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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기억의 거처

방현석 장편소설 『당신의 왼편』, 해냄 2000

이문구 소설집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문학동네 2000

김종광 소설집 『경찰서여, 안녕』, 문학동네 2000

 

윤지관 尹志寬

문학평론가. 덕성여대 영문과 교수.

 

 

1. 최근 출간된 이문구(李文求)와 김종광(金鍾光)의 소설집과 방현석의 장편소설을 읽었다. 각기 나름대로 재미있는 독서였다. 그러나 이들을 두고 무슨 평을 한다는 일이 버거워, 두어 주일 넘도록 미적거렸다. 이문구 선생은 이름조차 생소해진 보잘것없는 나무들을 제목으로 내세운 일종의 나무열전을 선보였다. 중간중간 한자말을 한두 마디 끼워넣지 않으면 글이 잘 되지 않는 처지로서는, 또 한번 우리말의 기막힌 조합이 이룩해낸 글쓰기의 진경을 대하매, 늘 그렇듯 말문이 막혀서 따져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방현석의 경우는 또 그것대로 작가가 모처럼 마음먹고 과거에 대한 착잡한 감정을 토로한 터에 차마 이런저런 시비를 가리기가 껄끄럽다. 김종광은 거의 처음 대하는 작가인데, 신진 소설가 가운데 이런 ‘인물’이 있었나 하고 솔직히 놀랐다. 일전에 『한겨레』에 난 기사를 보니 ‘작은 이문구’라는 별명까지 붙었다지만, 실상 아주 당돌하리만큼 새로운 면도 있고 또 막상 이문구와 비교하기에도 좀 이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임을 피할 수는 없는 일, 독서 소감을 몇가지 적어본다.

 

2. 『십년간』(1995) 이후 오랜만에 나온 방현석의 장편소설 『당신의 왼편』을 지배하는 것은 기억의 문제다.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현욱의 삶을 숨겨진 화자인 ‘나’는 이 작품의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정리한다.

 

20대 청춘의 10년을 고스란히 저당잡힌 채 그가 얻으려고 했던 세상에 대한 꿈, 그것이 이제 있어야 할 유일한 곳은 기억의 무덤일 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나 역시 그와 그의 친구들이 꾸었던 꿈이 앞으로 오랫동안 복권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나 허술한 무덤의 주위에 흩어진 채 매복해 있던 기억의 잔해들은 가끔 불시의 궐기를 감행하여 그의 일상을 습격하고, 무방비 상태의 그를 점령하여 심한 멀미에 빠뜨리는 것을 나는 오늘까지 지켜보아왔다. 그에게 기억은 흉기였다. (2권 251면)

 

이 대목은 이 작품의 거의 전모를 요약한다. 현욱은 시골 출신으로 서울의 한 대학의 문예창작과에 진학한 첫해, 광주항쟁으로 격화된 학생운동에 가담하여 그후 10년간을 세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80년대의 거대한 움직임에 동참한다. 그러나 90년대에 접어들어 달라진 세상에서, 대기업 회장의 자서전을 쓰는 일에 고용되고 그것을 계기로 회장의 심복 중 한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에게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찼던 자신의 청춘시절은 묻어두고 싶은 과거요 아픈 추억일 뿐이다. 그에게 “기억은 흉기였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현욱은 ‘꿈꾸며 살았던 시간의 기억’들로 인해 ‘내상’을 입게 되고, 그같은 내상이 결국 그를 다시 한번 변모시키는 계기가 되는데, 이로써 기억은 흉기가 아니라, 오히려 꿈 없이 사는 무의미한 삶을 혁파하는 삶의 이기(利器)임이 드러난다.

숨겨진 화자인 ‘나’는 현욱의 다른 측면 즉 그를 조감하는 어떤 궁극적인 자아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이런 시점의 분리를 통해 현욱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내상의 깊이와 치유의 과정을 좀더 밀도있게 기록하자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현욱의 내면적 갈등이 별로 깊이 탐구되지 못함에 따라 이 시도는 명백히 실패한다. 세속적으로는 30대 이사로 승진할 정도로 ‘잘 나가’면서 자조 섞인 포즈 하나로 삶의 불일치를 건사하고 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니, 현욱은 자신의 삶이 처한 모순에 정면으로 대응할 만한 인물로 그려지지 못하였다. ‘나’를 활용하려면 나와 그의 긴장된 대면과 대화가 인물의 삶의 변화를 추동해내는 한 계기가 되어야 할 터인데, ‘나’는 잠시 필요할 때 동원되는 도구에 불과하다. 첫 장과 마지막 장에 불쑥 끼여든 불필요한 군더더기 혹은 분식(粉飾)으로 남는다. 그러니 ‘그’도 평상시에는 기억을 통한 자의식의 고통, 혹은 내상을 가지고 이를테면 사활을 건 씨름을 할 필요가 별로 없게 된다.

그러나 이런 실패를 보상해주는 미덕이 『당신의 왼편』에는 있다. 주인공 설정과 서술전략의 엉성함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 전체를 끌어가는 힘으로서 기록에의 충동은 경탄스럽다. 80년대의 일을 하나하나 기억의 창고에서 꺼내어 눈앞에 펼쳐 보이고자 하는 욕망이 이 작품을 지배하고 충일하게 한다. 단적으로 당시의 기록물들, 특히 고문의 실상을 낱낱이 기록한 김근태씨의 생생한 증언 등을 이 소설의 맥락에서 읽는 일은 감동적이다. 어떤 점에서는 등장인물의 배치를 비롯한 플롯 자체가 이같은 기록물을 효과적으로 제시하기 위한 장치인 것처럼도 보인다. ‘네가 눈이 있다면 이 명백한 사실들을 보아라, 이 망각의 90년대여!’ 하고 그것은 외친다.

주인공인 현욱뿐 아니라, 이 작품 전체는 기억을 둘러싸고 벌이는 한바탕의 싸움이다. 기억, 즉 과거를 복원하는 정신활동은 문학의 핵심영역 가운데 하나다. 방현석은 80년대적인 세계의 핵심 속에 뛰어들어 기억을 통해, 그리고 때로는 기록의 도움을 받아, 그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고투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이번 소설은 기억이 아닌 추억을 일삼는 이른바 ‘후일담 소설’들에 대한 질타이기도 하다. 그런데 단순히 기록물을 제시하는 것이 소설은 아닌만큼, 소설에서 일어나는 기억은 현재를 통해 이룩되는 재생이며 그런 점에서 하나의 사건이자 창조이기도 하다. 『당신의 왼편』은 기록의 힘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잃어버린 80년대의 정당성과 순수성에 대한 회한과 열정이 교차하는 심적인 혼란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기억을 창조와 연결시키는 입지가 되는 당대의식, 즉 90년대에 대한 해석이 이 작품에 부재하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3. 방현석이 그토록 붙잡혀 있는 기억이라는 문제는, 다른 두 작가와도 무관하지 않다. 물론 이문구나 김종광 같은 작가들이 방현석처럼 지금에 이르러 억압된 80년대의 삶과 정신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김종광의 경우에는 분명 80년대 운동에 대한 동감어린 시선이 있거니와, 언뜻 보기에 그런 변혁의 기억과는 무관한 듯한 이문구의 경우에도 역시 기억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농촌사회의 변모에 대한 기록자이자 그같은 전통적인 공동체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가장 일관되고 깊이있는 사색자인 이문구는, 이번 작품집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에서 더욱 분명하게 농촌의 풍속작가로 자기 자리를 매겼다. 이것은 작가로서의 특성을 더욱 분명히한 잇점은 있으되, 영역의 협소화라는 점에서는 후퇴한 면도 있다.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고초를 겪다 이웃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난 과거를 기억하는 홍쾌식옹의 회고(「장석리 화살나무」)와 같은 예외도 있지만, 이 작품집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90년대 들어와서 변모된 이른바 ‘아이엠에푸’시대 농촌의 풍속도이다. 「장평리 찔레나무」 「장척리 으름나무」 「장이리 개암나무」 「장천리 소태나무」 「장곡리 고욤나무」 등 대다수가 이같은 풍속묘사에 중점이 가 있고, 최근 농촌의 삶을 다루되 낙향한 도시인의 감회를 담은 「장동리 싸리나무」와 「더더대를 찾아서」 정도가 이 목록에서 벗어날 뿐이다.

구체적으로 충청도의 한 시골을 배경으로 하는 이 풍속도는 비단 피상적 의미에서 풍속으로서의 미풍양속이 흐려지는 사태(노래방 등 갖가지 ‘방’들이 들어와 있고, 티켓 영업 등 매춘과 휴대폰과 음란전화의 등장 등)에 대한 보고뿐 아니라, 당대의 정치현실에 대한 불신어린 시골 민심이 여실한 현장감과 더불어 질박한 사투리로 그려진다. 풍속에 대한 충실한 기술을 기본으로 하다 보니, 농촌현실을 실감나게 전해주는 거의 기념비적인 장면들이 속출한다. 가령 한 노인이 농민의 살길을 가로막는 농촌정책에 절망하여 고욤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한 경위를 기록한 「장곡리 고욤나무」의 전반부를 차지하는 시골버스 속에서의 대화 장면 같은 것은 가히 압권이다. 고인의 초상집에 가는 주민들이 마을 정류장에서마다 한두 명씩 버스에 올라타면서 서로 수인사하고 나서 고인의 죽음을 두고 주고받는 대화는 민중들의 생생한 생활의 한 장면을 되살려놓으면서, 그들의 삶에 대한 감각과 정치현실에 대한 느낌까지 있는 그대로 전달해내는 리얼리즘의 힘을 보여주는 한 본보기이다. 어디 한 군데 끊어내기가 어렵지만, 그 일부라도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참 그이는 엊그제까장두 멀쩡하던 이가 워째 느닷웂이 시상을 그냥 싸게 놔번졌대요?”(236〜37면)라고 말을 꺼낸 마흔줄 아주머니가 몇마디 아는 소리를 하자, 버스에 탄 사람들이 한마디씩 거들고 나서는 중이다.

 

“아따 아줌니는, 그렇잖어두 햇덧 웂는 동지섣달에 먹은 그릇 설그지허기도 빠듯헐 텐디 워느새 지자제까장 연구를 다 허셨댜.”

남북대가리가 탄하는 것도 아니고 탓하는 것도 아닌 말로 지질러두려고 하였으나

“설그지허다 보면 짐칫그릇두 만지구 짠짓그릇두 만지는 거지 지자제가 뭐 별스런 그래유. 보나마나 둔 있는 늠덜 둔지랄 허기만 십상이겄데유.”

그 여편네도 수그러들 기미가 없었다.

“쓰기는 부족해두 살기는 넉넉한 사람이 사는 게 재미웂다구 무단히 자긔 손으루 영결종천헐 적에는 여북했을라구유. 다 그만침 말 못헐 폭폭헌 속이 있었겄지유.”

수리목이 거듭 말참견을 하였다.

“쓰다 냉긴 뇡약두 수두룩헐 텐디 해필이면 목을 그랬으까나.”

“약을 먹으면 대번에 종합병원으루다가 실어갈 텡께 곧 죽어두 객사는 마다헌 거지유.” (237〜38면)

 

제목으로 쓰인 나무들이 하나같이 ‘나무두 아니구 풀두 아닌’ 보잘것없고 별 쓸모도 없는 수종들이지만, 그 나름대로 만만히 볼 수 없는 개성과 성깔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대체로 우리가 민중이라고 일컬어온 다수 대중들의 정서와 저항의식과 끈끈한 생활상을 이만큼 생생하게 그려낸 작가는 드물 것이다. 이런 나무들의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특성을 작가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직접 설파하는 「장이리 개암나무」와 같은 작품도 있지만, 그보다도 생생하게 되살려진 버스 안 풍경이야말로 이문구의 리얼리즘의 수준을 증거한다.

그러나 마치 김홍도의 풍속화처럼 민중적 삶의 리얼리티를 살려낸 이같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풍속을 넘어선 영역에 대한 탐사를 어렵게 만드는 낌새는 이번 작품집에서 더욱 짙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이문구 문학이 한고비를 넘긴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가지게 한다. 풍속의 세계는 어디까지나 사회적 관습의 영역에 있으며, 그 세계 속에서 삶이나 사회의 근본모순은 후경(後景)으로 물러나거나, 말로든 행동으로든 눙쳐지고 타협되어 근본적인 문제로 부각되는 것을 막는다. 풍속은 풍속 너머의 세계를 보여줄 수 없고, 암시조차 하기 힘들다. 풍속을 그리는 화가 혹은 작가는 도덕적일 수는 있어도 삶의 근본적인 질곡이나 본질적인 물음 앞에서 무력하다. 이문구의 인물들에게는 소박하면서도 오히려 완강한 도덕의식이 존재하는데, 농사꾼의 노동체험에서 체득한 예절이랄까 지혜 같은 것이 배어 있는 것이다. 가령 「장평리 찔레나무」에서 김회장이 ‘반갑잖은 사람’인 시동생이 건강식으로 먹게 까치를 사달라는 말에 “농사꾼은 허구 싶은 것 다르구, 헐 수 없는 것 다르다는 걸 알구 사는 게 농사꾼유”(31면)라고 쏘아붙이는 데서 그같은 삶의 윤리가 엿보인다. 그럼에도 김회장 자신의 행동거지나 이 인물에 대한 작가의 풍자조차도 철저하게 풍속의 영역이나 사고범위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는 것이다.

역시 그의 문학에 긴 생명을 기약해주는 것은 언어의 힘과 아름다움이다. 그의 언어는 방현석이 그 나름대로 붙안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기억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즉 이문구의 작품은 언어, 살아있는 민중적 언어의 존재 그 자체를 통해 민중의 역사와 삶에 대한 깊은 기억을 축복하고 되살리는 것이며, 망각이 깊어 복원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는 그같은 역사와 삶에 대한 송가(頌歌)가 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는 역시 농촌이라는 전통적인 공동체의 기억과도 맺어져 있다. 이른바 유기적 공동체의 기억, 근대가 진행되면서 끝없이 되풀이 환기되는 이 과거에 대한 기억, 더 나아가서 그것의 현재성에 대한 증언이야말로 흔히 복고주의라고 오해될 법도 한 이문구 문학의 근대성이다. 작가가 활동해온 시기 내내 농촌공동체는 와해 혹은 소멸의 운명에 처해온 것이 사실이나, 민중의 생성터전인 농촌현실의 의미를 되살림으로써 근대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도 가능하다. 민중적인 지방어가 생활현실과 맺어져 생동하고 나아가 왁자지껄한 방식의 이른바 다성적(多聲的) 구사로 터져나오는 힘, 그것은 고전적인 리얼리즘이 세기전환기의 오늘에도 살아 있다는 놀라운 확인이 된다.

 

4. 세상에서 가장 끈질긴 기억은, 『당신의 왼편』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건우가 말한 것처럼, ‘몸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80년대의 기억이 현욱에게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깊은 곳에서 기억은 언어에 인각되어 있다. 언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 몸 속속들이 박혀 있는 기억의 원천이자 창조의 원천인 것이다. 민족어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으니, 이문구의 시골 사투리, 그리고 아름다운 우리말의 구사 자체가 민족적인 기억을 담지한 기념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문구에게는 역사적이기보다 근원적인 기억에 더 가까운 무엇이 있어서 방현석이 그토록 치열하게 겪은 80년대의 격랑과 그 상처들이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의 소설에서 80년대는 이상할 정도로 ‘존재가 없다’. 그 아쉬움, 이문구의 원천적인 한계에서 생겨나는 그같은 아쉬움의 한 자락을 젊은 작가 김종광이 시원하게 씻어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의 소설집 『경찰서여, 안녕』을 읽는 일은 서늘한 경험이었다.

김종광은 재능있는 이야기꾼이고(이야기도 꾸밀 줄 모르면서 요설에 사로잡힌 사람들과는 달리), 소설문법에 충실하되 나름대로의 작은 실험들을 효과적으로 해내고(기괴하고 새로운 것을 선보이지 않으면 소설이 안 되는 것처럼 아는 사람들과는 달리), 무엇보다도 요즈음의 대다수 젊은 작가답지 않게 기교를 탐하지 않는다. 하나같이 시원시원하게 읽히는 것도 그 때문인데, 역설적이게도 이런 특성들이야말로 쉽게 읽히기를 기피하는 포스트모던의 관습을 무너뜨리는 하나의 혁신일 수가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실험이 관습이 된 세상에서 사실성에 충실하려는 태도의 낯섦, 김종광의 신선함의 한 근원은 이것이다(실제로 김종광은 여러 곳에서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기법으로 일컬어지는 ‘낯설게 하기’를 즐겨 사용하여 오히려 리얼리즘의 효과를 보고 있다).

90년대하고도 후반의 작가라고 할 김종광이 이처럼 ‘철지난’ 리얼리즘의 영역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두고 새로운 세대에서 새롭게 창출되는 리얼리즘의 징후를 읽기에는 아직 이를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선배 작가 이문구와도 구별되는 새로운 면모들을 보여주고 있음은 주목되어 마땅하다. 이문구적인 세계를 연상시키는 작품들도 상당수 있긴 하다. 가장 최근에 쓴 「짚가리, 비릊다」라는 작품은 직접 농촌과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기도 하거니와, 그외에도 원동기 시험장의 풍경과 인간군상을 그린 「많이많이 축하드려유」, 소도시 노인들의 소일과 그 주변풍경을 그린 「편안한 밤이 오기 전에」, 동사무소에서 시행하는 공공근로의 일상을 그린 「모종하는 사람들」, 그리고 공무원과 결탁하여 시골사람들을 등쳐먹는 사기꾼과 시골여자 들의 난리법석을 그린 「중소기업 상품설명회」 같은 작품들에는 걸쭉한 입담과 풍자나 해학, 그리고 시골 혹은 소도시의 풍습에 대한 충실한 묘사 등 아닌게아니라 ‘작은 이문구’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러나 표제작인 「경찰서여, 안녕」이라든가 「분필교향곡」 「검문」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육점에서」의 지독한 패러독스와 전복의 세계는 분명 이문구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특히 후자의 작품들에서 두드러지지만, 김종광은 인간들 사이의 권력관계와 그것이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에 미치는 미묘한 파장에 예민하다. 「분필교향곡」의 그 대표적인 예인데, 이 난리굿판을 관조하는 시선에 담긴 짙은 우수가 일종의 블랙코미디 효과를 창출한다. 이 작품을 비롯해서, 다른 작품들도 기본적으로 권력구조의 폭력성에 대한 고찰이자 그로 인해 발생하는 아이러니를 깔고 있으며, 때때로는 정치적 알레고리의 양상조차 엿보인다. 그런데 이같은 관심과 양상 자체가 풍속성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문구적인 전통을 잇고 있는 전자의 작품군들도 정작 들여다보면 그 전통과는 상이한 요소들이 많이 틈입해 있다. 근본적으로는 이같은 유형의 작품들이 풍속성을 다 벗어버릴 수야 없겠지만, 「많이많이 축하드려유」나 「모종하는 사람들」에서 두드러지듯, 풍속에 대한 관심 못지않게 그 작품들을 끌어가는 추동력은 사건에 대한 거의 모사에 가까운 재현이다. 이문구에게서 흔히 보이는 훈계 투의 도덕주의도 자취가 없어 거의 삭막하게조차 여겨지지만, 그만큼 더 리얼하다. 사투리뿐 아니라 이문구가 좀체 사용하지 않는 쌍말까지 적절히 구사함으로써 현실감을 살리는 데 기여한다.

 

5. 이문구까지 포함하여 우연찮게도 이번에 읽은 작가들은 모두 같은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한 선후배간이다. 더구나 모두 시골 출신(이문구와 김종광은 고향도 충청도 보령으로 같다)으로 문학에 투신하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였다. 특히 방현석과 김종광은 나이로도 꼭 십년 차이고, 각각 80년대와 90년대에 같은 캠퍼스에서 대학시절을 보냈다. 대선배인 이문구는 그렇다 치더라도, 방현석과 김종광 소설의 차이는 이 두 연대 사이의 세대차와도 무관하지 않은 듯 보인다. 방현석은 진지하고 무거운 데 비해, 김종광은 상대적으로 풍자적이고 날렵하다. 김종광에게는 방현석에게서 보이는 도덕적 정당성에의 강박이 없는 대신, 그만큼 자기존재를 건 치열함은 덜하다. 80년대의 운동에 공감하고는 있으되, 현실문제의 정면돌파를 감행하기보다는 측면을 치고 빠지는 식이며, 직접 문제 속에 뛰어들어 허우적거리면서 찾아내는 힘이 부족하다. 역시 지난 연대의 현재성에 관한 한 ‘몸의 기억’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기대되는 신인임은 분명하나, 사태의 변죽을 건드리는 타성에 머물까 하는 우려가 생기는 한켠의 이유도 이것이다. 그러나, 오랜만에 새로운 좋은 작가를 만났으니, 이런 걱정이야말로 기우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