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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일상을 포착하는 내밀한 시선
영화 「오! 수정」
백문임 白文任
영화평론가. 연세대 강사
홍상수(洪尙秀)의 세번째 영화라는 이유만으로 개봉 전부터 기대와 관심을 모은 「오! 수정」은 의외로 매우 코믹하고 극적 집중도가 높은 작품이었다. 일상의 이율배반과 지리멸렬을 보아내는 시선은 전혀 무뎌지지 않았지만, 그 일상의 곳곳을 메우는 어떤 감응 내지 공감의 에너지마저 포착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성급한 평자들은 에릭 로메르(Eric Rohmer)나 압바스 끼아로스따미(Abbas Kiarostami)의 여유와 유머를 홍상수의 미래 작품들에서 점쳐보기도 한다. 이웃의 아주 작은 얘기들을 둘러보는 세심함, 그리고 얼핏 아귀가 맞지 않는 삶의 표면들을 편안하게 웃으며 관조하는 여유. 그렇다면 「오! 수정」은 홍상수의 미미하지만 중요한 전환의 징후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2개월간에 걸친 남녀의 연애담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들이 최초의 육체관계를 맺기 직전의 순간에 서사가 시작되어 이들이 처음 만나던 날로 플래시백되면서 그간의 만남에 대한 각자의 기억이 재구성된 후 다시 서사가 진전되는 영화이다. 독특한 것이 있다면 지난 2개월간의 만남에 대한 남녀의 기억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술자리에서의 대화내용이나 좁은 골목길에 함께 들어갔던 대상, 키스할 때 바닥에 떨어졌던 물건 등등에 대한 기억의 사소한 어긋남이기도 하고,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끼고 접근하기 시작하는 동기 또는 태도에 대한 기억의 어긋남이기도 하다. 이 어긋난 기억 속에서 때로는 상대방에게는 숨기고 있는, 다른 이성과의 미묘한 관계가 포착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어긋남들은 이들의 연애를 위선적이거나 가증스러운 것으로 만들 만큼 위력적이지는 않다. 우리 누구나가 조금씩은 기억의 착오와 악의 없는 거짓포즈를 지니고 살듯이, 이들도 그렇고 그런 연애관계에 빠져 있는 거라고 포용할 수 있는 분위기 속에 그려지는 것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과 「강원도의 힘」(1998)에서 홍상수가 집착했던 것도 로맨스였다. 그러나 이때 로맨스는 인간의 이율배반과 속물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관계이기 때문에 차용된 것에 불과하다. 로맨스는 고전적인 주제이지만, 그리고 휴머니즘과 숭고함과 근원적인 인간심성을 옹호하고 재확인하기 위해 즐겨 찬양되어온 주제이지만, 홍상수에게 그것은 다름아닌 바로 그 인간의 자기모순을 가장 잘 보여주는 관계로 포착된다. 수많은 예술작품 혹은 대중문화 텍스트에서 탈일상적인 감정의 순화를 가능케 하며 인간성의 비약과 승화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재현되는 이 로맨스는 과연 그렇게 극적인 서사와 숭고한 초월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 것인가. 홍상수는 연애에 빠진 사람들도 끊임없이 이해관계를 계산하고, 자기애를 질투로 위장해 살며, 사랑받지 못할 땐 애정을 곧 적개심으로 타락시킨다는 것을 냉소한다. 그가 영화에서 불륜과 짝사랑을 즐겨 형상화하는 것도, 그것이 가장 극적이고 애달픈 관계이면서 동시에 가장 왜곡되고 모순적인 관계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인 것만 같다.
그러나 「오! 수정」에 오면 로맨스에 대한 이러한 날카롭고도 관찰자적인 메스는 많이 무디어진다. 물론 이 작품에서도 청춘남녀의 로맨스가 순결하고 이타적인 것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경복궁에서 수정과 재회한 것에 대해 재훈은 ‘우연’ 내지 ‘인연’으로 기억하지만, 수정의 기억 속에서 그것은 재훈을 다시 만나려 는 자신의 집요한 노력 덕분이었다. 자신과의 키스가 수정의 첫키스 경험이라는 사실에 재훈은 감격하지만, 실은 수정은 상사인 방송국 PD와 이미 키스를 나눈 사이일뿐더러 이전에도 성경험의 불장난을 저지른 경력이 있는, 결코 ‘순진’하지는 않은 처녀이다. 재훈의 벤츠는 어떤가. 재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수정은 재훈과의 첫만남에서 그가 운전사를 고용해 벤츠를 굴리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오! 수정」은 그것을 인간의 나약함으로, 그래서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이라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로맨스를 되풀이하는 ‘삶’으로 감싸안는다. 감독이 지극히 관찰자적인 시선을 견지해 다소 무미건조했던 이전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에서 코믹한 상황과 대사가 빈번히 등장하는 것도, 이들 커플을 약간 우스꽝스럽게는 만들지언정, 냉소나 경멸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두 사람이 마침내 첫 육체관계를 맺은 후 행복하게 미래를 약속하는 장면은, 가장 불안하고 미심쩍은 장면이면서도, 두 사람에게 이 순간만은 허용해주려는 감독의 의도가 느껴진다. 속고 속이기는 하지만, 그 모든 포즈와 이율배반을 넘어서는 어떤 ‘씨너지효과’가 로맨스에 내재해 있기도 하다는 것을, 홍상수는 불현듯 깨달았거나 아니면 믿고 싶어졌는지도 모른다.
형식적으로 보자면 이는 「오! 수정」에 와서 비로소 카메라와 인물들 사이에 교섭작용이 일어난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이전의 영화들에서 실질적인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카메라였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강원도의 힘」에서 전반부의 마지막 컷, 그러니까 여주인공 지숙이 강원도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흐느끼는 장면은 관객을 무척이나 난처하게 한다. 여태껏 지숙의 행동은 카메라에 의해 중개되었지만, 그래서 관객은 그녀가 어떤 유부남과 연애를 했고 지금은 헤어졌다는 정보를 소유하고는 있지만, 정작 자신과 그녀의 시선, 그녀의 심리를 동일시할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관객은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인물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인물의 과거와 미래를 유추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들에게 감정이입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홍상수의 이전 영화들은, 마치 인물들의 일상을 무심하게 보여주는 것 같지만, 결코 미메시스(mimesis)적이지 않다. 수다스럽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은 카메라의 막강한 중개력 때문에, 즉 많은 것을 보여주지만 실은 인물들과 거리를 취하고 냉소하기까지 하는 뚜렷한 자의식을 가진 카메라의 장악력 때문에, 오히려 단일하고 독백적인 디에게시스(diegesis) 형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 수정」에 오면 카메라가 인물들에게 좀더 많은 것을 허용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도 실은 카메라의 장악력이 매우 우위에 놓여 있기는 하다. 앞서 두 연인의 각기 다른 기억의 플래시백이라고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수정의 기억이건 재훈의 기억이건 완전히 그들만의 기억은 아니다. 시점의 문제로만 보더라도 각 기억의 에피소드들에는 기억하는 주체의 시점에서는 포착될 수 없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선배의 부인과 재훈이 포옹하는 장면은 수정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결코 수정이 목격했던 장면은 아니다. 재훈의 방에서 수정이 브래지어를 벗는 장면 역시 재훈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만 그 순간에 욕실에 있었던 재훈이 보았을 리 없는 장면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서사 대부분을 이루는 플래시백 장면들은 각자의 기억과 상상이 압축과 치환을 일으키며 재구성된 것이기도 하고, 거기에 카메라의 시선만이 포착할 수 있는 단편들이 추가되어 일정한 서사로 재조립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 카메라는 주인공들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방향조정되어 있다. 어긋나고 뒤틀리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다지 자기희생적이거나 숭고한 것은 아니지만, 주인공들이 로맨스를 경험하고 그 무늬를 짜넣는 방식에 대해 카메라는 무심하게 관찰하거나 냉소하지만은 않는다. 그들의 기억과 시선에 동의하기도 하고 어떨 땐 약간 비웃기도 하면서, 주인공들의 욕망과 교섭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맨스에 대한 이러한 시각변화와 카메라의 방향전환 혹은 권력분배가 낳은 부수효과는, 홍상수의 영화가 관객과 좀더 편하게 소통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는 점이다. 이전 영화들이나 「오! 수정」이나 우리네의 일상으로 고착되어 있는 상습적인 자기모순과 이율배반을 날카롭게 포착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로 ‘끔찍한’ 영화들이다. 하지만 우리의 못난 모습을 까발리며 또 거기에서 헤어나올 수 없음을 재확인해주는 영화보다는 그것을 용인하고 감싸안아주는 영화가 좀더 대중적인 호소력을 갖는 것은 물론이다. 또한 카메라가 던져주는 단서들을 힘겹게 쫓아가며 인물의 심리와 정황을 유추하게 하는 영화보다는 인물들과 시점을 공유할 수 있게 해주는 영화가 우리를 편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을 「오! 수정」의 장점이라 해야 할지 단점이라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그간 행복한 여건 속에서 독자적인 시각과 화법을 구사함으로써 한국영화의 영역을 성큼 넓혀놓았던 한 감독이, 동어반복과 자기반영의 원환(圓環)에 갇히지 않고 자신의 카메라와 인물들의 관계를 재조정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자폐적인 영화는, 최근 한국영화계의 제작 열기 맥락을 염두에 둘 때 분명 소중한 미덕을 발휘할 수 있지만, 관찰과 냉소의 밑바닥을 거쳐 나온 유연하고도 노회한 영화는, 자기갱신과 실험이 부재한 우리 문화적 토양이 더 절실하게 요구하는 것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