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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신자유주의와 중국 지식인의 대응

동아시아 연대를 위하여

 

 

왕 후이

한중국사회과학원 대학원 교수, 문학연구소 연구원

이욱연

영동대학교 외국어학부 교수, 중국문학

 

 

때: 2000년 9월 28일

곳: 창작과비평사 회의실

 

110-336

 

이욱연  먼저, 서울에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처음으로 한국에 온 소감이 어떠신지요. 물론 온 지 며칠 되지 않았고, 게다가 매일 회의와 인터뷰 등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왕 후이 선생은 중국 지식인들 중에서도 한국 지식인들과의 교류가 비교적 활발한 편이고, 한국 지식인의 상황이나 한국 현실 등에 대해서 꾸준히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더구나 그동안 몇차례 방한 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무산되기도 했었고요.

왕후이  이번에 한국에 온 것은 두 가지 일 때문입니다. 하나는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국제적 잡지와 관련한 일들을 논의하기 위해서이고, 하나는 국제문학포럼에 참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다보니 백낙청 선생을 비롯하여 각국의 지인들을 여기서 다시 만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전체적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제는 잠시 틈을 내 전쟁기념관과 남산의 서울타워에 갔고, 어제는 「의형제」라는 연극을 보았는데, 그중에서 한국전쟁에 관한, 제가 어려서부터 배우고 익히 들어왔던 것과 매우 다른 해석, 다른 서사를 접한 점이 의미 있었습니다. 한강만 해도 내 기억 속의 한강은 어렸을 때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 의용군들이 쓴 참전수기에 나오던 것입니다. 첫 방문이지만, 그동안 한국 친구들로부터 한국에 대해 익히 들어왔기 때문인지 그리 낯설지는 않아요.

 

 

중국 지식인사회의 분화: 신자유주의자와 비판적 지식인 그룹

 

이욱연  한국 방문은 처음이지만 『창작과비평』과는 이미 구면인 셈이죠? 『창작과비평』 1994년 겨울호에 「중국사회주의와 근대성 문제」라는 글이 실렸고, 그 글은 그동안 미국과 일본·대만·홍콩 등 각국의 주요 잡지에 전재되면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지요. 중국에서는 4년이 지난 뒤에야 발표될 수 있었지만, 그 글이 발표된 뒤 이른바 신좌파와 자유주의 지식인들 사이의 논쟁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는 등 왕선생 자신의 표현대로 글 한편이 그야말로 ‘사건’이 되어버렸는데요. 그 글이 중국 지식인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그 글로 인해 여러가지 변화를 겪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루 쉰(魯迅) 연구자, 문학 연구자로서의 신분에 변화가 있었던 점도 그중 하나일 테죠? 물론 이번에는 문학평론가 신분으로 오긴 했지만 말이죠.

 

汪暉 중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화 과정에서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민중의 일상생활  영역에까지 민주주의가 확장되지 않는다면 결국  특정 세력이 이를 지배할 것입니다. 1959년 양져우(揚州)생. 1988년 중국사회과학원 대학원 졸업.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대학원 교수 및 문학연구소 연구원, 『뚜슈』 주간. 주요 논저로 『절망에 대한 반항─루 쉰 및 그 문학세계』 『왕후이 자선집』 등이 있음.

汪暉 중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화 과정에서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민중의 일상생활 영역에까지 민주주의가 확장되지 않는다면 결국 특정 세력이 이를 지배할 것입니다.

 

1959년 양져우(揚州)생. 1988년 중국사회과학원 대학원 졸업.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대학원 교수 및 문학연구소 연구원, 『뚜슈』 주간. 주요 논저로 『절망에 대한 반항─루 쉰 및 그 문학세계』 『왕후이 자선집』 등이 있음.

 

왕후이  그 점에 관해서는 먼저 그 글을 쓰게 된 계기를 제공해준 『창작과비평』에 감사를 표해야겠습니다. 이전부터, 그리고 6·4 톈안먼(天安門)운동을 겪은 뒤부터는 더욱더 중국의 현실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내 주요 연구분야는 청말(淸末)과 중화민국 초기의 사상사였습니다. 때문에 중국 당대 현실에 관한 연구는 극히 적었는데, 8,90년대 문제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근대성의 각도에서 중국현대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를 검토한 그 글이 연구의 전환점이 되었지요. 그 글이 근대성에 관한 토론을 촉발시키는 한 계기가 되었고, 나도 거기에 직접 참여하여 대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토론은 지금도 진행중이고요. 아시아 금융위기 이전에 중국 지식인들은 세계화에 극단적인 환상을 지니고 있었는데, 금융위기를 겪고 난 뒤 그런 환상이 무너졌거나 적어도 타격은 받았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내 글을 둘러싼 토론은 세계화 문제를 포함하여 중국이 직면해 있는 문제를 다시금 사고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내 개인적으로도 물론 그렇구요.

이욱연  90년대 중국의 가장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지식인 대오의 분화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글로 인해 본격화된 이른바 자유주의와 신좌파 사이의 논쟁이 그같은 분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80년대 중국 지식인들이 반문화대혁명·반봉건이라는 점에서 일치된 사상적 대오를 이루었지만, 1989년 6·4 톈안먼사태 이후, 즉 개혁·개방의 제2기라 할 이른바 ‘포스트 신시기’에 이르러 시장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경제적 이해관계 그리고 중국사회의 변혁 전망과 중국 현실에 대한 인식 등과 관련하여 중요한 분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에 대해 왕선생이 현재 중국 지식인사회를 자유주의와 신좌파의 대립구도로 나누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불만을 토로한 것을 보았는데, 저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리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중국적 상황에 대해 수긍이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대립이 이미 현실로 존재하는만큼, 그러한 대립과 모순을 확인하고, 그것들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일이 오히려 더 필요하지 않나 하는 것이죠. 최근 들어 왕선생이 쓴 글들을 보면 자유주의와 신좌파라는 구도보다는 신자유주의자와 비판적 지식인 그룹이라는 구도를 설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李旭淵 한국 역시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거의 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일국적 차원의 저항은  물론 전지구적 차원의 저항, 구체적으로는 동아시아 연대가 한층 강화되어야 합니다.

李旭淵 한국 역시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거의 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일국적 차원의 저항은 물론 전지구적 차원의 저항, 구체적으로는 동아시아 연대가 한층 강화되어야 합니다.

 

1963년생. 고려대 중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현재 영동대학교 외국어학부 교수, 중국문학 전공. 주요 논저로 「노신의 소설 창작과 기억의 서사」 「중국 지식인사회의 새로운 동향─‘신좌파’를 중심으로」 등이 있음.

 

왕후이  저는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와 신좌파라는 이원대립으로 중국 지식인사회를 묘사하는 데 반대합니다. 그들이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쓰는 데 동의하지 않는 겁니다. 중국에는 많은 비판적 지식인들이 있지만, 그들 모두를 신좌파라 칭한다면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욱연  비판적 지식인이란 급진적 자유주의자를 말하는 건가요?

왕후이  꼭 그렇지만은 않은데, 자유주의의 우익이 신자유주의자들이고, 자유주의의 좌익을 신좌파 혹은 비판적 지식인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허 칭롄(何淸漣)도, 저는 비판적 지식인이라고 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유주의 좌파와 자유주의 우파, 즉 신자유주의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죠. 사회운동 혹은 사상투쟁의 측면에서 볼 때 비판적 지식인들이 훨씬 더 광범위한 영향력을 지녔는데, 그들 중에는 좌익이론을 지닌 사람도 있고, 계몽적 지식인도 있고, 자신을 자유주의자로 보는 이도 있습니다. 중국에서 자유주의가 정당성을 내세우는 것은 원래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실패한 데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신좌파와 신자유주의의 관계는 앞으로도 토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다만 둘 사이에 중요한 사상적 대립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이는 이론적으로 구분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죠.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와 신좌파라는 이원대립 구도는 신자유주의자들이 만들어낸 것이고, 이는 반드시 타파되어야 하며, 이같은 구도로는 현재 중국 지식인사회를 개괄해낼 수 없다고 봅니다.

이욱연  물론 자유주의나 신좌파 등 어떤 이론적·사상적 배경에 따라 현재의 지식인들을 구분하는 것은 당연히 문제가 있겠지요. 중요한 것은 현재 하이에크(F.A. Hayek) 식의 자유주의를 숭상하는 중국의 발전주의자들, 시장주의자들과 신좌파들, 왕선생의 표현대로라면 비판적 지식인들 사이에는 중국 현실에 대한 진단과 변혁의 전망, 특히 현재 중국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경제개혁에 대한 입장 등에서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이 아닐까요? 더구나 양자의 차이가 경제적 평등이나 국영기업의 올바른 민영화 등의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어차피 중국 현실을 어떻게 변혁할 것인가가 핵심문제라고 할 때, 문학평론가 리 퉈(李陀)도 지적했듯이, 오히려 그런 대립을 노출시키고 차이를 분명히하는 과정에서 중국 현실의 변혁을 위한 전략과 전망을 모색해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왕후이  옳은 지적입니다. 다만 그같은 대립을 없는 것처럼 은폐하자는 게 아니라, 중국 자유주의가 매우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욱연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에 관한 논쟁으로 규정하는 편이 더 명료하겠습니다.

왕후이  그렇습니다. 논쟁 혹은 대립의 촛점이 이론이나 각자들의 사상적 배경에 있지 않습니다. 만일 신좌파가 존재한다면 그것과 대립되는 것은 신우익이지, 자유주의는 아니죠. 이렇게 볼 때, 중국 신자유주의와 비판적 지식인들 사이의 대립의 핵심은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평등과 사회정의의 문제, 민주주의의 문제 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점입니다.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는 경제적 민주주의, 사회평등과 불가분의 관계

 

이욱연  말씀하시는 민주주의란 정치적·경제적 민주주의를 포괄하는 건가요?

왕후이  꼭 그것만은 아니고, 민주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이해를 뜻합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요점은, 그들이 80년대말부터 가속화된 시장화 과정을 자생적이고 자연적인 것으로 본다는 겁니다. 그들은 중국사회의 계급분화에 대해서도 그것을 계획적·강제적 분화 과정으로 보지 않습니다. 또 경제적 시장화 과정을 통해 정치적 민주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여깁니다. 때문에 80년대말과 90년대초에 그들은 신권위주의를 통해 시장화를 추진하려 했지요. 시장의 성숙을 통해 민주주의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었죠. 또 하나, 신자유주의자들은 정치 영역에서는 민주주의의 문제를 거론할 수 있지만 경제 영역에서는 민주주의의 문제를 거론할 수 없다고 봅니다. 경제 영역에는 오직 자유의 문제, 자유경쟁의 문제만이 있고, 민주주의의 문제는 없다고 보는 거죠. 그렇지만 제가 신자유주의에 대해 주로 비판을 가하는 것은 그들보다 민주주의의 문제를 훨씬 폭넓게 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에는 특히 일반 민중의 참여가 필수적이죠. 일반 민중들이 자기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기본 규칙들에 대해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이야기하듯이 시장메커니즘이라는 자연적 과정에 의해 해결될 수 없습니다. 만일 민주주의가 일상생활 영역에까지 확장되지 않을 경우 어느 특정 세력이 독점권을 갖게 되고, 결국 그 세력에 의해 일상생활이 지배당할 것입니다. 저를 비롯한 비판적 지식인들은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가 경제적 민주주의, 사회평등 등과 불가분의 관계라고 봅니다. 신자유주의 이론의 중요한 특징은 시장화 과정과 정치 과정 사이의 긴밀한 연관을 부정하는 것인데, 실제로는 신자유주의가 정치적 고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거기에는 자유경쟁이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욱연  그 전형적인 예가, 현재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듯이, 국유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 정치권력을 이용해 국유재산을 나눠 가지면서 정치권력이 경제권력화하는 현상, 권력의 시장화와 시장의 권력화 현상이겠지요.

왕후이  잘 알다시피, 현재 중국에서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비롯해 사회 전반에 걸쳐 시장화가 빠르게 진행되지만 정치적 논리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지금 중국에서 시장은 지극히 반시장적인 것입니다.

이욱연  그런데 문제는 지금 중국에서 자유주의가, 왕선생의 표현에 따르면 신자유주의가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전사회 영역에서 막강한 지배이데올로기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나름대로 지난한 지적 투쟁을 벌이고 있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한 견제가 과연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루어질지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시장물신주의나 20대80이라는 계급분화 현상이 비단 중국만의 현실은 아니기 때문이죠. 그리고 중국 발전주의자들의 신자유주의 논리가 민족주의 논리와 결합되어 있고, 비판적 지식인 그룹이든 아니면 신좌파 지식인들이든 그들의 대오가 결집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볼 때도 그렇습니다. 더욱이 최근에는 중국정부가 노골적으로 한쪽 편을 들고 있고, 최근 허 칭롄, 쳰 리췬(錢理群) 등 일부 비판적 지식인에 대한 활동통제, 사상통제 등에서도 보듯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비판적 지식인들을 통제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어떻게 활로를 찾으면서 변혁을 위한 실천들을 수행해나갈 것인지 궁금합니다.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야만성에 저항하는 한편, 정치적·경제적 민주변혁을 추진해나가기 위한 동력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는 점이죠.

얼마 전 허 칭롄이 쓴 글인데, 현재 중국정부가 국가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특정 집단의 이익에 경사되어 있으며, 엘리뜨와 민중 중 이미 엘리뜨를 정책적으로 선택했고, 이로 인해 권력과 엘리뜨 사이에 공모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분석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사실 중국의 시장화 과정에서 대량으로 실업이 발생하고 계급구조가 악화되는가 하면, 예전 사회주의 시대의 복지제도 역시 크게 흔들리고 있는데, 민중들이 갈수록 주변으로 내몰리는 상황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지적 운동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민중의 현실을 어떻게 변혁을 위한 동력으로 바꾸어낼 것인가의 문제가 아닐까요.

 

 

중국 사회운동의 전망

 

왕후이  중요하지만 어려운 문제입니다. 현재 중국에서 민중운동이나 사회운동에 대한 전망은 어둡습니다. 신자유주의자들도, 주로 해외에서지만, 민중을 이야기하고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정치개혁을 외치고 있지요. 사실 해외의 민주화운동 인사들 가운데는 80년대 개혁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정치개혁에 근본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개혁은 국가에 의해, 시장에 의해 추동되는 방식이죠. 국가가 시장을 보호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내부개혁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전혀 터무니없지는 않지만 거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떵 샤오핑(鄧小平)의 ‘남순’(南巡, 1992년 1〜2월 떵 샤오핑이 중국 남부의 경제개방도시를 순회하며 연설 등을 통해 개혁·개방의 방침을 확고히 천명한 일) 이후 지금까지 중국에서 신자유주의가 확대되어가는 과정에서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은 정치개혁과 민주화의 구체적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정부 내부로 들어가 그것을 실현시켰을 테죠. 그들 중 일부는 WTO(세계무역기구) 가입 등 전지구적 질서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서서히 민주화를 이룰 수 있고, 내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알다시피 문화대혁명 이후 80년대 신계몽주의 시기를 거쳐 급진주의·대중운동에 대한 회의와 반대가 중국사회 전반에 매우 폭넓게 퍼져 있습니다. 지식인들은 물론이고, 평범한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이욱연  하지만 중국의 민중 가운데 적어도 30대 중·후반 이상은 평등의식을, 사회주의에 대한 기억을 무의식처럼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문화대혁명의 부정적 유산일 수도 있지만, 현재 중국인들 중 대다수는 어쩔 수 없이 문화대혁명 세대라는 거죠. 또 90년대 중반 중국사회에서 매우 폭넓게 유행한 과거에 대한 향수라는 사회문화적 조류 역시 산업화 과정에서 어느 사회에서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겠지만, 그 이면에는 현재에 대한 불만을 과거의 기억 속에 투사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봅니다. 중국인들이 지닌 사회주의에 대한 기억, 특히 지금보다 평등했고, 안정된 직장과 복지혜택을 누렸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 현재의 모순을 투시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죠. 최근 중국문학에서 중견작가들을 중심으로 시장화 과정을 비판적으로 해부하는 새로운 리얼리즘 조류가 싹트는 것도 크게 보면 이와 연관된다고 봅니다.

왕후이  1989년 6·4운동 같은 경우가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아직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최근에 쓴 글에서도 이 운동의 사회적 배경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분석한 바 있는데, 이 운동은 강렬한 사회주의 색채를 띠었습니다. 6·4운동은 평등을 요구하고 부패에 반대했다는 점에서 동구의 시민운동과 다릅니다. 민주화운동과 사회주의가 결합되어 있었죠. 물론 민중의 사회주의는 국가의 사회주의와는 다른 것으로, 사회평등에 대한 요구를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정치적 자유에 대한 요구로 표현한 것이죠. 이 점이 6·4운동이 우리에게 던져준 핵심 내용이며, 이러한 인식이 없으면 이 운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복잡한 문제가 존재합니다. 중국사회주의는 일정정도 계급을 철폐했고, 상대적으로 보면 평등을 이뤄냈습니다.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보면 계획경제, 특히 현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중국 사회주의는 도시와 농촌 사이에 중대한 차별을 낳았는데, 이는 제도에 의해 잉태된 거죠. 때문에 우리가 사회주의 평등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기왕의 사회주의 제도를 전적으로 찬성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같은 사회주의 자체가 심각한 불평등구조를 지니고 있었고, 이로 인한 불평등은 여전하며, 더구나 더욱 확대되기 때문이죠. 여기서 또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80년대에 유행한 견해에 따르면 중국사회주의가 실패한 원인은 지나치게 평등을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 원인은 오히려 진정으로 사회주의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분명히 지적되어야 합니다. 때문에 일반 민중, 농민이나 노동자가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은 지금의 중국 현실에 대한 일종의 비판이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과거의 비교적 좋은 측면이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처럼 그리워하는 것들이 당시 역사의 실체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볼 때 그러한 기억이 얼마나 현실적인 힘을 가질지는 단정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중국사회주의의 역사적 경험의 재검토 문제

 

이욱연  기왕에 중국사회주의의 역사적 경험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씀드리면, 왕선생이나 추이 즈위안(崔之元) 등이 자유주의자들로부터 신좌파라 불리게 된 데는 이데올로기적 책략에 따라 그렇게 된 측면, 마치 문화대혁명 때 반대파에게 우파라는 ‘모자’를 씌웠듯이 그같은 정략적 편가르기를 통한 매장하기라는 측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른바 신좌파 지식인들이 마오 쩌뚱(毛澤東) 시대와 그의 사회주의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서 그것이 지닌 합리적 요소, 근대성에 대한 이중적 태도라든가, 마오의 혁명전략이 제3세계 근대사 속에서 갖는 적실성, 경제적 민주주의에 대한 강조 등 마오 시대의 우량 유전자를 되살려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신좌파 지식인들은 중국사회주의의 경험과 마오 시대에 대한 평가에서 자유주의자나 신자유주의자들과 선명한 대조를 보인다는 것이죠.

왕후이  중국혁명과 사회주의 유산, 즉 사회주의의 성취와 비극을 어떻게 새롭게 이해할 것인가는 현재 중국 지식인들에게 매우 절박한 요청이자 중대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아직껏 온당한 대답을 얻지 못하고 있죠. 이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사회주의 유산을 철저히 부정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그리고 마오의 사회주의를 반근대적이라고 비판하는 가운데 자신의 합법성을 구축한 데 기인합니다. 중국 지식인들은 70년대말부터 90년대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주의 역사를 재검토해왔지만, 사회주의혁명의 부정적 결과, 예를 들어 새로운 불평등이나 독재 등에 대한 비판에만 치중했지, 그러한 혁명과 사회주의를 낳은 역사적 조건에 대해서는 분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역사적 조건에 대한 분석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우려처럼 혁명을 고취하는 것은 아닐뿐더러, 중국사회주의의 경험에는 중요한 역사적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훈은 앞서 얘기했듯이, 평등이라는 목표가 진정으로 실현되지 않은 데 기인하는 것입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중국 사회주의혁명의 역사적 조건을 구체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의 실현 가능성 및 그 역사적 조건에 대해 면밀히 검토하는 일이죠. 중국사회주의의 유산은 쉽게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갖가지 재난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지만, 사회보장제도·노동보호제도·공공의료 등은 상대적으로 볼 때 상당히 잘된 것들이죠.

그리고 중국혁명의 경험과 관련해서는 쑨 원(孫文) 시대까지 소급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11년에 중화민국이 성립한 뒤, 레닌(V.I. Lenin)은 쑨 원의 혁명에 대해, 중국혁명의 핵심은 국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 공업화·근대화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는데, 청말시대부터 이런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는 의견을 내놓은 바 있지요. 물론 레닌의 견해는 유럽중심주의라는 큰 문제점을 지녔지만, 오늘의 입장에서 되돌아볼 때 중요한 시각을 보여줍니다. 레닌은 쑨 원의 혁명강령을 반동적이라고 보았는데, 왜 그런가 하면 쑨 원의 혁명강령에는 민생주의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민생주의는 삼민주의 중 가장 사회주의 색채를 지녔지만, 레닌은 그것이 반자본주의적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반동적이라고 본 것이죠.

이욱연  사적 유물론의 역사공식으로 볼 때 자본주의화는 필연적인 경로이니까요.

왕후이  그렇죠. 그런데 레닌은 그러한 사적유물론의 측면에서 볼 때 반자본주의적이고 반동적인 강령이 구체적 현실 속에서는 도리어 진보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레닌은 이를 중국역사의 변증법이라고 불었는데, 그같은 반동적 강령이 중국역사 속에서는 혁명적 강령으로 전화될 것이라는 지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토지의 평균분배가 중국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할 것이기 때문이죠. 당시 토지겸병과 지주의 토지독점이 매우 심각해 중국경제의 발전을 저해하던 상황에서 중화민국이 토지개혁을 실시할 때 그러한 강령은 자본주의 강령으로 변할 수 있고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레닌은 그것을 진보적 강령이라고 본 것이죠. 요컨대 레닌이 쑨 원의 강령이 진보적이라고 한 것은 그것이 사회주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촉진하기 때문이었죠. 이러한 이해는 마오 쩌뚱 혁명에 대한 이해에도 시사점을 준다고 봅니다. 마오의 사회주의는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배경 속에서 그에 대한 항전과 건국이라는 강령을 세웠습니다. 통일된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과 공업화·근대화를 하는 것이었고, 공업화와 동시에 토지개혁을 진행했습니다. 토지개혁이라는 생각은 쑨 원 시대부터 마오 쩌뚱 시대까지 일관된 것이고, 신민주주의 시기를 거쳐 대규모의 인민공사 때까지 이어집니다. 인민공사제도는 일면 농업사회주의를 실행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국가의 농촌에 대한 독점지배를 통해 농민의 잉여가치, 즉 재산을 착취하여 그것을 도시공업화를 위한 원시자본으로 축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이같은 의미에서 보면 그것은 매우 근대적이죠. 제가 마오 사회주의의 혁명과정을 ‘반근대적 근대’라고 규정한 것은 8,90년대 중국 지식인사회의 상황을 주로 겨냥한 건데, 당시 대다수 지식인들은 마오 시대와 문화대혁명에 대한 비판과 철저한 부정을 통해 당시 현실에 대한 긍정을 시도했습니다. 내가 마오의 근대성 부분을 강조한 것은 그가 추진했던 것이 당시는 물론 현재에도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지요. 또 그렇기 때문에 마오 쩌뚱의 사회주의 경험을 재검토하는 것은 현재 중국에서 진행중인 과정에 대한 재검토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진보와 파괴의 과정으로서의 근대

 

이욱연  마오 쩌뚱의 사회주의는 크게 보면, 자본주의 근대에 대한 비판과 거부를 담고 있지만, 근대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근대이데올로기로 작동한 것이겠죠. 언젠가 왕선생은 ‘문제는 근대성’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근대성, 특히 중국의 근대성과 근대 경험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새로운 근대, 혹은 근대를 넘는 새로운 역사적 전망을 모색하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이 차원에서 마오 쩌뚱의 혁명과 사회주의를 볼 때, 혁명에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이란 혁명 시기에 근대에 대한 매우 이중적인 태도를 지닌 채 근대를 모순의 복합체로 보던 단계에서 신중국 건국 이후 중국사회의 사회주의적 개조과정을 거치면서 근대에 대한 이해가 매우 단순화되는 과정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사회주의가 강한 국가주의 색채를 띠고, 대약진 시기의 구호처럼 미국과 영국을 따라잡는 길을 가게 되면서 결국 중국사회주의가 넓은 의미에서는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에서 작동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이를 근대성이나 근대에 대한 이해 등과 관련시켜 보면, 근대에 대한 이해가 단순해지는 과정이자 근대에 대한 물신주의라 할 근대주의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또 그러한 근대주의는 개혁·개방정책이 실시된 이후, 특히 90년대 이후 거의 절정에 이른 듯합니다.

왕후이  신자유주의 지식인들과는 별도로 90년대 들어 일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근대성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깊어졌습니다. 사실 중국에서는 청말기부터 상당히 많은 지식인이 근대성의 모순성과 복합성을 인식했다고 할 수 있죠. 반근대성 자체가 중국 근대성의 주요 특징입니다. 옌 푸(嚴復), 쟝 타이옌(章太炎), 쑨 원, 루 쉰, 심지어 량 치챠오(梁啓超)에 이르기까지 그렇습니다. 근대성에 대한 단순한 이해는 주로 사회주의적 개조 시기와 문화대혁명 이후, 이른바 개혁·개방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근대를 모순에 찬 과정으로 인식하지 않은 것이죠. 중국 지식인들을 볼 때 근대에 대해 가장 깊이있게 비판하고 그 내재적 모순을 지적한 사람들은 바로 근대를 주창하던 이들이지, 보수파는 아니었습니다. 반근대적 근대란 부단한 자기부정을 통해 활력을 찾는 것인데, 중국 현실의 변혁이라는 실천 차원에서는 제 입장이 급진적인 것은 아닙니다. 저는 점진적인 해결을 원하죠. 그런데 이론적인 측면에서는 근대성에 대해 매우 근본적이고 철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식민주의도 전쟁도 청산할 수 없고, 민족국가 형성과정에서 발생한 재난도 해소할 수 없기 때문이죠. 세계사적으로는 18세기 이래 일어난 전쟁과 학살의 규모가 과거보다 뒤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재 목도하고 있는 진보를 가지고 그러한 역사를 가릴 수는 없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일곱 명 중 한 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런 희생은 인류역사상 보기 힘든 것이죠. 미국패권주의, 일본제국주의, 어느 것이 근대성의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근대성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철저한 반성을 해나가야 하며, 진보와 파괴의 과정이라는 근대의 양면성에 대해 철저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 경제가 발전하기는 했지만, 현재 10분의 1이 유동인구이고, 이들이 다시 예전의 생활방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이것 역시 또다른 댓가입니다. 세계화 추세 속에서 갈수록 동질화된 세계가 창조되면서 동시에 이같은 국면이 출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과정에 대한 근본적 비판은 필수적입니다. 세계적으로도 그렇고 중국에서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에 현재 유행하는 발전주의만 해도 그렇죠. 오늘날 중국에서 누가 사회의 발전을, 국가와 개인의 발전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발전주의에 대한 비판은 발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의 정당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발전주의에 내포된 근대성에 대한 일면적 이해라든가 독단성, 불평등을 비판하는 것이고, 발전의 신화로 현실의 다른 파괴 과정을 은폐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죠.

이욱연  현재 중국에 왜 그같은 발전주의 신화나 근대에 대한 맹목이라고 할 수 있는 근대주의가 통치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느냐는 점을 생각하면, 근대성이나 근대에 대한 이해가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와 더불어 마오 쩌뚱 시대는 물론이고, 지금도 중국에 폭넓게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민족주의 흐름, 글쎄 이것을 국가주의라고 불러야 더 타당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조류와 상당히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대표적인 자유주의 이론가로 활동하는 뻬이징대학의 왕 띵띵(汪丁丁)이 지난해 어떤 글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중국이 발전주의를 추구해나가는 것은 낙후되면 당하는 세계질서에 비추어볼 때, 특히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그 정당성이 입증되었고, 이는 중국인 대다수의 요구라는 것이죠. 이처럼 어찌 보면 중국인들은 아편전쟁 이래 서구에 포위되어 있고 서구에 비해 낙후되었다는 생각, 서구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시종 얽매여 있다고 봅니다. 이같은 의식은 비단 중국의 경험만이 아니고 근대가 반(半)식민 혹은 식민 상태와 더불어 시작된 대다수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지만, 중국의 경우 아무래도 과거 중심적 위치에 있었던 역사적 전통 때문에 더 강렬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민족주의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90년대 중국 지식인사회가 80년대보다 훨씬 경직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와 민족주의 내지는 국가주의의 결합, 이것이 현재 중국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죠. 90년대 들어 중국정부가 줄기차게 전개하고 있는 애국주의 운동도 그 일환이라고 봅니다.

 

 

대안적 체제의 모색과 동아시아의 연대

 

왕후이  신자유주의자들이 민족주의를 비판하지만, 오늘날 중국민족주의의 토대는 신자유주의입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근대성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는 논리 가운데 하나가 민족주의, 발전주의입니다. 그들은 제가 발전주의, 근대성을 비판하는 데 반발하지만, 이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는 한 민족주의에 대해 제대로 된 반성적 인식을 지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들 역시 민족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도 하지요. 민족주의가 개혁·개방과 중국의 부강을, 중국의 현대화를 방해한다는 논리인데, 신자유주의는 민족주의를 대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다국적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자들은 민족주의 비판이라는 간판을 들고서 특정 지역에 대한 다국적자본의 독점과 수탈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죠. 이렇게 보면 중국의 신자유주의는 민족주의의 형태와 반민족주의의 형태를 동시에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욱연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에 올바르게 대응하는 것이 매우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비단 중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의 경우도 경제위기의 극복이라는 명목 아래 진행되는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거의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죠. 때문에 일국적 차원의 저항과 더불어 전지구적 차원의 저항이 필요합니다.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어가는 데 국가를 넘는 지적·실천적 연대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최근 들어 부쩍 활발해진 시민단체들의 다국적 연대도 그런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대안적인 세계체제를 모색해나가는 데 있어 앞으로 동아시아의 연대가 한층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왕후이  지금까지 중국에서 동아시아 연대나 아시아에 관한 토론은 많지 않았습니다. 1996년부터 『뚜슈(讀書)』 편집을 맡으면서 첫호에 아시아에 관한 토론을 다룬 적이 있는데, 아시아 지식인 사이에는 상호 이해가 불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아라는 관념이 추상적이기 때문이죠. 아시아라는 관념은 식민주의·민족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므로, 아시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의 문제는 자기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와 긴밀하게 연관됩니다. 때문에 아시아 문제가 좀더 활발하게 토론되기 위해서는 자기 역사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죠. 아시아의 금융위기나 유럽연합의 탄생 등이 지역협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시아 문제는 제게, 그리고 중국, 한국 및 일본에 있어 매우 다른 문제입니다. 아시아 문제가 식민지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죠. 동아시아라는 관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엄격히 말해 식민주의 역사가 없었다면 동아시아라는 관념도 생기지 않았을 테니까요. 중국의 근대사, 한국의 근대사는 민족해방운동을 통해 점진적으로 형성된 것이고, 그 지역의 자본주의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중국은 사회주의혁명이라는 방식을 통해 민족해방을 진행했고, 그후의 과정은 심화된 냉전구조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동아시아에서는 냉전의 구조가 깨지지 않고 있는데, 남북한의 문제, 중국과 타이완의 문제, 일본의 문제, 미국의 영향력으로 인해 나누어진 동아시아 내부의 경계선 문제, 이런 문제들이 동아시아를 나누어놓고 있는 것이죠. 선 안과 선 밖에서 보는 동아시아의 형상과 문제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협력과 연대가 어떻게 가능할지는 퍽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욱연  동아시아에서 냉전구조가 아직도 지속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동아시아 연대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동아시아 문제에 정확하게 대응하면서 동아시아 냉전구조를 해체하는 일은 비단 동아시아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고, 일정정도 세계체제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남북의 분단체제가 해소된다고 해서 곧바로 세계체제에 어떤 커다란 변화가 온다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분단체제의 극복이 세계체제의 변화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거죠.

왕후이  저도 아시아나 동아시아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죠. 중국의 경우는 중국혁명의 문제가 해당할 겁니다. 중국혁명이 오늘날 동아시아지역은 제쳐두고라도, 심지어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조차 제대로 이해되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문화대혁명 이후 20여년간 중국혁명을 부정하고 개혁·개방을 추진해오는 동안 중국혁명사에 대한 재인식 작업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욱연  중국혁명과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재검토 역시 그것을 중국만의 일국적 시각에서 살펴볼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근현대사나 당시의 세계 냉전체제 등과 관련하여 조망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80년대 이후 중국 지식인들이 중국혁명과 사회주의의 경험을 반성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중국사회주의의 실패 원인을 지나치게 중국인들의 국민성이나 중국의 봉건성 등에서만 찾는 것 같았습니다. 중국혁명과 사회주의의 경험은 중국만의 것이 아니라는 시각이 필요하며, 중국사회주의가 파행의 길을 갔던 것, 또 자본주의 산업화에 필적할 만한 파괴적 산업화를 시도했던 것, 나아가 특유의 가부장적·혈통론적 사회주의 색채를 지녔던 것 등도 좀더 폭넓은 동아시아적 지평 속에서, 더 나아가서는 신중국과 서구자본주의 세계의 역학관계 차원에서 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아시아적 시각이라는 것은 일국적 시야와 전세계적 시야 모두를 방기하지 않는, 개별과 보편을 매개하는 특수성으로서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특히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대안적 세계체제를 모색하는 데 국민국가와 세계 사이에 그같은 매개항을 설정하는 것은 의미가 있으며, 동아시아가 지닌 문명적 유산과 근대의 역사 경험이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배우면서 새로운 대안문명을 열어나가는 데 필요한 역사적 지혜를 공유할 부분이 많다고 봅니다.

 

 

한·중 연대는 이제 초보단계

 

왕후이  한·중 사이의 연대는 극히 초보적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번에 백낙청 선생도 이야기했듯이, 중국으로서는 한국의 민주화 역사, 분단 이후 한국현대사의 전개과정, 한국자본주의의 발달과정과 거기서 생긴 여러 문제들에 대해 참고할 여지가 많습니다. 저는 이러한 경험을 참고하기 위해 제가 참가하고 있는 『뚜슈』 등의 잡지에 관련 지면을 할애할 생각이고, 한국 지식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주길 기대합니다. 사실 중국의 일반인은 물론이고 지식인도 한국 사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최근 들어 최원식 선생이나 백영서 선생의 글이 실렸는데, 앞으로 한국 지식인들의 글이 많이 실리길 바랍니다. 1998년 겨울에 창비 편집위원들과 『뚜슈』 편집위원들이 뻬이징에서 만난 것도 의미있는 자리였다고 생각하고, 그런 기회가 많아지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문제, 중국에서 동아시아에 대한 논의는 주로 경제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동아시아의 경제적 성장과 유교문화의 관계를 주로 검토하는 유교자본주의 차원이죠. 그리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경제위기 이후 중국이 세계화 과정에 참여하면서 직면할지도 모르는 위기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주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는 이선생이 말하는 차원의 동아시아적 시각이나 연대와는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이욱연  한국에도 유교자본가들이 있지요. 그들은 자본주의를 유일한 대안으로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더 잘해나갈 수 있을까, 어떻게 동아시아가 자본주의 세계의 패권을 차지할 것인가의 차원에서 동아시아 유교문명을 거론하고 있는데, 이것은 새로운 대안적 체제를 위한 사고와는 다릅니다.

 

 

한반도의 통일과 한·중연대

 

왕후이  그렇습니다. 저 역시 그런 유교자본주의와 유교문화권이라는 차원에서 제기되는 동아시아 교류와 연대에 대해서는 부정적입니다. 만일 문화 차원에서 동아시아 전통을 얘기한다면, 이는 유교가 아니라 동아시아 민간전통 속에 들어 있는 활력, 근대 합리주의 세계와는 다른 활력 속에서 찾는 것이 더 낫다고 봅니다. 아울러 동아시아에서 ‘동아시아와 서구’라는 이원론을 극복하는 일도 동아시아적 시각을 갖는 데 중요합니다. 한반도의 경우 현재 남북통일이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한반도의 근본 문제는 당시의 분단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입니다. 한반도 분단은 얄따회담으로 시작되어, 남에서는 1948년 미국 지지하에 이승만정부가 성립되면서 김구 등 민주파가 배제되었고, 북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립했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나누어 갖는 과정에서 한반도의 분단이 야기된 것이죠. 때문에 통일과정에서 그러한 세계구조에 대한 깊은 인식과 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가 공유해야 할 점이죠.

이욱연  한반도의 분단과정이 그러했고 분단체제 고착화 과정 역시 그 연장이었기 때문에 한반도 통일은 세계 냉전의 마지막 고리를 푸는 문제인 것이고, 따라서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들어 한반도에 평화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많은 중국인들이 남북통일에 많은 관심을 갖는 것 같은데, 남북정상회담 당시 한반도의 통일이 멀지 않았다고 축하를 보내는 중국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반도 통일에 대해 그처럼 관심을 보이는 것이 고맙고 고무적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중국 지식인들의 통일에 대한 관심이 주로 동아시아에서의 미국 패권의 약화라는 측면에서 나온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왕후이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미군이 주둔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원에서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통일이 이루어지면 한반도의 자주성은 분명 증대되겠지요. 그러나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축소된다고 해서 중국의 영향력이 증대될 수 있을지, 그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세계체제를 중·미 이원구도로 보는 시각이 거기에 있는 것 아닌가요? 사실 많은 중국 지식인들이 그같은 이원론적 세계인식을 지니고 있지만, 저는 이러한 시각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한반도의 통일은 또다른 분단국가인 중국과 타이완의 통일 문제에 영향을 줄 것이고, 남북한 문제, 중국과 대만 문제, 이 두 개의 문제가 해결되면 동아시아의 냉전은 해소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동아시아의 연대가 훨씬 더 고양되겠죠.

이욱연  최근 들어 한국과 중국 사이에 여러 차원에서 연대가 활발해지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양국 사이의 교류가 예전에 비해 상당히 실질적이고 좀더 전문적으로 진행되고 있고요. 왕 후이 선생의 이번 방한도 그러한데, 이같은 교류와 협력이 앞으로도 더욱 확대되어 좀더 나은 세계를 향한 두 나라 지식인들과 민중들의 노력이 지금보다 훨씬 더 성과를 거둘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장시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