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실학의 현대적 계승과 한국학
임형택 『실사구시의 한국학』, 창작과비평사 2000
박희병 朴熙秉
서울대 국문과 교수, 한국한문학·고전산문 전공.
1. 하도 많은 책이 쏟아져나와 비슷비슷한 책 이름을 많이 접하게 되는 요즘 상황에서 임형택(林熒澤) 교수의 『실사구시의 한국학』은 우선 제목부터가 신선하다.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말은 이즈음 꽤 알려져 있지만, 이 말을 ‘한국학’과 결합시키기로는 이 책이 처음이다.
저자는 국문학연구자다. 국문학 중에서도 한국한문학이 주전공이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 다루는 분야가 아주 호한하다. 문학은 물론이려니와, 역사·철학·정치·교육 등을 두루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지금 우리의 학문 풍토에서는 퍽 이상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혹자는 이를 월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의 전공인 한문학의 성격을 조금만 이해한다면 이는 전연 이상한 일이 아니며 또한 월권도 아니다. 동아시아의 전통, 그리고 한국의 전통에서 한문학은 이른바 문·사·철(文史哲)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가령 한국한문학사에서 높은 봉우리를 점하고 있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문학적 저술만이 아니라, 철학적 저술과 역사학적 저술을 두루 남기고 있다. 그러므로 저자는 넓게 보면 동아시아의 학술전통, 좁게 보면 한국의 학술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문학을 전공하는 연구자가 모두 저자처럼 관심 영역을 문·사·철 전반에 두고 있지는 않다. 대개들 문학에 국한된 연구를 하고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저자의 이 책은 과거의 한문학 전통에서 볼 때에는 조금도 이상한 책이 아니지만, 지금의 한문학 연구 풍토에서 보면 역시 이상한 책일 수 있다.
그런데 저자가 이 책의 성과를 통해 학계에 제론(提論)하고 있는 몇가지 핵심적인 주장 중의 하나는,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는 이 작업이 결코 이상한 것으로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일 터이다. 무슨 말인가? 저자는 한문학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함으로써 한국학의 쇄말화를 지양하고 그 종합적·유기적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한국학의 위기를 타개하는 데 한 주요한 방책이 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 학계는 저자의 이런 주장을 경청하면서 그 학적 실천이 갖는 의미를 요모조모 음미해야 할 것으로 본다.
저자의 연구는 문학 따로, 철학 따로, 역사 따로가 아니다. 물론 어느 쪽에 치중하고 있는가에 따라, ‘이건 문학 쪽에 속하는 연구군, 음 저건 철학, 그리고 이건 아무래도 역사 쪽에 속하는 연구군’ 하고 읽는 사람이 분류해볼 수는 있다. 그렇지만 놓쳐서는 안될 사실은, 문학 논문에 역사와 철학에 대한 공부가 삼투되어 있고, 역사 논문에 문학과 철학에 대한 공부가 삼투되어 있으며, 철학 논문에 문학과 역사에 대한 공부가 삼투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문학·역사·철학에 대한 공부는 서로 뒤섞이고 혼융됨으로써 묘한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비단 인용 자료와 논리 전개에서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의 방식, 논문의 문체에서까지 그 점은 관철된다. 가령 권득기(權得己)의 경학(經學)을 논하는 자리에 박지원(朴趾源)의 문학작품 「허생전」을 들이대기도 하고(390면), 정약용의 정치사상을 논하는 자리에 홍길동·임꺽정을 거론하기도 한다(349면). 그래서 저자의 논문은 재미있다. 재미있다는 말은, 우리가 아름다운 사물을 대할 때처럼 하등 지루하지 않다는 뜻이다. 동업자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한국학 관련 논문들은 대개 재미가 없다. 읽는 재미가 있으면서도 깊디깊은 사유를 지닌 글을 한국학에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다. 한국학이 이럴진대 다른 분야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저자의 글쓰기는 계시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글쓰기가 보여주는 이러한 혼융과 상승은 궁극적으로 저자의 깊은 학식에서 우러나오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고심하는 저자의 글쓰기 자세에 힘입고 있는 바 역시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저자는 마치 장인(匠人)이 심혼을 다해 정성스럽게 물건을 만들듯 그런 태도로 논문을 쓰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2. 저자의 논문들은 모두, 그 주제가 참신하고 문제의식이 심각하며 논리와 자료해석이 엄정하고 균형잡혀 있다. 저자는 많은 중요한 문제에 있어 새 길을 열고 있다. 그 길은 원래 길이 없던 데서 새로 개척된 것이지만, 탄탄하고 아담하여 뒷사람이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는 길이다. 아마도 후인들은 성심껏 닦인 이 길들을 통해 더 큰 길, 더 먼 길에까지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글들은 또한 대부분 현실적 연관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다시 말해 현실적 요구에 따라 작성된바 시의성이 높은 것이다. 예컨대 「국학의 성립과정과 실학에 대한 인식」은 세계화 담론과 인문학 위기론에 대응하여 한국학의 정체성과 학적 근거를 역사적·논리적으로 정초(定礎)하기 위해 작성되었으며, 「한국문화에 대한 역사적 인식논리」는 동아시아의 전통 속에서 근대를 재조명함으로써 향후 우리 문화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씌어진 것이다. 이처럼 큰 논제에서만 현실과의 관련성이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잡힌 논제에서도 그 점은 확인된다. 가령 「이조 말 지식인의 분화와 문학의 희작화 경향」이나 「정약용의 민주적 정치사상의 이론적·현실적 근저」와 같은 논문의 기저에는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감, 그리고 그에 대한 학적 대응의 자세가 자리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여러 영역에 걸쳐 다양한 문제들을 검토하고 있지만 그 모두를 관통하는 공통된 방법과 원리가 있는바, 그것이 곧 ‘실사구시’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책은 실사구시를 주창하는 데서 시작해, 그 타당성을 두루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그 성과를 테제화하고 일반화하는 것으로 종결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실사구시와 관련한 저자의 작업은 다음의 몇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실사구시라는 개념의 역사적 연원과 전개과정을 검토하고 이를 근대학문인 한국학의 방법적 기초로 삼는 작업. 저자는 이 작업에 큰 공력을 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실사구시 개념이 갖는 주요한 속성과 지향으로서 현실성·주체성·비판성·역사성 등을 추출해내고 있다.
둘째, 실사구시의 방법을 한국학의 실제 연구에 적용하면서 그 타당성을 점검하고 시현(示現)해 보이는 작업. 이 작업은 궁극적으로, 조박(糟粕)과 정수(精髓)를 함께 가지고 있는 민족의 고전유산을 현대적으로 어떻게 계승하면서 창조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셋째, 세계화 담론과 한국학의 위기에 대한 적극적 대응책으로서 실사구시의 개념을 다잡고 재성찰하는 작업. 여기서 실사구시 개념에 한층 더 세계사적 관련이 부여된다.
사실 한국학의 방법론으로서 실사구시에 대한 저자의 학적 탐구와 실천은 결코 이 책에 국한된 일이 아니요, 그 평생의 화두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 점에서 저자의 학문은 입문기(入門期) 이래 노숙한 입실(入室)의 경지에 이르렀다 할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이관지(一以貫之)’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의 ‘일이관지’는 정태적 동일성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그 내부에 다이내믹한 활기와 궤적을 내포하고 있다. 이 활기와 궤적은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국학자로서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에 대한 논리적 대응을 꾀함으로써 형성될 수 있었던, 비유컨대 저 나무의 나이테와 같은 것일 터이다. 만일 그간 한국사회의 굵직한 지적 흐름을 염두에 두고 이 나이테를 분석해본다면, 내재적 발전론, 민족문학론, 리얼리즘론, 근대성 논의, 동아시아론 등이 특히 깊은 관련을 보이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말하자면 저자의 실사구시 개념은 우리 사회의 주요한 쟁점들을 통과하면서 부단히 단련되고 보완되고 확장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 이래의 조선시대 실학은 저자가 있음으로 해서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저자에게서 실학자의 ‘환생’을 목도한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3. 실사구시는 이념에 구애되지 말고 현실, 혹은 사실관계를 직시하자고 주장하므로 이념의 횡포를 넘어서는 데는 아주 유력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실사구시는 넓은 의미에서 실용주의적 경향을 갖기 쉽다. 실용주의는 그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도 갖고 있다. 이념의 결여, 세계와 사물의 근원을 파헤치려는 래디컬한 문제의식의 소거, 현실의 비판과 개선을 위한 성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체제온존적 태도 등이 그것이다.
한편 실사구시는 이념의 횡포를 벗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이념의 부재에 시달릴 수 있다. 실사구시는 적어도 이념의 횡포가 해소된 단계에서는 이념 혹은 이론의 부재를 변명하거나 은폐하는 구호로 화할 여지가 없지 않다. 요컨대 실사구시는 그 개념의 태생상 이념적·이론적 지향에 있어 중대한 약점을 안고 있지 않나 보인다. 그런데 한국학에서 무엇 때문에 이념과 이론이 필요한가? 한국학이 ‘사실학’에 그치지 않으려면 ‘이론학’에 대한 추구는 불가피하며, 이 둘이 함께 발전해야 비로소 한국학의 몸과 마음이 균형을 유지하면서 세계학문의 반열에 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념과 이론은 치우치면 폐해를 낳지만, 사실 혹은 현실과의 긴장을 유지하는 한 본질적 중요성을 갖는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볼 때 실사구시를 강조한 실학보다는 실학이 비판한 성리학이 그 여러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론학으로서의 면모를 더 강하게 보여주지 않는가? 실사구시를 아무리 밀고 나가더라도 그 안에서 이론학의 입지가 마련될 수 있을까?
실사구시가 갖는 또하나의 문제점은 크게 보아 그것이 유학의 전통, 유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전통적으로 유학에서는 불가(佛家)나 도가(道家)의 학문을 이단이나 허학(虛學)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요구, 특히 근대학문과 문명을 넘어서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할 입장에서 본다면, 유학적 전통만이 아니라 불가나 도가의 전통 역시 중요하다. 불가와 도가의 전통을 21세기 한국학의 이론과 실천에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 이는 대단히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외에도 저자의 실사구시 개념이 그 근저에 강고한 직선적 발전사관을 깔고 있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할 사항이다. 이는 전반적으로 중세와 근대를 대칭시키면서 중세(중세적 가치)의 부정과 근대(근대적 가치)의 긍정을 낳고 있지 않나 보인다. 이런 입장은 전술적으로 볼 때 중세를 청산하는 데는 유리하지만 근대학문을 극복하는 데는 그다지 유리하지 않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상, 저자의 실사구시 개념과 관련해 서평자의 생각을 억지로 몇가지 첨부하긴 했지만, 천학(淺學)의 망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그러나 서평자의 지적 중에 설사 맞는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문제해결에 있어 꼭 저자만이 책임을 질 일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서평자를 포함해 한국학에 종사하는 후학들이 저자의 성취를 잘 이어받아 논의를 확대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저자에 대한 예의이며 그 노고에 대한 진정한 감사의 표시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