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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양애경 梁愛卿
1956년 서울 출생.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바닥이 나를 받아주네』 『사랑의 예감』 등이 있음.
만약 내가 암늑대라면
내가 만약 암늑대라면
밤 산벚꽃나무 밑에서 네게 안길 거다
부드러운 옆구리를 벚꽃나무 둥치에 문지르면서
피나지 않을 만큼 한입 가득 네 볼을 물어떼면
너는
만약 네가 숫늑대라면
너는 알코올과 니코틴에 흐려지지 않은
맑은 씨앗을
내 안 깊숙이 터뜨릴 것이다 그러면 나는
해처럼 뜨거운 네 씨를
달처럼 차가운 네 씨를
날카롭게 몸 안에 껴안을 거다
우리가 흔들어놓은 벚꽃 둥치에서
서늘한 꽃잎들이 후드득 떨어져
달아오른 뺨을 식혀줄 거다
내 안에서 그 씨들이 터져
자라고 엉기고 꽃피면
(꽃들은 식물의 섹스지)
나는 언덕 위에서
햇볕을 쐬며 풀꽃들 속에 뒹굴 거다
그러다 사냥을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무거워진 내 곁을
네가 떠나버린다면
그래서 동굴 안에서 혼자 새끼들을 낳게 한다면
나는 낳자마자 우리의 새끼들을 모두 삼켜버릴 거다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겠지
움직이지 못하게 된 내 곁을 지키면서
눈시울을 가느다랗게 하면서
내 뺨을 핥을 거다
후에 네가
수컷의 모험심을 만족시키려 떠난다면
나는 물끄러미
네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거다
그리고 다음해 봄에는
다른 수컷의 뺨을 깨물 거다
평생을 같은 수컷의 씨를 품는 암늑대란
없는 거니까
내 꿈은 무리에서
가장 나이 들고 현명한 암컷이 되는 것
뜨거운 눈으로 무리를 지키면서
새끼들의 가냘픈 다리가 굵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일
그리하여 나는 거기까지 가는 거다
이 밤 이 산벚꽃나무 밑동에서 출발하여
해 지는 언덕 밑에 자기 무리를 거느린
나이 든 암컷이 되기까지.
juicy
죽은 고양이들에게 바침
고양이들은 자기들의 야성을 믿는다
캄캄한 밤, 사람의 동네에서부터 달려나와
4차선 국도,
100킬로로 불을 쓰고 달리는 차들 앞에, 감히
잠깐의 머뭇거림도 없이 달려들어서
퍼슥─
흙받이에 몸뚱이가 부딪히면
치이─ 하고 끌리는 소리와 함께
차는 지나가고 고양이들은 길 한가운데 남는다
길바닥에 떨어져 새카맣게 터지는 익은 버찌처럼
다음 자동차가 고양이를 터뜨리며 지나가고
또 다음 자동차가 짓이기며 지나가고
왜 그렇게 즙이 많은지
길 가운데 검붉은 얼룩이 그렇게도 많이,
축축하게, 넓게 번지는지
그리하여 타이어에 네 피를 묻히면서
나는 아침 햇살 아래 달려간다
햇볕 밑에서 네 즙이 바닥에 얄팍하게 말라붙고
가벼운 털가죽만 남을 때까지 짓이겨지면서도
고양이야 너는 네 야성을 믿는다
불 켠 괴물들을 통과해 길 건너로 건너갈 수 있을 것을 믿는다
그래서 결국은 건너간다
길 가운데 필요없게 된 털가죽과 핏자국을 남긴 채
공기 속에 떠돌며 고양이답게 씨─익 웃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연두색 눈동자가 점점 작아져 검은 점만 남을 때까지
그리고 사람들은 그 자국 위를 달려서
자기의 즙을 짜바칠 곳을 향해 달려간다
천천히 말라붙어 껍데기만 남을 때까지
길을 가로질러 갈 생각 같은 것은 하지도 못한다
야성 같은 것은
어둠속에서만 가끔 꿈꿀 뿐이다
불안
모든 집은 불안 위에 서 있다
보송한 방도, 이불도, 김 나는 밥통도
아차 하는 사이에 썩어버린 풀처럼
끈적끈적하게 녹아내리는 순간
발을 헛짚어
까마득한 캔버스의 갈라진 틈으로
떨어져내리는 순간
나는 어디에 있는가
조금 전까지 서 있던 단단한 땅은 어디에?
─삶에는,
단단한 땅이란
없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