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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1세기, 어떤 시대인가

 

나와 우리, 그리고 세상

통일시대의 문학

 

 

최원식 崔元植

인하대 인문학부 교수. 평론집으로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민족문학의 논리』 등이 있음. cws919@inha.ac.kr

 

 

1. 우리들의 시대

 

얼마 전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대학생들에게 이문구(李文求)의 『관촌수필(冠村隨筆)』(1977)을 읽혔더니 아주 재미있어하더라는 것이다. 약간은 뜻밖이다. 사실 나도 황석영(黃晳暎)의 「객지」(1971)를 학생들과 함께 검토한 적이 있는데, 보고서에 나타난 반응의 주류는 줄거리를 따라가기도 힘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처럼 참담한 노동현실이 우리 사회에 존재했다는, 아니 아직도 다른 차원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진실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무의식적 방어심리도 한몫을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고생해서 읽은 보람이 있었다고 감사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새삼 기억의 전승에 있어 교육의 중요성을 스스로 다짐한 바 있었다. 그때는 마침 IMF사태의 여파가 미쳐서, 실직한 또는 실직의 위험에 처해 거리로 뛰쳐나간 아버지들의 경우와 학생들 스스로 대조가 가능했기에, 이 작품이 던져준 충격을 이만큼이라도 완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남에게 권하겠냐는 질문에는 반으로 갈렸다. 오늘의 젊은 독자들이 이 작품과 힘겹게 화해하는 착잡한 과정을 지켜보았기에 이문구에 대한 반응이 의외였던 것이다. 그래 『관촌수필』의 어떤 점을 재미있어하더냐고 물으니, 그 대답이 걸작이다. 이 작품집의 세계를 포스트모던한 것으로 수용해서 놀랐다는 얘기다. 이 맹랑한 도시의 아이들에게 이문구의 웅숭한 농촌이야기는, 도시의 성찬(盛饌)에 물린 이들이 토종 맛을 우정 찾듯이, 오히려 진기한 ‘보물섬’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황석영과 이문구에 대한 반응은 겉으로는 상반되는 듯, 기실 상통한다. 소통의 가능성 여부를 떠나서 두 반응 모두, 현실독자와 70년대 (민족)문학 사이에 심리적 거리가 엄존한다는 점에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분단과 독재 아래 고통받는 민중의 발견을 핵심 의제(議題)로 우리 민족의 역사적 운명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 70년대 민족문학운동이 산출한 최고의 작품들에 대한 요즘 독자들의 반응에서 엿볼 수 있듯이, 90년대 이후, 특히 최근 들어 더욱, ‘민족’ ‘국가’ ‘민중’ ‘계급’과 같은 집합적 표상에 대한 의식적·무의식적 충성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20세기 전반기의 식민지시대와 그 후반기의 분단시대를 겪어오면서 거의 내면화하였다고 보아도 좋을 그 충성 덕에 그 표상들은 감히 부정할 수 없는 일종의 신성상징으로 되었던 것이다. 물론 좌·우파 사이에 다양한 또는 미묘한 편차가 존재했다. 가령 우파들은 ‘민중’과 ‘계급’에 비우호적이고, 좌파들은 ‘민족’과 ‘국가’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그런데 이 의식의 정치학에서 한걸음만 층계를 내려가면 풍경은 교차한다. 현실적으로는 시종일관 지배적 우위를 점유하면서도 끊임없이 정당성의 위기에 시달려온 우파는 좌파를 과잉의식하고, 좌파들은, 특히 동아시아 민족해방형 사회주의에 두드러지듯이 근본적으로 애국적이다. 이 흥미로운 적대적 공존을 가능하게 한 꼭지점에 바로 한국현대사의 비원(悲願), 나라 만들기(nation-building)가 놓여 있지 않을까? 이 점에서 70년대에 산출된 민족문학의 고전적인 작품들이 세대의 이월(移越)에서 일정한 장애에 부딪치고 있는 최근의 변화는 괄목상대(刮目相對)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이 작품들 자체의 이월가치에 의문을 품을 수 있겠다. 그런데 독자들이 노력 끝에 소통에 성공하는 것을 보노라면 수용자측에 문제가 생겼다고 판단된다. 재독의 기회를 가진 「객지」의 경우, 내가 읽기에도 때로 뻑뻑했다. 강철무지개처럼 쨍쨍하지만, 독자가 참여할 틈을 좀체 주지 않는 작품이다. 바꾸어 말하면 철저히 생산자 중심의 ‘작품’(work)이어서, 수용자가 놀 수 있는 ‘텍스트’(text)의 성격이 부족한 것이다. 서사공간 밖의 작가 또는 그 안에서 작가를 대행하는 이야기꾼이 서사상황 전체를 빈틈없이 통어하는 리얼리즘적 서사전략에 대한 독자의 적응에 균열이 발생했다고 보아도 좋다. 이 현상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터이다. 어떤 점에서는 민주화의 진전이기도 하다. 작품 안에서 누리던 권위적 위치에 기초한 작가의 일방통행 시대가 어느 틈에 종언을 고하고 있다는 예감이 실감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시대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최근 알렉산더시대를 다룬 옛 논문을 흥미롭게 읽었다. 덕분에,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의 동정(東征) 개시에서 고대사를 양분하는 계기를 발견한 19세기 독일 사학자 드로이젠(J.G. Droysen)을 알게 되었다.1 알렉산더 이후를 지칭하는 ‘헬레니즘’이란 용어의 발명자이기도 한 그는 전기를 동방 전제정치와 그리스 도시국가의 시기로, 후기를 그 독특한 융합에 기초한 알렉산더의 세계제국 시기로 나누었는데, 그 변화는 ‘도시국가(polis)에서 세계국가(cosmopolis)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에 대응하여 도시국가에 충성스런 ‘시민’(polites)으로부터 탈각, 코스모스를 조국으로 삼는 ‘세계시민’(cosmopolites)이 탄생하였다. 교역과 여행기회의 증대 속에서 태어난 세계시민은 폴리스 중심, 신분 중심, 또는 종족 중심의 낡은 결속으로부터 결정적으로 해방된 ‘개인의 강화’(accentuation of personality)와 맞물려 있으니, 헬레니즘이라는 조숙한 보편주의 물결과 개인주의는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스토아철학이 “개체적 인격이 지니는 긍지에 넘치는 확고부동한 존엄성”2을 내세우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인종 또는 국적의 차이를 넘어선 세계시민적 개인에 대한 스토아적 강조가 “알렉산더대왕의 후계자들이 형성한 제국이라는 기성사실의 표현”이라는 하우저(A. Hauser)의 지적을 기억해야 한다. 초국가적 자본주의 단계의 국제적 혼합문화의 물결 속에서 동방과 서방, 그리스와 주변민족, 계층과 계층 사이의 경계를 지우는 사회적 평준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개인에게 주어진 기회의 동질성에 따라 구성”된 이익공동체가 출현함에 따라 고전 그리스시대의 폴리스 시민이념이 급속히 해체되었던 헬레니즘 시대3는 거의 현대세계를 방불케 하는 것이다. 또한 이 격동의 개인주의 시대에 유토피아적 몽상도 더욱 강렬해졌으니, 기독교·이슬람교·불교·힌두교 등 세계 4대종교가 헬레니즘과 오리엔트 문명의 해후 속에 출현했다는 지적도 유의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4

우리 시대의 알렉산더는 전지구적 자본이다. 특히 문민정부 출범 이후 더욱 두드러진 자본의 격렬한 진군 속에 집합적 표상들에 대한 충성이 약화된 개인들이 젊은 세대 속에서 증가하였다. 사회적 보편 속에 특수로서 위치하는 개인이 아니라 그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운 단독자로서의 개인이 출현한 것이다. 그 단적인 징표의 하나가 머리 물들이기다. 거의 태생적 숙명으로 여겨졌던 머리색깔마저 바꾸는 행위는 인종적 또는 민족적 고착지표에 대한 의식적·무의식적 교란이 아닐 수 없다. 개인의 탄생은 동아시아 현대사의 숙원의 하나였다. 서구근대를 앞서서 수용했던 일본이 ‘individual’을 번역하느라 골머리를 앓은 경험은 흥미롭다. “신에 대해서 홀로인 인간, 또는 사회에 대해서 궁극적 단위로서 홀로인 인간”5을 뜻하는 이 서양용어의 실제태가 일본사회에 부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용어는 ‘society’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특정한 이해(利害)와 목적을 위해 형성된 인간집단 또는 그 생활방식을 지칭하는 후자 또한 일본인에게는 난해했다. 전자 없이 후자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근대가 하나의 제도로서 정착한 메이지(明治) 20년대에 가서야 전자는 ‘개인’으로 후자는 ‘사회’로 번역어가 안착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어려운 과정을 통해 정착된 이 용어들이 그 이후 일본사회 안에서 구체적 내용을 순조롭게 획득하지는 못했다. 개인이고 사회고 조숙한 군국주의 물결 속에 동원·흡수돼버린 것은 이미 주지하는 바이다. 한국에서도 이 사정은 다른 차원에서 유사하게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저간의 사정에 비추어볼 때 최근 한국사회의 개인주의의 심화는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다. 물론 그 개인이 오랜 결속으로부터는 탈각했지만 아직 사회로의 적절한 통로를 찾지 못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긴 하다. 개인은 결국 적대적이든 통합적이든 사회와의 관계맺음에서 형성·정립되는 것이기 때문인데, 이 과제는 여전히 우리가 성취해야 할 근대 기획의 핵심이다. 그런데 근대극복의 전망 없이 ‘개인 대 사회’라는 고정축만에 지필 때 이 전형적 근대기획 또한 제대로 성취될 수 없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증대하는 해체적 개인주의는 개인과 사회의 균형을 이념형으로 삼는 서구적 개인주의의 귀결태(歸結態)일지도 모른다. 압축성장을 거듭해온 한국사회야말로 서구 근대의 숨은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자율적 인격이라는 모형에 기초하여 개인을 사회적 최소단위의 실체로서 구축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한, 개인은 결국 단자화(單子化)의 운명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집합적 훈육 속에 개인을 창출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남한사회에서 진행되는 해체적 개인주의가 함유하는 긍정·부정의 양면성에 주목하면서 어떻게 사회적 통합을 새롭게 구축할 것인가? 아상(我相)의 집착과 아공(我空)의 허무라는 양변을 여의고 개인을 탈구축적으로 재구축하는 복안(複眼)의 시각을 견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인연 따라 모였다 인연 따라 흩어지는 모든 목숨받은 유정(有情)들의 슬프고도 찬란한 유전(流轉)을 알아차릴 때, 없으면서 있는 개인들의 궁극적 상호의존성에 입각, 타자를 배제하고 동일성의 무한복제로 떨어지기 쉬운 주체의 형이상학을 넘어서 새로운 사회적 통합의 단초를 잡아챌 터이다.

한반도는 목하(目下) 새로운 시대, 통일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냉전의 해체가 불안하면서도 기이하게 안정적이었던 한반도 분단체제의 와해를 향해 드디어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였다. 낡은 시대의 종언과 새 시대의 시작이 겹쳐지는 이 미묘한 회색지대, 날카로운 과도기가 그랬듯이, 아마도 적지 않은 곤란이 예상된다. 6·15선언이 확인하였듯이, 한반도의 통일은 남에 의한 흡수통일 또는 북에 의한 무력통일을 배제한 평화통일을 지향하기 때문에 극적인 통일이 야기할 극적인 혼란의 위험은 거의 없을 것이다. 평화통일이 연착륙할 경우,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곤란에 직면할지도 모르는데, 아마도 초유(初有)라고 보아도 좋을 평화통일의 실험이 지금 한반도에서 발진하고 있다는 높은 자각이 절실히 요구되는 국면이다.  물론 이를 너무 특권화할 필요는 없다. 사실 한반도의 통일은 새로운 단계의 전지구적 자본의 요구라는 측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통일에 냉담한 또는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하다가 정작 통일 앞에 황망했던 독일의 진보적 지식인의 전철을 되짚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실험할 평화통일이 근대적이면서 근대극복적 기획이라는 이중성 아래, 한반도에 닥친 기회를 호기로 잡아채면서, 전지구적 차원의 민중세상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디딤돌로 구축하려는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우리는 드문 시대의 목격자로서, 좀체 만나기 어려운 중대한 역사적 전환기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들 하나하나가 높은 역사의식 아래 ‘나’와 ‘우리’를 근본에서 재조정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의 재조직을 위한 새로운 감각을 예민하게 훈련할 싯점인 것이다. 맑스는 남북전쟁 이전 마비상태에 빠져 있던 미국 노동운동이 전쟁 이후(즉 재통일 이후), 비약적 발전을 거듭했다고 지적하면서, 노예제도의 존치가 공화국을 어떻게 병들게 했는가를 다음과 같이 간명히 요약하였다. “검은 피부의 노동에 낙인이 찍혀 있는 곳에서 흰 피부의 노동도 해방될 수 없다.”6 흰 피부/검은 피부의 수사는 남과 북에도 적용할 수 있지만, 북과 남의 비유로 사용할 수도 있다. 남과 북의 내부에도 각기 두 세계가 존재한다고 상정할 때, 네 층위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복합적 자각이 통일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하나하나의 마음속에 오롯해야 할 터이다.

우리 문학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위대한 시인은, 자기 자신을 쓰면서, 그의 시대를 쓴다.”7 통일시대를 맞이하여 민족문학의 탈구축적 재구축이라는, 목숨을 건 도약이 요구되는 이 고독한 시간에 남한문학은 과연 어떤 시대를 어떤 ‘나’를 통해 쓰고 있는가? 나는 지난해 출간된 세 작품, 황지우(黃芝雨) 시극 『오월의 신부(新婦)』, 황석영 장편 『오래된 정원』, 그리고 고은(高銀) 시집 『남과 북』을 통해 우리 문학의 현재를 점검하고 그 머금은 미래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2. 시와 극: 황지우의 『오월의 신부』

 

광주항쟁을 다룬 『오월의 신부』는, 모더니스트 황지우의 시적 도정에서 의미있는 굽이가 될 것이다. 이 시는 4천행에 이르는 장편이다. 파인(巴人)의 『국경의 밤』(1925) 이후 서사시 또는 장시가 단속적으로 창작되었지만, 한국현대시는 규모의 경제가 지나치다. 단형 서정시에서는 빼어난 업적들이 접종(接踵)했어도 장시는 양적인 빈곤을 면치 못해왔다. 질의 면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그 서두의 빼어난 감흥에 비해 곧 지리멸렬한 줄거리 따라잡기로 떨어진 『국경의 밤』이 보여주듯, 한국의 장시는 편편의 완성도에서는 대체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아마도 김지하(金芝河)의 담시들이 드문 예외에 속할 것이다. 요즘 『뿌쉬낀전집』(석영중 옮김, 열린책들 1999)을 틈틈이 읽으면서 새삼 확인한 바이지만, 단시건 장시건 양과 질 양면에서 그의 시세계는 압도적이다. 러시아 근대문학의 아버지가 저만했으니 러시아가 한때 세계사적 임무를 감당할 수 있었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러고 보면 우리 서정시는 너무 짧다. 시적인 것의 본질을 정서적 강렬성으로만 과소 정의한 탓일까? 장시의 빈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한국현대시가 사회적 소통에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황지우가 뛰어난 장편시를 완성했다는 것이 종요롭다.

그는 시극이라는, 우리 시의 전통에서 아주 낯선 장르를 선택했다. 신동엽(申東曄)의 「그 입술에 파인 그늘」(1966)과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1972) 정도를 선행작품으로 들 수 있을 만큼 우리 시극의 전통은 더욱 빈약하다.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전자는 시극이라고 명토박았지만 산문극적 요소가 지배적인 단막이고, 전국 가톨릭교구들을 순회공연한 후자는 시극이라고 내세우진 않았지만 시적 요소가 강하게 삽입된 단막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오월의 신부』는 시적 긴장이 극적 타당성 속에 전체적으로 고르게 배분된 본격적 시극의 효시로 기록될 것이다. 어떤 예술의욕이 그로 하여금 시극이라는 장르 선택으로 나아가게 했을까? 혼자 읽거나 또는 소수의 회중(會衆) 속에서 낭송되는 다른 종류의 시와는 달리 “극장에서는 전달의 문제가 즉각적으로 대두”8되기 때문에 시극은 강한 사회성을 가지기 마련이라는 점을 상기하자. 극장 또는 극적 마당을 시민/민중의 정치학교로 전유(專有)하거나 마주세우려는 신동엽과 김지하의 자욱을 이어, 황지우는 이 시극을 통해 사회적 소통을 본격적으로 실험하였다. 『오월의 신부』는 황지우가 아상(我相)의 모더니즘 바깥을 향해 치열하게 포복한 고투의 흔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가 본격적 시극을 완성할 수 있게 된 데는 선배시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행복한 조건과 만났기 때문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특히 김지하의 경우에서 보듯이, 공연예술에 대한 군사독재의 탄압은 서릿발이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시극을 포함한 연극예술이 부진했던 것은 무엇보다 직접적이고 집단적인 연극장르의 정치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해온, 식민지 공연정책을 계승한 역대 독재정권의 날카로운 감시가 결정적 몫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문민정부 이후 꾸준히 지속된 사회민주화의 전진이 본격 시극 탄생에 중대한 외생적 변수로 작용했음에 틀림없다. 또한 시극 공연을 가능하게 할 만큼 시장의 규모가 증대했다는 점이다. 근대 이후는 물론이고 근대 이전에도 한국에서 연극이 번성하지 못했던 결정적 이유의 하나로 정치적 변수 외에 시장적(市場的) 변수를 꼽을 수 있겠다. 지배공간 속으로 틈입한 또는 그 바깥에 구축된 시민적/민중적 공간으로서 설립된 근대 극장은 일정한 규모로 성장한 시장의 힘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정치적 변수와 시장적 변수는 동전의 양면이기도 하다. 시장적 변수가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때 정치적 변수가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장의 힘을 긍정/부정의 양면에서 제대로 헤아리는 관점의 훈련도 절실하다. 최근 한국영화가 구태를 벗고 울흥(鬱興)하는 형세도 이 변수의 작동과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이딸리아 통일운동 과정에서 생산된 최고의 민족예술로서 전인류적 재보가 된 베르디(G. Verdi)의 오페라를 상기할 때, 한국 공연예술의 실태에 대한 더욱 세심한 주목이 요구된다. 황지우의 시극도 이 형세의 한 분출일 것이다.

이처럼 황지우 개인의 시적 도정뿐만 아니라 우리 현대시의 행보 속에서도 의미있는 한 지표로 되는 시극 『오월의 신부』는 액자형 구성을 취한다. 항쟁에서 살아남은 두 인물, 장신부(神父)와 허인호의 현재를 제시한 프롤로그로 시작, 20년 전 광주항쟁의 추이를 상상적으로 재구성한 총 3부 22장의 속이야기 부분을 거쳐, 다시 두 인물의 현재로 복귀하는 에필로그로 마감되는 것이다.

겉이야기에 해당하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두 인물은 항쟁의 기억을 앓는다는 점을 공유하면서도 그 방식에서는 상이하다. 항쟁의 마지막 밤, 자의반 타의반으로 도청을 빠져나온 장신부가 죄의식에 찢긴 ‘분열된 성자’라면, 최후의 지도부로서 도청의 마지막 밤을 지키고도 생존하여 그후 정신병동에서 죽은 혼들과 살아가는 허인호는 “미쳐버린 성자”9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시인은 장신부의 대사는 표준어로 된 비극적 운문으로, 허인호의 대사는 사투리가 강한 해학적 산문으로 처리한다. 이는 일견, 고상한 정치세계와 일반 서민사회의 반어적 대조를 운문과 산문으로 분리 표현한 셰익스피어(W. Shakespeare)적 수법이다.10 김동석은 이 문제에 관해 날카로운 고찰을 베푼 바 있다. 셰익스피어 희곡 전체에서 산문이 차지하는 부분은 약 26%인데, 산문장면 또는 산문대사는 대체로 부정적인 것 또는 저급한 것과 연관된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본질은 시”라는 판단을 통해 김동석은 똘스또이(L.N. Tolstoi)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보수성을 비판하였다.11 황지우는 수법에서 셰익스피어와 유사하되 그 지향점은 판이하다. 시인은 장신부보다 미친 성자 허인호에 기울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역전이 속이야기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여주인공 오민정을 둘러싸고 대치하는 강혁과 김현식, 두 남주인공의 경우는 대표적이다. 강혁은 그 이름답게 학생운동의 전설적인 지도자다. 반면 김현식은 남로당 도당위원장의 아들(183면)이지만 강혁에 대한 어떤 열패감 속에서 운동으로부터 이탈한 인물이다. 그런데 항쟁의 결정적 국면에서 강혁은 광주를 탈출하고, 평범한 이름의 이탈자 김현식은 광주로 들어와 ‘오월의 신부’ 오민정과 항쟁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김현식의 애인이자 동지인 오민정이 도경 정보과장의 딸(105면)이라는 일종의 결손을 짊어진 인물로 설정된 것과 함께, ‘카게무샤(影武者)’처럼 김현식이 강혁의 이름 아래 그 대리자로서 싸우고 죽어가는 핵심구성을 음미할 때, 그의 하위자적(subaltern) 성격이 암시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나타나는 성속(聖俗)의 반전과 속이야기에 드러나는 지도자와 이탈자의 위계전복, 이 작품은 역전에 기초해 있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광주항쟁의 지식인 부재적 성격을 반영하는 것인데, 시인은 그 뼈아픈 사실을 엄정히 접수하면서 이 무명(無名)의 산화(散華)에 지고의 진혼곡을 봉헌한다. 『오월의 신부』는 고통스러운 기억의 제의에서 피어난 일종의 종교극이다. 제도교회 또는 제도사회에 바쳐진 것이 아니라 엘리뜨들 사이의 경쟁의 연대기로부터 소외된 하위자 집단에 헌정된 반종교적 종교극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이 시극의 임계점이다. 우선 극적 전개에 대한 독자/관객의 예상이 너무 적중하는 게 문제다. 엄밀하게 보면 이 시극에는 진정한 의미의 극적 대립이 부재한다. 신군부와 진압군은 애초에 폭력적 타자로 조정돼 있으니 논외로 치더라도, 광주 안의 다른 목소리들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억압되었다. 온건한 해결을 기도한 수습위나, 이 사건의 진실을 외부에 알린다는 명분으로 최후의 순간에 도청을 빠져나간 서신부가 너무 희화적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것은 대표적 예다. 이 때문에 핵심 주인공들도 평면적 성격을 면치 못한다. 오월의 잔 다르끄로 성화(聖化)된 여주인공 오민정이 특히 그렇다. 내면이 제거된 그녀의 주체는 너무 순결해서, 삼각관계를 제대로 받치지를 못한다. 강혁의 집요한 구애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에로스는 오로지 김현식으로만 고정돼, 『춘향전』처럼 불구의 삼각관계로 현현된다. 종교극의 비극적 감상에 균열을 낼 해학, 즉 산문의 육체가 부족하다. 이 점에서 비극적 긴장과 희극적 해학을 엇바꿔가며 판을 짜가는 판소리의 예술원리를 비판적으로 계승했던 김지하의 담시작업을 참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시극의 뼈대가 의외로 단순해진 원인은 무서운 고독 속에 압살된 최후의 시민군에 시인의 시선이 과잉집중된 탓이다. 시인은 무대 아래에서 그 자리에 부재한 자신을 숨죽인 오열 속에 자책하며 그들의 죽음을 경배한다. 그리고 그 종교적 감정이 모든 부재자(독자/관객)에게 전염되기를 욕망한다. 이 동일성의 욕구가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이 말하는, ‘민족주의의 형이상학’12으로 통하는 입구가 아닐까? 이 시극은 무대와 객석의 수직적 위계화에 기초한 서구 근대극의 상자곽 무대에 너무 충실하다. 시인은 자기 자신을 쓰고 있지 않다. 이 점에서 30년대 시단에 대한 김남천의 비판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시인 자신의 문제를 급행열차와 같이 통과해버린 탓에 (…) 시정신은 고정화하여 일정한 궤도를 한결같이 내왕하는 전차의 ‘뽀─’ 소리가 되고 말았다.”13 앞으로 문제는 죽은 자에 지핀 이 시극의 종교극적 틀 또는 그 요소의 과다를 해체하여, 극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반쪽 소통을 연극 밖의 현실과 어떻게 이어 참된 소통으로 들어올리는가, 하는 것이다. 광주항쟁의 진혼을 넘어서는 것이 항쟁을 계승하는 산 자의 길임을 새기며, 새로운 도정에 나선 황지우 시인의 다음 작업을 기대한다.

 

 

3. 소설과 수상(隨想):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

 

황석영이 돌아왔다. 1989년 방북, 망명, 1993년 귀국, 체포, 5년간의 영어(囹圄), 1998년 출옥. 사람들은 과연 그가 작단에 성공적으로 복귀할 수 있을지 주시했다. 『무기의 그늘』(1987) 이후 무려 10년이 넘는 창작의 공백을, 그 현실 부재를 극복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가 부재했던 90년대란 얼마나 단층적 변화의 시기였던가!

『오래된 정원』은 이 머나먼 귀환의 율리씨즈적 기록이다. 세계를 휘돌아 북한을 품고, 그 때문에 혹독한 댓가를 치른 후 남한사회로 귀환한 작가답게 소설 속에 펼쳐진 시간대(줄거리시간story time)는 다양한 공간들을 품은 채 다채롭다. 그런데 이 소설 속에 실제로 조직된 시간(서사시간narrative time)은 뜻밖에 짧다. 1장은 90년대 말 어느 해 겨울 새벽, 주인공 오현우의 18년 만의 출옥으로부터 시작된다. 감옥을 나와 그는 곧장 서울 근교 “신도시의 초입에 있는”14 누님의 아파트에 기거한다. “그 뒤 사흘 밤낮을”(상 25면) 아파트에 틀어박혀 있다가, 자폐증으로 어느 대학병원에 일주일 동안 입원한다(상 26면). 2장에서 그는 퇴원 뒤 다시 누님집으로 돌아온다. 애인 한윤희의 죽음을 알게 되고 여행을 생각한다. 비행기로 광주(光州)에 내려가 옛 동지들을 만난다(3장). 광주에서 하룻밤 묵은 다음날 아침, 이 여행의 목적지 갈뫼로 시외버스를 타고 떠난다. “남도의 끝자락”(상 29면)에 위치한 갈뫼는 시골학교 미술교사로 일한 한윤희의 작업실이 있던 곳으로, 18년 전 서울을 떠나 은신, 체포될 때까지 그녀와 동거했던 ‘오래된 정원’이다(4장). 이 4장부터 작품 끝 27장까지 공간은 갈뫼로 고정된다. 작품의 몸통은 갈뫼에서 그녀의 편지뭉치와 일기 등을 읽으며 지난 18년의 세월이 훑고 지나간 감옥 안팎의 삶을 반추하는 그의 거대한 회상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이 겨우 엿새다(하 311면). 여섯째날 아침 그는 갈뫼를 떠나 고속버스로 상경, 딸 은결이를 만나기 위해 찻집으로 가면서 작품은 대단원을 내린다(27장). 그때는 개나리가 활짝 핀 초봄이다(하 314면). 이 작품의 서사시간은 늦겨울에서 초봄까지 한달이 채 못되는 것인데, 그것은 더욱 단순한 공간적 추이의 반영이다.

 

감옥─누님의 아파트─대학병원─누님의 아파트─광주 술집─갈뫼─서울의 찻집

 

이 단순한 공간배치에서 여타 장소들은 갈뫼라는 핵을 싸고도는 외피라는 점에 유의할 때, 이 소설이, 안이야기와 속이야기의 경계가 의도적으로 교란됐음에도, 근본적으로는 액자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갈뫼라는 고정된 공간 속에서 엿새 동안 이루어지는 오현우의 거대한 시간여행이 이 작품의 자궁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작품이 1인칭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정통의 3인칭 리얼리스트, 황석영은 왜 1인칭으로 유턴했을까? 작가는 3인칭의 위기를 예민하게 감지하였다. 3인칭의 위기란 (창작)주체의 위기다. 대상을 향해 무한히 침투, 그 본질을 장악하는 주체 위에 구축된 것이 3인칭 소설의 근본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작가가 왜 1인칭으로 돌아앉았는지, 깨닫게 된다. 주체/대상의 이분법 자체가 유동성 속으로 함몰한 현실을 작가 스스로 앓으면서 주체의 위기를 냉철히 접수한 것이다. 구멍 뚫린 화두와 결합된 행동주의 대신, 주체의 위기, 그 코드 자체를 정직하게 점검하는 이 내성의 소설은 그래서, 행동이 극히 제한된 일종의 메타소설이기도 하다.

내성적인 면모는 갈뫼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나지만 기실 이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이 장편의 문을 여는 1장은 단연 압권이다. 새벽의 기상(起床)으로부터 시작하여 감옥문을 빠져나오기까지 수인번호 1444번에서 오현우로 회복되는, 즉 인간이 지워진 기호에서 주체로 거듭나는 그 고통의 전과정이 완벽한 호흡으로 손에 잡힐 듯이 재현되었다. 그런데 3인칭으로 포착된 질감과는 사뭇 다르다. ‘나’라는 프리즘을 투과한 대상에 예민한 심리적 촉수가 어룽여 눈길이 닿은 사물과 사람 들이 분절적 연속 속에 반짝인다. 이 반짝임은 감방을 나오기 직전 ‘나’가 거울 속에 떠오른 쓸쓸한 오십대의 사내에 낯설어하면서 문득 뇌까리는 내적 독백과 연관될 것이다. “저 거울에 비친 얼굴 뒤에 컴컴하게 보이는 어둠 뒤편에는 무엇이 있을 건가. 과연 바깥세상이란 것이 있기는 한 걸까.”(상 11면) 18년의 격절 속에 즉자적 생존을 영위하던 주체 이전의 주체가 거울이라는 타자에 비친 ‘나’ 앞에서 일종의 실존적 공포를 느끼는 이 장면은 작품의 자물통을 딸 열쇠다. 넘치는 사회적 맥락 속에 살아가면서 우리가 항용 잊곤 하는 탈사회적 주체가 대면할 텅 빈 공포를 이 장편은 강력하게 환기한다. 출옥 직전의 거울 장면에 드러난 낯섦의 경험은 출옥 이후에도 다른 차원에서 지속된다. 가령 누님의 아파트, 중산층 아파트 침대의 폭신함에 오히려 잠 못 들어 뒤척이며 옥중을 회상하는 장면을 보자.

 

가끔 몽정을 했다. 얼굴을 알 수 없는 여자들이 다녀갔다. (…) 그네는 어디서 찾아온 걸까. 여기서 이 황폐한 공간에서 나가겠다고 오불꼬불한 인적없는 복도를 헤매고 다니다가 (…) 계단 모퉁이에 무슨 버스터미널의 매점 같은 게 보이고 (…) 매점 안쪽에 주인인 듯한 사십대의 아줌마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은 어둠 그대로였다. 내가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어디냐고 물으면 (…)

우리하고 더 좀 살다 가지 왜 벌써 갈려구 그래?

그 얼굴 없는 아줌마가 특사의 임자였을 게다. 그런데 아는 이의 모습은 좀체로 나타나지 않았다. 보고 싶어 잠들기 전에 골똘히 생각하다 잔 뒤에도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상 24〜25면)

 

난 이 대목을 읽다 소름이 돋았다. 억지춘향식 귀신이야기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사회가 지워지자 주체도 비어버린, 단자로 추락한 ‘나’의 위기를 냉엄하게 드러낸 이 장면은 ‘마술’이라는 관형어조차 싱거운, 소름끼치는 리얼리즘이다. 이 각별한 서사적 질감 속에 작가는 출옥 후에도 여전히 마음의 감옥을 지닌 ‘나’와 끊임없이 요동하는 세상의 대면을 비선형적(非線形的) 시간의 교차 속에서 ‘나’의 내적 리듬에 따라 탁월한 솜씨로 교직한다.

이 소설처럼 작가의 분신인 ‘나’를 본격적 주제로 다룬 작품은 드물다. 이 작품에는 몽떼뉴(M.E. de Montaigne, 1533〜92)가 창안한 ‘자기검사’(self-testing)로서의 수상(隨想, essai)의 혼이 숨쉰다. 『수상록』의 형식이 고대 후기, 중세 전기간, 그리고 16세기에 유행한 “예화(exempla), 인용(quotations), 경구(aphorisms)의 묶음”이라는 전통장르로부터 기원했다는 지적이 흥미롭다. 원래 이런 전통의 독서노트로 시작된 것이 그만 논평이 텍스트를 압도하면서, ‘읽기’로부터 ‘살기’로 중점이 이동한 『수상록』이 태어난 것이다. 신이 떠난 시대, 근대의 초입에서, 미끄덩거리는 세상의 굴곡 속으로 혼의 모험에 나선 자신의 내면을 마치 실험하듯 응시했던 몽떼뉴를 통해 인간의 삶 자체가 문제적으로 된 근대적 의미의 개인의 탄생을 고지하는 에쎄가 출현하였던 것이다.15

『오래된 정원』에 그처럼 많은 편지·일기·낙서 등이 등장하는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닐 터인데, 브레히트(B. Brecht)의 인용으로 시작하여 브레히트의 인용으로 마감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이 소설은 하나의 방대한 수상록이다. 한윤희가 남긴 내밀한 문헌들을 독서하며 ‘나’는 그가 부재했던 낯선 세상의 갈피를 조각보 모으듯 재구성하는 한편, 자신이 헌신했던 혁명운동 전체를 반성적으로 사유함으로써 잃어버린 고리를 더듬거리며 찾아가는 눈먼 포복을 거듭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모더니즘적 해체서사로 떨어졌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비결정적 시간 속으로 어지럽게 흩어져버린 삶의 분절들을 탐색하는 시간여행은 주체의 위기를 새롭게 극복하려는 강렬한 윤리적 충동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핵심에 갈뫼가 있다. ‘나’와 한윤희의 짧고 행복한 공생이 신화처럼 이루어지는 갈뫼는 현실의 외나무다리 건너에 있는, 희귀하게 보호된 유토피아적 공간이다. 그러나 한 점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이 불안한 유토피아는 붕괴된다. 나는 지서주임이 등장하는 뛰어난 장면(12장)에 이르러서야 갈뫼의 은신생활이 일제말 강원도 산촌의 소까이(疎開)생활을 생생하게 그려낸 이태준(李泰俊)의 「해방 전후」(1946)의 전반부와 조응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아니 작가적 위기 자체를 정면으로 문제삼은 「해방 전후」 전체가 『오래된 정원』에 관여하고 있으니, 작가들 사이의 시대를 넘은 무의식적 유전이야말로 신비롭다. 행동 이전에서 행동 이후로 이행하면서 작가적 위기를 구원하려고 한 현(玄)과 달리, 오현우는 행동 이후의 이후를 추스리기 위해 갈뫼로 회귀하는 것이다. 갈뫼는 부활을 꿈꾸는 상징적 죽음의 공간, 웅녀(熊女)의 동굴이다.

그런데 이 방대한 시간여행 끝에 ‘나’의 위기는 해소되었는가? 광장에서 윤희의 환시에 지핀 ‘나’가 어질머리하는 마지막 장면이 상징하듯이, ‘나’의 위기는 진행형이다. 이는 뻔한 해답을 전망으로 호도하는 통상적 마무리를 거절하는 성찰적 진지성의 반영인데, 한편 작품내적 논리의 어떤 불철저성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나’의 반성적 사유가 해체의 끝까지 나아가지 않고 중둥무이를 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오현우가 광주항쟁 때 그곳을 빠져나오게 된 경위(6장)는 너무 평면적으로 설명되었고, 80년대 급진운동의 탄생을 회상하는 대목(11장)은 자기분석적이기보다는 자기변론적이다. 그러고 보면 오현우에게 교사출신 냄새가 너무 나지 않는 것도 이 측면과 연관될지 모른다. 작가의 작위가 때로 승해서 작품의 내적 리듬과 충돌하곤 한다. 이 때문에 인물들이 자기 운명을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민중미술로 출발했다가 그를 밑천으로 출세의 길로 달아나는 한윤희의 전 애인과, 부르주아의 자식으로 참회 속에 운동에 헌신하다 파탄, 결국 입북하고 마는 한윤희의 남자친구 송영태는 대표적인 예다. 무엇보다 이 작품 최대의 문제인물은 한윤희다. 전향한 좌익의 딸로 운동에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그녀는 오현우를 만난 뒤 아버지의 삶과 화해하는데, 오현우가 영어된 이후는 자의반 타의반 운동권의 대모로 변신한다. 그런데 그녀의 주체는 실은 ‘나’의 분신적 주체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녀의 주체는 아버지와 오현우라는 남성 타자의 명령에 따라 주조된, 상상된 주체 즉 소외된 주체인 것이다. 물론 그녀는 남성 타자들이 소시민적 영역이라고 의식상에서 타기하는, 혁명적 삶 바깥의 일상적 삶에 대한 감각을 중시함에도 그들로부터 끝내 분리되지 못한다. 그녀가 베를린유학 시절, 마지막 애인 이희수에 빠져드는 것은 그 분리의 징표였지만, 작가는 결국, 생태주의자 이희수를 사고사로 처리함으로써 그녀의 항명을 징벌하고 이 속에서 그녀도 암으로 죽는다. 한윤희의 주체가 성공적인 분리를 거쳐 재구축되지 못했기 때문에 오현우의 주체도 위기에서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작품 끝에 작가는 의미심장한 가능성 하나를 묻어두었다.

 

당신은 그곳을 찾았나요?

윤희가 내게 묻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오, 라고 나는 대답할 것이다. 인가를 찾아서 산을 넘고 언덕을 내려오는 중이라고. 멀리 마을의 불빛이며 연기나는 굴뚝이 보인다고. 당신이 살고 겪어온 길을 따라서 나는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고. (하 312면)

 

‘나’는 비로소 혁명과 일상 사이에서 추락한 그녀의 비극을 온전히 접수한다. 그의 귀환은 이제 시작이다. 모쪼록 『오래된 정원』 이후, 1인칭과 3인칭의 기우뚱한 균형에 기초한 새로운 서사의 도정이 충만한 운명의 시간 속에서 성숙하기를 기원한다.

 

 

4. 고전시대를 위하여: 고은의 『남과 북』

이미 고인이 된 조연현(趙演鉉)과 김동리(金東里)에 이어, 미당(未堂)이 작고함으로써 한국 현대문학의 한 시대가 실질적 종언을 고하였다. 그들이 남한문단의 확고한 ‘주인’으로 된 것은 남한사회의 반공적 재편이 일단 완결된 6·25 이후지만, 그 문학적 무의식은 식민지경험에 태반을 두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남한의 역대 독재권력과 직·간접적으로 유착하면서 문학권력을 과점(寡占)했던 이 ‘어른’들의 행태는, 문학적 자율이라는 환상과 천황제 파시즘이 근본에서 제휴했던 일본 및 식민지 문단의 한 경험과 변형적 연속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분단체제의 안정적 관리에 자발적으로 복무함으로써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스스로 제한했던 불행한 세대의 한국문학이 이렇게 쓸쓸히 역사 속으로 스러진 것이다.

50년대에 등단한 문학인이 이제 명실상부한 문단의 원로로 정위(定位)하게 되었다. 물론 식민지경험을 앞세대와 일정하게 공유하고 있지만, 50년대 세대는 6·25가 더욱 직접적인 문학의 모태일 것이다. 이 불행한 전쟁에는 여러 층위의 역설이 기이하게 동거하고 있다. 근대 이후 수많은 전쟁이 한반도를 통과하였다. 그런데 조선/조선민중이 당사자로 나선 경우들은 대부분 소수의 국지적인 전투·전쟁이었고, 식민모국의 대규모의 침략전쟁의 경우들은, 강제동원 속에 조선민중이 입은 피해가 막대했음에도, 근본적으로는 ‘당신들’의 전쟁이었다. 남과 북의 내전으로 출발하여 대규모의 국제적인 열전으로 확대된 6·25는 그 이전의 전쟁들과 질과 양에서 현저히 차별된다. 한반도가 전쟁의 주제요 주전장이었다. 대규모의 남북 군대가 충돌하였다.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선대립의 축이 미·중으로 변모한 전쟁 후기에도 남북군대는 여전히 피흘리는 최고 당사자였던 것이다. 더구나 남진과 북진을 거듭하면서 한반도 전체의 민중이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얽혀들었으니, 민족의 탄생을 고지한 3·1운동도 이 전쟁에 비하면 국지적일 정도다. 프랑스혁명, 혁명전쟁 그리고 나뽈레옹의 등장과 몰락이 “처음으로 그리고 더욱이 전유럽적 규모에서, 역사를 하나의 거대한 집단적 경험으로 만들었”듯이,16 6·25야말로 전한반도 민중의 역사학교였다. 외국군대의 현전으로 민족사와 세계사의 연관을 생생하게 실감케 한 이 국제적 내전이 결국 38선의 부분변형으로 휴전에 이름으로써 역사의식의 각성은 일변의 반동을 함유하게 되었던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재생과 반동의 복합’이라는 모순된 역사의식이 휴전 후 첨예한 대립 속에서도 남북이 각기 사회주의공업화와 자본주의산업화로 나아갈 동력의 일부로 전환되기도 했으니, 역사의 간지(奸智)는 오묘하다. 그런데 6·25의 최대교훈은 남이건 북이건 일방에 의한 타방의 흡수통일의 불가능성을 그 자체로 현시했다는 점이다. 타방과의 공존·공생에 입각한 평화통일의 길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6·15선언은 그 뒤늦은 확인이다. 6·25의 역설을 카인의 낙인처럼 자신의 영혼과 육체에 새긴 50년대 문인들이, 앞세대와 달리 70년대 민족문학운동의 선배그룹으로 전이했던 비밀이 여기에 숨쉬고 있을 터이다. 고은 시인은 그 대표적 존재의 하나다.

『남과 북』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통일에 촛점을 맞춘 주제시집이다. 이 전작시집은 시인의 첫번째 방북경험, “지난해(1999년─인용자) 북한방문 15일 동안 현지에서의 여러 감회”17로부터 직접 솟아난 것이다. 그런데 이 시집은 통상적인 주제시집이 아니다. “통일이라는 말에 근신할 정도로 그것의 비전투적 잠복기를 늘여가고 있다”(255면)는 시인의 말처럼 통일을 괄호치는 통일시집이다. “낭림산맥 치솟은 연화산 줄기에” 누더기 낙하산으로 침투하여 낭림호수와 해후하는 상상여행을 어디 한군데 얼간 데 없이 정밀(靜謐)한 고독 속에 그려낸 「산중 낭림읍」은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시인의 자세를 상징한다. 시인은 「서수라」에서 다시 한번 확인한다.

 

마지막 기억조차 빼앗긴

스파이가 되고 싶어라

지령 끊어진 지 오래

 

‘지령 끊어진 지 오래인 스파이’라는 이 기발한 의탁(依託)으로 시인은, 초자아의 역사적/사회적 명령에 꼭두각시처럼 복종하는 낡은 자아로부터 탈각, “아 무어라고 지껄이는 자 극형에 처함이여”(「개마고원」), 이 선열한 말 그대로, 새로운 세상에 언어도단(言語道斷)으로 즉하는 것이다.

이 시집에서, 좀체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지 않던 그로서는 참으로 드물게도, 시인 자신의 문학적 모태, 6·25, 의식 밑바닥에 숨은 그 예민한 상흔에 수접게 다가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군산(群山)에서 그가 체험한 6·25의 동족상잔을 갈라진 어조로 메마르게  서술한 「선유도」의 1연은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

아 아 초개같이 스러지리라 하는 노래가 들렸다

 

로 끝난다. 슬그머니 삽입된 이 구절은 「상평 연못」에서 더 명료한 모습으로 변형 반복된다.

 

나는 못 먹고도 자라나서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

아 아 초개같이…… 하고 슬픈 국방경비대 노래를 불렀습니다

 

들렸던 그 노래는 1946년에 창설된 국군의 모체, 국방경비대의 군가였다. 그리고 ‘들렸다’가 ‘불렀다’로, 곧 피동에서 능동으로 전환된다. 이 전환에는 심연을 건너는 고독한 도약이 있다. 마침내 그는 「한글」에서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제시한다, 아주 담담히.

 

나는 세 번의 징병검사 무종을 맞아 보충역이었습니다

 

나라의 은혜는 최소로 입고 나라의 명령에는 최대로 동원되는 농민의 아들로서 동족상잔의 뒤안에서 국방경비대의 노래를 불렀던 시인의 비꼬인 존재태! 시인은 역사의 중압 아래 분열된 원초자아를 온전히 포옹함으로써 의식 저 밑바닥에서 자맥질하는 남루한 진실과 앨쓴 화해에 도달한다. 자기와의 화해가 최종적으로 이루어지는 「한글」이 “평안북도 향산군 최형민씨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북한에 갔을 때 시인이 우연히 만난 최형민씨는 6·25 당시 인민군 전사였다. 그런데 둘의 친교에서 50년전의 남루한 기표들, ‘국방경비대’와 ‘인민군’은 한줌의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 “형상은 진리가 아닙니다/형상뿐 아니라/진리란 진리의 이름도 없습니다.” 6·25는 형상들, 즉 이름들의 헛싸움이었다. “그가 북한사람이 아니고/내가 남한사람이 아닙니다.” 시인은 고은으로서 최형민과 통일한다. 이 장문의 서간시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안성에서 향산으로 갈 수 없는 편지를 씁니다/우선 이것이면 됩니다 사람보다 새가 먼저 가고 옵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통일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를 횡단하는 집합표상의 완강한 보수성을 예민하게 의식하되 시인은 상투적으로 신음하지 않는다. 예감 속에 무르녹은 현재에 대한 충만한 신뢰가 따듯하게 배어 있는 어조에서 짐작되듯, 시인은 온몸으로 감득하고 있다. 우리들의 시대가, 비유컨대, 다가올 파국을 절규하는 예언자 요한의 시대가 아니라 새 세상의 도래를 기쁘게 선포하는 복음꾼 예수의 시대라고. 최형민씨와의 개인적 통일이 이루어지는 바로 이 장소에서 시인은 과거의 나와 화해한다. 개인들 사이에서, 개인 내부에서 두 통일이 동시에 진행됨으로써 소외된 주체가 분열을 넘어 온전한 품성을 회복하는 미묘한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 시는, 통일이란 때묻은 정치적 구호를 해체하여 그 청렬(淸冽)한 야생의 향기로 무한히 회귀하는 이 특별한 통일시집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이 비집합적 실감으로부터 시인은 한반도를 낱낱이 이루는 모든 장소들을 만다라로 장엄한다. 이 시집을 구성하는 모든 시편이 지명과 연관된 제목으로 되어 있는 점에 주목할 일이다. 개중에 인물 또는 사물을 제목으로 한 경우가 없지 않지만 그조차도 그 장소와 관련된 한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만인보』가 인간화엄이라면 『남과 북』은 국토화엄이다. 이 화엄세계에 남과 북은 없다. 남과 북 이전, 아니 이후, 한반도의 모든 장소들이 각자성불(各自成佛)로 찬란한 슬픔 속에 회통한다. 이 때문에 이 세계에는 중심과 주변도 없다. 서울도 평양도 이 무차별 평등세계의 겸허한 구성분자의 하나일 뿐이다. 남과 북을 각기 대표하는 두 장소의 중심성의 과잉에 시인의 의식은 불편하다. “남한은 온통 속도뿐이고/북한은 오랫동안 속도전이라는 구호의 누리였다”(「대동문」). 적대적 공존 속에 어느 틈에 닮아버린 남과 북의 현재태를 다시 확인하면서, 평양에서 시인은 “이곳은 좀더 가벼워야 하리”(「평양」)라고 안쓰러워하고, 단군릉에선 나직이 중얼거린다, “가난한 역사이고 싶습니다”(「단군릉」)라고. 그리하여 시인은 서울과 평양에서 맹렬히 탈주하여 변경으로 무한히 분산한다. 이 시집에서 우리 국토의 모든 변경들은 기운생동하는 언어의 리듬 속에 신화처럼 눈부시게 살아난다. 그 분권적 분산은, 「옛 울릉도의 말씀」에서 간명히 요약되고 있듯이, 탈중심적 소국주의를 품은 유토피아적 충동과 속깊이 제휴하고 있다.

 

작은 나라!

그것만으로 세상의 보석이었다

 

이 소국주의는 민족주의 바깥과 소통한다. 이 시집에서 변경의 여진족이 시인의 각별한 눈길을 받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여진족 “세 년과 살아봤”던 마천령 사냥꾼을 야생의 호흡으로 노래한 「주을온천 가까이」는 단연 압권이다. 문명의 댓가로 잃어버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사유하며 타자와 대면한 시인의 에로스는 대발(大發)한다. 이 타자성이 「북청 사자춤」에선 한반도와 세계의 상호연관에 대한 몰록깨달음〔頓悟〕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여진 암자」에선 초원의 영웅주의에 대한 낭만적 숭배 속에 대국주의로 질주하기도 한다. 나는 이 대국주의에 통상적 경계를 발하고 싶지는 않다. “아니 여진족처럼 가장 자랑스러이 사라져야겠다 끙!”─이 마무리가 보여주듯이, 시인의 몽상은 유치한 국수주의가 아니다. 상상력의 부족은 우리가 걸어갈 전무후무한 통일시대의 실현에 치명적 결격의 하나로 될 터인데, 그럼에도 소국주의와 대국주의가 아무런 매개 없이 병치된 이 시집의 어떤 분리가 언어도단을 넘어서기를 나는 기대한다.

고구려·백제의 유민과 함께 당(唐)의 침략을 분쇄한 제2차 통일전쟁의 영웅, 문무왕(文武王)의 혼이 깃들인 감포(甘浦)에서 시작된(「대낮 감포」) 장엄한 국토화엄은 휴전선에서 끝난다(「휴전선」). 그런데 시인은 오히려 휴전선에 ‘감사’한다. 임자 잃은 땅들, 풀들, 풀벌레들, 나무들, 짐승들, 잔짐승들, 세균들을 위하여 휴전선이 “부디 영원하라”고 역설의 기원을 바침으로써, 오늘의 통일을 감포의 통일과 극명히 차별짓는다. 상흔 속에서 다른 세상이 피어난 오묘한 휴전선의 양방향 확대(“그 이쪽 저쪽도 넓혀가거라”) 에서 통일의 새 도정을 예감한 시인은 정녕 견자(見者)다.

우리 시대가 산출한 최고의 시집을 음미하면서 나는 새삼 고전의 문제를 다시금 새겼다. 단순성의 위엄을 잃지 않으면서 미묘한 그늘을 포착하는 시인의 눈은 이미 대가의 경지다. 각 시편들이 서로를 머금어 하나의 그물망으로 통합된 이 시집의 유기성도 대단하다. 그럼에도 나는 어떤 결핍을 느낀다. 그의 시는 더 복잡해져야 한다. 언어도단의 깨달음, 그 촌철살인(寸鐵殺人)이 현실화하는 절차의 복잡성이 작품내적 논리와 정합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획득되는 문학적 질감이 더 두터워졌으면 싶다. 돈오(頓悟)가 점수(漸修)와 만날 때, 긍정의 변증법에 기초한 화엄적 일통(一統)이 자칫 빠지기 쉬운 부정의 약화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T.S. 엘리엇은 성숙한 고전시대의 앞과 뒤의 문학은 편벽성과 단조로움을 드러낸다고 하였다. 아마도 현재 우리 문학은 고전시대 이후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고전시대 이전의 문학이 보이는 편벽성은 위대한 문학전통의 유전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공통기준의 부재에서, 그 단조로움은 한 언어의 가능성이 충분히 발굴되지 못한 데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18 이 점에서 그 가능성이 여전히 발굴 도중에 있는 한국어 창작이 기념비적 고전으로 전환되기 어려운 그 간난한 조건들이 상기된다. “한 문학의 원숙은 그것이 산출된 사회의 성숙의 반영이다.”19 고전시대 도래의 바탕이 되는, 문학과 사회의 동시적 원숙을 향하여 문학인과 독자의 상호교육이 절실한 싯점이다. 우리 곁에 문득 다가온 통일시대는 이 동시적 원숙을 위한 절호의 기회다. 통일시대를 제대로 살아낼 때, 시인의 말을 빌리면 “통일에 앞서 삶의 품성을 높이”(255면)는 작업을 동시에 온몸으로 밀어나갈 때, 그 시대의 징표로서 우리는 창조적인 고전시대로 진입할 것이다. 그런데 2000년에 산출된 작품들의 징후를 보건대, 고전시대를 향한 우리 문학의 행보는 이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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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池東植 「아렉산더대왕과 世界市民主義思想」, 『史叢』 제2집(고대 사학회 1957) 78면.
  2. H.J. 슈퇴릭히, 林錫珍 역 『세계철학사』 상권(왜관: 분도출판사 1983) 257면.
  3. A. 하우저, 白樂晴 역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고대·중세편』(창작과비평사 1976) 118〜19면.
  4. A. 토인비, 盧明植 역 『역사의 연구』 Ⅱ(삼성출판사 1993) 239면.
  5. 柳父章 『飜譯語成立事情』(東京: 岩波書店 1997) 33면.
  6. K. Marx, Capital I, Collected Works 34,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86, 284면.
  7. “The great poet, in writing himself, writes his time.” Selected Prose of T.S. Eliot, ed. by J. Haywood, Penguin Books 1965, 53면.
  8. “Poetry and Drama,” Selected Prose of T.S. Eliot, ed. by F. Kermode, Harcourt Brace & Company 1975, 138면.
  9. 황지우 『오월의 신부』(문학과지성사 2000) 214면. 이하 이 책에서의 인용은 따로 주를 달지 않고 면수만 표시함.
  10. “Poetry and Drama,” 앞의 책 134면
  11. 金東錫 「시극과 산문: 쉐익스피어의 산문」, 『뿌르조아의 人間像』(탐구당서점 1949) 120〜31면.
  12. Neil Lazarus, “National consciousness and the specificity of (post) colonial intellectualism,” Colonial discourse/postcolonial theory,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94, 202면에서 재인용.
  13. 金南天 「유다적인 것과 문학」, 『현대조선문학전집 7: 평론집』(조선일보사출판부 1938) 257면
  14. 황석영 『오래된 정원』 상(창작과비평사 2000) 23면. 이하 작품 인용은 따로 주를 달지 않고 책의 면수만 표시함.
  15. 몽떼뉴에 대한 탁월한 분석은 Erich Auerbach, Mimesis: The Representation of Reality in Western Literature, trans. by W. Trask,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3의 12장을 참고할 것.
  16. G. Lukács, The Historical Novel, trans. by Hannah and Stanley Mitchell, Boston: Beacon Press 1963, 23면.
  17. 고은 「후기」, 『남과 북』(창작과비평사 2000) 254면. 이하 이 시집에서의 인용은 따로 주를 달지 않고 면수만 표시함.
  18. “What is a Classic?” Selected Prose of T.S. Eliot, 119면.
  19. 같은 글 11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