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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생태주의는 민족주의의 대지를 동요시킬 것인가?
권혁범 『민족주의와 발전의 환상』, 솔 2000
고미숙 高美淑
문학평론가
“말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려니와 말을 하면 천하인이 취해 쓸 수 있어야 하고, 발표하지 않으면 그만이려니와 발표하면 우내인(宇內人)이 감복할 수 있어야 한다.”(『기측체의氣測體義』) 최한기(崔漢綺)의 이 파격적인 언술은 늘 찬탄과 회오의 양가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감히 천하를 배경으로 철학을 구축하겠노라고 선언하는 그 호쾌함에 무릎을 치면서도, 한편 어째서 한국의 인문학은 근대 100년간 단 한번도 한반도라는 시공간을 넘어서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이 곧바로 뒤를 잇는 까닭이다. 그 엄청난 중력의 진원지에 민족주의가 자리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대상과 영역을 불문하고 인문학적 사유의 심층을 장악하고 있는 ‘민족’이라는 주술을 어떻게 떨쳐낼 것인가? 이른바 ‘근대 너머’를 사유하고자 하는 연구자라면 이런 화두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권혁범(權赫範)의 『민족주의와 발전의 환상』 역시 “한국의 기존 사회과학, 특히 주류 정치학의 기본적 가정이 부국강병적 민족주의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다”(14면)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최근 형성되고 있는 민족주의 비판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셈인데, 우선 그간 제출된 민족주의 비판서들이 대개 좋은 민족주의/나쁜 민족주의를 가르는 선에서 멈춘 것과 달리, 민족주의가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공격적 속성, 즉 타자에 대한 배제원리를 가차없이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 이 책의 미덕이 있다. 베스트쎌러나 대중문화, 그리고 금모으기운동 등 1990년대 일련의 사회적 분위기를 두루 조망하면서 대중의 심리에 견고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애국심의 환상들을 조목조목 짚어내는 저자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치밀하다. 이 치밀함은 특히 ‘민족’과 ‘민족 외부’를 대립시키는 통념을 거부하고, 민족주의와 세계화가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작동한다는 단호한 주장에 의해 한층 탄력을 받는다. 물론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지독한 친화력은 원초적인 사안이기도 하다. “을지문덕주의는 곧 제국주의니라!”(「을지문덕」)는 신채호(申采浩)의 선언적 천명이 집약하고 있듯이, 이미 탄생의 순간부터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적(?) 연을 맺고 있었다. 그럼에도 민족(선)/외세(악)를 가르는 도덕적 이분법이 이런 기원에 대한 탐색을 가로막아왔던바, 저자는 바로 그러한 기존의 낡은 관습과 결별하고 있는 것이다.
2부를 구성하는 통일론에 대한 비판도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저자는 ‘한’민족 신화에 기초한 통일론의 허구성을 지적하면서 “혈연적 민족주의에 토대한 통일론은 근대 민족국가의 인위적 형성과정에 비추어볼 때 별로 설득력을 갖지 못”하며(125면), 더구나 이러한 통일론은 “정치적 성격에 대한 논의를 무화하며 초월적 민족주의를 강제한다”는 점을 지적한다(178면). 특히 ‘통일’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통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를 전제하는 ‘오염된’ 개념이므로 ‘탈분단’이라는 용어로 바꿀 것을 제안하면서 남북한이 어떻게 ‘차이 속에 공존’할 것인가를 논하는 부분은 저자의 진지함이 십분 발휘되는 대목이다.
‘개인지향 에콜로지정치의 모색’이라는 부제가 암시하듯이 이러한 논의의 사상적 거처는 생태주의이다. 민족주의와 세계화의 상생적 관계와 ‘민족동질성회복’이라는 명제의 허구성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나아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모두 ‘경제’ 숭배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발전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도높게 비판할 수 있는 저력은 생태주의로부터 풍부한 자양분을 제공받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대안으로서의 생태정치를 제시하고 있는 3부의 글은 그런 점에서 하이라이트라 할 만한데, 자본에 대항하는 생태주의적 국제연대, 자급자족적 생활공생체운동의 확산, 다른 종류의 자발적 운동단체들과의 연대 등이 주요 내용을 이룬다.
이렇게 이 책은 민족주의 비판에서 생태주의적 대안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스펙트럼을 구사하면서, 시종일관 유연하면서도 명료한 색조를 잃지 않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 사안의 분석 너머에 있는 사유의 기저는 여전히 추상적이라는 한계를 노정한다. 이를테면 시야는 계급과 민족을 넘어 전지구적으로 확충되었으되, 그 인식론적 기반은 여전히 낡은 세계에 고착되어 있다는 혐의가 짙다. 특히 모든 사안의 가치척도로 기능하는 ‘보편적 이성’이라는 개념은 치명적인 결함으로 보인다. 이 개념은 때론 ‘인권’으로, 때론 인류적 가치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자명한 전제로서 그냥 ‘던져질’ 뿐이다. 굳이 ‘보편적’이라는 관형사를 덧붙인 것은 아마도 근대적 이성의 억압적 성격과 구분하기 위함인 듯하나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과연 선험적으로 작동하는 어떤 보편적 가치가 존재할 수 있는가? 모든 억압받는 자들의 자유와 평등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근대적 이성 범주와 그다지 다를 것이 없고, 그렇다면 그것은 결국 민족주의와 인식론적 지반을 공유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게다가 이러한 가치의 설정은 언제나 도덕적 평균주의로 전이할 위험성을 내장하고 있음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생태주의적 이상은 늘 근대화의 문제를 욕망의 과잉이라는 문제로 치환함으로써 욕망의 균질화 내지 윤리적 엄격주의로 환원되곤 하지 않았던가? 저자가 내세우는 생태정치적 대안이 나름대로 현실에 근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계에 대한 거부감, 농촌공동체적 삶에 대한 향수 등 ‘루쏘주의적’ 정조가 깊이 스며 있는 것도 이 점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굳이 푸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근대와 함께 탄생한 ‘인간’ ‘생명’이라는 범주는 앞으로 전면적인 해체 혹은 변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는 더욱 모호해질 것이고, 따라서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기계의 출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게다가 인간의 욕망은 앞으로 무수한 분자적 흐름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중요한 것은 보편적 이성이나 자연/인간에 대한 본질론적 접근이 아니라, 이 무규정적인 욕망의 흐름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어떤 배치를 만들어낼 것인가이다. ‘민족’과 ‘발전’이 환상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 내지 ‘보편적 이성’ 또한 근대가 구성해낸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민족주의와의 전투는 이런 사유의 심연까지를 투시하지 않고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을 터, 생태주의가 과연 ‘보편적 이성’에 대한 미련을 떨쳐내고 민족주의의 인식론적 대지를 동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물음을 던져준 것이야말로 이 책이 나에게 준 가장 큰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