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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2000년을 여는 젊은 시인 20인
조연호 趙燕湖
1969년 충남 천안 출생. 199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죽음에 이르는 계절
나무의 실핏줄에 입맞춘다. 죽은 나무의 영혼이 내 귓속 이명이 되어간다. 감사한다. 위험하고 싱그러운 나뭇결도 가져보지 못하고 이제 立春. 산책길의 태양은 헐렁한 양말처럼 자꾸 발뒤꿈치로 벗겨져내리고 붉은 잇몸을 보이며 어린 숲이 해맑게 웃는다. 그날은 군대 가서 죽은 사촌형이 내 뺨을 쳤고 물빠진 셔츠 얼룩을 닮은 구름이 빨랫줄 위를 평화롭게 지나갔다.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며 바라보던 붉은 봄날. 감사한다. 죽은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쏟아져나와 기둥을 좀 슬고 책그늘과 내 그림자가 그렁그렁 어울려 가시연꽃을 만든다. 암수딴그루인 내 계절에 돋는 가시는 언제쯤 나를 찢고 봉오리를 열 수 있을지. 감사한다. 자줏빛 꽃이 나 오늘 첫 생리를 시작했어,라고 말하던 하루. 아직 보송보송한 겨울눈을 버리지 못한 바람이 버려진 상자마다 골목을 채워넣는다. 화장실에 줄 선 여자들이 신 열매를 만나 붉은빛으로, 딱딱한 구름을 만나 푸른빛으로 변하는 리트머스페이퍼였던 봄날. 늙은 연잎가시가 목덜미에 바람의 돌기 하나를 올려둔다. 콧물 훌쩍이며 푸른 봄에 방부제를 먹여주고 싶었다. 감사한다, 인간이라는 짐짝. 짐짝이 점점 더 무거워질 때 아이의 거짓말이 밝아지고 아름다워져간다. 바람의 유충이 사람들의 발목에서 넓고 가벼운 날개를 꺼내던 立春. 감사한다, 맑은 정오에 구릉을 지나던 객차와 화차 사이에 어린아이가 끼여 죽은 날.
수로
홀수 해의 마지막 저녁이었다. 별들은 지금 바람좌에 들어 있다. 낡고 허름한 농협 건물 뒤편에 개암나무 하나가 씨앗을 심고 있었다. 어린 내가 엄마의 어두운 밤눈을 걱정한다. 쓰레받기에 담겨 버려진, 벌레들이 남긴 허전한 散文을 읽는다. 아름다운 무늬지 않니, 자주 고장 나는 TV 앞에서 형은 내게 말 걸고 싶어했지. 휴일의 北行 버스를 타고 산란하는 이끼들의 방을 찾아 저수지로 떠나고 싶었다. 할머니의 참빗질에 동생의 머리칼에서 서캐가 쏟아지고, 방역차가 꽁무니에 흰 연기와 아이들을 매달고 달려간다. 내 기억에 찬밥에 총각무를 먹었고 천천히 쉰내를 풍겼다. 수로 위에 바람을 묶어두던 저녁, 죽은 개암나무 아래 늙은 여자가 쪼그려 오줌을 누고 아래를 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