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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분단시대에서 통일시대로, 역사에서 사상으로

강만길 비평집 『21세기사의 서론을 어떻게 쓸 것인가』, 삼인 1999

 

정근식 鄭根埴

전남대 사회학과 교수

 

 

지금으로부터 한 세대쯤 흐른 시점에서 오늘을 되돌아본다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혁명적 이성의 실험이 실패하고,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초국적 자본의 시대가 전면적으로 도래하면서 방향을 몰라 방황하는 착잡한 시기? 세계적 냉전체제와 한반도의 분단체제가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식민지체제와 전쟁이 남긴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채,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강요당하는 어정쩡한 시기? 희망의 메씨지를 담은 새로운 천년의 담론들이 무성하지만, 이들은 사회적으로 완성된 현실에 근거한다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간절한 기원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사 최대의 소용돌이를 겪었으면서도 사상이 부재한 사회에서, 역사의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은 20세기를 치열하게 살았던 학자에게는 당연하지만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21세기사의 서론을 어떻게 쓸 것인가』의 저자 강만길(姜萬吉) 교수는 숨이 콱콱 막히던 1970년대 후반, 양식있는 시민과 후학들에게 한국역사학의 좌표를 보여준 바 있다. 그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은 『전환시대의 논리』 『민족경제론』 『분단시대의 사회학』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등과 함께 군부독재하에서 이루어진 한국적 성찰의 알토란같은 성과들이었다. 우리 학계는 모두 이를 바탕으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로부터 거의 한 세대가 지107-384난 오늘날, 저자는 ‘통일시대’라는 화두로 21세기사의 서론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살아온 세월과 민족사의 흐름을 하나의 궤도 위에 올려놓고 들여다본 역사를 쓰기란 참으로 어렵다”고 고백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역사에 대한 애정과 원숙함이 배어 있다. 약간의 회한이 서리긴 했지만, 일생을 변치 않고 이처럼 뚜렷이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다. 이 책에서 역사는 인간 이상(理想)의 현실화과정이라고 보았듯이, 젊었을 때 자신이 만들고자 했던 사회가 실제로 얼마나 만들어졌는가를 성찰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역사학자…… 성공한 혁명가 외에 또 누가 그런 행복을 가질 것인가.

이 책을 관통하는 역사적 현재에 대한 규정은 분단국민국가 시대에서 통일민족국가 시대로의 이행이다. 저자는 19세기 후반부터 통일까지의 한국 근현대사를 근대적 군주주권주의 국가기, 국민주권주의 국가수립 준비기, 분단국민국가기, 통일민족국가기로 나누었다. 우리는 세번째 국면을 살면서 네번째 국면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21세기 초두에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한반도의 통일과 동아시아 평화체제의 확립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한반도의 평화통일이 왜 동아시아 평화체제의 확립에 필수불가결한 것인가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19세기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힘의 배치가 어떻게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를 결정해왔는가를 설명하면서, 한반도의 휴전선이 20세기 미국과 소련을 대신한 21세기 중국과 일본의 세력균형선으로 작용할 위험성을 경고한다. 이 책의 또다른 핵심적 주장은 역사학계가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그리고 통일 후 역사학의 올바른 위상정립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한국 역사학은, 첫째 세계사 속에 민족사를 놓고 바라보며, 둘째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역사를 수립하고, 셋째 분단시대 두 체제가 거둔 성과 모두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어떤 형태의 흡수통일도 아닌 남북한이 대등한 평화통일을 옹호하고, 역사서술 또한 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평화통일을 기조로 하는 흐름에서 ‘7·4남북공동성명’과 1991년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매우 중요한 성과로 간주하는 것은 당연하다. 비록 이들이 당시의 정권적 이해에 종속된 측면이 있지만, 남북간에 가능한 최고의 합의를 담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또한 지금까지의 역사학이 가졌던 한계도 지적한다. 식민지체제와 분단체제를 겪으면서 우리들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인식의 범위가 한반도, 특히 남한 내부로 한정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현대사 연구는 동아시아 전체의 식민지체제 비교연구나, 세계적 냉전과 한국의 분단, 경제성장을 종합적으로 아우르는 지점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겪는 사상의 빈곤의 한 원인이다. 또한 저자는 일제식민지사 연구가 주로 좌우익 민족해방운동사에 바쳐지고, ‘피해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었으므로, 이제부터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피해의 역사’ 연구가 수행되어야 함을 지적했다.

우리가 이런 지적을 좀더 끌고나간다면, 한국현대사를 특징짓는 ‘깊은 역사’에 적합한 역사학 방법론에 관해 성찰하게 된다. ‘분단국가주의’에서 ‘통일민족주의’로의 이행뿐만 아니라,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에서 도외시된 사회적 타자들의 역사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 역사학은 대중들의 가슴속 깊은 곳에 고인 역사적 상처들을 끌어내 말하도록 하고, 또 진지하게 경청함으로써 고통을 나누어야 한다. 말해지지 않은 것, 기록되지 못한 것에 대한 좀더 많은 애정을 가져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 역사학은 깊은 곳에 있는 상처를 과감하게 드러내 치유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다. 그런 점에서 여성·외국인·방랑자·환자·수형자 등의 역사가 좀더 무대의 중심으로 올라서야 하며, 비문헌자료와 구술사에 대한 좀더 따뜻한 애정이 필요하다. 그럴 때 비로소 ‘역사에서 사상으로’라는 한국학계의 최대 과제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