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지역에 사는 의미

최원식 『황해에 부는 바람』, 다인아트 2000

 

 

구모룡 具謨龍

문학평론가·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gumo09@chollian.net

 

 

지역에 사는 의미를 궁리하는 이가 있다면 최원식(崔元植) 교수의 『황해에 부는 바람』과 만나기를 권한다. 아마 내가 그랬던 것처럼 수도 없이 무릎을 치게 될 것이다. 우선 지역을 인식하는 탁월한 관점에서 놀라고 다음으로 탐구와 실천이 전하는 실감에서 더 큰 감동을 받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사회는 지독한 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자본과 제도 등의 서울 집중으로 주변부 지방은 식민화되고 지방민들은 자기 땅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주변부 농어촌의 경우 중앙과의 도저한 거리감과 일상화된 체념으로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거의 낼 수 없는 지경이라면 반(半)주변부라 할 수 있는 도시지역, 특히 인천과 부산 등은 매우 심각한 수준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보이고 있다 하겠다. 이러한 현상은 중심부─반주변부─주변부의 세계체제를 일국 차원에서 그대로 닮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한데, 무엇보다 지역이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한 나라는 물론 세계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맥락을 찾아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역을 통하여 나라와 세계를 본다는 것은 배타적인 지방주의나 지역중심주의와 무연하다. 그동안 우리는 자기의 터전을 무시하고 세계만을 추수하거나 세계를 거부하면서 지역에 매달리는 두 양상을 보아왔다. 그러나 세계주의든 지역주의든 애써 다른 한쪽에 대하여 눈을 감으려 한다는 점에서 이복형제와 다름없다. 이러한 점에서 ‘전지구적 사고, 지역적 실천’이라는 관점은 세계─지역─국가─지방 등이 프랙털(fractal) 형국을 만들고 있는 21세기 세계체제에서 지역운동이 견지해야 할 가장 확실한 테제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전지구적 시야로 지역을 보고 지역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상호침투적 시각’으로 ‘인천’을 읽고 있다.

인천이 개항과 더불어 도시공간이 식민지 수탈구조로 왜곡 발전되었다는 저자의 지적은 내가 부산을 생각하면서 품어왔던 의문을 풀게 하였다. 전통과 생활의 본거지를 해체하면서 식민지 도시 인천을 건설한 일제는 동일한 패턴으로 부산사람들의 본거지인 동래와 기장과 다대포를 변두리화하면서 부산항과 부산역 중심으로 기형적 도시공간을 형성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식민지 도시로 발전하였으나 인천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활력을 앗아간 것이 해방에 이어진 냉전체제와 분단체제라 지적한다. 이러한 지적은 곧 냉전체제의 와해와 함께 인천의 부활을 예고하고, 황해를 ‘동아시아의 지중해’에 비유하는 견해를 수용하여 인천을 새로운 문명의 바람을 일으키는 동아시아 평화의 중심거점으로 키울 것을 제안하는 데 이른다. 좋은 제안이 아닐 수 없다.

111-414이러한 지역 인식틀과 함께 저자의 인천학에 살을 덧붙인 것은 지성사적 계보학과 풍경의 고고학이다. 저자는 비류백제 이후 2천년의 인천사를 탐색하면서 특히 지역의 지성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위대한 실학자 성호 이익의 근거지였던 인천에서 근기학파를 재건하는 것이 꿈”(42면)이라는 저자의 입장에서 지성의 계보를 확인하는 일은 급선무에 속한다. 그가 이승엽·조봉암·장면·곽상훈 등을 통하여 인천 사상을 탐색하고, 고고미술사학자 고유섭의 학덕을 기리거나, 정노풍·진우촌·함세덕·현덕·김동석·배인철 등 평론가 극작가 소설가 시인 들의 문학을 재조명하는 것은 지성의 계보학을 통하여 지역의 가능성을 이끌어내려는 의도에 상응한다. 이러한 계보학과 함께 저자는 풍경의 고고학을 도모하고 있다. 근대 이후 왜곡된 풍경의 이면을 헤집어 상상적 풍경을 복원하는 일은 고고학에 비유될 수 있는 것으로 공간 왜곡을 바로잡는 데 필수적이다. 특히 「경인선의 문화지리」는 감명 깊은 민족지학적 기술이다. 저자가 말하는 ‘인천의 인천화’는 궁극적으로 풍경의 복원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풍경의 복원이 과거로 돌아가자는 단순한 복고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췌언의 여지가 없다. 풍경의 복원은 왜곡된 근대를 해체하고 인천의 전통과 현대를 조화롭게 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풍경의 고고학에 항상 뒤따르는 것이 지명학이다. 지명의 비정(比定)을 저자는 공자의 정명(正名) 사상과 연결시킨다. 사실 저자의 지적처럼 우리는 수많은 엉터리 지명과 접하면서 그와 더불어 잘못된 지명의 이데올로기에 설득당하고 있다. 풍경을 복원하고 잘못된 지명을 바로잡는 일이 식민화된 생활세계를 해방하는 일과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저자가 거듭 강조하고 있듯이 자기가 딛고 있는 땅으로부터 소외된 이념과 실천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생활은 물론 궁극적으로 민중으로부터의 소외를 뜻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가 딛고 사는 터전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은 그 지방에서 살았던 또는 살아가는 민중의 꿈과 투쟁과 좌절, 곧 지방의 혼을 자기 안에 정성스럽게 받아들이는 대지에 대한 경배이다. 이 마음이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35면) 분명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사실 저자가 문제삼은 인천사람들처럼 내가 살고 있는 부산사람들도 ‘자기의 땅에서 일종의 심리적 망명상태’에 빠져 있다. 식민지 도시로 기형적으로 발전하여 상업적으로 급조된 도시에 한국전쟁과 더불어 도처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만큼 지역에 대한 애정은 그리 크지 못하다. 이러한 처지에 설상가상인 것은 중심부의 바람, 세계화의 바람이 지역민들로 하여금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기 삶을 돌아볼 여유를 한시도 갖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지역운동이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운동으로 대두해야 할 근거가 된다. 말할 것도 없이 바람직한 시민사회의 형성 없이는 올바른 지역자치나 지역문화의 활성화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자기 땅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고 진정한 시민으로 거듭나는 일이 필수적이다. 지역운동이나 지역문화운동은 결코 생활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최원식 교수의 책을 ‘요산문학제’를 치르면서 읽었다. 요산 김정한의 문학정신을 시민정신으로 계승하자는 목표를 둔 문학제전의 한가운데서 최원식 교수의 『황해에 부는 바람』은 김정한의 소설을 다시 읽어야 할 필요성과 그것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눈을 제공했다. 부산이라는 지방을 통하여 한반도를 보고 동아시아를 이해하며 나아가서는 세계를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요산 김정한의 문학이 이미 이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문학적으로 지역성은 새롭게 인식되어야 한다. 그것이 모든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서울 작가들의 문학에서 구체적인 사람살이의 터전을 발견하기 힘들다. 살아숨쉬는 풍경들이 사라지고 일률적이고 획일화된 장면들이 도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만큼 중심부가 자본의 동질화 전략에 빠르게 휩쓸리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제 희망의 바람은 중심에서 생성되지 않는다. 주변부와 반주변부 지역에서 새로운 의미와 가치들이 생성되어 그것이 대안적 삶을 만들어갈 것이다. 『황해에 부는 바람』은 나에게 그동안 막연하고 느슨했던 생각들을 다잡아 단단하게 만드는 계기로 충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