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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신화와 저항

히야마 히사오 『동양적 근대의 창출』, 소명출판 2000

 

 

이욱연 李旭淵

인하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gomexico@inha.ac.kr

 

 

중국과 일본에서 루 쉰(魯迅)과 나쯔메 소세끼(夏目漱石)는 하나의 신화이다. 그들이 치열하게 근대와 ‘악전고투’를 치렀고, 그로 인해 분명한 문학적 개성을 확보한 점을 감안하면, 그런 신화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러한 신화가 두 작가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로막고 하나의 해석과 평가만을 강요하고, 그러한 신화의 창제과정이 중국과 일본의 국가주의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루 쉰 신화, 나쯔메 신화를 해체하기 위한 작업도 있어왔다. 중국에서는 80년대 이후 ‘인간 루 쉰’이란 구호로 ‘혁명가 루 쉰’ 신화를 해체하려 하였고, 올해 들어 젊은 네티즌들이 루 쉰이 갖는 의미를 근본적으로 다시 물으면서 루 쉰 토론방을 몇달째 뜨겁게 달구고 있다. 사정은 나쯔메 쪽도 비슷하여, 가령 윤상인 교수의 작업(「일본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와 제국주의」, 『역사비평』 1999년 가을호)에서 보이듯이, 나쯔메와 제국주의 간의 연관성을 통해 일본 지식인사회를 지배해오고 있는 강고한 나쯔메 옹호기제에 균열을 내기도 한다. 루 쉰과 나쯔메에 대한 탈(脫)신화작업은 그들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시도하는 문학적 작업인 동시에 중국과 일본 근현대사의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과 해체작업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두 작가에 대한 신화해체 작업에서 비교연구는 퍽 유용한 방법일 수 있다. 둘을 교차해 서로 비추어봄으로써 각자의 문학적 개성이 입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본과 중국의 근대가 서로 더없이 좋은 차감(借鑑)의 대상이라는 점에 상도(想到)할 때, 두 작가에 대한 비교연구는 동아시아 근대문학사와 동아시아 근대지성사의 수맥을 건드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히야마 히사오(檜山久雄)의 루 쉰과 나쯔메에 대한 비교연구인 『동양적 근대의 창출』(정선태 역)은 시도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크게 보면 동아시아 근대지성의 지형학을 탐사하는 데 중요한 방법론을 제공한다.

히야마 히사오는 루 쉰과 나쯔메를 “두 사람 모두 ‘뒤처진 동양’에서 출발하여 안이한 서양 모방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근대의 창출을 목표로 삼았”(107면)던 인물로 규정하고 있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서양문명에 의해 짓눌린 억압감”(28면)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느껴야 했던 ‘동양의 비애’를 바탕으로 동양적 근대창출을 위해 감행한 두 사람의 ‘악전고투’에서 ‘동양적 연대’를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히야마의 기본 출발점은 나쯔메 신화다. 히야마는 서구 근대에 대한 모방에서 벗어난 동양의 ‘자기본위’ 확립이라는 나쯔메식 문명비평론에 기대어 동양의 근대와 루 쉰을 해석한다.

112-4401976년에 출간된 이 책에 대해 토오꾜오대의 중문학자 후지이 쇼오조오(藤井省三)는 기본적으로 루쉰과 나쯔메 신화에 근거하여 씌어졌으며, 그런만큼 “신화가 파산을 고하는 지금(80년대 중반—인용자)의 입장에서 볼 때 시효를 상실한 감이 든다”고 지적한 바 있다. 후지이에 따르면 히야마는 두 작가에 대한 안드레예프(L. Andreev)의 영향을 무시하고 있고, 루 쉰이 나쯔메를 비롯한 일본문학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문학보다는 러시아와 동구의 문학에서 주로 영향을 받았으며, 나쯔메의 작품이 루 쉰에게 직접적 영향이나 충격을 주지 못한 사실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藤井省三 「夏目漱石と魯迅」, 『口シアの影』, 平凡社 1985 참조)

루 쉰은 『현대일본소설집』이란 번역서를 내면서 부록에 나쯔메에 관한 짧은 소개글을 쓴 적이 있다. 거기서 루 쉰은, 나쯔메 소설은 기본적으로 긴박함이나 ‘비상(非常)’이라는 것과는 관계없는 여유로움의 산물이긴 하지만, 드넓은 세상에서는 그것도 필요하다고 평한 바 있다. 루 쉰의 이 언급은 긴박한 비상상황이 일상이 된 중국과 나쯔메 소설 사이의 거리, 그리고 비상적 상태를 벗어난 이후의 근대적 일상에서 문학은 무엇을 다룰 것인지까지를 염두에 둔 발언인데, 히야마는 이 책에서 그러한 거리를 기초로 두 작가를 되비추고 두 작가에 대한 신화를 해체하여 새로운 해석을 이끌어내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히야마의 루 쉰과 나쯔메 비교에서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동양/서양’이라는 이원적 대립구도다. 히야마에게 있어서 동양이란 서구 근대에 대한 ‘안티테제와 해독제로서의 동양’이다. 이 구도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것을 타께우찌 요시미(竹內好) 식으로 말하면 “동양은 저항한다”는 차원에서 제기되는 동양에 의한 서구 근대의 되감기와 저항이다. 물론 이러한 구도 속의 동양적 근대 창출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서양문명에 의해 짓눌린 억압감으로부터” 동양의 해방을 가져다줌으로써, 나쯔메의 경우처럼 “경쾌한 마음으로 음울한 런던을 바라보”게 할 수는 있다(27〜28면).

하지만, 그러한 동양의 해방이나 동양적 근대의 창출은 ‘앞선 서양/낙후된 동양’이라는 구도를 역전시킴으로써 동양이 서양을 극복하고 선진으로 나서는 차원일 뿐 근대는 그대로, 혹은 더욱 열악한 형태로 된다는 점에서 참다운 근대극복의 길은 아니다. 그러한 동양의 저항이란 근대를 세계적 차원에서 전면적으로 실현하는 계기로 작용할 따름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서구에 대한 저항을 위해서 동양 내부에 공고한 일체감을 형성한다든지 억압적 국가주의를 통해 균질적인 국민을 창조하는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근대 초극론이나 아시아주의가 그 여실한 본보기이다.

루 쉰과 나쯔메를 ‘서구’ 근대에 저항하는 ‘동양’의 작가라는 차원에서 해명하고 비교하는 일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나쯔메의 경우 그의 문학론뿐만 아니라 문명비평의 핵심이 ‘동양/서양’의 이원론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구도설정이 상당부분 타당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의 문학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근대와 근대적 인간 자체에 대한 질문이 홀시되어서는 안되며, 루 쉰의 경우 ‘동양/서양’이나 ‘전근대/근대’ 식의 이원론으로는 전혀 해석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그 구도로는 루 쉰에게서 보이는 근대 합리주의에 대한 공포와 그것에 대한 저항, 근대와 반근대 사이에서의 긴장, 그리고 밑으로부터의 근대극복의 전망을 해명할 방도가 없다. 문명비평론 차원에서 창제된 나쯔메 신화를 기초로 루 쉰과 나쯔메를 해명하고, 동양적 근대 창출을 모색하려는 저자의 시도가 루 쉰과 나쯔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지 못하고, 끝내 아쉬움을 남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