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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전성태 全成太

1969년 전남 고흥 출생. 1994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으로 『매향』이 있음. jst0808@chollian.net

 

 

연이 생각

 

 

좀 독했던 여자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하지만 독하다는 표현엔 썩 자신감이 없다. 나는 종종 연이(淵伊)─그에게도 이름이 있었으나, 망자가 된 마당에 실명을 거론하는 게 아무래도 육신을 못 썩게 하는 일만큼 가혹하리라 싶어 그저 ‘연이’라 부른다─에게 독종이라고 말한 적은 있지만, 그가 자진을 한 마당에 도대체 어떤 삶을 두고 독하다고 해야 하는지 지금으로선 모호해졌다. 때때로 죽음보다 못하게 여겨지는 삶에 맞서 살아남는 일이 독한 것인지, 스스로 생을 버리는 행위가 보통의 용기로는 어림없는 짓이라면 그야말로 독종이 아닌지, 생각이 연이의 죽음에 이르면 더없이 혼란스러워진다.

연이는 스물다섯의 나이로 짧은 생을 접었다. 벌써 7년 전의 일이다. 7년은 죽은 자를 잊기에는 턱없이 짧은 세월일는지 모른다. 하지만 망각의 집념이 강한 존재가 또 사람이어서 누군가를 열두 번도 더 잊을 만한 시간일 수도 있다. 더구나 아름답지 못한 죽음에 대한 우리의 망각의 집념은 얼마나 맹렬하던가.

따지고 보면 그의 죽음 이후에도 나는 잘 살아왔다. 앞으로 그에 대한 추억을 상실한다 해도 난 무난하게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시간이 한참 지난 마당에 그의 삶과 죽음을 들춘단 말인가? 말과는 달리, 행여 나는 그녀의 죽음을 합리화하거나 미화하여 그 덫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럴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나는 그의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라고 꽤 애를 쓰며 살아왔다. 나는 그가 생이 버거워서 도망쳐버린 아이쯤으로 남아서는 안된다는 무슨 강박증 같은 심리에 시달려왔다. 일테면 나는 무모하게도 그의 죽음이 한때 거리에서 쓰러져간 숱한 젊은이들의 죽음과 나란히 놓여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의 죽음이 저 1991년 무렵, 소위 그 전염병처럼 번지던 죽음의 행렬의 마지막으로 기억되길 원했으며, 나아가 열사의 시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저 80년대적인 죽음들에 대한 어떤 마지막 상징쯤으로 자리잡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그래서 연이를 추억하는 행위가 결국은 한 시절에 대한 기억을 지우겠다는 것 아니냐고 누군가가 혐의를 씌워도 나는 딱히 부정할 생각이 없다.

아무튼 나는 연이의 죽음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의도를 꽤나 진지하게 마음속에서 키워온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죽음 앞에 어떤 비석을 세우자는 의도는 아니었다. 열사라니, 당치도 않다. 그는 그저 평범한 대학생이었고, 그 나이에 할 법한 고민을 안고 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버린 나약한 젊은이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 누군가 열사의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 시대에 대한 지독한 희화화이기 십상이고, 한편 연이에게는 더없는 모욕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지난 몇년을 나는 이상스럽게도 상주(喪主)가 된 기분에 젖어 지냈다. 하루하루가 상중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것이 역사라는 것에 대해 갖는 지나친 엄숙주의라 해도 좋고, 죽은 이들에 대한 알량한 부채의식이래도 상관없다. 이제 전부나 전무의 상태가 존재하리란 건 믿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그 죽음의 시절을 채 빠져나오지 못한 데에는 연이의 죽음이 늘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잃은 슬픔과 고통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일상을 잃은 상주에게 망자를 향한 슬픔과 고통만이 있겠는가? 상주의 일상은 도피한 자의 그것과 같을 수도 있다. 쾌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책감 따위는 안 가져도 되는, 일탈이나 혹은 도피를 꾀한 자의 은근한 안락함이 공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의 이름으로 얻어지는 휴가이다. 그래서 일탈과 도피의 일면을 의식하는 순간 상주는 스스로 못 견딜 만큼 황폐해진다. 그럼에랴 제 스스로 죽음의 그늘로 도망가버린 자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나는 더 황폐해지기 전에 아무도 입혀준 적이 없는 이 상복을 벗고 빨리 일상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가야 할 내 일상이란 게 있었는가?

졸업과 함께 들어간 직장에서 나는 건강상의 이유로 한달을 채 못 버티고 나와야 했다. 1997년 봄이었다. 책상을 정리하고 가방을 싸서 회사 문을 나선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한참을 회사 앞에 황망히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터무니없게도 가죽가방은 버튼이 채워지지 않을 만큼 불룩했다. 회사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병원에서 챙겨볼 만한 서류들을 다 담아 나온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 실직자가 된 신세에 감히 직장인의 일상을 꿈꾼 것이다. 나는 퇴근 후 동료들과 드나들던 회사 옆 당구장 건물로 향했다. 당구장으로 오르는 계단에 서서 나는 그동안 참기라도 한 듯 찔찔 눈물을 짰다.

B형 간염으로 치솟은 GOT, GPT 하는 간기능 수치를 다스리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열흘 만에 퇴원하여, 담당의사의 권유대로 행여나 간염바이러스에 대한 항체가 형성될까 싶어 확률이 낮은 인터페론 치료에 들어갔다. 일주일에 세 차례씩 냉장고에서 인터페론 주사제를 꺼내 손수 팔뚝이나 다리 정강이의 근육을 찾아 주사해야 했다. 약을 투여한 날은 몸살 기운과 흡사한 전신결림, 미열, 구토증 그리고 무력감으로 종일 누워 지냈다. 약기운이 잦아들어 운신할 만해진 이튿날은 폐병환자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아파트 단지의 근린공원으로 볕을 쬐러 갔고, 그 이튿날 다시 바늘자국이 없는 근육을 찾아 주사를 놓았다. 독한 약기운 탓인지, 아니면 그런 생활의 연속이 낳은 심리상태 때문인지 나는 스스로 목숨을 놓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다. 몸을 한없이 가라앉히는 약의 후유증은 하루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대로 견딜 만해졌지만, 자살 충동만은 오히려 더 강렬해졌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보려고, 아니 그런 목적도 상실한 채 손수 제 몸에 주삿바늘을 꽂고 약기운이 퍼지는 것을 느끼며 나날을 살아내고 있었다. 생존이 결코 의식적인 활동이 아닌, 지극히 자연스런 몸의 반응일 뿐이란 사실도 새삼스러웠지만, 생명현상 자체가 그토록 치욕스러울 수 있다는 것도 실감한 날들이었다.

하루는 상경한 친척 어른을 배웅하기 위해 서울역에 나가야 했다. 서울은 바야흐로 황사의 계절이었다. 매연과 섞여 하늘을 뿌옇게 뒤덮은 황사는 마음속까지 밀려들어 일식의 대낮처럼 어떤 불안과 불쾌감마저 던져주었다. 간간이 바람이 있었지만 하늘 깊숙이까지 고인 그 불투명한 공기는 씻겨나가지 않고 더욱 농밀해져갔다. 그날은 약을 거른 날이었음에도 오랜만의 장거리 외출 탓인지 나는 미열에 멀미 기운까지 겹쳐 몸과 마음이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서울역 광장에서 예기치 않은 한 전시회와 맞닥뜨리면서 내 마음은 더욱 흔들리기 시작했다. 빨랫줄처럼 철줄이 쳐지고, 그 줄에는 두꺼운 하드보드의 대자보가 백오십여장 만국기처럼 치렁치렁 매달려 있었다. 전시용 줄은 족히 백미터가 넘었다. 흔히 우리가 열사로 부르는 인물들이 대자보마다 한명씩, 영정사진과 짧은 생애와 죽음에 이른 정황, 간혹 유언 한마디가 덧붙여져 간단히 소개되어 있었다. 매년 유월경 민족민주열사 합동추모제에 즈음하여 거리에서 구경하곤 하던 그런 전시회 풍경이었다.

걸음을 멈춘 채 대자보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스무명 남짓한 노숙자들이 뿌연 하늘에 계란 노른자처럼 눌어붙은 볕을 쬐며 콘크리트 차단블록에 걸터앉아 있었다. 행인들의 시선은 오히려 그 노숙자 무리에 머무르는 편이었다. 살림이 거덜난 나라의 상징이 되어버린 군상을 확인하고픈 심사들이었을까. 그러나 어찌 보면 구경이라기보다는 반쯤 던져진 무심한 시선에 지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역광장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그랬듯, 행인들 역시 열사들의 대자보와 노숙자라는 두 피사체를 외면하고픈 부담감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 백오십여명에 이르는 영정들을 무슨 긴 담벼락이라도 끼고 걷는 사람처럼 예의 그 엉거주춤한 시선으로 지나쳐갔다. 그 영정의 담벼락이 끝나는 지점에 모금함이 놓여 있었다. 또 한번 난감한 상황에 직면한 기분이었다. 나는 천원 한장을 모금함에 넣고, 그 모금함 옆에 쌓인 자료집 한권을 낚아채듯 해서 자리를 벗어났다.

버스가 용산 국제빌딩 앞을 지날 무렵, 나는 비로소 그 백여쪽에 달하는 자료집을 돌돌 말아 손에 쥐고 있음을 알았다. 신문을 펼치듯 나는 무심히 그 자료집을 펼쳐 들었다. ‘우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제목의 자료집에는 전시회의 대자보에 실린 그 사진과 글 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펼쳐든 자료집의 페이지에 한 노동자의 흑백사진이 실려 있었다. 권미경. 1969년 6월 24일 생. 나와 동갑내기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산 보세신발공장 노동자가 된 그녀는 1991년 (주)대봉에서 미싱공으로 근무하다가 회사 3층 옥상에서 투신, 경남 양산 솥발산묘원에 안장되었다고 했다. 그 밑에는 짤막하게 그의 마지막 행적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지역노동자들의 독서모임인 ‘도서원 광장’에 나가면서 노동자의식에 눈을 뜬 그는 신발업체인 대봉에서 91년 11월부터 어용노조의 협조 속에서 회사가 펼치는 30분 일 더하기 운동, 구사운동 등 노동통제 강화에 맞서 공장 옥상에서 투신, 죽음으로 항거하였다. 다음은 팔뚝에 남긴 유서 전문이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이 차가운 땅에 묻지 말고 그대들 가슴속에 묻어주오. 그때만이 우리는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으리.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마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이런 내용의 죽음, 혹은 죽음 자체를 알리는 글들을 한때는 일상적으로 보아온 터에 나는 왜 그랬을까. 난데없이 울컥 솟구치는 격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당황한 나는 주먹으로 눈자위를 누르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창밖으로 얼굴을 돌렸다. 퇴근시간이라 도로가 막히고 있었다. 번번이 신호 구간에 갇힌 버스는 신호가 세 번 정도 바뀌어야만 겨우 그 구간을 벗어날 수 있을 지경이었다.

나를 당황케 한 그 격정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건대 그 죽음의 비극성에 나 자신을 투사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 비극적 죽음에 기대어 일종의 대리만족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죽음은 나의 죽음이었고, 순식간에 틀어막았던 격정은 나의 죽음에 흘리는 세상의 눈물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심한 혐오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연이가 생각났다. 그 마지막이 얼마나 절박했고 외로웠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1993년. 그해 추석은 9월 마지막날이었다.

추석연휴를 이틀 앞두고 나는 연이가 지내고 있는 기숙사에 전화를 넣었다. 내 쪽에서는 거의 일년 만에 취하는 연락이었다. 스스로 힘들고 외롭다는 생각에 젖어 있던 나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연이로부터 어떤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아쉽게도 그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며칠째 학교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경비실 아저씨의 신경질적인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추석이 끝나고 나는 그의 학교로 직접 찾아갔다. 경비실 아저씨는 몇번이나 관계를 물은 후에야 그가 추석 전에 학교 연못에 투신자살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소식을 알리지 말라는 유족들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수소문 끝에 장례식에 동행한 학교 친구 한명을 만나보았지만 분당의 생모 무덤 옆에 묻혔다는 이야기뿐 다른 대답은 얻지 못했다. 그 동료라는 여학생은 장의차에서 내내 머리를 박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이 어디쯤이었는지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형부 되는 이가 서울에서 지낸다기에 그곳에도 연락을 취해보았다. 그는 서초의 어느 빌딩 한 층을 세내어 ‘신선초 녹즙 서울영업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연이를 통해 아버지와 오빠가 고향의 바닷가에서 신선초 농장을 몇년째 운영하고 있다는 말은 이미 들었던 터라, 그의 가족 중 한사람이 영업소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그를 찾아나설 무렵에 나는 그의 자살동기를 확인하겠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장지를 알고 싶었다. 마치 무덤 앞에 서면 망자로부터 왜 죽었는지 얘기를 직접 들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나는 그의 실존공간인 무덤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형부는 되레 집안에서도 조용히 잊혀져가니 사정을 이해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며칠 후면 처제 결혼이 있어요.”

처제라면 연이의 배다른 언니를 이르는 말인 듯싶었다. 나는 두말없이 물러나야 했다.

그 집 사정도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연이의 죽음은 아무래도 내놓고 알릴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가족의 처사가 얄밉고 서운했다. 그의 죽음에 얽힌 시시콜콜한 내막을 듣자는 것도 아니고, 단지 망자의 지인으로서 묘 앞에 분향할 기회를 갖자는 것인데 그렇게까지 나올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죽음이 있고 바로 며칠 동안 내가 당했던 피곤하고 당혹스런 일들을 생각하면 가족에 대한 서운함은 한층 더했다.

생이 짧았든 길었든 연이도 이제 몇가지 선험적인 말로 남을 때가 된 것 같다. 그에 대한 숱한 기억들은 곁가지는 흩어지고 몇개의 굵은 가지로만 남았으리라.

비록 연이는 짧은 생애를 살다 갔지만 그에게는 여러 층위의 인간관계가 있었다. 그에 대한 기억들은, 그래서 여러 층위로 존재할 것이다. 우선 내 경우는 남도의 소읍(小邑)을 동향으로 두고 있는 고향친구인 쪽이다. 그렇다고 죽마고우는 아니다. 그녀와 함께 보낸 시간이라고는 중학교 시절의 이년과 1990년 전후의 일년 남짓이 전부이다. 그외에 그녀와 특별히 함께 묶여질 만한 추억은 별로 없다. 우리는 고등학교와 대학교도 따로 다녔고, 중학교 졸업 후 만났던 기억도 기껏 스무번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 소원한 만남을 그나마 메울 소통이 있었다면 가끔 주고받은 편지와 엽서 정도나 될까.

나와 처지가 같은 동향의 몇몇 친구들은 그를 당찬 아이로 기억하는 편이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그가 우리 앞에 나타난 중학교 2학년 무렵을 기억하는 친구들이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졸업생을 두 학년밖에 못 낸 신설학교였다. 마을이 없는 들판에 무슨 은밀한 연구소처럼 들어선 학교였는데, 보통 신설학교가 그렇듯 여러모로 정돈이 되지 않아 퍽 어수선하였다. 비가 오면 운동장의 모래가 휩쓸려내려가 전교생이 진흙이 불컥거리는 운동장으로 나가 땅을 고르고 마사토와 모래를 뿌리는 일에 동원되었다. 체육시간과 실업시간은 아예 정원 가꾸는 시간으로 대체되었고, 교실과 복도의 바닥을 윤내느라 바지 무릎께는 늘 양초때로 반질거렸다.

연이가 우리 앞에 나타난 날도 우리는 운동장에서 돌을 골라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두 여자아이가 손을 맞잡고 교문으로 들어섰다. 우리는 일손을 놓고 두 아이를 지켜보았다. 큰 아이는 우리 또래로, 작은 아이는 한참이나 어린 일고여덟살 정도 되어 보였다. 자매지간인 듯했다.

돌연 두 아이는 진입로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었는데, 그때부터 우리는 한동안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작은 아이가 치마를 걷고 길 위에 쪼그려앉았다. 학생들이 빤히 바라보는 길 가운데에서 그 아이는 천연덕스럽게 똥을 누는 거였다. 금방이라도 그 냄새가 우리의 코끝으로 달려드는 기분이었다.

“음마, 저 가시내들 좀 봐.”

누군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동생이 똥을 누는 동안 언니는 연습장을 찢어내 비벼서 밑씻개를 만들었다. 이윽고 동생이 일을 마치자 언니는 동생에게 엉덩이를 들게 하고 서너 번에 걸쳐 밑을 말끔히 닦아주었다.

동생을 그 자리에 세워놓은 언니는 이제 우리들 쪽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황당함과 호기심이 뒤섞인 시선으로 이 낯선 이방인의 숨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내린 여학생은 얼굴이 희다 못해 희묽어 보였다. 그는 우리들 중 하나를 찍어놓고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 많은 시선을 한몸에 받으면서도 그 아이의 시선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얘, 그것 좀 빌려줄래?”

그는 한 남학생 앞에 서서 그렇게 말했다. 그 녀석은 바짝 굳어서 손에 들고 있는 삽을 내놓았다. 내놓았다기보다는 그 아이가 빼앗았다고 해야 옳았다. 삽을 받아 든 그는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 여학생이 변을 떠다가 울타리 너머 밭으로 던지는 모습을 우리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삽질은 별로 능숙하지 않았는데 일련의 그 행동으로 인해 그 아이는 꽤나 어른스러워 보였다.

이튿날 한 아이가 서울에서 전학을 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덤으로 따라붙은 소문은 혀를 내두를 만큼 만만치 않았다. 재혼하는 아버지가 미워서 여동생 하나를 데리고 제 발로 외가를 찾아 내려온 아이라는 거였다.

뒷날 그녀가 대학을 다닐 때 동창들 사이에 그에 관한 확인 안된 일화 한 토막이 회자되었는데, 지하철이 터널 가운데서 멎자 문 옆에 밀봉된 도끼를 꺼내어 문을 열었다는 이야기였다. 일견 촌스런 아가씨의 실수담으로 웃음거리가 될 만도 했지만, 오히려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녀의 당찬 이미지를 더욱 굳혀주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당찬 아이로 기억하는 축들은 대부분 그를 중학생 시절에 접했거나 피상적으로 관계를 맺어온 편에 속한다.

그에 관한 기억에서 나오는 반응 중 또다른 갈래도 있다.

“아, 그 부담스러운 아이!”

당찬 아이와 부담스러운 아이가 어떻게 한가지 기억에서 나올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당차다거나 부담스럽다는 인상평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가 부담스러운 아이였다는 기억에는 우리 세대가 일반적으로 갖는 심리도 한몫 작용하고 있다. 흔히 아버지 세대가 가지고 있는 요소를 그는 많이 가지고 있는 편이었다. 일테면 식민지와 전쟁과 가난을 체험한 세대에게서 종종 느껴지는 곤궁함, 핍진함 따위가 그에게도 느껴졌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생(生)으로 귀결되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듯 늘 몸으로 밀어간다. 그것은 우리 세대에게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다. 끝없이 주눅들게 하는 만큼 또 불편하기도 한 게 그 세대의 체험과 정서였다.

연이의 복잡한 가족사도 그러했고, 스스로의 선택인지는 모르나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했던 그의 소녀가장 노릇도 친구들에게는 그런 이미지를 심어주었을 것이다.

중학교 졸업 후 연이를 다시 만난 것은 대학에 진학한 1989년이었다. 노량진에서 고향친구들이 모였는데 거기 홍일점으로 연이가 앉아 있었다. 그는 모대학에서 루마니아어를 전공하고 있었다. 권좌에서 쫓겨난 독재자 차우셰스쿠로 인해 그 나라가 부쩍 가까워진 시절이었다. 그는 여전히 아버지와 불화중인지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네, 과외지도를 하네 하며 어렵게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재수생의 길을 밟는 친구들이 하숙을 하고 있는 노량진에서 자연스럽게 모였다. 가끔 연이가 백화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을지로로 나가 철없이 그의 주머니를 축내기도 했다. 미팅도 꺼리던 당시의 대학가 분위기에서 그 모임에 나가는 자체만으로도 나는 마치 휴가를 얻은 군인처럼 숨통이 트이곤 했다.

때로 집회장에서 연이를 만나기도 했다. 정리집회가 끝나고 그를 찾아보면 벌써 아르바이트를 하러 자리를 뜨고 없었다.

어느날 불쑥 연이가 내 자취방을 찾아왔다. 잠결에 허리를 감는 섬뜩한 냉기에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아이, 추워!”

연이였다. 밤길을 걸어왔는지 그는 무릎을 꿇고 내 허리 밑에 차가운 손을 묻고 있었다.

“야, 너두 내가 민중으로 보이니?”

그는 앞뒤없이 불쑥 그렇게 물었다.

“너두 내가 소녀가장에다가 지지리 궁상인 게 마음에 드냐구?”

그러고 보니 그의 입에서는 술냄새가 풍겼다. 나는 몇차례 들은 적 있는 주정인 것 같아 “애인하고 싸웠구나?” 하고 물었다.

“날 좋아하는 이유가 글쎄, 고아에다가 고학생인 프롤레타리아이기 때문이래. 니가 들어도 정말 유치하지 않니?”

“니는 자발적인 고아에다가 용돈 많은 부르주아 학생이야.”

나는 그렇게 응대하고 말았는데, 실제로 당시 애인이었던 그의 선배가 그런 이유로 연이를 좋아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그 선배와의 연애는 그리 오래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날 밤, 간간이 눈을 떠보면 연이는 주방에서 무슨 음식을 지지고 볶느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니 연이는 보이지 않고, 상 위에 반찬 몇가지와 함께 쪽지가 놓여 있었다.

“동생한테 반찬 몇가지 해서 여수에 내려간다. 네 것도 좀 떼어놓았으니 잘 먹고 깡깡 성해라.”

상 위에는 장조림, 멸치볶음, 어포무침 따위가 놓여 있었다. 그후로도 연이는 백화점 아르바이트를 마친 금요일 늦은 밤이면 내 방을 찾아와 밤새 반찬을 만들어서 첫기차 편으로 여수에 내려가곤 했다. 그 똥을 누던 동생이 자라 여수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연이에게 친구 이상의 어떤 감정을 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언젠가 나란히 누워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손이 그의 가슴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간 적이 있다. 그는 내 손을 살며시 쥐었다.

“아마 난 너희들을 한번씩은 다 떠올리며 수음했을 거야.”

연이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살며시 그의 손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잠깐 헷갈렸다. 내 손이 다시 움직이자 그는 완강하게 쥐었다.

“내가 왜 데모에 나가는 줄 아니?”

“………”

“동무들이 다 거기에 있기 때문이야. 난 혁명이니 민주화니 하는 거, 별로 관심없어. 솔직히 내가 꿈꾸는 세상이 너희들이 말하는 세상하고 같은 것인지 잘 모르겠어. 그게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잘 몰라. 단지 난 거기에 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시간에 쫓기면서도 부득불 나가. 나는 다 하고 살 거야. 대학도 꼭 졸업할 거고, 동생도 가르치구, 연애도 할 거구……”

그런 연이가 살며시 내게 입맞춤을 해왔다. 그의 볼은 축축이 젖어 있었는데, 입술을 뗀 그의 입에서는 깊은 한숨이 묻어나왔다.

“날 이기적이라 욕해도 어쩔 수 없어. 좋은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

이듬해 나는 군에 입대를 했다. 그로부터 띄엄띄엄 편지가 배달되어 왔다. 친구들이 하나둘 군에 입대를 해서 외롭다는 둥,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는 둥 하는 내용으로 몇차례 편지가 이어지더니 한동안 소식이 끊겼다. 상병이 되었을 때 다시 편지가 날아왔다. 휴학을 하고 고향에 내려가 있다며 남도 생활을 세세히 적어 보내왔다.

분신정국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장교들의 쓰레기통에서 나오는 신문을 뒤적거리며 심한 열패감에 젖어 있었는데 그나마 그의 편지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 무렵 그의 편지를 생각하면 ‘희망’이니 ‘절망’이니 하는 말과 함께 ‘생명’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불꽃으로 떨어지는 동료들의 죽음은 사실 우리들이 불러들인 것이라고 했던가. 아무도 지켜봐주지 않았다면 결코 꺼지지 않았을 목숨들이라는 말을 그가 했던 것 같다. 아마 우리는 오랫동안 고통을 당할 거라고 했다. 다분히 자학적인 그의 말을 되새길 때면 반감도 없지 않았다. 젊은 죽음들은 분명 권력에 대항하는 죽음이라는 공분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열패감과 무력증에 더 발을 들여놓고 있던 나는 내심 그의 생각처럼 지내지 않았나 싶다.

휴학을 하고 고향에 내려가기 전, 연이는 학교에 위탁교육 받으러 온 육군장교와 연애를 했다. 그 장교와 연애하는 동안 주위의 친구들이 모두 떨어져나간 것 같은데 당시의 분위기를 봐서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연이는 그 장교와 결혼도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남자 쪽 집안에서 그의 가정환경을 탓하여 혼담이 깨진 것으로 친구들 사이에는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도 역시 연이의 죽음 이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들의 이별에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애인인 육군장교가 일단의 동료학생들에게 프락치로 오인을 받아 학내문제로 비화된 일이 있었다. 그 내막은 자세히 모르지만 그의 애인은 학생들에게 감금되어 자술서를 썼고, 그것이 대자보로 학내에 나붙었다고 한다. 그때 연이는 친구들과 애인 사이에서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알 수 없다. 연이는 죽기 직전까지도 그때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 같다. 그가 루마니아에까지 건너가 찾은 것들 중에는 파견근무중인 그 옛애인도 있었다.

마지막 휴가를 나올 무렵에 그와 연락이 다시 끊어졌다. 이번에는 내가 답장을 몇차례 걸렀기 때문이었다. 친구 몇명으로부터 나는 연이에 관한 불미스런 소문을 들었다. 연이가 피라미드 영업을 하면서 친구들 여러명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거였다. 연이의 죽음 이후에 만난 친구들 중에는 연이에게 피해를 본 친구들도 있었다. 그들이 하나같이 변상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나는 다소 충격을 받았다. 어떤 친구는 3개월 만에, 어떤 친구는 죽기 한달 전에 돈을 돌려받았다는 것이다. 증권사에 다니는 친구는 이런 말을 했다.

“드러내놓고 말들은 안했지만 운동권이 한때 그곳에 많이 몰렸다. 왜 그랬겠어? 단순히 벌어먹기 위해서였을까? 아니야. 그게 아주 고약해. 단순히 보면 이게 한때 우리가 꿈꾸었던 그런 대동세계와 논리가 너무 닮았단 말야. 순수하면 다 넘어가게 돼 있어.”

그 친구들을 만나면서 받은 느낌은 모두가 저만의 애인을 잃은 놈들처럼 하나같이 비통해하였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연이와 어떤 일이 있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말들을 주워섬겼다. 심지어 술에 취해 따라 죽겠다고 설치는 녀석도 있었다. 나 자신도 예외는 아닐 거였다. 어찌나 부끄럽던지 나는 그 술자리에 앉아 있는 게 고통스러웠다.

1993년 봄에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하지만 학교 분위기는 삼년 전과는 영 딴판이었다. 말 그대로 광장에서 도서관으로 모든 것이 물러나 있었다.

연이는 여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여태 학교에 남아 있었다. 보통의 여자라면 대학도 졸업하고 결혼생활이나 직장생활에 한창 바쁠 나이였다. 그런데도 연이는 그때껏 학생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89학번. 휴학에 휴학을 거듭한 끝에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봄축제를 핑계로 한번 만나자는 엽서가 왔는데, 나는 연락하지 않았다. 마음의 여유도 없었거니와 전역 후에 부모님으로부터 자립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대학에 들어와서 한 줄도 써내려본 적이 없는 소설을 무슨 과제물처럼 붙들고 있었다. 1학기가 끝나기 전에 다시 그로부터 엽서가 왔다. 장학생 특전으로 방학 동안 루마니아로 어학연수를 떠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엽서 곳곳에서 꽤나 들뜬 기분을 읽어낼 수 있었다. 당시 연이도 뭔가 자신을 새롭게 추스를 돌파구를 찾고 있었는데, 그게 선교활동인 모양이었다. 그는 어학연수 동안 자신이 선교활동을 할 수 있을지 알아볼 계획이라고 했다. 서로간에 종교 이야기가 오고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소식은 다소 의외였다.

루마니아에서 엽서가 두 통 더 날아왔다. 한결같이 절망적인 내용이었다. 독재자를 무너뜨려 민주화를 쟁취한 국민들의 생활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참혹한 그곳 민중들의 생활을 목도하고 있노라고 했다. 석탄을 구하느라 구덩이에 들었다가 매몰되어 죽은 두 어린이의 장례식도 보았다고 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병들었고 상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답다는 묘한 느낌이 공존하는 나라가 우리 루마니아다. 굳이 우리 루마니아라고 하는 것은 어떤 몸부림일까. 이곳에 온 후 내게 일어난 변화라고 믿고 싶은데 아직은 의지일 뿐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 나라보다 더 내가 불확실하다. 너무 성급했다 싶어. 지금 내게 남은 과제는 앞으로의 내 삶이다. 풀고 가고 싶다.”

연수기간이 끝날 무렵에 보내온 마지막 엽서는 더욱 절망적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자신의 모든 게 너무 불확실하다는 내용이었다.

“떠날 채비를 끝냈다. 혼란도 스스로 지쳤는지 더이상 상념 속에 빠져들지 않아 좋다. 이제 세상 속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인데 웬일인지 아무 느낌도 들지 않는다. 친구들이 보고 싶을 뿐이다.”

그는 아무것도 풀지 못하고 돌아오는 셈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그곳에서 무엇을 찾길 원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더구나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절망의 실체도 모른다. 그는 유서도 없이 입을 닫고 말았다. 그가 보내온 두 통의 엽서들을 최근에 다시 들춰보면서 나는 미처 보지 못한 한 구절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날 그렇게 쉽게 용서할 줄 몰랐어. 사람들이 의외로 시간의 매듭을 잘 짓고 살아간다는 게 놀랍다. 정작 용서받고 싶은 사람은 나 자신이었는가봐.”

왜 나는 그 짧은 엽서의 글을 숱하게 읽으면서도 그 문장을 놓쳤을까? 의도적으로 그의 엽서를 왜곡하며 읽어왔다는 사실은 꽤나 당혹스러웠다.

아직도 나는 그의 무덤 앞에서 분향을 하지 못했다. 무덤을 찾아 그 앞에 선다는 게 이제 와서 새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투사도 그 무엇도 아닌 한 친구가 황량한 새벽길을 걸어가서 연못에 몸을 던졌을 뿐이다. 나도 어느 새벽을 그 연못가에서 맞이해보았는데 안개가 매혹적인 연못이었다. 지켜봐주는 건 안개뿐, 아무도 없이 자신의 그림자만 어린 연못 속으로 연이는 뛰어든 것이다.

아마도 우리 세대에게는 분신정국에 보낸 젊은 죽음들에 대한 기억이 전쟁이나 가난처럼 기억될지 모른다. 연이는…… 공교롭게도 젊은 죽음들이 많았던 시절의 뒤끝이라는 사실 외에, 그의 죽음을 기억할 이유는 아무데도 없어 보인다. 아직 나는 연이를 어떤 식으로 기억해야 할지 모르겠다. 시간이 스스로 묻고 답해주리라는 기대를 갖고 그를 추억하며 살아가기에도 아직 벅찰 만큼 나는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한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