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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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2000년을 여는 젊은 시인 20인

 

최영숙 崔英淑

1960년 서울 출생. 1992년 『민족과문학』으로 등단. 시집 『골목 하나를 사이로』가 있음.

 

 

 

한밤에 일어나

 

 

보일러에 피 도는 소리 뼈와 살이 녹는다 아이와 잠든 지아비 사이를 빠져나와 듣는 새벽 다섯시 이것은 空도 色도 아니다 세상의 밥을 먹는 아이는 점점 자라 인간의 자식이 되어가고 캄캄한 우주의 자궁 속 제가 온 곳을 잊는다 색도 공도 아닌 혼돈 그것이 질서였을 한 별에서 떨어져나온 알 수 없는 슬픔이 그의 일생을 이끌 것이다 우리가 약속하기를 어느 별에서 만나 한 이부자리에 식구가 되어 나란히 뼈와 살을 누인다는 것이 몇겁을 벗고 다시 돈다 해도 이땅만큼 선명하지 않으리 세상의 늙은 아비와 아이의 맑은 몸이 얽혀 만드는 저 별자리를 하늘에 부쳐 이름하면 무언가 내가 모르는 어느 먼 곳을 다녀와 아침에 깰 때면 나를 알아보기나 하려는가

 

 

 

비망기(備忘記) 1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누가 남겨놓았을까

정거장 옆 낡은 공중전화에는

통화는 할 수 있으나 반환되지 않는 돈

60원이 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나는

어디로도 반환되지 않을 것이다

이 봄

 

긴 병 끝에 겨울은 가고

들판을 밀고 가는 황사바람을 따라

부음은 왔다 어느 하루

민들레 노란 꽃이

상장처럼 피던 날 너는

어지러이 마지막 숨을 돌리고

나는 남아 이렇게 안 오는 버스를 기다리며

떠도는 홀씨 환한 손바닥으로

받아보려는 것이다

 

저 우연한 단돈 60원이

생의 비밀이라면

이미 써버린 지난 세월 속에서

무엇과 소통하고 무엇이 남아

앞으로 남은 시간을 견디게 할 것인가

산다는 것이 통화는 할 수 있으나

반환되지 않는다는 것을

반환되지 않는 것조차 남기고 간다는 것을

 

너는 알았을 것이다

나만 몰랐을 것이다 호주머니 속의 두 손처럼

세월이 가고 다시 이 자리에 섰을 때

무엇이 달라져 있을 것인가

나 또한 바람 속에 흩어져 있을 것이고

흩어진 자리에 민들레꽃 한두 송이

너를 기억할 것이다 안녕, 사랑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