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강준만 교수님께 드리는 편지
강준만 『한국 지식인의 주류 콤플렉스』, 개마고원 2000
박노자 Vladimir Tikhonov
오슬로국립대학 교수, 한국학
존경하는 강준만 교수님.
교수님의 최근 저서에 대해 서평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 저는 적지 않게 망설였습니다. 언론학자도 아닐뿐더러 한국신문을 정기적으로 읽지도 않는 저 같은 사람이, 한국 지식인과 언론의 관계를 다루는 전문가의 저서를 평한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봐도 주제넘은 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혹시 오슬로대학에서 제가 맡고 있는 ‘한국 현대사회’라는 과목을 위한 좋은 자료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가 생겨서 일단 승낙했습니다. 책을 펼쳐보니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여태까지 많이 보지 못한 독특한 담화·구어체 혼합의 문체였습니다. 그 문체에 나름대로 매력을 느껴 이 짧은 글도 교수님이 즐겨 쓰시는 서신(書信) 형태로 써볼까 합니다.
저는 ‘조선일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교수님께서 여태까지 경주하신 노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저는 교수님의 현실참여적 활동 중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상당히 ‘본능적 거부감’을 느낍니다. 『조선일보』의 국가폭력 미화와 역사왜곡이 한국 극우체제의 대중 우민화(愚民化) 전략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언론학자가 아닌 저도 잘 아는 사실이지만, ‘좌파들의 신문기고 원칙’을 세워 그 ‘원칙’을 ‘위반한’ 사람을 ‘제1차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 ‘원칙’의 타당성 여부와 관계없이 저의 개인주의적인 체질에는 너무나 맞지 않습니다. 저의 문화적 편견인지 모르지만, ‘좌파들의 『조선일보』 기고 절대불가론’을 펴시는 강교수님의 모습에서 교수님 자신이 그토록 비판하시는 집단주의(집단 결속 위주주의)의 잔재를 느낍니다. 교수님의 주장이 100% 맞아도(저는 원칙적으로 다소 타당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술자리에서 술을 강권하듯이 이 지당한 ‘원칙’을 강요하는 것은 교수님이 주장하시는 ‘자유주의’의 일상적 행동윤리와 좀 상치되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수님은 강요가 아닌 정당한 비판이라고 반박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의 과민한 개인주의적 감각으로는 ‘비판’의 수위를 이미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수님의 대(對)사회적 행동의 일부분에 대해서 이같은 거부감을 가졌음에도, 교수님의 책을 읽으면서 ‘청탁에 응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저의 목적 중의 하나인 ‘한국 현대사회’ 강의를 위한 자료수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책만큼 한국 현대 지식인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예리하게(거의 무자비할 정도로 예리하게) 다룬 저서를 본 적이 없습니다. 교수님은 대중매체 이용에 대한 열망, 이념적으로 완전히 반대되는 매체에까지 기고하는 매체 이용의 무분별성과 탈(脫)윤리성, 신문을 통한 ‘이름값(name value) 올리기’에의 무절제한 집착 등등 ‘미디어적 주류’에 무조건 편승하고자 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근대화 과정에 있는 어느 사회든 ‘현대적 인뗄리겐쨔’가 보통 언론자본(print capitalism)과 함께, 그리고 언론자본의 힘에 의해서 무대에 오릅니다. 그것까지는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교수님의 지적대로 몇개의 신문만이 ‘공론장(公論場)으로서의 특권’을 부여받을 수 있었던(23면) 일제시대를 거친 한국사회는, 지식인의 ‘언론중심주의’라는 면에서 상당한 특수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일제만 탓해야 하는가요? 교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 지식인은 ‘상징가치의 축적’을 신문을 통한 ‘매명(賣名)’과 ‘매문(賣文)’으로 하지만, ‘지식인’이라는 위치를 획득·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경우에는 사립대학교라는 또하나의 기업체에 자신의 ‘상징적 가치’를 내걸어 몸을 팔아야 합니다(59면). 대학도, 지식인 자격 소지자(박사학위 소지자)도 남발되고, 우수 학생을 둘러싼 대학간의 경쟁과 젊은 지식인들의 부끄러운 ‘취직경쟁’이 유례없이 치열한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지식인의 ‘원칙을 결한 이름값 올리기’는 똑같이 ‘원칙을 결한’ 자본주의의 경쟁논리로 어느정도 설명되지 않을까요? 교수님이 저서에서 아주 예리하게 지적하신 교수들간의 ‘신문칼럼 따먹기 경쟁’(18면)은, 신문칼럼이 해당 교수의 ‘이름값’뿐만 아니라 그 소속 대학의 ‘이름값’까지도 올린다는 사실로도 설명되지 않을까요? ‘좌파’와 ‘우파’는 이론 차원의 이야기이고, 대학간 그리고 개인간의 ‘죽기 살기 경쟁’은 한국형 천민자본주의의 살벌한 현실입니다. 2003년부터 예상대로 대학의 ‘소비자’인 학생의 수가 전체 대학정원에 미달한다면, 현실은 더욱 살벌해지지 않을까요? 아무튼, “히틀러가 한국에서 다시 태어나 신문사 사장이 돼도 그에게 기고할 교수들이 많다”는 교수님의 말씀은 정곡을 찌르는 지적처럼 보입니다. 저의 강의시간에, ‘공인된 상징적 자본’의 주요 창조자인 거대 미디어기업이 그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둘러 한국을 어떻게 지배하는가를 학생들에게 설명하기에 앞서, 교수님의 이 명언을 그대로 인용해도 괜찮을까요?
한국의 ‘미디어지식인’들이 무조건 ‘이름 내걸기’를 추구한다는 맥락에서 ‘얼굴 내밀기’를 생리로 하는 연예인들을 닮아가고 있다는 교수님의 지적(13〜15면)도 신중히 음미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청각미디어의 ‘상징자본의 창조’에 자신의 노동력을 고가로 파는 연예인과, 문자미디어의 똑같은 상업행위에 자신의 전문성을 파는 ‘미디어지식인’은, 각자가 그 분야는 좀 달라도 ‘산업자본주의’를 조금씩 대체해가는 ‘상징자본주의’의 고급인력이라는 점에서 매우 비슷한 성격의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교수님의 비교법을 더 논리적으로 발전시키면, 연예인이 본인의 ‘진짜 생각’과 무관하게 영화에서 혁명가나 진압군의 역할을 ‘잠시’ 맡을 수 있듯이, 연예인화된 ‘미디어지식인’도 수지타산이 맞기만 하면 ‘좌파적 자세’도, ‘극우적 자세’도 ‘잠깐’ 취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이 ‘지적인 엔터테이너’에게 ‘좌파적 실천’(내지 ‘극우적 실천’)까지 요구한다는 것은, 「쉬리」에서 북한 간첩의 역을 맡은 배우에게 “진짜 간첩 하라!”고 요구하는 격으로 우스운 일일 것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이러한 ‘탈(脫)현대적’ 세상이 한국에 오지 않으리라고 믿으십니까? 이미 이러한 세상이 도래한 러시아를 지켜보고 있는 저는, 한국도 비슷한 상황이리라 짐작합니다. 왜냐하면, 지식인 사회가 시장논리의 적용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 ‘복지 천국’ 유럽과 달리, 러시아나 한국에서 지식인의 몸은 무절제한 시장경쟁이라는 칼날같이 추운 바람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생존공포에 몸을 떠는 사람에게 ‘언행일치’를 따져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의 무례함을 백번 사죄하고 교수님의 ‘비판방식’대로 교수님께, 그리고 저 자신에게 한번 솔직하게 물어보겠습니다. 지금 ‘한국의 지성계’라는 상징체계에서 ‘정의로운 비판자’의 역할을 맡으려고 하시는 교수님이나, 더욱 작은 목소리로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해온 제 행동의 심층적 동기에도, 알게모르게 ‘상징가치의 축적에의 열망’이라는 모티프가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저 자신을 매우 괴롭히는 생각이지만, 제 마음의 깊은 구석까지 성찰해보면, ‘아니오’라고 잘라 말하기가 힘들 때도 있습니다. 물론, 교수님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 제 지적이 엉뚱하다면, 교수님의 표현대로(190면) 성균관 대성전 앞에서 무릎 꿇고 선비를 모독한 죄를 빌 각오입니다.
한국 미디어지식인의 ‘언론에의 기생(寄生)’에 대한 교수님의 근본적인 주장 이외에도, 교수님의 저서에는 저의 수업에 도움이 될 대목이 많았습니다. 또하나의 예를 들자면, 장유유서(長幼有序)의 봉건적 위계질서를 철저하게 지켜 나이가 어리거나 ‘이름값’이 자신보다 덜 되는 이를 논쟁의 상대로 삼지 않는 이문열에 대한 대목입니다(183〜216면). 종래의 연령질서(그리고 이문열의 사례에서 잘 보이듯이, 남존여비의 질서)와 현대적 시장가치(이름값) 질서의 혼합이야말로, 현재의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계급주의적이며 위계적 사회로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언론사 직원의 권력화·관료화에 대한 교수님의 지적(127〜28면)은 한국사회의 일면을 너무나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상화·당연화된 부정부패에 대한 부분(325〜26면)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교수님의 활동의 일부분을 저의 좁은 도량으로 이해하기 힘들지만, 한국학자인 저는 교수님의 저서를 매우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의 과민성을 용서해주시고 저의 감사를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교수님께 한가지 제안을 드릴까 합니다. 교수님께서는 따뜻하고 편안한 전북대학교 바깥의 세상이 점차 아비지옥으로 되어가는 사실을 생각해본 적은 없으십니까? 약 70%의 노동자가 비정규직으로 전락하여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고, 한국사회의 모든 독소에 노출된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그리고 중국이나 동남아로 진출한 한국기업들이 거기에서 현지인으로부터 어떤 평판을 받는지 교수님께서 모르실 리 없겠지요? 그러면, 차라리 극우매체에 기고한 ‘죄’말고 다른 죄가 별로 없는 몇명의 ‘비(非)실천적 진보분자’를 잠깐 가만히 놔두시고, 비정규직을 악질적으로 양산하고 외국인노동자를 때려잡는 ‘실천적’(너무나 실천적!) 극우분자를 집중적으로 다루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저는 교수님을 비판할 생각도, 그리고 또하나의 새로운 논쟁에 불을 지필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다만, 한 동지의 입장에서, 비판의 실천적 결과가 나오기를 갈망할 뿐입니다.
교수님의 많은 활동을 기대하면서 이만 줄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