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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행복과 위험의 경계에 선 고민

박은정 『생명공학 시대의 법과 윤리』, 이화여대 출판부 2000

 

 

차병직 車炳直

변호사·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bjcha@hklawyer.co.kr

 

 

작년 미국 콜로라도주의 한 가족이 직면했던 난관과 그 해결은 구체적이어서 흥미롭고, 극적이어서 고민스럽다. 리사와 잭 부부 사이의 여섯살 난 딸 몰리는 판코니 빈혈증에 걸렸다. 게다가 백혈병 등 합병증으로 몰리는 1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형 판정을 받았다. 유일한 치료방법은 가족 중 판코니 빈혈 유전자를 보유하지 않은 건강한 사람의 세포를 몰리의 골수에 이식하는 것이다.

리사와 잭은 둘다 판코니 빈혈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 그들이 다시 아이를 낳아도 판코니 빈혈에 걸릴 확률은 25%나 된다. 일리노이주의 메이스닉 의료쎈터에서 나섰다. 네 차례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리사와 잭의 인공수정란 15개 중 판코니 빈혈 유전자가 없는 2개를 발견했다. 다행히 그 수정란의 유전자는 몰리의 체질과도 일치했다. 그중 건강한 수정란 하나를 선택하여 리사의 자궁에 착상시키고, 몰리의 동생 애덤을 만들어냈다. 1개월 쯤 뒤 애덤의 탯줄 혈액세포를 몰리의 골수에 이식하면서 치료의 길고 복잡한 과정은 막을 내렸다.

의료진들이 개입한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다른 논쟁이 그때부터 시작됐다. 몰리의 병 치료를 위한 수단이 된 것은 첨단의 생명공학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포괄적이고 관념적인 수단일 수 있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치료의 도구가 된 것은 애덤이었다. 인간으로서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애덤은 그 탄생에서부터 특정한 목적에 따라 의도되었고 조종되었다. 생명윤리학자들은 윤리에 역행하는 짓이라고 비난했다. 어떤 이유로도 태어날 자식의 형질을 결정할 권리가 부모에게 없다는 주장이다. 반론도 만만찮다. 사람이 임신하는 이유에는 부부 사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부터 노동력을 얻으려는 것까지 다양한 형태가 있으므로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지난 세기는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시대로 요약할 수 있다는 것이 각계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중 과학의 눈부신 발전은 인류의 생활과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근대성의 상징인 합리성의 극대화로 인식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물질적 성취는 삶의 질까지 변화시켰다는 점에 대해선 부인할 길이 없다. 따라서 21세기에는 ‘과학’ 중에서도 정보화혁명과 함께 생명공학기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때보다도 커질 것으로 예견된다. “23쌍의 염색체, 8만개의 유전자, 100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인간의 비밀은 무엇인가?” 그 보물섬의 지도는 바로 게놈이다라는 광고문구가 우리를 설레게 한다. 그러면서도 불안하게 만든다.

111-417이런 급변하는 과학의 시대에, 과학적 전문지식은 없어도 그 결과만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철학적 규범학자들은 나름대로 새 시대에 대비한다. 그런 세상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는 법에 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빛과 같이 빠른 속도로 우리 시야를 스쳐가는 과학기술의 진행에 대응하여, 새로운 시대와 경향에 대한 규범의 태도는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줄 필요는 분명히 있다. 그것은 정치가들 이전에 법학자의 의무이다. 저자 박은정(朴恩正) 교수는 그러한 기본적인 관점에서 출발하여 10년 가까이 생명윤리에 대한 관심을 보여왔고, 틈틈이 쓴 글들을 정리하여 비교적 방대한 분량의 단행본으로 엮었다.

법철학자로서의 저자는 장기이식에서 시작된 생명윤리 문제 이전에도 그랬듯이, 이후에도 최고의 가치는 인간의 존엄성임을 놓치지 않는다. 인간의 가치는 존엄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비록 그것이 아무리 추상적인 개념이라 할지라도 자연법적 거울로 삼는 데 주저할 수 없는 것이다. 저자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져오는 혼란스런 현실에서 법철학의 관심인 인권 패러다임을 어떻게 정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조심스럽게 성찰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인간 존엄에서 시작한 성찰은 생명공학에 대한 합리적 규제의 필요성과 함께 인간생활의 안전 및 윤리 확보를 위한 바람직한 법정책의 모색에까지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지한 사고와 논의가 거의 전부 총론의 영역에만 머물고 있어 조금 안타깝기는 하다. 그래서 안경환 교수는 ‘인문적 법학’의 한계를 지적한다. 예를 들어, 생명공학의 질주가 우리 사회에 초래하는 구체적 위험은 무엇인가. 벡(U. Beck)의 말대로, 위험이란 무지에서가 아니라 지식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삶의 질에 관여하여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고양시킬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말하자면 법학의 규범적 태도를 ‘제약’에서 ‘수용’으로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적극적 반론이다.

물론 저자는 그러한 지적들을 이 저서에서 자신의 논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인간 수정란의 배아를 도구로 한 연구 자체를 막을 수 없다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과학기술의 흐름에 규범의 이름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겠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공동선에 기여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과학연구의 자유가 보장되어왔지만, 중상주의적 흐름 때문에 과학의 공공성은 무너지고 고전적 윤리가 손상되었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윤리와 복지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법철학적 고민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법학도 하나의 고통임에는 분명하다. 그 고통을 이 세상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새로운 것들을 막음으로써 감당할 것이냐 받아들임으로써 감당할 것이냐. 법철학자는 의사들이 과학에 근거한 약의 투여로 야기한 병들을 다시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들, 즉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의 인간과 첨단과학의 자연성의 한계 등에 관한 과학적이면서도 비과학적인 고민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거기다 구체적인 흥미를 즉각적으로 유발시켜주는 동인은 없더라도 인내심을 유지하며 하나의 종합적인 텍스트로 이 책을 읽어보겠다는 예비독자들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알려줄 정보가 있다. 서점에 가거들랑 법률서적 코너에서 시간을 허비할 것이 아니라, 바로 사서적 지식이 있는 점원에게 이 책을 찾아달라고 하는 편이 훨씬 현명한 행동이란 것이다. 저자가 필요에 의해 유명한 대형서점에 갔더니, 이 책은 자연과학 서적으로 분류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저자가 14년 전 의욕적으로 펴낸 『자연법사상』도 한때 그 코너에 처박혀 있었다고 한다. 현상과 관념, 또는 존재와 당위를 둘러싼 현실의 혼란은 재미있게 그리고 끝없이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