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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동순 李東洵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개밥풀』 『봄의 설법』 등이 있음.
눈물에게 자유를 주다
스프링필드의 봄 1
대지의 풀들은 내 가슴 높이에 있다
나는 반지하의 춥고 눅눅한 방에서 이른봄을 내다본다
봄은 자신의 푸른 가슴을 드러내고 싶어 땅속에서 안달이 나 있다
바람이 가랑잎을 마치 강아지 굴리듯 휩쓸며 불어갈 때
다람쥐란 놈은 도토리를 먹다 말고 그 광경을 멀뚱히 보고 있다
아, 낯선 일리노이 땅 스프링필드 언덕에서 고향의 봄을 생각하며
젖은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던 사람은 모두 어딜 갔는가
방안의 습기는 필시 그들이 남긴 눈물의 흔적이리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방안에 수년째 갇혀 있던 눈물의 습기를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 하늘로 새처럼 날려보낸다
날아가라 눈물이여 더이상 춥고 어두운 곳에 갇혀 있지 말고
푸른 숲에서 맑은 소리를 내는 어여쁜 노래가 되라
미야모또
스프링필드의 봄 2
쓰던 물건을 싸게 판다는 빨래방의 광고를 보고 찾아갔더니 젊은 일본인 부부 미야모또가 사는 집이다 머리가 텁수룩하고 까무잡잡한 미야모또는 아내가 임신을 해서 예정보다 일찍 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미야모또는 아내가 고독병을 심하게 앓아서 정신병원까지 다녀왔다고 심각한 얼굴로 말한다 이 말을 들으며 미야모또의 아내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채 핼쑥한 얼굴로 허공을 보며 앉아 있다 그뒤의 바람벽으로는 미야모또가 붙여놓은 아메리카 지도가 펼쳐져 있다 미야모또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한국인이었다고 머뭇거리며 말한다 나는 그의 집에서 스프링필드 언덕의 가난한 유학생 거주지역을 물끄러미 내다본다 일몰이 온다 이윽고 해가 지고 나는 그들 부부가 쓰던 선풍기를 어깨에 메고 계단을 내려온다 바람에 선풍기 날개가 저절로 돌아간다 나는 집에 돌아와 캄캄한 방안에 전깃불을 켜고 한쪽 구석에다 미야모또를 내려놓는다 머리가 텁수룩하고 까무잡잡한 미야모또가 방구석에 혼자 쓸쓸히 서 있다
비오는 날의 鄕愁
스프링필드의 봄 3
하루 종일 비가 온다
비는 스프링필드의 모든 나무들의 뿌리 끝까지 타고 내려가
봄소식을 전하려 한다 다람쥐란 놈들은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온몸에 맞으며
도토리 까먹는 일에 열심이다, 저 무서운 생존!
방안에서는 곰팡이 핀 오징어를 잘게 찢어 간장에 절이는 작업이 한창!
해는 저물어 캄캄한데 어느 나라의 민속음악인가
필시 고향이 그리워진 유학생이 틀어놓았을
흐느낌 같은 야릇한 선율이 오징어 냄새처럼 빗속에 번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