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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삶의 진실을 보는 몇가지 이견

김영하 『아랑은 왜』, 문학과지성사 2001

김연수 『꾿빠이, 이상』, 문학동네 2001

김인숙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 문학동네 2001

이호철 『이산타령 친족타령』, 창작과비평사 2001

 

 

서영인­ 徐榮姻

문학평론가. 경북대 강사. 제7회 창비신인평론상 수상. sinpodo12@hanmail.net

 

 

1.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거기에서 어떤 삶의 진실을 발견해내기를 기대한다. 무의미하게 반복되기 마련인 일상의 지루한 사건들이 소설적 맥락에서 재구성되고 그리하여 어느 순간 반짝 빛나는 삶의 의미가 그 소설 어디인가에 맺혀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소설읽기의 오랜 관습이고, 실제로 소설읽기의 재미와 감동은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만만찮은 작업인데, 삶이란 언제나 소설보다 더 풍부하고 느닷없기 때문이고 그래서 소설이 축조하는 진실은 때로 삶과 무관한 단지 ‘허구’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과 삶은 이 막막한 거리 때문에 서로를 회의하면서 또한 서로를 비추고 통찰하는 거울이 되는 것이 아닌가. 소설과 삶의 이 거리가 긴장감을 유지하지 못하고 각자의 영역으로 고립될 때 소설과 삶은 함께 엄청난 속도로 파편화된다. 진실은 그 이면에 또다른 진실을 품고 있으며, 그래서 어떤 것도 진실이 아니기도 하다. 삶은 누구에게나 저마다 절박하여 아무에게도 더이상 절박한 삶은 없고 그래서 모두 무료한데도 서로 무관하다. 산다는 것은 이 무료함 속에서 느닷없이 비죽이 고개를 내미는 진실들 때문에 공포이며 엽기가 된다.

캄캄한 어둠속에서 정체 모를 진실의 출몰에 식은땀을 흘려야 하는 것이 이즈음의 소설읽기라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어두운 극장에서 공포에 질려 악악 소리를 지르다 우르르 몰려나와 마주친 극장 앞의 환한 햇살 앞에서처럼 우리는 오히려 삶이 낯설다. 소설은 점점 삶과 떨어져 고립되고, 소설은 소설 내적인 두려움과 무료함 때문이 아니라 삶과의 고립과 거리 때문에 더 큰 공포가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청년 실업자 130만의 시대, 내일을 모르는 하릴없는, 피끓는 청춘들의 무료함과 불안함은 그것 자체가 섬뜩한 엽기가 아닌가.

그러니 어떻게 할 것인가. 삶과 고립된 소설 속에서 고립 그 자체를 즐길 것인가. 그리고 더 용감하게, 진실은 없다고 선언하며 진실에 애면글면하는 조바심을 한바탕 비웃어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여전히 소설 속에서 삶의 진실을 찾는 작업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 그래야 한다면 이 갈래갈래 가닥지고 또 저마다 고립된 삶들 속에서 진실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찾아야 하는 걸까. 또는 고립된 삶속으로 파고들기보다 훌쩍 뛰어넘어 더 큰 틀을 찾아본다면 저마다의 진실이 맺고 있는 연관관계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최근 젊은 작가 김영하와 김연수가 ‘아랑전설’과 ‘이상(李箱)’이라는 다른 텍스트를 기반으로 『아랑은 왜』와 『꾿빠이, 이상』이라는 소설을 각각 내놓았다. 두 작가가 공히 진실찾기라는 추리소설적 틀을 활용하여 ‘진실은 없음’을 표방한 것은 우연의 일치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젊은 작가들에게 이제 ‘없는 진실’은 새로운 사실도 아니며 그다지 안타까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 다른 편에 김인숙의 근작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가 있고, 또 이호철의 『이산타령 친족타령』이 있다. 김인숙의 주인공들은 여전히 삶의 진실을 찾아 헤매고 있고 잘 보이지 않는 진실 때문에 삶을 고통스럽고 힘겹게 유지한다. 그런데 이호철에 오면 삶의 진실이란 그렇게 애타게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들 삶 속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대를 망라한 ‘진실 없음’과 ‘당연히 있음’ 사이의 진폭은 크다. 이 진폭은 다양함을 의미할 수도 있고 단절과 거리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 다양함과 거리를 확인하고 검토하는 작업을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 소설의 내적 소통과 외적 현실성을 확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 대신 ‘삶’을, ‘진리’ 대신 ‘진실’을 짐짓 내세우며 몸을 낮추고 보폭을 줄이는 이 모호하고 갑갑한 작업은 소설과 삶의 간극을 절감하며 더 촘촘하고 겸손하게 삶을 읽으려는 데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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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영하(金英夏)의 『아랑은 왜』는 익히 알려진 아랑전설을 재구성하는 과정 자체를 소설적 틀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 재구성은 이미 종결된 사건에 개입하여 흩어져 존재하는 단서들을 통해 진상을 규명하는 추리소설의 틀을 빌려 유지된다. 작가는 아랑전설의 진상에 의문을 품은 의금부 낭관 김억균이라는 인물을 투입하여 억울하게 겁간당한 처녀의 원혼 달래기라는 원래의 아랑전설을 재구성한다. “증거를 수집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허위를 밝혀나가”는 “근대적 의미의 탐정”(130면)이라 할 만한 김억균은 추리와 조사를 통해 아랑의 전설이 처녀 원혼 달래기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치적 추궁을 피하기 위한 아전들의 조작극임을 밝혀낸다. 그러나 김억균이 규명하는 진상은 명백한 진실로 인정받지 못하는데, 여기에서 숱한 장애물을 극복하고 드디어 진상을 찾아 완결된다는 추리소설의 플롯은 배반당한다. 저마다의 명분 때문에 저마다의 비밀을 감추고 있는 인물들이 각각의 진실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설은 ‘아랑전설’을 토대로 추리소설을 한편 구성해보겠다고 표방하면서 곳곳에 단서를 미리 배치해놓고 갖가지 가능성들을 타진하며 다시 소설로 되돌아오는 서술자에 의해 통제되고 차단된다. 서술자는 “우리는 이 책의 끝까지 여러 자료들을 검토하고 그것을 통해 이야기를 구성하는, 일종의 퍼즐게임을 계속할” 뿐이며, “적어도 우리의 책 안에서 이야기의 종결은 없”(203면)음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그래서 아랑전설이든 김억균의 추리든 단지 하나의 소설적 가능성에 불과한 것이 된다.

『아랑은 왜』는 가능성들을 앞에 놓고 찰나의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따라 펼쳐지는 다른 운명을 훔쳐보는, 소설로 쓴 「슬라이딩 도어즈」나 「롤라 런」이다. 또는 여러 스테이지 중 하나를 선택하여 그 속에서 죽기살기로 이야기를 만들고 적을 물리치며 점수를 축적하다 게임오버를 알리는 명멸하는 불빛 앞에서 그것이 허구임을 뒤늦게 깨닫는, 아랑전설을 기본대본으로 하는 컴퓨터 가상게임이다. 기존 장르의 상상력들을 천연덕스럽게 활용하면서 또 은근히 해피엔딩과 권선징악의 문법을 해체하는 김영하는 현대사회의 다양한 문화들을 섭렵하고 그것을 다시 소설 속에 투입하는 능란한 이야기꾼이다. 그가 비판하는 할리우드의 에로물이나 법정드라마의 허구성이 이미 재기발랄한 새로운 실험영화들에 의해 깨어졌으며 그래서 별로 새롭지 않다고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김영하에게 본디 소설은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의 무한복제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이야기꾼이라는 작자들이 과거나 지금이나 밥 먹고 하는 일이” “다 아는 이야기를 다르게 말하기”(23면)이므로.

김연수(金衍洙)의 『꾿빠이, 이상』은 기존텍스트 다시쓰기, 추리소설 문법 빌려오기, 그리고 진실이란 알 수 없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 등에서 『아랑은 왜』와 유사한 외관을 갖고 있다. 그러나 김영하의 ‘아랑’이 숱한 전설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그래서 다른 것으로 바뀌어도 별 관계없는 소설의 유용한 소재에 불과한 반면에, 김연수의 ‘이상’은 그 자체가 특이한 삶을 살다 갔고 또 이후 많은 의혹과 신비를 불러일으킨 인물이다. 따라서 『꾿빠이, 이상』은 소설의 구성과 주제의식에서 『아랑은 왜』보다 훨씬 더 기본텍스트에 기대고 있다. 그래서 김연수의 이상 다시읽기, 혹은 다시쓰기는 김영하의 아랑전설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은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김영하가 왜 ‘아랑’인가를 규명할 필요가 없는 반면에 김연수는 왜 하필 ‘이상’인가를 규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꾿빠이, 이상』에 의하면 “이상은 소설을 창작한 게 아니라 앞으로 쓸 소설처럼 자신의 삶을 먼저 창작했”고, “아이 김해경이 쓴 소설이 위대한 작가 이상”이며 “위대한 작가 이상의 작품은 그 부산물에 불과하다”(78면). 그리고 소설의 주제라 할 만한 “진위와는 무관하게 모든 정황이 진짜라면 진짜인 것이고 모든 정황이 가짜라면 가짜라는 사실”(200면)의 발견은 이 이상의 삶을 건 도박에 기대고 있다. 진실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삶 자체가 창작된 허구일 때 그 허구를 태반으로 하는 작품의 열정과 광기는 과연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소설은 이상을 빌려 묻는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우리들 삶은 과연 허구인가 실제인가를 고민하며 소설쓰기와 삶의 진실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이상이 작품을 창작한 것이 아니라 삶을 창작한 이유, 그리고 그가 삶을 창작할 수밖에 없었던 생애적이거나 시대적인 진실이 더 밝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랬을 때에야 이상의 시집을 손에 들고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입양아 출신의 교포 2세 ‘피터 주’가 정체성을 상실한 현대인의 한 상징으로 선명하게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진지하고 난해한 질문은 ‘이상’이라는 선택이 세간의 소문과 경외에 기대고 있음으로 해서 다소 허약하게 소설 안으로 되돌아와 갇힌다. 삶의 진실이란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절실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의 절박함이 삶과 소설의 대조와 상호개입을 통해 더 첨예하게 탐구될 수 있는 가능성은 이상을 탈신비화시키지 못함으로 인해 차단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이 두 작가의 차이점이라기보다는 공통점이다. 우선 흥미로운 것은 두 작가 모두 이미 알려진 텍스트를 서사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경향성은 소설이 삶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들을 ‘다시 쓰는’ 과정에 불과함을 의미하며, 이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씨뮬레이션 세대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거기에다가 진상을 캐는 추리소설 문법의 활용과 배반이라는 공식은 어떤가. 추리소설이 근대의 인식적 주체, 즉 의혹을 발견하고 추리를 통해 결국은 진실을 해명하고 마는 근대적 자아의 발견에 의해 탄생된 양식이라면 추리소설의 활용과 해체는 이 근대적 자아에 대한 조롱이며, 근대적 자아가 확신하는 진실에 대한 의심이기도 하다. 이것은 한편에서는 진실탐구의 모든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허무주의를 유발하며, 또 한편에서는 더이상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와 대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변호사와 함께 대리석 계단을 내려오다 아내의 볼에 입맞추며 환하게 웃는 의로운 영웅”(『아랑은 왜』 219면)의 환상에 위안받을 수 없는 현대적 삶의 조건을 암시한다. 그런데 소설은 근대적 주체의 오만과 확신에 대한 경계, 그리고 더이상 질서정연하지 않은 삶의 난마를 지적하는 것을 훌쩍 뛰어넘어 자기증식한다. 소설은 결국 이야기이며 이야기란 허구일 뿐이라는 소설 내적 진실은 그러므로 삶도 곧 허구라는 결론으로 비약하는 것이다. 두 소설은 아랑과 이상의 원텍스트와 교차하는 현대의 인물들이 원텍스트와 허약한 연관성을 갖기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의 허구성을 현재의 삶에 무리하게 대입시키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허구일 따름이라고 재차 주장하는 이야기는 허구의 그늘에 머물지 않고 삶으로 육박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허구성이 그 이면에 허구가 아닌 삶이 엄연히 존재하며 그 삶은 이미 허구인 이야기 속으로 끊임없이 개입한다는 사실의 은폐로 연결되는 것은 좀 억울하다. 게다가 삶은 진위를 구분할 수 없으며 끊임없이 조작된다는 ‘음모론’이 고작 아랑과 이상의 ‘이야기’에 기대고 있다니. 우리의 삶이 개입되지 않은 인물들의 서사에 의해 우리의 삶은 쉽게 ‘허구’로 일반화된다. 그래서 삶과 분리된 이야기가 끊임없이 삶을 무력화하는 역설적 상황에 우리는 좀더 저항할 필요가 있다.

 

3. 김인숙(金仁淑)의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에서 삶은 항상 죽음과 함께 있다. 김인숙은 삶과 죽음을 맞닥뜨려놓는 극단적 방식에 의해 그래도 삶은 살아야 할 무엇임을 이야기하며 희미하게 인간관계의 끈을 찾아나가려 한다. 이 관계의 끈은 김인숙의 새로운 모색이라 할 만한데, 그러나 여전히 서사의 틀은 김인숙적이라고 할 만한 혼란스러움으로 채워져 있다. 혼란스럽고 복잡한 온갖 기억의 흔적들은 의미를 잃어버린 멍한 시선 아래에 섬세하게 거미줄 치고 있으며, 이러한 파헤쳐진 서사의 어지러움 속에 ‘단지 한 개인의 고통만이 아닌 삶’이 드러난다.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지금 자신의 존재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으며, 관계의 단절과 존재의 불확실성에 고통받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 ‘아무것도 아닌 삶’은 죽음이나 실직이나 살인미수 같은 느닷없이 닥친 사고에 의해 더욱 극명하게 서사의 표면으로 도드라지지만, 사실 이 깨달음이 느닷없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들의 ‘아무것도 아닌 삶’은 오랜 세월 조금씩 축적되어온 것이고, 그래서 이미 그들의 무의식 속에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존재의미를 확인할 수 없는 인물들의 무기력함과 허망함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내면을 가질 수밖에 없고, 또 그 내면은 지난 삶이 이미 준비한 것이기에 회한과 고통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 가족과 직장과 사회가 강요한 주어진 정체성이 아닌 다른 삶을 갈망하지만 그것을 이룰 수 없어서 고통스러운 이 무료한 삶들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거기에는 “아버지의 시선으로밖에는 보여지지가 않던 내 청춘, 그리고 남편과 주변의 시선으로밖에는 보여지지가 않는 내 결혼”말고는 다른 삶이 없는, 한번도 주체적일 수 없었고 그리하여 아버지와 남편의 금고 속에 갇혀버린 여성의 삶이 있다(「어느 해의 봄날」). 그리고 출발은 그게 아니었으나 지방의 시간강사로 떠돌면서 현직교수가 되는 것이 유일한 꿈이 되어버린, 그리하여 살인미수사건의 용의자로 신문받을 때 알리바이 대신 자기도 모르게 ‘국립대학의 현직교수’임을 내세우고 마는, “너무 오래 한가지 일에만 매달려 살아온” 삶 때문에 무너지는 중년이 있다(「칼에 찔린 자국」). 어느날 동시에 알게 된 아내의 외도와 시한부인생의 충격보다 그로 인해 깨닫게 된 “그 여자가 내 아내라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적이며 그것은 오랜 기간 단절된 그들 부부의 메마른 관계에서 비롯된다(「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 죽은 누이와 살았던 적이 있는 매형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되묻지만 대답을 찾지 못하는, 어느날 갑자기 당한 실직을 계기로 지나온 삶의 안전함이 사실은 함정이었음을 깨닫는 ‘나’는 어떤가. 배터리가 없는 휴대폰의 꿈, 관계 단절의 악몽에 시달리는 ‘나’의 기억 속에는 목숨 걸고 사랑하지도 않는 자신을 결혼상대로 선택할 때부터 불륜을 준비하고 있었던 아내가 있고, “난간을 붙들지 않고는 다시는 어떤 다리도 건너가려고 하지 않는”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생존하는 은행원으로서의 지난 삶이 있다(「길」). 그러니 산다는 것은 얼마나 섬뜩한 진실인가. 수십년 동안 전력을 다해 매달린 삶이 지금의 ‘아무것도 아닌 삶’의 존재기반이 되어버렸고, 그 기억들은 “내 삶의 깊숙한 곳에 촌충처럼 박힌 무료함의 발톱”(「술래에게」)으로 응축되어 있다.

그래서 김인숙이 발견한 ‘몸에의 갈망’은 그 의미가 새롭다. 이혼하려던 남편이 법원으로 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자 이혼녀 대신 갑자기 미망인이 되어 문방구집 친정으로 돌아온 ‘수’. 누군가의 삶을 함께 짐지는 일이 버거워 스스로를 격리시킨 채 ‘수’의 일기파일을 훔쳐보는 ‘컴퓨터 가게 오씨’. 그들의 시선이 맞닿은 곳에 개교기념일의 텅 빈 운동장을 힘차게 돌고 있는 남자의 몸이 있다(「개교기념일」). 컴퓨터를 매개로 오가면서도 한번도 구체적으로 만난 적이 없는, 단절된 존재들의 시선은 바로 이 ‘몸에의 갈망’에서 함께 얽힌다. 오랜 기간의 훈련과 질주로 단련된 운동선수의 근육처럼, 이들이 갈망하는 그 몸은 살아온 세월들이 피톨 하나하나에 맺혀 응축된 생생한 현존의 증거물이다. 이미 사라져버린 삶, ‘아무것도 아닌 삶’이 아무것에도 목숨 걸지 않는 오랜 세월이 침전된 결과물이라면, “살아 있음에 대한 저 강렬하고도 뻐근한 충동”(「술래에게」)은 그 충동으로 다시 피가 돌고 살이 돋는 새 ‘몸’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몸’을 얻는 과정이란 얼마나 지난한가. 무의식에까지 더께 앉아 악몽으로 출몰하는 지난날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새 피와 새 살을 얻는 그만큼의 세월과 고투가 필요할 것이다. 아마도 김인숙적인 서사, 두꺼운 기억의 지층을 헤집으며 어지러운 서사의 결을 따르는 지그재그의 여정은 이 지난함의 증거물인지도 모른다. 이 서사를 통해 우리는 삶과 분리된 무력하고 고독한 존재감이 결코 단순히 구성되지 않았음을 충분히 고통스럽게 실감한다. 그러나 김인숙의 주인공들은 아직 “꿈과 현실의 몽롱한 사이에 숨어”(「술래에게」) 있거나 정상이 한참 남은 언덕길의 바위 위에 잠시 누워 있다(「바위 위에 눕다」). 과거의 어지러운 기억들을 재구성하여 현재의 삶의 근원을 찾는 것만으로도 진력이 날 정도로 삶은 무거운 것이지만 어쩌겠는가. “고단하지만 지쳐버릴 수도 없는 몸…… 영혼이 완전히 떠나기 전에는 내다버릴 수도 없는 몸”(「길」)으로 아직 갈 길이 남아 있는 것을.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기억을 뚫고 새로운 몸을 얻는 지난한 길을 다시 가기 위해서 이제 김인숙은 ‘삶의 뻐근한 현존’의 실체를 구성하는 기억을 찾아내야 할 것처럼 보인다. “삶이 펄떡이는 생선 몸통의 은빛 비늘처럼 찬란하고 비리던 때”(「바위 위에 눕다」), 그리고 살아 있음의 환희로 번쩍이는 우리 삶의 ‘브라스밴드’(「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는 경구나 상징으로는 훌륭하지만, 그 찬란함을 채우는 구체적 삶의 기억이 없다면 꿈과 현실의 간극을 뚫는 힘이 되기에 아직 허약하다. 미약하지만 희망의 끈은 보인다. 그리고 그 희망의 끈은 당연하게도 죽음과 삶의 문턱을 스쳐 지나가는 찬란한 환영이 아니라 ‘고통으로 굳어진 몸’들에게서 온다. 예컨대 「개교기념일」에서, 다른 삶과 관계맺는 것이 무거워 스스로를 격리시켰던 ‘컴퓨터 가게 오씨’의  서걱서걱한 삶 속에 함께 자리잡은 기억들, 묶인 염소 한마리의 고통마저도 내 고통 같았던, 다른 존재에 대한 연민과 그 무거운 삶의 공유감 같은.

고통스러운 기억의 구체성에 비해 그 기억의 창고를 한사코 뒤지게 했던 ‘삶에의 갈망’은 아직 환영의 흔적으로서만 존재하고 그래서 다소간은 추상적이다. 그러나 우리 삶의 무의미함과 존재감의 상실을 흔들어 일깨우는 저 섬세하고 풍요로운 기억의 목록은 쉽게 떨쳐낼 수 없는 힘을 가졌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기억의 힘을 빌려 다시 묻는다. 삶은 처음부터 허구인 것이 아니며 산다는 것에 대해 당신과 내가 공유한 진실 또한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복잡하고 고통스러워서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니냐고. 그렇다면 이 혼선투성이의 흐릿한 서사의 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가야 할 길이 아니냐고.

 

4. 이호철(李浩哲)에게 산다는 것은, 다시 말해 삶이란 순리와 상식을 따라 흐르게 마련인 ‘응당 그런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그렇고 분단이 그렇듯이 인간사 모든 비극은 이 순리와 상식을 거스르려 하는 데서 온다. 그러나 이 순리와 상식을 너무 오랫동안 거슬러온 이념이나 체제는 우리의 삶을 이미 장악해버렸고 그러므로 소설의 대부분은 순리와 상식으로 이념과 체제를 뒤집는 데 바쳐지고 있다.

전쟁과 분단은 어떻게 집단의 광기가 순리를 거슬러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휘둘리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극명한 예가 될 것이다. 더불어 살며 함께 나누고 이웃의 살림을 걱정하던 사람들은 전쟁의 총구 앞에서, 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인간으로 돌변하게 된다. 급기야 전쟁은 살육에 중독되어 죄의식 없이 양민을 학살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인물들을 전쟁의 공로자로 만들고(「사람들 속내 천야만야」), 피란중에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 반세기를 떠돌게 한다(「이산타령 친족타령」). 극도의 피곤에 전 병사들이 한계를 넘어서는 작전을 수행하지 못한 것은 불가항력이지만 군법은 누군가를 처벌해야 하고 그 처벌이 억울한 것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또한 바로 전쟁이다(「비법 불법 합법」). 오랜 대립으로 굳어진 이념체제는 혈육을 찾는 간절한 소망도 정치적 거래에 부칠 정도로 경직되어, 반성없이 개인의 행동거지와 사고방식을 장악하고 있다(「1991년 초겨울의 서울 모스끄바 평양」). 그러나 우리는 이 개인의 야만성을 인간의 악마성이라고 섣불리 진단해서도 안되고, 또 헤어지고 찾으면서 떠돌았던 기구한 운명을 팔자 탓으로 돌릴 수도 없는데, 이 야만성과 기구한 운명의 저변에는 전쟁이라는 미친 세월의 소용돌이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견고한 분단의 세월이 한편에 있다면 마땅히 허물고 순리를 되찾아야 할 당위성에 기반한 든든한 낙관이 또 한편에 있으며, 이 둘의 맞부딪침은 예상치 못한 반전의 결말을 구축한다. 겉으로는 전쟁영웅이었지만 그 잔인성과 야수성 때문에 경원의 대상이기도 했던 안중사와 송중사, 이들은 결국 야간행군 도중에 누군가의 총에 맞아 죽거나 눈사태로 개죽음을 당하면서 거칠 것 없어 보였던 전시의 야만적 삶에 종지부를 찍는다(「사람들 속내 천야만야」). 아들을 찾아 미친듯이 40년을 헤맨 세월의 근본원인은 피란중 아들을 빼돌려 북으로 사라진 과수댁에게 있지만, 정작 아들을 만난 부모는 지난 세월의 회한과 상봉의 감격에 목놓아 울 뿐, 그 때의 일에 대해서는 거짓말처럼 한마디 말도 없다(「이산타령 친족타령」). 모스끄바 이국땅에서 만난 북의 청년은 혈육을 만날 방법을 묻는 영호에게 정치적 거래의 당위를 내세운다. 그러나 공화국의 이념이 곧 개인 생각임을 주장하는 이 철저하게 체제화된 인간도 영호가 찾는 사람이 자신의 외삼촌이라는 상상도 못한 사실이 밝혀지자 망연자실 말을 잇지 못한다(「1991년 초겨울의 서울 모스끄바 평양」). 이러한 서사의 반전은 명분과 이념과 체제로 가로막을 수 없는 상식과 순리의 힘을 보여준다. 전쟁을 명분으로 죄없는 목숨을 마구 죽이고 겁탈하는 야만이 정당화될 수 없으며, 수십년의 그리움과 간절함 앞에 한때의 흑심과 착오가 문제가 되지 않고, 또한 혈육과 벗을 그리는 인지상정을 이념과 명분으로 가로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재단하고 말고 할 여지조차 없는 삶의 순리이고 상식이다. 이 순리, 삶의 구체적 진실이 체제와 이념과 분단을 압도하기 때문에 이호철 소설의 서사는 통념적인 결말을 뒤집어 이념과 논리로 무장한 ‘먹물근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이것은 바로 이호철의 통일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진짜 통일은 남북의 고위급 정치인들끼리 나누는 술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밑바닥 벌거벗은 인생들, “갖은 불법을 저지르는 데만 늘 혼신의 힘을 쏟아 부으면서”(「불법 비법 합법」) 살아온 인생들마저 함께 술잔을 나눌 수 있을 때 우리 삶의 현장으로 실감있게 다가올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소설세계를 “탈향에서 귀향에 이르는 도정”이라 규정한 「작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호철의 『이산타령 친족타령』은 실향민 의식의, 쉽게 뿌리내리지 않는 자의 관찰력이 발견한 삶의 생생한 진실이 일관하고 있다.  초기작 「판문점」에서 우리의 후각을 자극했던 살아 있다는 것의 저 풋풋한 ‘신 살구 냄새’, 정치적 회담의 형식적 공간을 뚫고 풍기던 그 생활의 냄새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더욱 강한 향내로 진동한다. 그러나 이 향내는 삶의 구체적 현장과 맥락 사이에 있을 때만 풋풋하고 싱그럽게 맹목적 이념의 강파른 ‘먹물근성’을 반성하게 한다는 사실 역시 잊어서는 안된다. 순리라든가 상식이 파란만장한 역사를 견뎌내며 얻은 지혜가 아니라 ‘본시’ 존재하는 동양적 미덕이나 순종의 생래적인 습성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면 작가가 단호하게 거부했던 이념처럼 도그마로 굳어질 수 있다. 또한 작가가 비판해 마지않는 이념과 체제조차도 개개의 구체적 삶이 응결되어 이루어진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중요한 것은 순리와 상식을 이편에 두고, 인간다운 삶을 위한 집단적 노력마저도 ‘박래(舶來)의 이념’으로 저편에 놓는 이분화가 아니라 그 둘이 만나 싸우고 엉키면서 이룩한 관계를 탐색하는 일이다. 그래서 분단과 이산의 생체험으로 사람사는 일의 근본을 다듬어온 노작가의 혜안과 낙관은 든든하고 경외롭지만 쉽게 탐낼 수 있는 경지는 아닌 것 같다. 이념과 순리로 쉽게 이분화할 수 없는, 그 사이에 섬세하고 정교하게 드리워진 삶의 구체성에 우리는 여전히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5. 김영하와 김연수, 그리고 김인숙과 이호철의 소설들에서 우리는 삶을 대하는 판이하게 다양한 시선들을 만난다. 이들 시선은 엄청난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그래서 결코 통합될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한켠에 소설을, 한켠에 삶을 두고 그 둘의 관계에 대해 모색중이다. 삶과 소설의 거리를 구체적인 서사로 보여준 것은 김영하와 김연수이지만, 어지럽게 뒤얽힌 서사의 호흡이나 통념을 뒤집는 서사적 반전을 통해 삶의 진실을 담아내려는 김인숙과 이호철의 노력 역시 소설과 삶의 거리감각으로 긴장을 유지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네 작가들 사이의 거리는 아직 멀지만 우리는 결코 통합될 수 없어 보이는 이 이질성으로부터 소설이 삶과 관계맺는 다양하고 풍부한 증거물을 얻을 수 있다. 거리의 확인에 그치지 않고 서로의 이질성이 영향을 미쳐 상호교접할 수 있다면, 직설적으로든 우회적으로든 소설과 삶이 서로의 거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의 폭은 훨씬 넓어질 것이다. 김영하와 김연수의 당돌한 ‘진실 없음’은 자동화된 순리와 상식의 환원성을 경계할 수 있을 것이며, 김인숙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길찾기는 단순하게 결론내릴 수 없는 삶의 중첩성을 깨닫게 할 것이다. 아울러 이호철의 순리와 상식에서 오는 낙관은 섣부른 허무와 냉소를 삶에 대한 엄정한 관찰로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한없이 먼 거리에 서로 다른 입장으로 선 작가들이 튼실하고 섬세하게 현실을 묘파하는 풍부한 스펙트럼을 구축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분명 설레는 일이다. 소설과 삶을 행복하게 이어주었던 그 공유된 진실은 한없이 분할되고 그리하여 삶과 소설이 모두 낯설게 겉돌고 있음을 절감하는 요즈음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소설은 의외의 기회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당연한 것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솟아올라 삶의 구체적 세목들을 다시 발견하고 연결짓는. 그러므로 소설은 삶의 다채롭고도 복잡한 구체성으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삶과 분리되어 개인의 주관으로 침잠하는 소설, 그 고립과 파편화의 어두운 틈새에서도 살아가는 일의 구체성이 숨어 있다면, 지루한 소설과 신경전을 벌이면서도 우리는 소설과 삶의 아픈 거리에 기꺼이 매혹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 매혹과 긴장에 숨을 죽이면서, 살아가는 일의 맨얼굴과 만나는 감동을 기대하는 일은 여전히 독자의 당연한 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