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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혜경 李惠敬
1960년 충남 보령 출생. 1982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그 집 앞』, 장편소설 『길 위의 집』이 있음.
대낮에
지붕의 박공이 마무리되었다. 지붕은 오랫동안 닫혀 있는 암자의 쪽문에서 볼 수 있는, 세월이 느껴지는 동록빛이었다. 그 자체로는 썩 마음에 드는 빛깔이었다. 문제는 집 주위가 녹색투성이라는 것이었다. 연둣빛 잔디에 메타세쿼이아를 닮은 진초록 나무, 게다가 동록색 지붕이라니. 수틀을 소파에 기대어놓고 몇발짝 떨어져서 보니, 오래 묵혀둔 집처럼 스산했다. 수본대로라면 환한 빨강 지붕이었다. 같이 십자수를 배우는 다른 여자들은 순순히 빨간 실을 꿰었는데 왜 나는 빨강이 너무 상투적이라고 생각했을까. 연녹색에서 진녹색까지 농담을 두어가며 지붕을 절반쯤 수놓았을 때 이미 그르쳤다는 걸 알았다.
생전 처음 놓아본 십자수였다. 지지난달 시누이네 집에서 거실 탁자 위에 놓인 둥근 수틀을 보지 않았더라면 직물의 날줄과 씨줄 사이에 코를 박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볼이 통통한 소녀와 머리가 둥근 남자애가 코를 맞댄 수본 위에 수가 절반쯤 놓여 있었다. 여고생인 조카가 남자친구에게 선물하겠다는 일념으로 수놓는 중이라는 게 시누이의 설명이었다. 남편이 그걸 유심히 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봐요?”
“아니, 요즘도 이런 수를 놓나 싶어서. 어렸을 적에 벽에 걸려 있던 옷덮개, 뭐라더라, 횃댓보? 그래, 거기에 이런 수가 있었던 것 같아서. 당신은 이런 거 할 마음 없어?”
“나도 남자친구가 생기면 고려해볼게요.”
남자친구 아닌 남편의 생일을 달포 앞두고 나는 유럽풍의 십자수를 지향한다는 수예방에 들어섰다.
대학 신입생 때 만난 남편은 첫번째 데이트에서, 가족이라고는 누나와 단둘뿐인데다 남는 시간은 온통 아르바이트에 바쳐야 하는 처지임을 먼저 밝혔다. 그가 자신에게 불리한 점을 먼저 내보이는 게 결벽 때문인지 아니면 나에 대한 완곡한 거절인지를 곰곰이 저울질하면서 나는 맥주거품을 핥았다. 친가도 외가도 형제가 많은 집안인데다, 오빠 둘에 언니가 둘인 막내딸이라서, 가족모임이 있는 날이면 현관에 신발이 잔을 넘는 맥주거품처럼 넘쳐나는 집안에서 자란 내게 그의 단출함은 결격사유가 못되었다. 추억도 식구수에 비례하는지, 연애시절, 내가 개성 다른 언니들 이야기며 짝사랑했던 오빠 친구 이야기를 조잘거려도 남편은 자기의 어린 시절을 펼쳐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남편이 추억 속에서 불현듯 꺼낸 십자수였으니 나로선 무심하게 넘길 수 없었다. 남편 몰래 수를 놓으며 비밀스러운 기분이 들 때가 좋았다. 남편의 생일에 맞춰 식탁 옆 벽에 걸고 그 앞에서 케이크를 자를 예정이었다. 그랬는데…… 초록투성이인 풍경은 오히려 식욕을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나 하는 짓이 늘 이렇지, 뭐. 나는 짧게 한숨을 쉬고 딱딱하게 뭉친 어깨를 주무르며 일어섰다. 어느새 한시 반이 다 되어 있었다. 유치원에 간 딸 희영이 돌아올 시각이었다. 카디건을 찾아 걸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거기 김형도씨 댁인가요?”
애프터써비스 쎈터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격식을 갖춘 목소리였다.
“네, 그렇습니다만.”
“여기는 대전 유성구청 사회복지과입니다. 김형도씨 계십니까?”
“출장중인데요. 무슨 일이시지요?”
“그래요? 혹시 부인 되시나요?”
“예, 그렇습니다만……”
“그럼 김경선씨를 잘 아시겠네요?”
“김경선씨요?”
나는 뜨악하게 되물으며 머릿속으로 더듬었다. 낯선 이름이었다.
“며느리 되시는 분이 시아버지 성함을 몰라요?”
은근히 힐난조인 사내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시아버지 이름이 여자 이름 같았다는 걸 떠올렸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김경선씨가 그동안 수용시설에 오래 계셨어요. 저희는 연고가 없는 분인 줄 알았는데, 아드님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밝혔어요. 김경선씨가 살고 있는 시설은 부양할 가족이 있으면 머물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남편이 출장에서 언제 돌아오시나요? 우선 제 연락처 알려드릴 테니 오시는 대로 연락 바랍니다.”
머릿속에 매캐한 연기가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시아버지라니? 혼잣몸으로 고생하면서 남매를 키운 시어머니의 고생담을 간간이 들었을 뿐, 시아버지에 대해 들은 것이라고는, 남편이 초등학교 때 어느날 집을 나가서 종적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내게 시아버지는, 산길에서 우연히 만난 묵은 무덤을 보면서 그 무덤 임자를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막연한 존재였다. 그런데 시아버지라니?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시누이네 전화번호를 눌렀다.
“뭐, 누가 전화했다구?”
“그, 저, 김경선씨, 아니 아버님……”
늘 차분하던 시누이가 날카롭게 되묻는 바람에 나는 더듬거렸다.
“그분이 직접 전화하신 건 아니구요. 그런 분들을 담당하는 공무원인가봐요. 그분이 자식들 곁으로 가고 싶다고 하셨다구요.”
“아니, 자식들이라니. 누가 그 인간 자식이라나. 그냥 싸질러만 놓으면 자식인가?”
시누이가 갑자기 대들듯 소리를 질렀다. 나를 질책하는 게 아님을 알면서도, 처음 들어보는 시누이의 거친 말투에 가슴부터 벌렁거렸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뒤, 어린 동생을 돌보며 세상을 헤쳐온 시누이는 나와 첫대면하던 날, 내 손을 잡고 손등을 하염없이 쓸어내릴 뿐, 제대로 인사치레조차 할 줄 모르던 여자였다. 기름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소슬하던 손이 전하는 그 진정에 나는 그만 목이 메었다. 골목을 다 벗어날 때까지 지칫거리며 따라온 시누이는 내가 몸을 돌려 다시 작별인사를 했을 때에야 내내 하고 싶었을 말을 입밖에 내었다. 우리 형도, 세상에 그렇게 가엾게 큰 애도 다시 없을 거야. 잘 부탁해요.
표나게 자상하지도 않았지만 남을 입질에 올리지도 않는 시누이의 질박함은, 잘 쌓은 돌담에 등을 기댄 것처럼 든든하기도 했고 때로는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데에 투명한 옹벽이 되기도 했다. 그런 시누이가 이십여년 만에 받은 생부의 소식에 그런 반응을 보이다니. 사건이라면 그것이, 내게는 없는 걸로 알았던 시아버지가 나타난 것보다 더한 사건이었다.
“전화가 또 오면 희영 엄만 무조건 모른다고 해. 희영 아빠 돌아오면 희영 아빠랑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아니야, 거기 전화번호 받아놓았다며? 불러줘봐.”
통화를 마친 뒤, 담장이 무너져 밖에서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집안에나 앉은 것처럼 허둥거리던 나는 그날 밤, 평소에 잠그지 않던 베란다 쪽 문까지 꼼꼼히 걸어잠그고 나서야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별일 없었지?”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은 평소의 버릇대로 동전이며 열쇠 들을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안방 탁자 위에 올려놓으면서 물었다.
“별일이…… 없진 않았어요.”
“뭔데? 우리 희영이가 또 외간남자를 팼어?”
남편은 짐짓 농담조로 말했다. 희영이는 심심치 않게 사고를 쳤다. 갓난아기 때부터 유난스러운 성정이긴 했다. 곤히 잠든 것처럼 보였다가도 요 위에 내려놓기만 하면 와앙 울어젖히는 통에 아이를 업고 졸면서 밤을 새운 게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아파트 현관까지 왔다가도 애가 동네가 떠나가라 우는 소리를 들으면 몸 돌려 다시 나가고 싶어져. 그렇게 말하는 남편 앞에서 나는 서운한 기색조차 내비칠 수 없었다. 자업자득이었으니까.
아이가 뭐가 급하냐, 집부터 장만하자는 남편의 말이 타당하게 여겨지기도 했고 둘만의 시간을 좀더 누리고 싶은 욕심도 있어서 우리의 신혼은 4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새 집으로 이사한 어느날 밤, 나는 버릇처럼 콘돔을 꺼내는 남편의 손목을 쥐었다.
“이젠 안 그래도 돼요. 우리 집이잖아. 난 당신 아기 갖고 싶어.”
남편은 멈칫거리다가 손에서 힘을 풀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몸을 떼어냄으로써 내 꿈에 합세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했다. 나는 아연했다. 한껏 달아 있던 내 몸에서 피가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는 듯했다. 집 장만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외롭게 자랐으니만큼 속마음으로는 나보다 더 아기를 기다릴 것이라며 지레 안쓰럽던 내 마음은 황잡은 거였다. 남편은 변명인지 해명인지 모를 혼잣말을 했다. 난 부모가 된다는 게 겁나. 자신없어.
그날부터, 아기를 가지려는 나와 아기를 피하려는 남편의 은근한 전쟁은 반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남편이 나 몰래 정관수술을 받지 않은 건 두고두고 신기한 일이었다.
엄마가 되어보지 못한 채 늙느니 이혼하겠노라는 극언까지 들은 다음에야 남편은 꺾였다. 그랬으니만큼, 밤이면 울어대는 아이를 업고 앞동의 불빛이 하나둘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부은 다리로 서성인대도 나는 할말이 없었다. 친구하고든 언니들하고든 제대로 된 싸움 한번 못해본 내 뱃속에서 나온 애 같지 않게 아이가 성질을 부릴 때면, 제 아빠가 저를 원하지 않았던 걸 알아차리고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동생을 보면 나아질 거라는 주위의 위로도 내겐 희망이 안되었다. 희영이 그렇게까지 사납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둘째를 낳아 키우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희영인 이번 주일엔 양호했어. 근데 희영이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는 연락이 왔어요.”
주머니를 다 비우고 재킷을 벗던 남편이 흠칫했다. 침묵. 어디선가 무덤을 열고 망령이 살아나고, 그 망령의 기미를 탐색하느라 숨소리까지 죽인 침묵. 언젠가 이런 적이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아물거리는 기억을 더듬는 내게 남편이 갑자기 쉬어버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그쪽에서 뭐래? 뭐 묻는 것 없어?”
“당신 출장갔다니까 돌아오면 연락해달라고 전화번호 알려주던데요.”
“혹시 회사 전화번호는 안 물었어? 그래. 당신, 앞으로 나 찾는 전화 오면, 누가 뭐 물어보면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래.”
남편이 당부할 필요도 없는 게, 나는 정말 모르는 것이다. 나야말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이 느닷없는 사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묻고 싶어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저녁상을 차리는 일뿐이었다.
감자국에 들어갈 다시마를 자르다가 얼결에 떨어뜨린 가위가 아슬하게 발가락을 비껴나가는 순간, 나는 아까부터 내 기억을 간질이던 기시감의 정체를 찾아냈다. 얼마 전에 본 비디오였다. 「슬리피 할로우」. 칼에 맞아 죽을 때 잘려나간 제 머리를 찾느라, 나무둥치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뛰쳐나와 산 사람의 목을 뎅강뎅강 자르는 목 없는 철기사. 이미 죽었으므로 총을 맞아도 칼을 맞아도 심지어 불에 태워도 살아나는 그 유령. 그 유령을 조종하는 사람이 살고 있는, 언제 그 목표물이 될지 모르는 마을사람들의 숨죽인 불안. 그거였다. 철기사의 소굴엔 사람의 목이 여럿 뒹굴고 있었다. 사람의 목을 들고 돌아와 혼자 제 목에 머리를 맞춰보았을 철기사. 영화에 없는 그 장면을 상상하면서, 그 무섭던 와중에도 유령이 우습고 딱하게 여겨졌던 기억도 났다.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 아버지가 맞긴 맞을까요?
“아마 그 인간이 맞을 거야. 어머니는 그 인간이 죽었을 거라고 했고, 우린 죽었기를 바랐지. 행불신고를 낸 게 십년도 더 전이야. 우리가 짐이 될 땐 나 몰라라 했다가 누님이랑 내가 살 만해졌을 거라는 계산이 서니까 나타난 거지.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야.”
아버지라면서 ‘그 인간’이라니. 남편은 자기 차를 긁고 오히려 덮어씌우는 사람에게도 “이 인간아!” 운운할 만한 인간은 결코 못되었다.
“어떤 분이셨기에……”
“안 듣는 게 나아.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야.”
“그래도 말해봐요. 난 도무지 형님이랑 당신이 이러는 게 이해가 안돼요. 부모가 찾는다는데…… 우리도 자식 가진 부모인데……”
“그래, 우리도 부모야. 부모지…… 당신, 내가 희영이 보는 앞에서 이유도 없이 당신을 마구 때린다면, 그것도 모자라서 팔 자르겠다고 당신 팔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 들고 팍팍 찍어댄다면 어떻겠어? 당신 옷을 갈기갈기 찢은 다음 몸에 석유를 끼얹는다면? 그 앞에서 성냥을 그어대며 웃는다면? 그걸 보면서 겁에 질려서 우는 희영이를 마당에 내던진다면?”
“………”
남편의 말은 걷잡을 수 없이 가팔라졌다. 머리가 휑하니 비면서 핑글 돌았다. 내 아이의 할아버지가 그런 사람이었다구? 눈앞이 확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뭐든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숨넘어가게 울다가 나중엔 경기를 일으켜서 응급실로 뛰어가게 만들던 희영이의 성정, 억지를 쓰다가 제 친구와 싸우게 되면 얼굴이고 팔이고 손톱으로 긁어서 나를 죄인으로 만들던 버릇. 타일러도 을러도 안 고쳐지는 아이를 보면서, 나는 자격도 없으면서 아이를 낳았다는 생각에 울울해지곤 했다.
“어떡하지요, 이젠. 그 사람 말로는 부양할 자식이 있으면 그 시설인지 뭔지에서 나와야 한다던데.”
“알 바 아니야. 거기말고도 시설은 많을 거야.”
남편의 대답은 자신있는 문제에 답을 쓰듯 명쾌했다. 그렇지만 나에겐 출제 의도조차 파악이 안되는 문제였다.
당장이라도 다시 전화할 듯하던 사내의 연락이 없는 걸로 보아 시누이나 남편이 어떤 식으로든 조처를 취했으리라 짐작하면서도 나는 묻지 못했다. 희영 엄만 모를 거야. 어떤 땐 참고 산 내 엄마가 더 밉기도 했으니까…… 그리움? 그것만은 고마워해야지, 그리워할 여지를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는 거. 당신은 몰라…… 그래도 부모인데,라는 내 반응에 대해 해명하려는 노력이, 시누이와 남편으로 하여금 더 격하게 만든다는 걸 깨달은 뒤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침묵 속에서 마음은 끝이 안 보이는 뻘에서 발이 푹푹 빠지며 헤매고 있었다. 완성된 십자수를 수틀에서 뜯어내어 장롱 속에 처박고, 나는 새 수본을 사왔다. 남녀가 아기 옷을 펼쳐 보이는, ‘단란한 가족’이라는 낯 간지러운 제목이 붙은 그림이며 세 가지 빛깔의 풍선을 들고 있는 소녀며. 사랑한다, 아니다, 사랑한다, 아니다, 아카시아 나뭇잎을 하나씩 뜯어가면서 사랑을 점치는 여자애처럼, 실을 교차시켜 한 땀씩 십자수를 놓을 때마다 내 마음도 저울의 양쪽 접시 위에서 퍽퍽, 팥죽처럼 끓었다.
저울의 한쪽 접시. 나도 사람의 본성이 쉬 변한다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때 시아버지는 혈기방장한 나이였다. 지금은 칠순이 넘었다. 왜 조직폭력배였다가 어린 양들을 돌보는 목회자가 된 사람도 있지 않은가. 오래 소식 없다가 어느날 여성지에서 본, 대학동창 문경이는 어떻구. “일산에서 살림 잘하기로 소문난 주부 서문경에게서 배우는 알뜰살림 지혜”라는 화보에서 환하게 웃고 있던 문경의 별명이 ‘문리대 꽃뱀’이었다는 걸 누가 짐작할 수 있을까. 남편의 헌 와이셔츠로 똑같은 앞치마를 만들어 두른 문경 모녀의 웃음은 사진에 나온 그애의 집처럼 소박했다.
반대편 저울접시엔 ‘개꼬리 삼년 두어도 황모 못된다’는 속담이 턱하니 올라앉아, 개꼬리인지 황모인지 알아맞혀보라는 듯 터럭을 날리고 있었다. 어렸을 적, ‘제 털 뽑아 제 구멍에 다시 박겠다’는 소리를 듣던 큰오빠는 청렴한 공무원으로 이름남으로써 올케 속을 터뜨리고, 동네 골목대장이던 둘째오빠네는 세 식구 살림에 한달 쌀이 한 가마니 든다 할 정도로 객식구가 들끓고…… 중년이 된 지금에도, 형제자매들은 아주 어렸을 적에 지녔던 성정에서 그리 못 벗어났다. 남의 이야기 할 것 없었다. 남편과 연애할 때 언니들은 그러면 그렇지, 했었다. 제법 무난하게 사는 집 막내딸이면서도 늘 엄마가 첩이거나 아버지가 없거나 고아원에서 사는 아이들과 더 친했던 내 어린날까지 들추면서.
남편을 인사시키던 날, 근본이 어떤지도 모르는 사내를 끌고 들어왔다면서 아버지는 팽 돌아앉았다. 아버지가 남편을 사위로 인정하는 데 3년이 걸렸다. 언니들로부터 “니네 신랑, 장인 장모에게 혼자 너무 잘하지 말라고 좀 해라. 다른 사위들이 빛이 안 나잖니?”라는, 칭찬인지 타박인지를 받던 남편의 살가움이 얻어낸 결실이었다. 장인에게서 냉대에 가까운 대접을 받으면서 부득부득 처가를 찾는 남편을 보면 안쓰럽기도 했고 어떤 땐 피학성향이 있지 않은가 의심스럽기도 했다. 생부를 외면하는 남편은 무슨 마음으로 냉대하는 장인을 섬겼을까. 칸마다 채워가는 십자가 우리 집을 넘보는 무엇을 막아내는 십자가라도 되는 듯이 나는 열심히 수를 놓았다. 하지만 그건 십자가가 아니라 가위표였다.
“김경선씨 며느님 되시지요? 저는 전에 전화드렸던……”
“저희 남편이 전화 안 드렸던가요?”
“네, 받았습니다. 어렸을 때 충격이 심한 것 같더군요. 하지만 이제는 칠순이 넘은 분이에요. 젊어 한때 잘못이야,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 아닙니까? 게다가 남편 되시는 분은 명문 K대까지 나온 엘리뜨라면서요.”
“네? 그건 어떻게?”
“아버님이 워낙 서운하셨나봐요. 막노동으로 명문대까지 보냈는데 이렇게 모른 척할 수 있냐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남편이 K대를 나온 건 사실이지만, 순전히 고학으로 학교를 마쳤어요. 남편이 어떻게 고생하면서 학교를 다녔는지는 제가 잘 알아요.”
은근히 주눅들었던 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학시절 남편이 겪은 고생을, 가난한 고학생의 연인이었던 나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분위기있는 레스또랑은커녕 주말마다 북한산에 오르느라 종아리에 알 밸 지경이었다. 시내버스표와 김밥, 오이나 사과 몇알로 온종일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은 그때 생각으로는 산뿐이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느라 삭막한 북한산 대동문에서 시가지를 내려다보면서 “서울엔 저렇게 집이 많은데…… 우리도 저 가운데 하나에 우리 집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고단하고 청승맞은 청혼을 받았던 나였으니만큼 얼마든지 당당해질 수 있었다. 나는 차라리 기뻤다. 시아버지가 비열한 사람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잡았으므로. 남편의 입장에 편승하면서도 노인네를 산속에 유기한 듯 발뻗기가 편치 않았던 내게, 시아버지의 거짓말은 우리가 정당하다는 결정적인 증거로 여겨졌다. 그런 거짓말을 천연스럽게 할 수 있는 노인이라면 무슨 패악인들 못 저지르랴…… 전화번호를 바꿔야 할까봐. 어떻게 알아냈는지 회사로도 전화가 오는데 또다시 집…… 남편의 반응에도 나는 침묵으로 동조했다.
친정과 아이의 유치원 선생에게만 바뀐 전화번호를 알렸을 뿐, 친구들에게조차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는 날들이 이어졌다. 혼자 있는 시간이면 진공 속에 던져진 것 같았다. 이따금 전화기를 들고 얼마 전까지 우리가 쓰던 번호를 눌러 녹음된 목소리를 거푸 듣기도 했다. 방금 거신 전화번호는 결번이오니, 확인하시고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족은 실종중이었다. 한밤중, 잠결에 옆이 허전해서 나가보면, 어둠침침한 거실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남편. 그의 마음이 어디쯤에서 헤매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도 남들은 우리를 잘만 찾아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심정, 저희도 어느정도는 이해합니다. 성장기의 상처는 지워지기 어렵지요. 그렇지만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패륜을 꾸짖는 듯하던 지난번 사내와 달리, 종교단체에서 사회복지 업무를 맡고 있다는 그는 말소리도 나직나직했다.
“며느님께서도 힘드시죠? 무조건 모셔가시라는 건 아닙니다. 오래 헤어져 있던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게 어디 쉽겠습니까? 하지만 한번 만나보시기나 하면 어떨까요? 아버님께서도 옛일을 뉘우치면서 우시더군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식구들에게 몹시 굴었다고 하시면서요.”
어떻게 해서 담당자가 바뀌었는지, 어떻게 우리 전화번호를 알아냈는지, 마구 떠오르는 궁금증을 스스로 가라앉혀야 할 정도로 부드러운 그의 말투는 그 무렵, 줄타기하듯 간당간당 가누던 나날을 출렁, 흔들어놓았다.
어느날 아침, 나는 내 몸을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남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깨우고 있었다. 당신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남편은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가슴이, 그냥 가슴이 너무 아파. 남편은 의사 앞에서도 겁에 질려 있었다. 그냥 심장이 그대로 굳어버리는 것 같아요. 남편의 고통과 무관하게 심전도검사 결과는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였고 다른 검사에도 이상은 없었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그런 경우가 있지요. 의사는 가볍게 넘어갔다. 어떤 날엔가는 출근을 하러 나갔던 남편이 이십분쯤 지나서 전화를 해오기도 했다. 움쭉도 할 수가 없어……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길가에 차를 세워놓은 채 남편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마침내 의사는 공황장애라는 진단을 내렸고, 약을 먹으면서 남편은 병든 병아리처럼 잠이 늘었다. 남편은 잠속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언제까지 도망만 칠 거야? 당신이 한번 가봐요. 난 두고두고 후회할 일 만들고 싶지 않아. 살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그때마다 당신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인과응보려니, 이런 생각 들까봐 겁나.”
“인과응보라면 나도 좀 아는데, 지금 그 인간이 받고 있는 게 바로 응보야.”
그 인과응보의 여파로, 희영이를 낳으면서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한 남편이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어 자기 얼굴을 가렸다. 할 수만 있다면 연기처럼 사라지고 싶어. 연기 속에 가려지는 남편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 살아봐서 알잖아. 내가 그렇게 몰인정한 놈이었어? 당신, 내가 아이 낳지 말자고 한 거 생각나? 희영이 낳았을 때 딸이라서 내가 기뻐했던 것도? 당신은 내가 아들을 바랐을 줄 알았겠지만, 천만에, 난 정말로 아들만은 낳고 싶지 않았어. 내 아버지의 피가 내 몸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대물림할까봐 겁났어. 그런 씨앗이라면, 이 세상에서 단종시켜야 해.”
단종이라니, 그럼 희영인 뭐냐, 그 와중에도 그런 마음이 잠깐 들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지금은 성차별을 들먹일 때가 아니었다.
“당신 그거 알아? 회사에서 바쁘게 일하는데 사회복지산지 뭔지 하는 전화가 와. 그러면 난, 어찌어찌 세상에 발 붙이고 사는 회사원 김아무개에서 대번에 온동네가 침뱉던 개망나니의 씨가 되어버리는 거야. 몇십년 전 과거를 아직도 풀어내지 못해서 제 아비 내친 놈이 되고. 내가 혐오스러워. 회사 옥상에 올라가서 사람들 사는 곳을 내려다보면 발바닥이 간질거려. 내 쪽에서 끝낼 수도 있다고 누가 속삭이는 것 같아.”
“………”
“당신한텐 말 안했지만, 벌써 다녀왔어. 그동안 시설에서 어떻게 살았나도 주위 사람들에게 듣고. 내 기억 그대로야. 우린 벗어날 수 없을 거야.”
남편은 재떨이에 꽁초를 위악적으로 짓이겼지만 그 눈길은 제발 그만,이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자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렸다.
간석지의 둑길이었다. 왼편엔 바다를 메워서 만든 논이, 오른편에는 갈대가 나부끼는 농수로가 나 있는 둑길.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란 길 위로 오후의 햇살이 하얗게 빛났다. 나는 그 길을 맨발로 걷고 있었다. “안 아프니? 이제 그만 신발 신어.” 그애가 나를 바라보며 애원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이었다.
그애는 우리 반에서 가장 못생기고 가난한 아이였다. 게다가 본처인 큰엄마의 구박을 받으면서 그 집에서 더부살이하는 첩실 소생이었다. 학대는 그애의 일용할 양식이나 다름없었다. 반장인 내가 저를 다른 애와 차별없이 대하는 걸, 그애는 자기에게 특별한 친절을 베푼다고 생각하고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날 내가 왜 그애와 그 길을 걷고 있었을까. 햇살 아래 반사되는 개흙이 너무 고와서 나는 풀섶에 주저앉아서 신발도 양말도 벗어버렸다. 잠깐 그래보고 싶었을 것이다. 하얀 길의, 그 부드러워 보이는 개흙의 유혹에 잠깐 넘어갔을 뿐이다. 그냥 단순한 유희였다.
시멘트처럼 결이 고운 흙이 먼저 발바닥에 닿았다. 혓바닥에 얹힌 포도당 가루처럼 녹아 피부에 스며들 것 같은 고운 흙이었다. 귀를 후빌 때처럼 발바닥이 간질거렸다. 그러나 그 보드라움은 이내 표변했다. 한 발짝씩 내딛자, 그 보드라움 사이로 뾰족뾰족한 것이 찔러왔다. 자디잔 돌이었을 것이다. 걸으면 걸을수록 따가움은 짙어져만 갔다. 그런데도 내가 신을 신지 않은 건 그 고통 속에 일말의 감미로움 같은 게 느껴져서였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그애는 제가 더 아픈 듯 울상을 지었지만 나는 맨발을 고수했다. 그 애원하는 눈길이 없었더라도 내가 그 길을 끝까지 맨발로 걸었을까.
남편은 옛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시아버지가 순한 양이 되었다 하더라도 남편의 눈에는 양의 탈을 쓴 이리로만 보일 것이다. 준비가 덜 된 건 남편 쪽이었다. 나는 남편이 새로 바리케이드를 쌓는 데 협조했다. 다시 한번 전화번호를 바꾸고, 남편은 시누이네 집으로, 나와 아이는 친정으로 주민등록을 옮기는 걸로.
처음 전화번호를 바꿨을 땐 얼렁뚱땅 얼버무렸지만 이번엔 그냥 넘어가기가 어려웠다. 유치원에서 미술관으로 견학 가는 날, 나는 아이를 유치원 버스에 태우고 그 길로 친정으로 향했다. 생각하니 오랜만의 친정 나들이였다. 고작 전철로 한시간 거리였는데. 혼자서 집을 지키다 맞아들이는 친정엄마의 눈길이 유심했다.
“너, 혹시 둘째 가진 건 아니니?”
“엄만…… 희영이 하나로도 벅차. 걔가 세 몫은 하잖우.”
“그런데 그새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냐?”
“그냥, 좀 신경쓸 일이 있었어. 엄마, 나 주민등록을 엄마네 집으로 옮겨놓을까 하고.”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주민등록을 옮기다니?”
“에이 엄마,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일 아냐. 희영이 아빤 나 없인 살아도 장모님 없이는 못 산다는 사람이잖우. 내가 이혼해달라고 애원해도 안할거야. 사실은, 시댁 쪽에 문제가 좀 있나봐.”
난데없이 나타난 엄마의 바깥사돈, 남편과 시누이가 기억하는 시아버지, 우울증의 기미를 보이는 남편과 시누이의 변한 모습을 되도록 간략하게, 하지만 전화번호를 바꾸고 주민등록을 옮기는 당위성이 납득될 만큼 말하는 동안, 엄마의 어깨는 솟구쳤다가 천천히 가라앉곤 했다. 나는 짐짓 씩씩하게 말했다.
“희영이가 나 어렸을 적 닮지 않고 사납다고 그랬지? 이제 생각하니 지네 할아버지 닮았나봐. 최소한 궁금증 하나는 풀었잖아?”
언젠가, 아파트 출입구 앞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옹송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아이들의 머리 위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이들이 만든 원 안에는 아주 커다란 배추벌레가 꿈틀거리면서 힘겹게 나아가고 있었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이어선지, 아이들의 눈은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때, 아이들을 헤치고 조그만 계집애가 쪼르르 원 안으로 들어서더니 대번에 발로 콱 밟아버렸다. 제 오빠뻘이 되고도 남을 애들이 움찔하는데, 희영은 제 신발 바닥을 보도블록에 비벼가며 짓이겨진 배추벌레를 천연덕스럽게 떨어내고 있었다. 그때가 생각나 새삼 진저리치는 나에게 엄마는 맵게 눈을 흘겼다.
“별 데다 다 갖다붙이려고 하지 마라. 어렸을 적에 네 고집도 희영이 못지않았어. 앞집 영진이네가 이사한다니까, 영진이한테 시집가겠다고, 따라가겠다고 하루 낮밤을 울어댄 거는 생각 안 나지? 김서방이 남자치고 눈썹이 너무 옅어서 부모 덕 없을 줄은 알았다만…… 넌 그냥 네 업이려니 하면서 김서방이랑 희영이 고모 하자는 대로 따라가.”
“나야, 뭐. 한마디 했다가는 알지도 못하면서 나선다는 분위기라 입 다물고 있는 중이지, 뭐.”
“그래, 그래야지. 좀 쉬었다가 온 김에 동사무소에 들러서 아예 전입신고 하고 가든가.”
“그러잖아도 그러려구요.”
바람이 새어 들어왔는지, 베란다에 매달아놓은 풍경이 쟁강쟁강, 투명한 소리를 냈다. 엄마와 내 눈길이 동시에 그리로 향했다. 그 소리가, 혼탁하던 머릿속에 한줄기 맑은 기운을 흘려넣었다. 전화벨 소리에 철렁 놀라고, 희영을 보면서 본 적도 없는 시아버지의 사나운 피를 연상하고, 살을 맞대고 누운 남편의 마음속에 뱀처럼 똬리 틀고 있는 아픈 기억을 만질 수 없어서 가슴이 시리고……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무언가 나를 납득시킬 만한 이유를 찾아야 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내가 범했던 크고 작은 잘못들을 찾아냈다. 줄기에 달려나오는 감자처럼 잘못한 일은 많고도 많았다. 평온한 거죽을 한겹만 들추면 줄줄이 파헤쳐지는 생채기들. 나는 근신중이었다. 여고시절, 근신처분을 받은 아이들은 땡볕을 받으면서 운동장 가장자리,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잡초를 뽑곤 했다. 그애들 가운데 몇은, 저희가 뽑아낸 잡초처럼 학교에서, 제가 몸담았던 세상에서 몸을 빼서 또다른 세상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교실에서 그애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운동장 아닌 교실에 있다는 것에 안도한 죄는 없었던가?
쟁강쟁강, 머릿속에 늘 연기가 자욱한 것처럼 무지근하던 나날이 갑자기 다른 생의 일인 듯 아득히 물러났다. 여긴 딴세상 같아…… 그만 주질러앉고 싶어질 것 같아서, 나는 그 고요한 세상에서 몸을 뽑아냈다.
큰길가, 공사중에 부도가 나서, 흉가처럼 유리창이 다 깨어진 건물 모퉁이를 돌아설 때였다. 언덕 쪽으로 난 상가 앞 포도에 한 할머니가 쓰러져 있었다. 햇빛에 허옇게 바랜 입술이 먼저 눈에 띄었다. 목덜미엔 피가 진득하게 말라붙었고 옷은 오랜 노숙의 흔적을 보여주었다. 힐금거리며 지나치는 사람들에 부딪히며, 나는 그 자리를 지나칠 수 없었다. 겨우 걸음을 떼어 다가섰지만, 죽은 듯해서 흔들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할머니, 정신 차리세요. 할머니. 그러자 다시 열릴 것 같지 않던 눈꺼풀이 무겁게 열렸다. 그 눈꺼풀은, 내가 사온 생수를 빨대로 두어 모금 마신 뒤 다시 닫혔다. 마음은 급했는데 공중전화가 눈에 뜨이지 않았다. 생수를 산 가게에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119에 연락을 부탁했지만, 눈이 우멍한 가게 주인은 되도록 얽혀들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간절함을 덧입은 뻔뻔함으로 그에게서 신고해주겠다는 답을 얻어냈다. 가게에서 나오다 생각하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파출소도 있었다. 나는 잰걸음으로 달려가 또 한번 신고를 했다.
파출소를 등지고 나오면서, 나는 그동안 꼭꼭 여며두었던 눈물을 풀어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거기까지였다. 파출소에 신고하고 마음의 무게를 더는 일. 그 할머니에게도 혈육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 저리면서도 나는 어김없이 동사무소로 향하고 있었다. 아가, 나 좀 데려가다오. 여긴 너무 춥구나…… 꿈속에서 본 시아버지는 가래가 끓어 끈적이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꿈속의 그 순간에도 나는 신혼 초 남편이 내게 던졌던 재떨이를 떠올리면서 안된다고 고개를 젓고 있었다. 말다툼을 하다가 두꺼운 유리 재떨이에 맞은 나는 뒤로 넘어지면서 정신을 놓았다. 깨어나보니 병원이었다. 한밤중이었는데도 시누이가 달려와 있었고 세상에 다시 없는 극성스러운 장모도 그러지 못하리라 싶게 시누이는 그 자리에서 남편을 닦아세웠다. 결혼생활에서 딱 한번 겪은 그 폭력의 기억이 생생해 시아버지에게서 뒷걸음질쳤던 그 꿈속에서처럼, 나는 우리를 실종시키려 동사무소를 찾아가고 있었다. 끝내 숨을 수 있을까, 내가 나를 가릴 수 있을까, 생목 오르는 물음들을 밟으며, 고개를 외로 틀어 쏟아지는 눈물을 가리면서, 햇볕이 꿈결같이 환한 대낮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