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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통일과정과 개혁과제

 

탈독재·탈냉전시대의 정치개혁과 언론개혁

 

 

정해구 丁海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정치학. 저서로 『10월인민항쟁 연구』 등이 있음. hgjung@mail.skhu.ac.kr

 

 

1. 기대에 미치지 못한 민주주의와 남북관계 진전의 현실

 

1980년대 후반 이후 우리는 두 가지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그 하나는 과거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권위주의체제가 퇴각하고 민주주의를 향한 이행이 진행되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분단과 전쟁 이래 한반도 정세와 남북관계를 지배해왔고 동시에 남한 권위주의체제 강화의 외적 배경이 되었던 냉전체제가 해체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물론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곧장 성숙된 민주주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또한 국제적 차원에서 시작된 냉전체제의 해체가 곧장 한반도의 냉전 종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탈독재·탈냉전의 이같은 상황은 민주주의 발전과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한층 증대시키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같은 변화가 시작된 지 십수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와 남북관계는 높아진 기대에 부합할 만큼 충분히 발전하고 개선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탈독재·탈냉전 상황이 전개된 이후 우리의 민주주의와 남북관계는 어떤 점에서는 일정한 진전을 이룩했다고 볼 수도 있다. 우선 1987년 민주적 개방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나름의 발전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선거가 쿠데타정권의 사후합리화 수단으로 이용되거나 실질적인 정치적 경쟁 자체가 불가능했던 과거의 상황에 비하면, 현재는 적어도 선거를 통한 정치적 경쟁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로의 이행에도 불구하고 구 독재세력이 건재했던 상황에서 줄곧 민주적 야당의 위치를 고수해온 김대중의 민주당이 결국 집권에 성공함으로써 선거에 의한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룬 것도 민주주의의 진전된 모습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한반도문제 및 남북관계 역시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그것은 거의 물리적 충돌에 이를 만큼 첨예한 북미간의 대립을 불러일으킨 북한의 핵개발문제에 대한 해결의 계기가 북미 제네바합의에 의해 마련되고, 이를 바탕으로 양측 관계의 개선이 어느정도 모색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김대중정부의 일관성 있는 대북 포용정책의 추진으로 지난해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기에 이른 것도 남북관계 진전의 한 양상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거를 통한 정치적 경쟁이 가능해졌고 야당에 의해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는 것만으로 한국의 민주주의가 기대만큼 충분히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부정적이다. 여전히 강력하게 존재하는 수구 기득권세력의 요구와 이익은 과잉반영되고 있는 반면,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이해와 정치참여 요구 그리고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제반 개혁요구는 정치사회나 국가의 정책결정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정권교체에 성공한 김대중정부조차 자민련 등 구 독재세력에 의존하여 공동정권을 꾸리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은 민주주의로의 이행 이후에도 우리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반증해준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선거주의’(electoralism)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선거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는 이루어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시민사회의 요구와 이해를 제대로 반영하는 정치참여의 증대나 정치적 대표체계 강화의 계기로서 기능하기보다는, 실제적으로는 비민주적이고 과두적인 정치적 지배구조를 정당화하고 이에 합법성을 부여해주는 기능을 수행하는 측면이 크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편 상당한 진전을 보여준 북미관계 및 남북관계도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대단히 불안정하고 취약한 것임이 드러난다. 우선 북미관계가 제네바합의 이후 일정한 진전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미 부시행정부의 등장으로 그러한 기조가 계속될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탈냉전 상황이 전개되는 가운데서도 국내에서는 대북 강경노선의 흐름이 면면히 지속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북핵 위기의 싯점에서뿐만 아니라 제네바합의를 통해 북핵문제 해결의 돌파구가 마련된 이후에도 남북대화의 재개는 국내 냉전세력에 의해 강력히 저지당한 바 있으며, 남북관계 개선이 본격적으로 추구되는 현 김대중정부하에서도 이에 대한 국내 냉전세력의 비판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탈독재·탈냉전 상황이 전개되고 이에 따라 민주주의 발전과 남북관계 진전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남북관계 진전의 성과는 일정한 한계를 보여준다.

 

 

2. 수구세력의 저항과 싸보따주

 

그렇다면 이같은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그 원인은 여러 차원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1987년 민주적 개방 이후 국가와 시민사회 곳곳에 포진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수구세력의 존재이다. 탈독재·탈냉전 상황의 전개가 그들의 기득권 약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진전과 남북관계의 개선상황을 예의주시했던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들의 수구적 태도를 빈번히 드러내곤 했다. 다음은 수구세력이 보여준 반민주적·냉전적 저항 또는 싸보따주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첫째로 문익환 목사의 방북사건,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 그리고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 자격의 임수경 평양축전 참가 등 일련의 방북사건에 의해 야기된 1989년의 공안정국이다. 당시 6월항쟁의 여파와 여소야대의 상황 속에서 노태우정부는 과거청산 등 민주개혁 요구에 직면하였다. 노태우정부가 1988년 6월 국회에 ‘5공비리 특별위원회’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등 민주개혁을 위한 7개 특별위원회를 설치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태우정부는 일련의 방북사건을 계기로 공안정국을 조성해서 민주개혁 요구를 무력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즉 통일운동과 노동운동 등 민족민주운동 전반에 대한 탄압을 강화한 한편, 상호협력을 통해 정부에 민주개혁의 압박을 가하던 야당의 공조체제마저 동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1

1989년의 공안정국이 노태우정부에 대한 민주개혁 요구를 무산시킨 공안당국 주도2의 반개혁 싸보따주의 사례라 한다면,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직후 ‘조문파동’에서 비롯된 신공안정국은 공안당국이 주도하기는 했지만 관료·언론·재벌·사회단체 등 국가와 사회 곳곳의 거의 모든 수구세력들이 이에 가세한 반개혁 싸보따주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결집했는가? 우선 당시 북한을 방문한 카터 전 미대통령은 김일성과의 대타협을 이루어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북한의 핵개발문제를 둘러싼 북미간 갈등이 해소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는 한편,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통해 남북대화가 재개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구세력은 김일성 사망 직후 남에서 야기된 조문파동을 이용, 이같은 남북대화 재개의 기회를 무산시키고자 했다. 그뿐 아니라, 조문파동은 이후 주사파척결 파동, 경상대 교재에 대한 이적성 시비, 민간 통일운동에 대한 탄압, 노동문제에 대한 국가기강 차원의 강경대처 등 민주화운동 전반에 걸쳐 일련의 매카시즘적 탄압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그러지 않아도 국제경쟁력 강화와 세계화의 주장 속에서 동요하고 있던 김영삼정부 초기개혁을 최종적으로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즉, 수구세력은 신공안정국을 통해 밖으로는 남북대화 재개를, 안으로는 김영삼정부의 초기개혁을 저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두 사례는 탈독재·탈냉전의 상황에서 수구세력이 민주개혁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시도에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상 가장 취약한 고리라 할 반공 또는 안보논리를 동원하여 남북관계의 진전을 가로막았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민주개혁조차 저지하거나 약화시키고자 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수구세력이 국가권력을 전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경우 그들의 저항은 주로 공안당국을 통해 행사되었던 한편, 그들이 국가권력을 부분적으로 장악한 경우 그것은 일부 공안기구와 시민사회 수구세력의 합세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음의 두 사례는 수구세력의 반개혁 싸보따주가 공안당국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또다른 주체인 보수언론에 의해 독자적으로도 주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 한 사례는 김영삼정부 말기인 1997년 초·중반 각종 여론매체를 통해 갑작스럽게 전사회적 현상으로 떠오른 ‘박정희씬드롬’이다. 물론 그 일차적 원인은 김영삼정부의 실정(失政)에 있었던만큼, 이에 대한 즉자적 반발로서 박정희리더십에 대한 복고적 분위기가 일시 야기되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날 수도 있던 것이 당시 전사회적 차원의 씬드롬으로 확산되었는데, 이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보수언론이었다. 즉, 그들은 이 에피소드성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박정희의 ‘지도력’과 ‘위업’을 새삼 강조함으로써 박정희씬드롬을 의도적으로 확산시킨 것이다. 보수언론들은 15대 대선을 앞둔 당시의 싯점에서 김영삼정부의 실정이 탈독재 민주화의 직접적인 결과인 것처럼 왜곡하는 한편,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구체제의 정당성을 홍보하고자 한 것이다. 이같은 시도의 공공연한 목적이 수구세력의 기득권 유지에 있었음은 물론이다.3

김대중정부의 등장으로 수구세력이 국가권력의 중심에서 점차 배제되지 않을 수 없던 상황에서 김대중정부의 개혁 추진에 제동을 걸고자 한  대표적 사례로서, 1998년말 김대중정부의 정책기획위원장 최장집(崔章集) 교수에 대해 행해진 『조선일보』의 사상검증 사례를 들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장 예민한 주제인 한국전쟁을 내세워, 그것도 학술논문의 내용을 자의적으로 편집·해석하여 행한 『조선일보』의 매카시즘적 공격은 한국 극우세력의 ‘마녀사냥’식 사상검증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4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이제 이같은 ‘마녀사냥’이 정부당국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보수언론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행해진 수구세력의 저항이 정권이 교체된 상황에서는 점차 국가 이외의 시민사회 영역에서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수구세력의 저항 또는 싸보따주는 국민정서상 이에 대한 반대가 쉽지 않은, 그러나 그들로서는 쉽게 동원할 수 있는 논리와 수단을 매개로 이루어지는데, 그 효과는 단순히 남북관계나 이데올로기적 사안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내의 민주개혁 문제와도 관련된다. 또한 수구세력의 저항이나 싸보따주가 이루어지는 거점이 그들의 국가권력 장악 여부나 정도에 따라 달라졌다. 이를테면 노태우정부 시기와 같이 그들이 국가권력을 직접 장악하고 있을 경우 수구세력의 저항이 공안당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반면, 김영삼정부 시기와 같이 그들이 국가권력의 핵심을 완전하게 장악하지 못한 경우 그것은 일부 공안기구를 중심으로 하고, 시민사회의 수구세력이 이에 가세하는 양상을 띤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정부 시기와 같이 그들이 국가권력의 핵심으로부터 멀어졌을 경우 그것은 국가 밖의 시민사회에서, 특히 그들의 주된 거점인 보수언론으로부터 제기되었다.

 

 

3. 민주주의 이행과 정치개혁의 지체

 

기회가 있을 때마다 행해진 수구세력의 반민주적·냉전적 저항 또는 싸보따주로 인해 민주주의와 남북관계는 기대보다 진전되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수구세력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이 탈독재·탈냉전 상황이 전개되었음에도, 특히 민주주의 이행과정을 거쳤음에도 청산 또는 약화되지 않고 이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우선 수구세력은 앞의 사례들이 시사하듯이, ‘수구 정치세력’과 ‘보수언론’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가 국가 및 정치사회 영역에서 활동하는 수구세력이라면, 후자는 주로 시민사회 영역에 근거해 활동하는 수구세력이라 하겠다. 우선 수구 정치세력과 관련하여 민주주의 이행과정 및 그후의 과정에서 여러번 시도되었으나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한 민주개혁·정치개혁의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과거의 독재세력이 민주주의로의 이행 이후에도 살아남아 개혁과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 정치세력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어떻게 행사하게 되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다음으로 보수언론과 관련하여 우리는 1987년 민주적 개방 이후의 보수언론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 이후 시민사회의 수구세력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그들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최근 제기되고 있는 언론개혁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우선 정치개혁 문제와 관련해 얼마 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는 김대중정부 집권 3년을 맞아 정치개혁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정치개혁에서 김대중정부는 국민이 갈망하는 민주주의의 확고한 실현에 실패하였다. 소수정권의 한계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진정한 개혁을 추진했더라면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 망국적인 지역주의를 청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기성 정치인들의 ‘특권적 카르텔’을 극복하지 못해 노동자를 비롯한 국민 다수의 이해를 정치에 반영하지 못하고 그들을 대표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형성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방해하였다. 여야간 소모적 경쟁과 당내 민주주의의 미흡으로 말미암아 정당정치의 활성화도 이룩하지 못하였다. 현정권은 국가보안법의 폐지와 부정부패방지법과 인권위원회법의 제정을 미루고 있으며, 지역주의적 기득권세력을 약화시키고 신진정치세력의 진출을 조장해줄 수 있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도 채택하지 않고 있다.5

 

이에 비추어보았을 때, 현재 문제가 되는 정치개혁 의제들을 다음과 같이 범주화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지역주의정치와 관련된 것으로서, 여기에는 기성 정치인들의 ‘특권적 카르텔’, 개혁적 리더십의 부재, 사회 각계각층의 요구와 이해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이익대표체계, 그리고 신진 정치세력의 정치권 진입 장벽 등의 문제들이 포함된다. 이렇듯 첫번째 범주가 시민들의 정치참여 및 정치적 대표체계 구축과 관련된 의제들을 포괄한다면, 두번째 범주는 정치활동 및 정당운영에서의 정치행태와 관련된 것으로서, 인맥 중심의 정당운영, 여야간 소모적 정쟁, 이로 인한 국정의 마비, 당내 민주주의 부진, 부정부패 등 우리가 ‘구(舊) 정치’ 또는 ‘낡은 정치’라 칭할 수 있는 문제들이 이에 포함된다. 세번째 범주는 주로 개혁의 제도화와 관련된 것으로서, 국가보안법·부정부패방지법·국가인권위원회법 등 3대 개혁입법의 채택 문제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의 채택 문제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같은 정치개혁 범주나 의제들은 상호 독립된 채 아무런 연관을 갖지 않는 별개의 문제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즉 ‘구 정치’ ‘낡은 정치’ 등의 정치행태가 가능했던 것은 지역주의정치 때문이며, 지체되고 있는 개혁입법과 관련된 정치의제들은 바로 이러한 지역주의정치 및 이에 근거한 정치행태를 근절하고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문제가 주로 김대중정부하에서 야기되었고 따라서 김대중정부에만 해결의 책임이 귀착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문제들은 기본적으로 1987년 민주주의 이행과정에서 정치지형, 즉 지역주의정치 속에서 과거의 독재세력이 청산되지 않은 채 살아남음으로써 야기될 수밖에 없었던 것들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로의 이행 이후에도 지금껏 이상과 같은 정치적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원인은 무엇인가? 특히 이들 정치개혁 의제의 미해결과 밀접히 관련된 수구 정치세력의 생존과 영향력 유지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권위주의체제로부터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위로부터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다음으로는 민주주의로의 이행 이후 시도된 일련의 정치개혁이 제한적인 것에 그치거나 중도에서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6

우선 1987년 6월 민주화대항쟁은 군부권위주의체제의 퇴진을 강요한 것이었고 그 성공을 통해 얻어진 6·29선언은 그것을 가능케 해줄 실제적 여건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해 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화운동진영은 양 김씨의 분열 속에서 패배했고, 대신 군부독재의 잔존세력이 집권에 성공했다. 물론 그것은 이제 불법적인 쿠데타가 아니라 선거라는 합법적 절차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이 과정이 단순히 선거의 승패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이 과정을 통해 민주화운동진영은 분열된7 반면, 과거의 독재세력은 그 기득권과 영향력을 별반 훼손당하지 않은 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민주주의 이행 직전 민주화운동진영의 힘이 독재세력의 힘을 능가하기 시작함으로써 역전된 관계는 또다시 역전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전면적으로 등장한 지역주의는 1987년 대통령선거와 1988년 총선거 등의 정초선거(founding election)8를 거치면서 지역주의 정치지형을 형성했다. 따라서 ‘위로부터의’ 민주주의 이행과정을 통해 살아남은 과거의 독재세력, 즉 수구 정치세력은 이같은 지역주의 정치지형 위에서 그들의 생존을 지속할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한편, 민주주의로의 이행 이후의 정치개혁과 관련하여 각 정권은 개혁추진과 반개혁추진의 모순적인 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위로부터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아래로부터의 개혁요구가 여전히 남아 있고, 수구 정치세력은 이에 대응해 자신들의 기득권과 영향력을 지키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잔존 독재세력으로서 수구세력을 대표하지 않을 수 없었던 노태우정부는 민주개혁 추진의 적극적·자발적인 주체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노태우정부는 6월항쟁을 통해 분출된 아래로부터의 민주개혁 요구와 1988년 총선을 통해 형성된 여소야대 국회의 압박 속에서 불가피하게 제한적인 민주개혁 조치, 이른바 ‘의사(擬似)민주화’ 개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90년 1월 3당합당으로 여소야대의 압박이 해소되자 노태우정부의 이같은 개혁은 별다른 성과 없이 이내 종료되고, 곧 반개혁정책으로 전환되었다.9

노태우정부 시기의 민주개혁 요구가 외부로부터, 아래로부터 강요된 것이었다면, 김영삼정부 시기의 개혁은 3당합당을 통해 민자당에 참여한 김영삼 중심의 세력, 즉 민주계에 의해 권력 내부로부터, 위로부터 추진된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김영삼정부가 기반을 두고 있던 집권여당 및 지지세력의 반개혁적 성격으로 인해 김영삼정부의 개혁은 집권여당 내부 또한 기득권층 중심의 수구세력이 벌인 강력한 저항과 싸보따주에 직면했다. 이를 반영하듯, 김영삼정부하의 국정운영은 개혁국면과 반개혁국면이 번갈아 전개되는 양상을 띠었다. 즉 초기의 개혁국면, 이후의 안보 및 세계화를 내세운 반개혁국면, 그리고 역사바로세우기 개혁국면, 마지막으로 레임덕(lame duck) 방지를 위한 반개혁국면 등이 번갈아 전개됨으로써 김영삼정부하에서는 초기개혁의 일부 성과를 제외하면 정치개혁의 실질적인 성과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10

마지막으로 민주적 야당으로서 정권교체에 성공한 김대중정부의 등장은 적어도 민주적 야당이 국가권력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서 상당한 정치개혁적 의미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정부가 민주개혁 추진과 이에 대한 반개혁의 딜레머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수정권으로서의 김대중정부가 구 독재세력의 일부인 김종필의 자민련(자유민주연합)을 공동정부에 끌어들여야 했고, 그런만큼 그들의 수구적 요구를 일정부분 수용해야 하는 현실 때문이다. 또한 김대중정부는 과거에는 집권여당이었지만 이제는 국가권력의 핵심으로부터 배제된, 그러나 여전히 의회 다수당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한나라당의 강력한 도전과 저항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같은 야당의 도전과 저항은 ‘분할정부’(divided government)적인 정치적 교착상태, 즉 대통령 소속의 집권당과 의회 다수당이 서로 다름으로써 행정부와 의회의 정면 대치상태가 야기되고 이로 인해 국정운영이 자주 마비되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11 아무튼, 김대중정부가 처한 이같은 이중적이고 교착적인 상황은 민주개혁 추진을 심각하게 제약하고 있으며 국가보안법·부정부패방지법·국가인권위원회법 등 3대 개혁입법 채택의 지연은 바로 이러한 제약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탈독재의 민주주의 이행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서 유지된 수구 정치세력의 영향력과 지역주의 정치지형에 기인한 이러한 개혁과 반개혁의 항상적인 교착상태가 민주개혁·정치개혁의 과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나아가, 개혁과 반개혁의 이같은 교착상태 속에서 수구 정치세력은 탈냉전 상황에 대해서도 줄곧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4. 민주적 개방 이후의 보수언론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민주주의로의 이행에도 불구하고 민주개혁·정치개혁이 지지부진했던 것은 과거의 독재세력이 수구 정치세력으로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독재세력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민주주의 진전 과정에서 그들이 마땅히 약화 또는 축소되거나 청산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계속 살아남은 수구 정치세력에 대한 청산 요구에 비해, 민주주의로의 이행 당시 언론에 대한 개혁 요구는 거의 제기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개혁되지 않아도 될 만큼 깨끗했던가? 그렇지가 않다. 실상은 오히려 그 반대다. 즉, 기자 등을 중심으로 그 일부가 민주화운동에 동참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의 언론은 하위파트너와 나팔수로서 독재권력에 동참하고 봉사했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더 거슬러올라가면 일제 말기의 전시체제하에서 이른바 ‘민족지’들은 친일에 앞장서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불명예스러운 경력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민주주의 이행 당시 언론개혁에 대한 요구가 그다지 제기되지 않은 것은 권언유착(權言癒着)이 독재권력의 강압에 따른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되었거나 언론개혁이 민주주의의 기본전제인 언론의 자유를 해칠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민주적 개방 이후 언론개혁에 대한 요구는 점차 높아져왔고 최근 그 압력은 급속히 증대했다. 또한 일부 시민단체들에 의해 추진되어온 언론개혁운동이 최근 수많은 단체들의 참여 속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12 그렇다면 언론개혁이 더이상 뒤로 미룰 수 없는 최대 현안으로 부상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와 관련하여 『한겨레』는 최근 일련의 기획연재를 통해 언론권력의 ‘추악한 과거’와 그들이 휘둘러온 ‘무한권력 횡포’에 대해 고발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제목들만으로도 그동안 성역 속에 감추어져 있던 언론권력의 일그러진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13

 

제1부 무한권력 횡포 ① 동아마라톤재단 의혹 ② 언론사옥은 성역 ③ 편법으로 얼룩진 상속 ④ 동아마라톤재단 의혹(2) ⑤ 자성과 울분 ⑥ 파행적 보도 태도 ⑦ 세금 탈루 ⑧ 특혜, 특권 ⑨ 안티조선운동

제2부 추악한 과거 ① 조선일보의 친일 곡필 ② 동아일보의 친일 곡필 ③ 조선·동아 사주 친일행적 ④ 재벌신문의 태생적 한계 ⑤ 박정희정권과 밀월 ⑥ 5공정권 미화·찬양 ⑦ 5·6공 왜곡보도 ⑧ 권언유착 ⑨ 반공 ‘마녀사냥’

 

즉, 그동안 은폐된 채 누적되어온 거대언론의 무소불위의 행태가 이제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거대언론의 이같은 행태와 관련하여, 우리는 그에 대한 비판을 다음의 세 가지 정도로 구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언론재벌’ ‘재벌언론’ 등의 용어가 시사하듯이 언론이 거대기업화되었거나 재벌소유가 되어 자본논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비판이다. 더구나 이같은 언론재벌·재벌언론은 대부분 족벌체제하에서 운영되기 때문에 시장합리성의 측면에서도 전근대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과거에 그 하위파트너로서 독재권력과 유착했던 언론이 이제는 정치권력으로부터도 독립하여 거꾸로 정치권력을 통제하는 막강한 ‘언론권력’이 되었다는 비판이다. 이를테면,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던 『조선일보』나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던 『조선일보』 『중앙일보』가 바로 그 적절한 사례라는 것이다.14 셋째, 한국의 언론은 예전부터 반민주적·냉전적 태도를 보여왔으며, 거대자본 또는 거대권력이 된 지금도 그 성격은 변함이 없다는 전통적 비판이다.

언론매체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몇몇 보수적 중앙일간지를 비롯한 거대언론에 대해서는 이상의 비판 모두가 해당할 것이다. 즉 전통적으로 냉전적·반민주적 태도를 견지해온 이들은 민주주의로의 이행 이후 정치권력과의 관계 면에서는 과거의 하위파트너의 지위에서 벗어났고, 경제적 측면에서는 더욱더 거대자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신자유주의적 시장화의 조류 속에서 더욱더 거대자본으로 되어가는 언론이 국가권력마저 통제하고자 했을 때, 또한 국가와 사회의 그 어떤 힘에 의해서도 통제되지 않는 이러한 거대권력이 국민 전체의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한편 기득권층의 목소리만을 대변하게 되었을 때, 그 부정적 효과는 대단히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수언론으로서 이같이 거대권력·거대자본이 된 오늘날의 언론에 대한 대책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언론 본연의 기능을 되찾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언론의 기능은 공적 결정을 위한 토론의 장으로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정당과 같이 중심적 기제라 할 수 있다. 언론은 집단적 언술이 전달되며 반영되고 응축, 재생산되는 공적인 의사소통의 매개체이다. 따라서 이러한 공적 소통과정의 민주화는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중요하다. 그것은 곧 이데올로기적 지형을 형성하고 방향을 잡으며, 공적 이슈의 내용과 성격을 결정하고 이를 제기하거나 폐기, 왜곡시키는 핵심적인 기제이다.15

 

즉, 언론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상층에 올라앉아 공적인 의사소통을 통제하고 왜곡시켜서는 안되며, 오히려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의 그 어떤 지점에 위치하여 공적 결정을 위한 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근에 이르러서야 그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한국언론에 대한 개혁은 기본적으로 언론 본연의 기능을 회복시키고 이를 조성해나간다는 그 공공성과 민주성을 강화시키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5. 정치사회·공공영역의 개혁

 

탈독재·탈냉전시대에 부합하는 정치개혁과 언론개혁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그 개혁의 촛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 그것은 국가와 시민사회를 연결하고 매개하는 정치사회 또는 시민사회의 ‘공공영역’의 개혁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 정치사회가 주로 국가와 연결된 의회·정당 등 정치적 대표체계의 제도적 장치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시민사회의 공공영역은 시민사회의 이해와 요구들이 표출되고 토론되어 여론이라 불리는 공론이 형성되는 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이어지고 중첩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16 국가와 시민사회를 연결하는 이 영역이 지닌 본연의 기능이 회복될 때 정치개혁과 언론개혁은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1987년 이후 한국의 국가와 시민사회에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서 정치사회 또는 공공영역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지,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어떠한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1987년 이후 가장 커다란 변화를 보인 것은 한국의 국가, 특히 그 지배방식이다. 그 이후 한국 국가의 억압성은 과거에 비해 상당정도 약화되었다. 대신 한국 국가는 헤게모니적 지배를 어느정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민주화의 진전으로 인해 적어도 국가가 사회 각계각층의 요구와 이해를 일부 수용, 그들의 동의를 확보하는 모습을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정책결정에 있어 좀더 민주적인 절차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물론 국가의 지배방식의 이같은 변화가 1987년 이후 곧바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전면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각 정권의 독재적 성격의 잔존 정도와 그리고 민주적 성격의 강화 정도에 좌우되면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민주적 개방 이후 한국 국가의 역할, 특히 그 억압적 성격은 과거 독재시대에 비해 상당정도 약화되고 축소되었다는 점이다.

한편 국가 억압성의 약화와 축소는 과거에는 국가의 통제하에 있던 시민사회를 국가로부터 분리시키고 해방시켜주었다. 그 결과 민주적 개방 이후 한국의 시민사회는 과거보다 확대되고 그 자율성이 커졌다. 그렇다면 국가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시민사회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을까? 우선 과거에 국가의 억압적 통치에 저항했던 재야 민주화운동은 한편으로는 국가에 대한 저항 자체보다는 국가와 사회 내의 다양한 문제를 공론화하고 그 해결을 도모하고자 하는 시민운동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적 요구와 이해를 제기하고 그 관철을 도모하고자 하는 민중운동으로 분화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다음으로 국가 억압성의 약화와 축소는 과거 국가의 지원과 유착을 통해 성장한 재벌과 언론 등 사회 내 기득권세력으로 하여금 좀더 독자적인 위치에서 자신들의 사적 이익과 영향력의 증대를 추구하게 했다. 더구나 그것은 경제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추세 속에서 더욱 강화되고 있다.

그러나 국가와 시민사회의 이같은 변화 이외에 또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국가와 시민사회를 매개하고 연결해주는 정치사회 또는 공공영역의 중요성이 급속히 증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은 국가 억압성의 약화와 축소로 인한 이 영역의 팽창과 자율성 증대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정치사회 또는 공공영역의 의미가 좀더 중요하게 된 것은, 우선 이 영역이 공적인 토론과 의사소통을 통해 시민사회의 요구나 이해가 조직되고 이슈화되며 정치의제화되며, 다른 한편으로 국가의 정책이 환류되어 점검되는 영역으로서 여론 또는 공론이 만들어지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영역은 이제 국가의 지배가 억압이 아니라 좀더 헤게모니적인 것이 되어야 하는 변화된 상황에서, 시민사회 내의 각종 요구와 이해를 국가정책으로 연결해주고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가능하게 해주는 정치적 대표체계가 제도적으로 구축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전자가 주로 언론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는 기능이라면 후자는 주로 정당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는 기능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는 자율적인 정치사회 또는 공공영역의 등장을 감안할 때, 정치적 민주주의의 발전은 어떤 점에서는 언론과 정당이 시민사회의 각종 요구와 이해를 얼마만큼 잘 여론화하고 대변하며 이를 국가의 정책결정으로 연결시키느냐에 달려있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1987년 이후 한국의 정치사회 또는 공공영역에서 기존의 언론과 정당이 수행한 현실적 역할은 이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기존 정치엘리뜨 및 정당들은 민주적 개방 이후 지역주의정치를 통해 시민사회의 요구와 이해를 차단함으로써 독재시대부터 누려온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또한 거대언론들은 진정한 의미의 ‘공론’을 만들어내기보다는 특정 기득권세력의 이해만을 대변하거나 그 스스로가 언론재벌 또는 언론권력이 되어 자신의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며 특정 형태의 왜곡된 여론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따라서 민주적 개방 이후 개혁대상은 국가의 차원을 넘어 정치사회 또는 공공영역에까지 확대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우리가 정치개혁과 언론개혁의 거점으로서 정치사회 또는 공공영역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현실에 있다.

 

 

6. 정치개혁·언론개혁의 방향

 

한국의 정치사회 또는 시민사회의 공공영역은 1987년 이후 시민사회의 요구와 이해를 제대로 반영하는 통로가 되기는커녕 이를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정치계급’이 된 정치인들의 생존과 특권의 보장 및 사적 이익 추구의 장으로, 또는 시민사회의 특정 계층 또는 집단의 이해만이 일방적으로 반영되는 장으로 변질되었다. 결국 이같은 현실은 시민사회의 다양한 요구와 이해가 국가의 정책결정에 반영되지 못하고, 정치적 수준에서 정치인과 특권적 집단의 사적 이해만이 일방적으로 관철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치사회 또는 공공영역의 개혁, 특히 정치개혁과 언론개혁을 어떻게 추진해야 할 것인가?

우선 정치개혁의 핵심은 민주주의 이행과정에서 정초선거를 통하여 굳어진 지역주의정치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를 통해 시민사회의 요구와 이해가 제대로 반영될 수 있는 정치적 대표체계를 어떻게 새로이 구축할 것인가에 있다. 물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가 시급히 해결해야 될 정치개혁 의제들은 많다. 거기에는 국가보안법 개폐, 국가인권위원회법·부패방지법 등 개혁입법의 문제, 정치인들의 정치행태 및 정당운영과 관련된 ‘구정치’ ‘낡은 정치’를 극복하는 문제 등 많은 과제들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들 중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은 지역주의정치를 타파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여타의 정치개혁 과제들이 지역주의정치로 특징지어진 정치지형의 기반 위에서 존재하므로, 이같은 정치지형의 변화 없이 그 근원적인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역주의정치는 기존 정치인들이 신진 정치인 또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진입을 차단하는 가운데 자신들만의 참여를 가능케 하는 일종의 독과점적 정치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선거 때마다 상호 경쟁적인 지역감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지역적 기준이 아닌 다른 기준에 의한 정치참여를 봉쇄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사실상 유권자들의 판단과 선택을 제한하고 왜곡함으로써 진정한 경쟁의 정치를 가로막는다. 그 결과는 보스 중심의 전근대적 정당운영으로 나타난다.

이같은 지역주의정치를 변화시킬 방법은 두 방향에서 모색할 필요가 있다. 우선 아래로부터의 압력을 통한 방법이다. 이를테면, 민주노동당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노동자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을 대변하는 민중운동의 정치세력화와 이를 통한 정치참여가 그 한 방법이다. 그리고 지난해 4·13총선 때의 낙천·낙선운동과 같이 시민운동을 통해 정치권의 변화를 요구하고 압박하는 것이 또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지역주의가 뿌리깊은 현실에서, 더구나 과거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같이 광범위한 연합전선이 형성되기 어려운 조건에서 이같은 아래로부터의 압력은 여전히 미약하며 따라서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스스로 지역주의정치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정치권 내의 민주적이고 개혁적인 정치세력의 선택과 결단을 촉구할 필요가 있다. 물론 지역주의정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치생명을 내걸어야 하는 현재의 정치현실에서 볼 때 이러한 선택이 쉬운 것은 아니다. 또한 기존의 대부분의 개혁적 정치인들 역시 지역주의정치에 안주해온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지역주의정치에 기반을 두고 있는 정치권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국민의 실망이 급속히 증대하고 정치권에 대한 세대교체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현재의 상황에서 그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민교협 선언에서도 얘기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채택하는 것도 현재의 지역주의 정치지형을 타파하는 데 일조할 것이거니와,  이같은 위로부터의 시도가 아래로부터의 압력과 결합하게 될 때, 그 영향력과 파괴력은 대단히 클 가능성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지역주의정치 타파를 위한 정치개혁은 위로부터의 시도와 아래로부터의 계기가 결합되면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언론개혁의 방향은 민주적 개방 이후 수구적 태도로 시종하고 있는 언론을 시민사회 각계각층의 요구와 이해가 제대로 반영된 여론 또는 공론을 만들어내고 이를 대변하는 언론으로 변화시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언론개혁은 다음과 같은 과제들의 해결에 그 촛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우선 언론개혁은 언론으로 하여금 자본논리에서 벗어나 그 본래의 공공성을 회복하도록 하는 데 촛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언론이 사적 영역에서 사익을 추구하는 기업조직이 아니라 시민사회 공공영역에서 공론을 만들어내는 공익적 기구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의 공공성 회복은, 특히 한국의 언론이 권언유착의 댓가로 획득한 각종의 특혜와 특권 속에서 현재와 같은 거대자본으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를 위해 언론시장의 정상화를 이룸은 물론, 소유지분 제한을 통해 그 자본지배적 성격을 약화시키는 한편 그 공공적 성격을 강화시켜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언론으로 하여금 정치권력논리에서도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사실 과거의 독재권력은 언론을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홍보기구로서 활용해왔다. 이같은 ‘권력우위적 권언유착’ 속에서 언론의 자유는 제대로 지켜질 수 없었다. 그러나 민주적 개방 이후 정치권력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거대권력으로 등장한 언론은 이제는 거꾸로 정치권력을 통제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언론우위적 권언유착’이라 할 이같은 행태는 무소불위의 언론 횡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권력우위적 권언유착뿐만 아니라 언론우위적 권언유착 또한 엄격히 근절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자본논리와 정치권력논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중요한 제도로서 우리는 언론의 편집권 독립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편집권 독립이라는 제도적 장치가 없는 한, 언론이 자본논리와 권력논리 그리고 매체 소유주의 이해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더불어 시민 일반의 알 권리, 의사표현의 자유, 언론에 관한 주요 정책결정 참여 등 수용자 주권17 또한 강화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공론이 언론 일방에 의해 이루어질 수는 없으며 일반 수용자들과 더불어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언론이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편집권 독립이 보장되고 그 수용자들과 더불어 합리적 토론을 거쳐 공적인 여론을 만들어나갈 때, 언론개혁의 목표는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할 때, 언론은 수구세력의 일방적 요구와 이해만을 대변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시민사회 각계각층의 요구와 이해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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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89년 공안정국에 대해서는 한국사회연구소 『1989 한국사회연감』, 백산서당 1990, 434〜42면 참조.
  2. 당시의 공안정국은 안기부·경찰·검찰·보안사 등 관계기관으로 구성된 공안합동수사본부가 주도했다.
  3. 박정희씬드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정치연구회 편 『박정희를 넘어서』, 푸른숲 1998, 제1부 ‘박정희, 그 신화의 진실은 무엇인가’ 참조.
  4. 이에 대해서는 고려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편집 『최장집교수에 대한 조선일보사의 왜곡-음해 보도 관련 자료집』(1998.11.11) 참조.
  5.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김대중정부 3년을 평가한다」(2001.2.20).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다른 성명 「개혁쟁취를 위한 사회 각계인사 10,000인 시국선언」(2001.2.21) 역시 김대중정부가 해결해야 할 정치개혁의 과제로서 낡은 정치의 악순환과 개혁리더십의 부재, 국가보안법 개폐 등 3대 개혁입법의 지체와 허구화, 정치적 기득권과 관료적 무사안일주의 및 국민참여의 문제 등을 지적하고 있다.
  6. 1987년 ‘위로부터의’ 민주주의 이행과정과 이후 노태우정부 및 김영삼정부 시기의 개혁정책의 전개와 실패에 대해서는 졸고 「한국정치의 민주화와 개혁의 실패」, 학술단체협의회 편 『6월항쟁과 한국사회 10년』 2, 당대 1997 참조.
  7. 당시 민주화운동진영의 분열은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에 따른 지역분열 및 야당의 분열, 제도권에 진입한 야당과 진입하지 못한 재야의 분열, 재야 민주화운동권 자체의 분열, 중산층과 민중진영의 분열 등 다(多)분열적인 형태를 띠었다. 이후 시민사회 차원에서 재야 민주화운동은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으로 점차 분화되었다.
  8. 민주주의 이행과정에서 치러지는 선거로서 이후 전개될 정치적 경쟁의 틀을 결정한다. 정초(定礎) 선거에 대해서는 G. O’Donnell & P.C. Schmitter, Transition from Authoritarian Rul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6, 57〜64면 참조.
  9. 앞에서 살펴본 1989년의 공안정국 사태는 ‘의사민주화’ 개혁이 3당합당 이후의 반개혁정책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10. 앞에서 살펴본 1994년의 신공안정국은 초기 개혁국면이 이후 안보 및 세계화를 내세운 반개혁국면으로 넘어가면서 초기 개혁국면을 최종적으로 종결시켰다.
  11. 민주적 개방 이후 한국정부의 ‘분할정부’적 교착상태에 대해서는 최장집 「한국 민주주의의 반성과 과제」, 성공회대 두오 사회과학콜로키움(2000.11.29) 발표문, 2면 참조.
  12. 대표적인 단체로서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언론개혁시민연대, 조선일보반대시민연대 등을 들 수 있다.
  13. http://www.hani.co.kr/section-special/2001103press.html, ‘심층해부 언론권력’ 참조.
  14. 강준만 『권력변환』, 인물과사상사 2000, 564, 594〜96, 630〜31면. 이 책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강준만은 한국에서 이제 가장 강한 권력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언론권력으로 이동했다고 파악한다.
  15. 최장집 『한국민주주의이론』, 한길사 1993, 382면.
  16. 최장집은 그람시, 또끄빌, 그리고 하버마스 등의 이론을 빌려 정치사회를 시민사회의 ‘공공영역’까지 포괄하는, 국가와 시민사회를 매개하는 수준으로 정의하고 있다. 같은 책 381〜82면 참조.
  17. 수용자 주권에 대해서는 강명구 「언론 자유와 언론 권력을 위한 쟁투의 역사」, 『한국언론 바로보기』, 다섯수레 2000, 595〜9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