스트리아와 유사한 선택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오스트리아자유당의 길을 따르고 싶은 유혹을 똑같이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두려웠던 것이다. 유럽연합의 강경한 반응을 끌어낸 것은 바로 자신들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런가 하면 오스트리아인들은, 자신들이 모든 서유럽 국가가─1999년이 아니라 1945년에─자발적으로 설정한 선을 실제로 넘어버렸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오스트리아측의 반발은 이런 몰이해 때문이다. 여기서 내 입장을 아주 분명히 밝혀두어야겠다. 나는 오스트리아와의 쌍무관계를 중단한 유럽연합의 결정에 찬성한다. 유럽연합이 이런 결정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서유럽을 갈가리 찢어놓을지 모르는 실로 엄청난 이데올로기의 급류에 휩싸여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럽연합의 결정에 상당한 위선, 아니 상당한 자기기만이 담겨 있다는 데도 역시 동의한다. 왜 그러한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1989년 이래가 아니라 1945년 이래의 세계체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에 앞서 1989년 이래의 세계 사회과학계에 관해 한마디 더 해야겠다. 사회과학계는 통탄할 지경이었으니까 말이다. 모두들, 그것도 정치적 성향과 거의 관계없이, 들먹이는 것이 ‘지구화’뿐이니 마치 이것이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듯한데, 기실 이것은 국경을 가로지르는 유통을 어느 정도까지 풀어놓을지를 놓고 자본주의 세계경제 내에서 계속되는 논쟁에서 한시적으로 사용되는 수사적 장치일 따름이다. 지구화는 우리의 시야를 흐리는 티끌인 것이다. ‘종족간 폭력’을 끝없이 되뇌는 것도 역시 그러하며, 여기에는 사회과학자들뿐 아니라 인권운동가들도 책임이 있다. 종족폭력이 끔찍하고 무서운 현실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운이 나쁜, 덜 현명하고 덜 문명화된 어떤 타자들한테만 관련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는 우리 세계체제 내의 깊숙한 곳에서 자라나는 불평등이 낳은 지극히 정상적인 결과이며, 그런만큼 불순하고 낙후된 사람들이 통제하는 지역에 대한 순수하고 선진적인 사람들의 도덕적 훈계나 간섭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세계 사회과학계는 1989년 이래의 세계체제에서 일어나는 일을 분석할 유용한 도구를, 따라서 현재의 오스트리아 현실을 이해할 유용한 도구를 전혀 제공하지 못한 것이다.

 

 

2. 1945년 이래의 세계체제  

 

1945년에 나찌의 경험과 나찌의 만행은 끝났다. 히틀러가 반유태주의를 발명한 것도, 독일인들이 그것을 발명한 것도 아니다. 반유태주의는 오래 전부터 유럽세계의 뿌리깊은 인종차별주의를 드러내는 유럽 내부의 주요한 표현이었고, 근대적 형태의 반유태주의도 유럽 현지에선 적어도 한 세기 동안 풍토병처럼 만연했다. 이 점에서 1900년 당시의, 빠리와 베를린을 비교하면 어느 누구도 베를린이 최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활발한 반유태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던 곳은 어디에도 없었으니, 심지어 2차대전중에도, 심지어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1945년 이후에도 왜 나찌즘에 그토록 반발하는가? 대답이 워낙 눈에 띄기 때문에 놓칠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최종 해결책’(Endlösung, 히틀러의 유태인 말살정책을 가리킴—옮긴이) 때문이었다. 범유럽세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1945년 이전에는 공공연히 그리고 즐거이 인종차별적이고 반유태주의적인 언행을 했지만, 그렇다고 최종 해결책이라는 결과를 의도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히틀러의 최종 해결책이란 자본주의 세계경제 내의 인종차별주의의 핵심요지를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인종차별주의의 목적은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인종차별주의의 목적은 사람들을 체제 내에 붙들어두되, ‘하급인간’으로 대하여 경제적으로 착취할 수 있고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써먹을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나찌즘의 경우에 벌어진 일은 프랑스인들이 ‘차질’(dérapage)이라고 부르는 것, 즉 실책, 미끄러짐, 통제력 상실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마귀’가 상자 속에서 빠져나온 것인지도 몰랐다.

인종차별은 최종 해결책 직전까지 바싹 다가갈 수는 있지만 그 이상 나아가면 안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언제나 미묘한 게임이었기에 이전에도 분명 미끄러지는 실수는 있었지만, 결코 이렇게 거대한 규모로는, 결코 세계체제의 이처럼 중심적인 무대에서는, 그리고 결단코 이렇게 가시적으로는 일어난 적이 없었다. 1945년 유태인수용소에 들어간 연합군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정말로 경악했다. 그리고 집단적으로는 범유럽세계가 상자 속에서 탈출한 ‘마귀’를 처리하는 데 성공했다. 범유럽세계는 인종차별주의의 공적인 사용을, 특히 반유태주의의 공적인 사용을 금지하는 과정을 통해 이 일을 이뤄냈다. 인종차별주의는 금기의 언어가 된 것이다.

사회과학자들이 이 게임에 동참했다. 1945년 이후 수년 동안 사회과학자들은 인종 개념이 유의미하다는 주장을 비난하거나1 현행 사회적 척도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집단의 차이를 선천적인 유전적 특징에까지 추적하여 해명할 수 있다는 가설의 부당성을 비난하는 책을 연달아 써냈다. 유태인 대학살의 기억이 학교 교과과정의 내용이 되었다. 독일인은 처음에는 마지못해 했으나, 결국에는 적잖은 도덕적 용기를 발휘하여 그들 자신의 죄를 분석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치욕을 덜어내고자 애썼다. 그리고 1989년 이후에는 범유럽세계의 다른 나라들도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독일과 같은 자기반성을 수행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같은 연합국측의 국가도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기 시작했는데, 그 죄란 이런 차질이 일어나게 허용한 죄이며, 그들의 시민들 가운데 적어도 몇몇은 그 과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죄였다. 유럽연합이 하이더에게 그토록 강하게 반발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하나의 나라로서 오스트리아가 자기 죄의 몫을 떠맡기를 거부했다는 점이며, 자기들이 일차적으로 희생자라고 고집을 피운 점이다. 어쩌면 과반수의 오스트리아인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을 바라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히틀러에게 환호하는 빈의 군중을 찍은 뉴스영화를 보면 이를 좀처럼 알기 어렵다. 그러나 더욱 핵심을 찌르는 것은 합병 이후의 제3제국에서는 오스트리아인 가운데 유태인이나 집시가 아닌 사람은 모두 독일인으로 간주되었으며 대다수가 이 사실에 의기양양했다는 것이다.

인종차별주의가 지나치게 멀리 나아감으로써 망했다는 이런 깨달음은 1945년 이후의 범유럽세계에 두 가지 주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 이 나라들은 인종차별적인 억압에 물들지 않은 인종통합적인 나라로서, 소련이라는 ‘사악한 제국’과 맞서는 자유의 나라로서 자국의 미덕을 강조하고자 했으니, 그 바람에 이번에는 소련의 인종차별주의가 서구 선전전의 단골 주제가 되었다. 이런 시도로부터 온갖 종류의 사회·정치적인 행동이 유래하였다. 인종분리를 불법으로 규정한 1954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결정, 범유럽세계의 모든 나라들의 친이스라엘 정책, 심지어 서양 기독교세계 내에서 교파를 초월한 세계교회주의(ecumenicism)를 새롭게 강조한 것 등이 그것이다(유태교와 기독교 공동의 유산 같은 것이 있었다는 발상의 창안은 물론이고).

둘째, 그러나 첫째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위험요소를 제거한 인종차별주의를 그 본래의 기능으로, 즉 사람들을 체제 내에 붙들어두되 하급인간으로 묶어두는 기능으로 되돌릴 필요가 있었다. 이제 유태인들이나 프로테스탄트 국가의 가톨릭교도들을 이런 식으로 취급할 수 없어졌다면, 좀더 시야를 넓혀서 다른 집단을 찾아볼 필요가 생겨난 것이었다. 1945년 이후 시기는, 적어도 처음에는 엄청난 경제적 팽창과 동시에 인구상의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으니, 범유럽세계의 출생률이 급격히 감소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 세계는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을 필요로 했으나, 어느 때보다 적게 노동자들을 배출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독일인들이 ‘손님노동자’(Gastarbeitern, 현재는 외국인노동자라는 뜻으로 정착되었음─옮긴이)라고 조심스레 부르는 인간들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들 외국인노동자는 누구였는가? 비(非)지중해지역 유럽에 온 지중해지역 민족, 북아메리카 내의 라틴아메리카인과 아시아인,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의 서인도제도 사람, 유럽의 아프리카 흑인과 남아시아인이었다. 그리고 1989년 이래로는 예전의 사회주의권에서 서유럽에 온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이 모든 이민들이 무더기로 몰려온 까닭은 그들이 오기를 원했기 때문이며 직장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만, 실은 범유럽 국가들의 번영을 위해서 그들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예외없이—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밑바닥에 위치한 사람들로 왔다.

세계경제가 1970년대에 꼰드라띠예프 장기순환의 B국면(경기하향국면)으로 진입하여 1945년 이후 처음으로 실업이 증가하자, 이민들은 편리한 희생양이 되었다. 1945년 이래 완전히 위법적이고 주변적이던 극우세력들이 갑자기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니, 어떤 때에는 주요 보수정당 내에서, 어떤 때에는 별개의 조직을 꾸려서 등장했다(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보수정당뿐 아니라 중도좌익의 노동자정당의 지지까지 파먹어 들어갔다). 1990년대에 이르러 이런 정당들은 더욱 만만찮게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내가 이미 시사한 대로다.

아주 노골적이든 덜 노골적이든 공공연하게 인종차별주의적인 정당들의 이런 부활을 주류정당들은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확실하게 정하지 못했다. 주류정당들은 ‘마귀’가 다시 한번 병 바깥으로 빠져나와 그들 국가의 사회적 안녕을 깨뜨리지 않는가 하는 공포에 돌연 사로잡힌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극우세력의 반(反)이민 이슈를 자극성이 덜한 온건한 형태로 체제 내로 통합함으로써 이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세력은 되도록 빨리 고립시켜야 하는 바이러스일 뿐이라고 말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지금 이런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니 여러분들은 이 논쟁의 내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도 사회과학자들이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들은 세계체제 전체가 오랫동안 불장난을 계속해왔으며 어디서든 어떤 식으로든 불이 붙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라는 것을 간파하기는커녕, 독일의 역사적 상황이 지닌 어떤 특수성의 관점에서 나찌 현상을 분석하려 들었다. 사회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미덕(이것의 가치는 잠시 후에 살펴보기로 한다)을 천명하려 했고, 1945년 이후 범유럽의 인종차별주의가 사실상 1933년 이전이나 1945년 이전의 그것만큼이나 맹위를 떨쳤음에도 불구하고 범유럽세계의 현재 언사가 인종차별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 세계의 죄를 사하려 들었다. 그들은 곧 증오와 공포의 다른 대상을 찾아낸 것이다. 요사이 우리들은 한 사회과학자가 발명한 개념인 이른바 ‘문명의 충돌’을 놓고 갑론을박하고 있지 않는가?

사실은, 오스트리아에 대한 유럽연합의 비난 자체도 내가 찬성하긴 하지만 인종차별주의의 기미가 있다. 유럽연합이 하는 말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유럽연합은 사실상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더와 같은 사람은 범유럽세계 바깥에서라면, 심지어 어쩌면 헝가리와 슬로베니아 같은 인근 국가에서라면, 있을 수 있고, 어쩌면 정상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명화된 유럽 내부에서 하이더 같은 사람은 허용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우리 유럽인은 우리의 도덕적 우월성을 수호해야 하는데, 오스트리아가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그렇다, 오스트리아가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 우려가 있으니, 오스트리아는 현재의 당치 않은 입장에서 어떤 식으로든 물러서야 한다. 그러나 유럽연합이 제기한 비판의 근거 역시 도덕적 오점의 혐의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서유럽의 보편주의적 가치 그 자체가 범유럽세계의 만성적이고 구조적인 인종차별주의의 두터운 껍질을 둘러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올바로 이해하고, 또한 이것의 가면을 벗기지 못한 사회과학의 실패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1492년 이후의 근대 세계체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3. 1492년 이래의 세계체제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대륙에 상륙하여 이 대륙의 정복을 주장했을 때, 그들은 극히 낯선 토착민족들과 맞닥뜨렸다. 어떤 민족은 아주 단순한 수렵·채집 체제로 조직되어 있었고, 어떤 민족은 복잡하고 정교한 세계제국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양쪽 경우 모두, 이 민족들의 무기나 후천적인 생리학적 면역성(아니 정확히 말하면 면역성의 결핍) 때문에 성공적인 저항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유럽인들은 이 민족들을 어떻게 대할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방대한 토지를 (많은 경우 처음으로) 획득하고서 이 민족들을 가능한 한 신속하게 착취하기를 바라며 토착노동자를 노예화하여 마구 부려먹으려 드는 유럽인들이 있었다. 이런 태도에 대한 그들의 정당화는 토착민족이 야만적이라서 혹독한 노역 외에는 어떤 것도 베풀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의 정복자들이 토착민족에 가한 비인간적인 대우에 강한 혐오감을 느끼면서 토착민족의 영혼을 사로잡아 기독교적 구원을 이룰 가능성과 그것의 중요성을 맹렬히 주장한 기독교 복음주의자도 있었다. 그런 사람 중의 하나가 라스 까싸스(Bartolomé de las Casas)인데, 그의 열정과 전투성은 ‘타자’의 성격에 대한 1550년의 한 유명한 고전적 논쟁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미 1547년에 그는 황제 칼 5세와 그밖의 모든 사람에게 짤막한 개요서를 써서 아메리카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일들을 상당히 자세하게 이야기하는데, 일어난 일들을 이런 식으로 요약한다.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훌륭한 자질의 영혼들을 그토록 많이 죽이고 파괴하였다면, 이는 오로지 금을 얻고, 아주 짧은 시간 내에 엄청난 부자가 되고, 그들의 신분에 걸맞지 않는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였습니다.(…)그들은 〔그토록 겸허하고, 그토록 인내심 있고, 그토록 제압하기 쉬운 이 민족들에게〕 어떤 존경심도 배려도 존중심도 없습니다.(…)그들은 이 민족들을 짐승으로도 대접하지 않았습니다(그들이 이들을 짐승만큼이나 대접하고 이들에게 짐승만큼의 배려라도 해주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들은 이들을 짐승보다 더 못한 것으로, 똥보다 못한 것으로 대했습니다.2

 

라스 까싸스는 분명 이들 민족의 권리를 열렬히 수호한 십자군이었다. 그가 오늘날 신사빠띠스따(neozapatistas)의 본고장인 치아빠스(Chiapas)의 초대 주교였음은 이런 맥락에서 주목할 만한데, 이곳에서는 지금도 라스 까싸스가 거의 500년 전에 수호한 것과 똑같은 대의, 즉 이 토착민족들의 인간적 존엄과 그들의 땅에 대한 권리를 수호할 필요가 여전하다. 이곳의 민족들은 라스 까싸스 시대에 비해 자신들의 처지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니 라스 까싸스를 비롯한 에스빠냐의 신교부철학 신학자·철학자·법관들을 그로티우스(H. Grotius)의 선구자이자 “근대적 인권의 진정한 창시자”로 분류하는 사람들도 있다.3

황제는 처음에는 라스 까싸스의 주장에 끌려 그를 아메리카 인디언의 호민관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생각을 고쳐먹고는 1550년에 발로달리드(Vallodalid)에서 특별 판관회의를 소집하여 이 중대 쟁점에 대하여 라스 까싸스와 황제의 다른 보좌관 가운데 하나인 쎄뿔베다(Juan Ginés de Sepúlveda) 간의 논쟁을 들었다. 라스 까싸스의 강고한 적수인 쎄뿔베다는 라스 까싸스가 반대해온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대우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네 가지 제시했다. 이들은 야만적이며 따라서 좀더 문명화된 민족들에게 예속되는 것이 이들의 자연적인 조건이라는 것. 이들은 우상을 숭배하며 인간을 제물로 삼는 제사를 지내니, 자연법을 어기는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개입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 무고한 생명을 구하기 위한 개입은 정당하다는 것. 개입함으로써 기독교 복음화가 촉진될 것이라는 것. 이런 논리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우리 당대의 것처럼 보인다. 다만 기독교 대신 민주주의를 대입하면 된다.

이 논리에 맞서 라스 까싸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어떤 민족도 문화적으로 열등하다는 추정 때문에 다른 민족에게 강제로 예속당할 수는 없다. 그것이 범죄라는 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 범죄를 물어 한 민족을 벌할 순 없다. 무고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그 과정이 다른 사람에게 더 큰 해를 끼치지 않을 때뿐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칼로써 전파될 수는 없다. 이 논리 역시 믿을 수 없을 만큼 우리 시대의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들한테는 라스 까싸스가 16세기 첫 삼분기에 에스빠냐에서 일어난 최초의 사회적 항의운동을 대변하는 꼬무네로(Comunero, 1520년 까스띠야 왕국의 읍민들이 칼 5세의 부당한 과세에 대항하여 읍단위의 자치권을 수호하기 위해 벌인 운동—옮긴이) 운동의 마지막 참여자로 간주되어 마땅한데, 이 운동은 민주주의적인 동시에 공동체적이기도 했다. 라스 까싸스의 주장에 함축된 뜻은 에스빠냐제국의 기초 자체를 문제삼는 듯했다. 사실 이것이 십중팔구 칼 5세가 라스 까싸스에 대한 초기의 지지를 철회한 이유일 것이다.4 실로 무엇이 야만인인가의 개념에 대한 논의에서 라스 까싸스는 “어느 누구도 지배를 염두에 두고 야만인의 지위를 정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에스빠냐인들에게 자기들이 로마인한테서 받은 대우를 상기시켰다.5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라스 까싸스가 실제로는 ‘좋은’ 식민화의 이론가이며, “엔꼬미엔다(encomienda, 에스빠냐령 아메리카에서 에스빠냐 정복자나 식민자가 토지와 함께 현지에 사는 원주민을 수여받는 제도로 1503년에 제정되었음—옮긴이)에 기초한 식민체제 문제의 대안적인 해결책을 생애 마지막까지 지칠 줄 모르고 제안한” 개혁가일 뿐이라고 주장한다.6

발로달리드 종교회의의 대논쟁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 회의가 무엇을 결정했는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야말로 근대 세계체제를 상징하는 대목이다. 우리가 결정한 적이 있는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가? 반(反)인종차별주의자이자 짓밟힌 사람들의 수호자인 라스 까싸스 역시 ‘좋은’ 식민화를 제도화하려는 사람이었을까? 칼로써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모든 논란을 종식시킬 만큼 논리적인 일관성이나 정치적인 설득력을 갖춘 그런 대답을 들은 적이 없다. 어쩌면 그런 대답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라스 까싸스 이후 우리는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구축하였고, 이것이 확장되어 지구 전체를 에워싸게 되었는데, 이것은 언제나 어떤 계기에서나 인종차별주의를 기초로 하여 자신의 위계를 정당화하였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에는 분명 이런 인종차별주의의 가장 나쁜 특징들을 완화하고자 애쓰는 사람들 역시 언제나 일정한 비율로 있었고, 이런 사람들이 얼마간의 제한적인 성공을 거둔 것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잔혹한 대량학살, 말하자면 나찌의 ‘최종 해결책’ 이전에도 최종 해결책은 항상 있었는데, 다만 이런 학살이 아마도 관료적으로, 체계적으로, 효과적으로 조직된 정도가 덜했으며, 공공연하게 눈에 띄는 것도 덜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 다음에 프랑스혁명과 ‘인권선언’이 있었잖아요,라고 여러분은 대꾸할 것이다. 과연 그렇다, 아니 그렇지 않다! 프랑스혁명이 위계·특권·억압에 대한 항의를 구현한 것은 분명했고, 그것도 평등주의적인 보편주의에 기초하여 이런 항의를 하였다. 이 항의를 표시하는 상징적인 제스처는 말을 걸 때, 신사의 신분을 나타내는 ‘므쓔’(Monsieur)를 거부하고 그 대신 시민임을 명시하는 ‘씨뜨와앵’(Citoyen)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W. Shakespeare)의 표현대로, 아아, 이게 걸림돌이다. 왜냐하면 시민의 개념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것으로 의도되었기 때문이다. 제한된 한 귀족집단뿐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그들의 정부에 참견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걸림돌은 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모두 포함하려면 누군가가 먼저 이 집단의 성원을 구성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비구성원인 사람들이 있음을 필연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시민 개념은 포함하는 것만큼이나 배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사실 프랑스혁명 이후의 2세기 동안 시민권의 배타적인 추동력은 그것의 포괄적인 추동력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빈에서 이름을 떨친 칼 뤼거(Karl Lueger, 노동계급 출신으로 오스트리아기독교사회당을 창립하고 빈 시장을 역임했음—옮긴이)가 1883년 “우리는 모두 인간이며, 기독교를 믿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이다”7라고 했을 때, 그는 시민 신분의 한계에 대한 정의를 제시한 셈이다. 이 정의를 황제는 달가워하지 않았을지라도 당시 빈의 유권자들은 높이 사준 듯하다. 뤼거는 유태인과 마자르인을 포함할 용의가 없었으니,8 그에게 이 종족들은 자신이 역시 비난한 외국자본가들만큼이나 낯선 이방인들이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주장대로 ‘원형파시즘’(proto-fascism)이었을까 아니면 존 보이어가 주장하고 싶어하듯 단지 “계산된 극단주의”였을까?9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외르크 하이더에게 이와 똑같은 질문을 한다. 그러나 대답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정치적인 결과는 사실상 동일한 것이다.

프랑스혁명이 이렇듯 우리에게 시민 개념이라는 지뢰밭을 물려주는 근대사의 바로 그 순간, 지식의 세계는 주요한 변동을 겪고 있었다. 이 거대한 변동은 철학의 신학으로부터의 분리에 의해 지식의 세속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결과로서 일어났는데, 이 과정은 여러 세기에 걸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 과정이 지식의 세속화 문제에서 그칠 것 같지 않았다. 그때까지 같은 뜻은 아닐지라도 심하게 중첩되어 쓰였던 두 용어인 과학과 철학이 18세기 후반쯤에는 존재론적인 대립물로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근대 세계체제의 지식구조의 저 유별난 특징이라 할 ‘두 문화’가 지식의 기본적인 분할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분할과 더불어 진리의 추구(과학의 영역)를 한 편으로, 선과 미의 추구(철학 혹은 인문학/정신과학의 영역)를 다른 편으로 하는 양자의 지적·제도적인 분리가 일어났다. 이 근본적인 단절이야말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일부를 구성하는 인종차별주의에 대하여, 내가 믿기로는, 아무 말도 못하는 사회과학의 무능력뿐 아니라 차후의 사회과학 발전형태를 해명해준다. 이제 나는 이렇게 된 연유에 주목하고자 한다.

프랑스혁명의 위대한 문화적 유산 두 가지는 정치적 변화가 정상적이라는 생각과, 주권은 통치자나 일군의 명사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에게 있다는 생각이었다.10 후자는 시민 개념의 논리적 표현일 따름이었다. 양자가 모두 함축된 뜻에서는 극히 급진적인 생각이었으니, 자꼬뱅 정권의 몰락도 심지어 이를 계승한 나뽈레옹 정권의 종식조차도 이 생각들이 세계체제 곳곳에 스며들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는 상황을 막지는 못했다. 권좌에 앉은 사람들은 이 새로운 지구문화적 현실에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적 변화가 정상으로 여겨져야 한다면, 이제 그 과정을 더 잘 통제하기 위해서 체제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사회적 행동, 사회적 변화, 그리고 사회적 구조를 해명한다고 하는 지식분야, 즉 사회과학의 제도적 출현에 기본적인 추진력을 제공했다.

여기서 사회과학의 제도적 역사를 분석할 계제는 아니다. 이 작업은 내가 책임을 맡은 국제적인 위원회의 보고서 『사회과학의 개방』에서 간결하게 이루어졌다.11 여기서 내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단 두 가지, 두 문화 가운데 사회과학이 점하는 위치와 인종차별주의를 이해하는 데 사회과학이 한 역할이다.

두 문화는 지식의 영역들을 분할하였는데, 이 분할의 경계를 17세기나 그 전에는 아무도 자명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테지만 오늘날의 우리들은 자명한 것으로 생각한다. 과학은 자연계의 영토를 자신의 배타적인 영역으로 전유하였다. 그리고 인문학은 사상계, 문화적 생산, 지적인 사색을 자신의 배타적인 영역으로 전유하였다. 그러나 사회현실의 영토에 대해서는 두 문화가 지배권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각각은 이 영역이 사실은 자기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사회과학이 19세기에 부흥한 대학체제 속에서 제도화되기 시작했을 때, 그것들이 이 인식론적 논쟁, 이 방법론논쟁(Methodenstreit)에 의해 갈가리 찢겨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회과학은 출현하면서 두 진영으로 갈라서는데, 오늘날 ‘학문’이라 불리는 것 가운데 몇몇은 적어도 초기에는 개별사례적인 인문학 진영 쪽으로 심하게 기울었고(역사학·인류학·동양학), 다른 몇몇은 법칙적인 과학주의 진영 쪽으로 심하게 기울었다(경제학·사회학·정치과학). 이것이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문제에 대해 함축한 바는 사회과학이 진리의 추구에만 관여할 것인가 아니면 선의 추구에도 역시 관여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심하게 나뉘었다는 것이다. 사회과학은 이 쟁점을 결코 해결한 적이 없다.

인종차별주의에 관해 말할 것 같으면, 19세기를 통틀어 그리고 1945년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지식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사회과학이 이 쟁점과 결코 직접 맞닥뜨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간접적 대면에서도, 사회과학의 실적은 통탄할 만한 것이다. 19세기 훨씬 전부터 하나의 이름과 하나의 개념으로 존재한 유일한 근대적 사회과학인 역사학부터 살펴보자. 역사학은 19세기에 이른바 과학적 혁명을 겪었는데, 이 혁명의 중심인물은 랑케(Leopold von Ranke)였다. 랑케가 역사학자는 역사를 ‘원래 있던 대로’ 써야 한다고 역설했음을 여러분은 모두 알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연구대상인 과거와 동시대의 자료들로부터 그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과거에 씌어진 문서들의 창고인 ‘문서보관소’라는 개념이 나왔으며, 문서들은 ‘사료’로서 비판적으로 분석되어야 했다.

나는 이 접근방식에 대한 후대의 비판, 이것이 국가와 그 통치자와 연관된 인물들의 저작을 이용함으로써 역사를 거의 정치외교사만의 연구로 불가피하게 한정하였다는 비판을 여기서는 무시하겠다. 또한 문서보관소를 핵심적인 자료원으로 강조함으로써 역사학은 오로지 과거 속으로 파고들게 되었으며, 그 과거의 시간적 경계란 것도 국가가 학자들로 하여금 문서보관소의 문서를 읽을 수 있도록 허용할 용의가 얼마나 있는가에 따라 정해졌다는 사실도 역시 무시하겠다. 다만, 적어도 1945년 이전까지는 관행이었던 역사학의 한가지 요소에 대해서만 주장하겠다. 역사란 이른바 ‘역사적 민족’(historical nations)만의 역사였다는 것 말이다. 사용된 방법들로 보건대,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역사적 민족이라는 개념은 단지 학술적인 개념만은 아니었으니, 그것은 정치적 무기이기도 했다. 역사적 민족이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분명한 것이다. 역사적 민족이란 자기네 역사가들로 하여금 자국에 관해 쓰도록 자금을 대고 강제할 수 있는 강력하고 근대적인 국가에 위치한 민족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트레버-로우퍼(H.R. Trevor-Roper)는 아프리카는 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는 믿어지지 않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19세기에 빈대학에서 슬로베니아의 역사에 관한 강좌가 몇개나 개설되었는지 물어봄직하다. 오늘날에는 과연 몇개가 개설되어 있는가? 역사적 민족이라는 용어 자체가 하나의 인종차별주의적 범주를 바로 역사학적 관행의 심장부 속으로 들이미는 격이다. 그렇다면 1945년 이전의 세계의 역사학 저작들을 살펴볼 때 (최소한으로 잡아도) 그것의 95%가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국가들, 이딸리아국가들(독일국가들이나 이딸리아국가들로 표기하는 것은 나의 의도적인 선택이다) 등 5대 역사적 민족들/각축장들의 이야기인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나머지 5%는 주로 네덜란드나 스웨덴이나 에스빠냐와 같은 덜 강력한 유럽 국가들의 역사이다. 근대 유럽의 원천으로 추정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관해서뿐 아니라 유럽의 중세에 관해서도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이 씌어졌다는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하지만 고대 페르시아나 심지어 고대 이집트에 관해서는 씌어지지 않았다. 19세기 마지막 삼분기에 칼 뤼거와 그밖의 사람들에 의해 빈에서 시작된 공론을 해명하는 데 독일국가들의 역사를 구축한 역사가들이 약간이라도 쓸모가 있었던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회과학은 좀 나았던가? 경제학자들은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의 보편적 이론들을 구축하느라고 바빴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자신의 유명한 공식에서 모든 인간은 “거래하고 교환하고 장사하기”를 추구한다고 말했다. 그의 저서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의 전 목적이, 그 누구든지 모든 인간의 이러한 자연적 경향에 대한 간섭을 중지해야 함을 우리한테 (그리고 영국정부한테) 설득시키는 것이었다. 리카도(D. Ricardo)가 비교우위의 개념에 기초한 국제무역의 이론을 창안했을 때 그 역시 유명한 가설적 실례를 사용하였는데, 그 예 속에 그는 영국과 뽀르뚜갈의 이름을 삽입한 것이다. 그는 그 예가 실제의 역사에서 끌어낸 것이라고 하지도 않았거니와, 이른바 비교우위란 것이 영국의 힘에 의해 상대적 약세인 뽀르뚜갈 국가에 얼마만큼 강요된 것인지 설명하지도 않았다.12

하긴, 몇몇 경제학자가 최근 영국역사의 과정이 보편적 법칙의 예증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슈몰러(Gustav von Schmoller)는 경제학적 분석의 역사화를 꾀하는 ‘국가학’이라는 학술운동 전체를 이끌었다.13 이 이단적인 학설이 일찍이 프로이쎈 대학체제 속에 강력한 기반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여 마침내 이를 쓰러뜨린 장본인은 빈의 경제학자인 칼 멩거(Karl Menger)였다. 다른 한편 고전경제학에 대하여 슈몰러의 비판보다 더 강력한 비판은 칼 폴라니의 『거대한 변혁』(The Great Transformation)이었는데, 이 책은 그가 1936년 빈을 떠난 후 영국에서 쓴 것이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폴라니를 읽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은 할 수만 있다면 정치경제학을 전혀 다루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으며, 주류 경제학자가 인종차별주의를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할 때에는 이를 하나의 ‘시장 선택’으로서 논해야만 했다.14

주류 경제학자는 ‘다른 사정이 같다면’이라는 매개변수를 벗어난 어떠한 상황의 분석에도 냉소를 보냄으로써, 시장의 규범—이런 규범은 경제학자들이 규정하는데—을 따르지 않는 경제적 행위는 가능한 대안적 경제적 행위로 심각하게 고려할 가치가 없음은 물론이며 분석할 가치조차 없다고 못박는다. 이런 단정적 태도에 깔려 있는 허구적인 정치적 순진성으로 말미암아 인종차별주의 운동의 경제적 원천이나 결과를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이런 허구적 순진성이 인종차별주의라는 주제를 과학적 분석의 시야에서 지워버리는 것이다. 더욱 나쁜 것은, 인종차별주의 혹은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분석될 수 있는 수많은 정치적 행위가 경제학적으로는 비합리적인 행위임을 암시한다는 점이다.

정치과학자의 기여도 그다지 나을 게 없다. 이들은 법학부와 맺어온 유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헌법상의 쟁점들에 일찌감치 집중함으로써 인종차별주의 분석을 하나의 형식적 입법상의 쟁점으로 바꿔놓았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의 남아프리카는 법적 체제 내에 공식적 차별을 안치하였기 때문에 인종차별주의이며, 프랑스는 적어도 중심부에서는 그런 법적 차별이 없기 때문에 인종차별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헌법의 분석 외에, 1945년 이전의 정치과학자들은 이른바 ‘비교정부론’이라는 것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들이 어떤 정부들을 비교하였던가? 우리의 한결같은 친구인 5대 범유럽 국가, 즉 영국·프랑스·미국·독일·이딸리아의 정부인 것이다. 다른 어떤 나라도 연구할 가치가 없었는데, 그것은 다른 어떤 나라도, 내 생각으로는 심지어 저 별종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조차도, 진정으로 문명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사회학자들은 대학체제 내에서 정치적 급진주의의 온상 노릇을 한다는 명성을 떨쳐왔으니, 적어도 좀 나았을 테지. 천만의 말씀! 그들이야말로 최악이었다. 1945년 이전에는 두 종류의 사회학자들이 있었다. 백인우월주의 개념을 명시적으로 정당화한 사회학자들이 있었는데, 특히 미국에 많았다. 그리고 사회사업이나 종교활동의 배경을 지니고서 대도시 도심의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을 기술하고 이런 주민들의 ‘일탈’을 해명하고자 한 사회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기술은 비록 온정주의적이긴 해도 좋은 의도를 지니고 있었으나,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의─옮긴이〕 이런 행위가 정상에서 벗어난 것이며 중산계급의 규범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교정되어야 한다는 가정은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다. 그런데다 하층계급들은 대다수의 경우─이는 미국에서만 그런 것은 아닌데─중간계급들과는 종족적으로도 구분되기 때문에, 이들 사회학자 집단의 인종차별주의적인 토대는 설령 이들 자신은 인식하지 못한다 해도 명백한 것이다.  

그리고 가장 나쁜 것은, 네 가지 기초학문들─역사학, 경제학, 정치과학 그리고 사회학─모두가 근대성과 문명의 세계로 간주되는 범유럽세계만을 분석했다는 점이다. 이 학문들의 보편주의란 근대 세계체제의 위계를 전제한 것이다. 유럽 바깥의 세계에 대한 분석은 별개의 학과들에, 가령 야만적인, ‘역사가 없는 민족’은 인류학에, 비서구의 ‘고도 문명’─그러나 유럽이 침입하여 그들의 사회적 동학(dynamics)이 재조직되지 않으면 근대성으로 나아갈 수 없는 ‘고도 문명’─은 동양학에 맡겨졌던 것이다. 종족학은 종족들이 적어도 ‘문화적 접촉’ 이전에는 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종족들’의 역사성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동양학은 이 고도 문명들의 역사를 ‘얼어붙은 것’으로 보았다.

유럽 바깥의 세계는 ‘전통’을 대변하고, 범유럽세계는 근대성·진화·진보를 대변하였다. 서구 대 나머지 세계의 구도였던 것이다. 근대세계를 분석하면서 사회과학은 현재의 규칙성들을 기술하기 위하여 하나가 아니라 세 개의 학문을, 즉 경제학·정치과학·사회학을 창안하였다는 사실을 눈여겨보라. 반면에 유럽 바깥의 세계를 분석하는 데는 역사가 필요하지 않았을뿐더러, 범유럽세계에는 필수로 요구된 경제·정치·사회 3개 분야마저 필요하지 않았다. 이는 사회적 행동의 별개의 각축장─시장·국가·시민사회─으로의 ‘분화’야말로 근대성의 성취로, 근대성의 정수 자체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과학과 철학의 분리 때문에, 사회과학자들한테 이것이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한 가설에 불과하며 사회적 현실에 대한 그럴듯한 해명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줄 사람이 없었다. 나찌즘을 이해하는 데 사회과학이 도움을 주지 못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1945년 이후의 사회과학의 행로는 목표를 약간 수정하긴 했지만 하이더를 이해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이번의 반인종주의 저항운동도 또하나의 일탈적인 행동으로밖에는 해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어쩌면 약간 온정주의적인 방식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일탈행동일지라도 말이다.

사회과학자들은 근대 세계체제 탄생의 싸움을 하느라고 너무 바쁜 나머지 작동중인 세계체제와의 싸움을 할 수 없었다. 학술적인 중립성의 추구는 학자들한테 간섭하려 드는 교회에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국가에) 맞선 투쟁이었다. 베버(M. Weber)가 세상의 ‘마법에서 깨어남’(disenchantment)을 언급하였을 때, 그가 사실은 프로이쎈의 민족주의를 통렬히 비난했음에도 그 언어 자체는 신학적이었다. 1차대전으로 말미암아 부르주아 가치가 끔찍하게 파괴된 후에야 베버는 뮌헨대학의 학생들에게 행한 그 유명한 강연,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다시 한번 사회과학이란 세계가 언제나 마법에 걸려 있는 방식들과 분리될 수 없음을 기억할 수 있었다.

 

현재 어느 집단이 외적으로 승리하건, 우리 앞에는 여름의 꽃핌이 아니라 차라리 얼음같이 찬, 어둡고 가혹한 극지의 밤이 놓여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는 황제뿐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들조차 자신의 권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밤이 서서히 이울고 나면, 그토록 호화롭게 꽃핀 듯한 봄을 맞이했던 이들 가운데 그 누가 살아 있을까요?15

 

 

4. 2000년 이후의 세계체제

 

오스트리아자유당 표의 강세와 유럽연합의 강경한 반응은 우리의 현 위기를 나타내는 최초의 신호는 아닐지라도 이를 알려주는 조짐이다. 미래에 대한 근본적인 낙관주의로부터, 상황은 사실상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확신으로부터 그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근원적인 불안으로의 변화가 세계의 부유한 지역에 도달한 것이다. 오스트리아에서건 서유럽에서건 미국에서건, 느리지만 항상 오른쪽으로만 이동하는 중도적인 합리적 개혁주의에 대한 믿음은 자칭 중도좌익이든 중도우익이든 주류 정치세력의 그 모든 공약에 대한 회의론으로 대체되었다. 19세기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성된 중도주의적 합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합의는 1968년에 근본적인 도전을 받았고 1989년에는 매장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 일부를 이루는 세계체제의 장기간에 걸친 혼돈스러운 변혁 속으로 진입한 것이다. 변혁의 결과는 그 본질상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그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복잡성의 과학들’(sciences of complexity)의 메씨지이다.16 이것이 사회과학이 오늘날 전달해야 하는 메씨지인 것이다.17 우리는 외르크 하이더와 이번의 저항운동을 이러한 맥락에서 자리매김해야 한다.

하나의 세계체제가 적응의 구조적 가능성들이 소진되었기 때문에 붕괴하고 있을 때, 권력과 특권을 지닌 사람들이 수수방관하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을 리는 없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단결하여 비록 현재의 세계체제와는 다른 원칙에 기초하고 있을지언정 그것 못지않게 위계적이고 불평등한 세계체제로 현재의 세계체제를 대체하려 들 것이다. 그런 사람들한테는 외르크 하이더는 선동정치가요 위험인물이다. 하이더는 우리 시대의 현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니, 오스트리아인들이 현재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받아들인 이민의 숫자를 다음 25〜50년간에는 매년 2배, 3배, 혹은 4배로 증가시켜야 할 것이며, 그래야 고령화하는 오스트리아 주민들의 연금을 지탱할 만한 규모의 노동인구를 겨우 유지할 수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18 선동정치가 범유럽세계를 파괴적인 내전의 길로 더욱 빠르게 이끌 위험은 명백하다. 보스니아와 르완다가 재연될 가능성이 다가오는 것이다. 유럽연합의 지도자들은 이를 알고 있다. 클레스틸 대통령도 알고 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인민당 지도부는 알지 못한 듯하다.

한편, 반인종주의 저항운동이 존재한다. 이 운동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구조적 위기 한가운데 존재하는 변혁세력을 대변하는데, 이 변혁세력은 자유당 세력과 다를 뿐 아니라 유럽연합 지도부의 그것과도 또 다르다. 그렇지만 이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선명한 전망을 갖고 있는가? 아마 흐릿한 형태의 전망만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사회과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지만, 다만 진리의 추구와 선의 추구를 분리하기를 거부하는 사회과학만이, 인간의 창조성과 새로운 실질적 합리성(막스 베버의 materielle Rationalität)을 위해 불확실성의 영속성을 내부에 완전히 통합시켜 그런 불확실성이 제공하는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하는 사회과학만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좀더 실질적으로 합리적인 역사적 체제를 위하여 대안적 가능성을 탐구해서, 우리 삶을 에워싼 이 죽어가는, 광기의 체제를 갈아치울 필요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종차별주의적 특권의 깊은 뿌리를, 우리의 현존 세계체제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지식구조와 실로 저항세력 그 자체까지 포함한 이 체제의 모든 제도를 에워싸고 있는 이 깊은 뿌리를 드러낼 필요가 절실한 것이다. 우리는 급속한 변화의 한가운데서 살고 있다. 그게 그렇게 나쁜 것인가? 앞으로 수십년간 우리에겐 많은 혼란과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빈 역시 변할 것이다. 그러나 변화란 언제나 우리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컸으며,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빨랐다. 사회과학은 과거를 이해하는 데서도 우리를 실망시켰다. 사회과학은 전통적 세계가 너무너무 천천히 움직였다는 그릇된 상(像)을 우리에게 제공하였다. 그런 세계는 결코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다. 현재도 오스트리아에서건 다른 어디에서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매우 불확실하지만, 이런 엄청난 불확실성 가운데서도 우리는 우리의 과거들─이 과거들을 우리는 현재 만들어가는 중이다─에서 무엇이 선(善)이고 미(美)인지를 가려내어 이런 비전들을 우리의 미래 속으로 구축할 수 있도록 분투해야 한다. 우리는 좀더 살 만한 세계를 창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우리는 우리의 상상력을 활용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 속에 놓여 있는 뿌리깊은 인종차별주의를 송두리째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1968년 프랑스의 대규모 학생봉기 때 학생들의 지도자인 ‘빨강머리 다니’(Dany le Rouge)로 알려진 다니엘 꽁-방디(Daniel Cohn-Bendit)는 잠시 독일을 방문하는 전술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독일시민이지 프랑스시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드골 정부는 그의 프랑스 귀환을 막을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빠리에서 행진을 하면서 ‘우리 모두는 독일의 유태인들이다, 우리 모두는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이다’라는 슬로건을 치켜들고 항의했다. 그것은 훌륭한 슬로건이었고, 우리 모두가 채택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욱 겸허하게 “우리 모두는 외르크 하이더이다”라는 말을 덧붙임직하다. 우리가 전세계의 외르크 하이더들과 싸우고자 한다면─필히 우린 싸워야 하는데─먼저 우리 속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한가지 작지만 의미심장한 예를 들겠다. 새 오스트리아 정부가 형성되었을 때, 이스라엘 정부는 항의의 뜻으로 자국의 대사를 소환하는 올바른 행동을 했다. 그러나 불과 한달 남짓 후에 이스라엘 의회는 골란고원에서의 철수를 결정하는 어떠한 국민투표에도 ‘특별 과반수’─이는 이 쟁점에서 이스라엘 내 아랍시민들의 투표권을 사실상 박탈하는 조항을 뜻하는 약호이다─가 필요하다고 강변하는 동의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바라크(E. Barak) 수상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런데 이 동의안의 주동자 가운데 하나는 나딴 샤란스끼(Natan Sharansky)와 러시아 망명자로 이루어진 그의 당이었다. 소련정부의 사실상의 반유태주의적 정책에 항의한 소련의 저 유명한 반체제인사인 바로 그 샤란스끼인 것이다. 인종차별주의에 맞서는 투쟁은 분리될 수 없다. 오스트리아, 이스라엘, 소련, 미국, 각각에 대하여 다른 규칙이 있을 수 없다.

흥미로운 일화를 하나 더 이야기하겠다. 미국에서 진행중인 대통령선거전 이야기인데, 싸우스캐롤라이나에서 공화당의 결정적인 예비선거가 있었다. 이 예비선거에서 부시(George W. Bush)는 이른바 기독교 우익으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확보하고자 이 세력의 요새인 밥 존즈 대학(Bob Jones University)에서 연설을 했다. 문제는 밥 존즈 대학이 두 가지 사항, 즉 (이 대학이 근본주의적인 프로테스탄트 기관이기 때문에) 교황을 적(敵)그리스도라고 비난하는 것과 학생들에게 다른 인종의 사람들과의 데이트를 금지한 사실로 유명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후 주요한 정치적 쟁점이 되어 부시를 당혹하게 만들었는데, 부시는 자기가 그 대학에 갔을 때 두 입장(맹렬한 반가톨릭적 태도와 인종간 데이트의 거부)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이 일화의 촛점은 부시의 당혹스런 처지를 전해주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곤혹스러워졌다는 사실은 1945년 이후 성립된 금기에 대해 말해주는 바 없지 않다. 정작 흥미로운 것은 이런 논란이 벌어졌을 때 이 대학의 총장 밥 존즈 3세가 보인 반응이다. 밥 존즈 3세는 CNN의 래리 킹(Larry King) 대담 프로에 출연했다. 래리 킹이 밥 존즈 3세에게 한 첫 질문은, 이 대학이 왜 인종간의 데이트를 금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대답은 차이가 없는 ‘하나의 세계’라는 철학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래리 킹은 하나의 세계에 대한 반대와 두 젊은이의 데이트에 대한 반대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밥 존즈는 이의를 제기했지만, 자기나 자기 대학이 (크나큰 금기인) 인종차별주의를 행한 것이 아니며, 그 교칙이 기독교 장려라는 자기들의 목표에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이기 때문에 대학은 그날로 그 교칙을 폐기했음을 강조했다. 나는 여기서 나타나듯 공개적인 항의가 몇몇 인종차별주의자로 하여금 적어도 전술상으로는 공개적인 입장철회를 하게끔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는 극우 공세의 악몽에 직면한 보수주의 세력에게는 하나의 교훈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런 전술적인 변화와는 전혀 별개로, 인종차별주의가 그래도 계속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앨버트로스는 우리의 목에 걸려 있다. 그것은 우리를 못살게 괴롭히는 마귀이다. 저항운동은 도덕적인 의무이다. 이는 분석 없이는 지적으로 그리고 유용하게 수행될 수 없는데, 그런 분석을 제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야말로 사회과학의 도덕적·지적 기능이다. 그러나 우리 각각의 내부에 있는 인종차별주의를 근절하기 위해서 우리들 각자가 대단한 자기쇄신을 수행할 필요가 있듯이, 사회과학자들이 우리를 불구로 만든 그런 종류의 사회과학에서 탈피하여 더 유용한 사회과학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자기쇄신이 필요하다. 이제 나는 ‘이행의 시대에서의 사회과학’이라는 원래의 제목으로 돌아온다. 이런 시대에는 우리 모두가 사태진행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줄 수 있다. 세게 밀어도 기껏해야 약간의 결과밖에 얻지 못하는 좀더 정상적이고 좀더 안정된 시기와는 반대로, 구조적 분기의 순간에는 상하의 진동이 격해서 약간만 밀어도 커다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기회를 제공하지만 도덕적인 압박감도 역시 생겨난다. 이행이 끝났을 때의 세계가 현재의 세계보다 명백하게 좋아지지 않는다면—그렇게 될 공산도 적지 않은데—그땐 우리 자신만을 탓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란 저항운동의 구성원들이다. ‘우리’란 사회과학자들이다. ‘우리’란 예의를 아는 보통사람들 모두이다. 

〔韓基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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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네스코(UNESCO)가 이런 책들의 씨리즈 전부를 후원했다.
  2. Bartolomé de las Casas, Trés brève relations de la déstruction des Indes, Paris: La Découverte 1996〔1547〕, 52면.
  3. Angel Losada, “Ponencia sobre Fray Bartolomé de las Casas,” in Las Casas el la Politique des Droits de l’Homme (Institut d’Etudes Politique d’Aix & Instituto de Cultura Hispánica, Aix-en-Provence, 12-13-14 Octobre 1974), Gardanne: Imp. Esmenjaud 1976, 22면.
  4. Vidal Abril Castello, “Bartolomé de Las Casas, el último Comunero,” in Las Casas de la Politique des Droits de l’Homme 참조.
  5. Henry Mechoulan, “A propos de la notion de barbare chez Las Casas,” in Las Casas et la Politique des Droits de l’Homme, 179면.
  6. Alain Milhou, “Radicalisme chrétien et utopie politique,” in Las Casas et la Politique des Droits de l’Homme, 166면.
  7. Helmut Andics, Ringstrassenwelt, Wien 1867-1887. Luegers Ansteig, Wien: Jügend und Volk 1982, 271면.
  8. 뤼거는 유태계 사회민주주의, 유태계 자유주의, 유태계 프리메이슨 역시 비난하였다.
  9. John W. Boyer, Political Radicalism in Late Imperial Vienna: Origins of the Christian Social Movement, 1848-1897, Chicago: Univ. of Chicago Press 1981, xii면.
  10. 내 글 “The French Revolution as a World-Historical Event,” Unthinking Social Science, Cambridge: Polity Press 1991, 7〜22면 참조.
  11. Open the Social Sciences: Report of the Gulbenkian Commission on the Restructuring of the Social Sciences, Stanford: Stanford Univ. Press 1996.
  12. S. Sideri, Trade and Power: Informal colonialism in Anglo-Portuguese Relations, Rotterdam: Rotterdam Univ. Press 1970 참조.
  13. Ulf Strohmayer, “The Displaced, Deferred or was it Abandoned Middle: Another Look at the Idiographic-Nomothetic Distinction in the German Social Sciences,” Review XX, 3/4, Summer/Fall 1997, 279〜344면 참조.
  14. Gary S. Becker, The Economics of Discrimination, 2nd ed., Chicago: Univ. of Chicago Press 1971 참조.
  15. Max Weber, “Wissenschaft als Beruf,” Gesamtausgabe, Bd.17, hrsg. von W.J. Mommsen u.a., Tübingen: Möhr 1992, 251면; “Science as a Vocation,” in H.H. Gerth & C. Wright Mills, eds., From Max Weber: Essays in Sociology, New York: Oxford Univ. Press 1946, 128면.
  16. 무엇보다도 Ilya Prigogine, La fin des certitudes, Paris: Odile Jacob 1996〔영어본 The End of Certainty, New York: Free Press 1997〕 참조.
  17. 나는 최근의 두 저서에서 이 작업을 시도했다. Utopistics, or Historical Choices for the Twenty-first Century, New York: New Press 1998; T.K. Hopkins & I. Wallerstein, coords., The Age of Transition: Trajectory of the World-System, 1945-2025, London: Zed Press 1996
  18. 국제연합 인구분과에서 2000년 3월에 발간하는 “Replacement Migration: Is It a Solution to Declining and Ageing Populations?”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참조하라. 이 보고서에서 오스트리아는 논의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보고서의 주장에 따르면, 독일의 경우 단지 노동력 가용 연령 인구의 규모를 1995년 수준으로 일정하게 유지하려 해도 지금부터 2050년까지 매년 연간 50만명의 이민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