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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황상익 黃尙翼

서울의대 교수, 의학사 전공

 

 

생활사적 시각에서 본 전통의료

신동원 『조선사람의 생로병사』, 한겨레신문사 1999

 

 

구미사회에서 대체로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상생활사 연구는 몇해 전만 해도 우리에게는 남의 일이거나 사소한 짓거리로만 여겨졌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학문적·실천적으로 온통 국가권력의 민주화라는 거대담론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 군부독재 세력과의 건곤일척의 대결을 부분적으로나마 승리로 이끈 뒤, 혹자에게는 우리 사회가 변혁적 긴장감과 집중력이 이완된 것처럼 비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방치되었던 일상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역사 연구도 조금이나마 외연을 넓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은 어떻게 살았을까” 유의 역사책이 여러 권 나왔으며 그 가운데 몇몇은 독서시장에서 어느정도 성공을 거둔 마당에 역사서술에서, 생활사·일상사(日常史)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필자는 우리 전통시대의 의학과 질병의 역사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신동원이 주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저술한 『조선사람의 생로병사』의 출간을 반기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우선 질병과 건강이 일상사(日常事)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에 속하기 때문이다. 즉 의식주 생활이 풍족해지고 의술이 크게 발전한 현대사회에서도 질병과 건강 문제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큰 문제이거늘, 그렇지 못했던 조선시대에는 더더욱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했을 것이다. 그러한 형편임에도 그 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어떠한 질병에 시달렸고 그 피해는 얼마나 되었으며 또 어떻게 대처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모습을 그린 개설서 하나 없던 터에 이 책을 얻게 된 것이다. 물론 김두종(金斗鍾)과 일본인 미끼 사까에(三木榮), 그리고 그뒤를 이은 몇몇 연구자가 조선시대의 의학과 질병에 대한 연구업적을 쌓았고 또 그러한 성과가 이 책의 밑받침이 되었지만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지는 못했다. 평자는 한국사의 다른 분야들에 비해 연구의 역사와 인력이 많이 부족하고 그에 따라 연구성과의 축적도 미흡한 한국의학사의 지평을 그동안의 제도사나 학설사 위주에서 생활사로 한결 확대시킨 것을 이 책의 적잖은 공이라고 여긴다.

108-414그리고 그동안 세상에 선보인 이러한 종류의 책이 대체로 비전문가에 의해 자못 급조된 인상을 주었던 반면, 이 책은 “몇몇 책에 실린 것을 모아서 짜깁기하듯 재구성하지는 않았다”는 저자의 말처럼 오랜 연구와 사색의 소산이라는 점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저자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의서들뿐만 아니라 언뜻 보면 이 문제와 무관해 보이는 여러 문헌들을 섭렵하여, 좁은 의미의 의학과 질병뿐만 아니라 임신과 출산, 전녀위남법(轉女爲男法), 방중술, 연단술, 검시법(檢屍法), 위생관념, 보신 등 생로병사의 모습을 폭넓게 그려내고 있으며, 서구의 문헌들을 인용하여 다른 문명권과 비교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모습에 대해 섣불리 오늘의 잣대를 들이대기보다는 일차적으로 당대인의 자리에서 이해하고 필요한 경우에 현대적 관점을 비치는 식의 서술을 취하였다.

특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저자가 우리 문화와 전통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흔히 빠지기 쉬운 국수주의적 관점을 껑충 뛰어넘어 세계사적 보편성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줄기차게 기울이고 또 많은 부분에서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요즈음 우리 의료현실의 난맥상을 지적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현대의료의 한계를 지적하며 “우리의 풍성한 전통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막상 실제적인 대안을 찾아내지 못하는 일부 논자들에 비해 저자는 전통의료에 대해 훨씬 넉넉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의학과 질병, 그리고 생로병사에 관한 문제에서 한동안 잊혀졌던 모습을 담담하지만 입담 좋게 그려내면서 우리 내면 곳곳에 숨어 있던 현대 한국인의 원형을 끄집어냄으로써 그것이 잊혀졌을지언정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 점은 의학연구자나 실제로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들에게 특히 중요하다. 현상적으로는 근대의학에 포섭된 것처럼 보이는 우리 한국인들의 신체관과 질병관 등에는 여전히 전통적인 모습이 많이 남아 있으며, 그것의 온전한 이해가 진료과정의 성패에 지대한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점에서 이 책이 의료인과 의학도들에게 현실적으로도 유용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 책의 또 한가지 중요한 미덕은 평이하지만 재미있는 문장과 적절히 배치된 그림들 덕분에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간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리고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소제목 때문에 “책의 전체적인 정서는 오히려 가벼운 흥미 위주의 교양 오락물처럼 변질되어 있다”(조창환)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어떻든 (전통)의학과 역사에 대해 별다른 지식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특별히 순서를 생각할 것 없이 책이 펼쳐지는 대로 읽으면 될 것이고, 그저 그림만을 주욱 훑어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조선사람의 생로병사의 모습이 어느정도 그려질 것이지만, 정작 저자의 메씨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독자의 진지한 사고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펼칠 때만큼 쉽게 덮을 수 있는 책은 결코 아니다.

조선시대의 생로병사 문화 전반에 대한 최소 수준의 논의조차 별반 없는 까닭에 감히 용기를 내어보았다는 저자의 말(6면)처럼 이 책은 저자에게나 동학들에게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자리매김되어야 할 것이다. 강조하거니와 저자가 제시하고 발굴한 주제와 소재에 대한 천착과 외연의 확대는 이제부터의 과제이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의 ‘보신 씬드롬’에 대한 것과 같이 견강부회하는 해석(그것이 저자의 주장대로 단지 자본주의 노동과정과 구매력 증가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우리와 비슷한 사회구조와 생산력 발전단계에 있는 다른 사회에 나타나는 상이한 모습은 설명할 도리가 없을 터이다)들도 저자가 줄곧 강조하는 역사적 관점으로 다듬는 근본적인 노력을 더욱 기울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