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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비서구적 탈식민주의의 가능성

나오키 사카이·유키코 하나와 편 『흔적』 창간호, 문화과학사 2001

 

 

송승철 宋承哲

한림대 영문학과 교수 scsong@sun.hallym.ac.kr

 

 

『흔적』은 일단 여러 면에서 관심을 끄는 학술지이다. 자끄 데리다, 에띠엔느 발리바르, 가야트리 스피박, 베네딕트 앤더슨, 카라따니 코오진, 스튜어트 홀 같은 유명인사들이 편집고문으로 있어서가 아니다. 이 정도 인명록을 편집고문으로 전시하는 학술지도 적지 않겠지만 편집고문이야 어디서든지 어차피 ‘얼굴마담’일 것이니까. 『흔적』이 나의 관심을 끄는 가장 큰 이유는 이 기획을 실제로 주도하는 편집동인들의 명단에서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이름을 다수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은 현대 서구이론을 그런대로 뒤쫓아 읽는다고 생각하나 이들 동아시아 편집위원들의 면면은 대단히 생소하다. 그만큼 우리 시선이 서구 일변도이고 지식의 흐름도 서구로부터 일방통행이다. 『흔적』이 문제삼고 있는 현실이 바로 이것인데, 그 출발점은 모든 근대적인 가치는 서구로부터 왔다는 ‘방사(放射)모델’이다. 『흔적』이 표방하는 내용을 창간호 편집책임자인 사까이 나오끼(酒井直樹)를 비롯 여러 필자들이 반복해서 강조하는 주장을 통해 요약해보자.

이들의 비판대상은 우선 오랜 동안 서구담론에서 별 의심없이 사용되었던 전제인 ‘서구’(the West)의 통일성과 근대성 개념이다. 즉, 서구는 일정한 사회적 특성과 제도(즉 근대성)를 공유하면서 지도 위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라는 것, 그리고 근대적 가치와 제도가 서구에서 발원해서 ‘나머지 세계’로 전파되었다는 근대성의 기원으로서의 서구개념이다. 『흔적』의 필자들은 단일하고 통일된 지리적 공간으로서의 서구개념은 상상적 구성물, 즉 환상에 불과한 것이며, 근대성의 대두는 서구라는 단일한 원인, 근대화라는 단일한 과정으로 귀착시킬 수 없다는 근대성의 전지구적 출현 또는 다중적 근대성 개념을 제시한다.

그런데, 서양은 동양을 타자로 설정함으로써 자신을 인식할 수 있었다는 주장은 이미 70년대말 에드워드 싸이드(Edward Said)의 선구적 업적 이후 탈식민주의 논의에서 반복되어온 주장인만큼 ‘서구’개념에 대한 이러한 발화내용 자체는 크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탈식민주의 담론의 공간에서 『흔적』의 고유한 자리가 있다면 오히려 다수 필자들이 제국주의의 피해자인 동양인들이기 때문에 기존의 서구 탈식민주의 이론들과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발화위치이다. 예를 들면, 단선적 서구모델이 지닌 약점이 선명해지는 부분, 보편적 서사로 수렴되지 않는 각 지역의 고유성이 드러나는 부분, 무엇보다 지배-피지배 형식을 벗어난 다른 유형의 근대성 개념을 개진하려는 노력이다. 필자들의 발화위치가 지닌 또하나 장점은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 이론은 서구에서 만들어지고 아시아 현장은 이론창출에 필요한 데이터를 주로 제공해온 학계의 불균등 분업을 시정할 계기가 된다는 점이다.

112-446서구적 근대의 한계가 드러나는만큼 각 지역들의 특정성이 부각되는 점은 당연한 일인데, 이는 번역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난다. 사까이는 이질적 경험의 접촉을 근대성의 핵심개념으로 부각하며, 차크라바르티(D. Chakrabarty) 역시 자본주의 근대의 문제에서 핵심적 논점은 시차는 있지만 세계 모든 지역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역사적 이행의 문제가 아니라 각 지역에 고유한 경험의 번역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이때 번역은 원본을 고스란히 복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고유성 때문에 결코 다른 것으로 환원불가능한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이 된다.

『흔적』의 이런 의도는 얼마나 달성되었는가? 차크라바르티의 「인도 역사의 한 문제로서의 유럽」과 같은 논문은 이 기획의 장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20세기초 ‘미신적’인 인도의 농민들을 (단선적 방사적 근대 모델의 관점에서) 전근대적(前近代的) 주체로 규정하는 서구학자들의 역사서술 관행에 대해 반발한 한 인도 역사학자를 새롭게 조명하면서, 근대개념을 이렇게 정의할 경우 전근대적 농민들이 민족주의라는 근대적 운동에 적극 참여한 모순을 설명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그는 근대성을 서구의 소유로 보는 식민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면서, “근대성이나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먼저,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는 이분법적 담론이 지배-피지배의 식민주의 역사를 합리화할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밖에도 『흔적』 창간호의 경우 동양인 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덕에, 서구에서 개진되는 통상적 탈식민주의적 관점에 비해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상당수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이 계몽주의 서사에 대한 강한 반발 때문에 서구 근대의 역사를 억압체제가 강화되는 폭력의 역사로 보는 것에 비하면, 동양인 필자들은 오히려 서구적 근대가 지닌 장점에 대해서 서구인보다 더 적극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또한 차이를 강조하는 탈근대주의적 경향이 거의 다원주의적 상대주의로 귀결되는데 비해, 여기서 일부 필자들이 고유성의 보편성이라는 문제를 조심스럽게 거론하는 점도 그 발전과정을 지켜볼 만하다.

하지만, 『흔적』이 창간사에 명시된 기대수준을 채우려면 개선할 점도 적지 않다. 앞서 말한 바대로, 서구의 방사적 근대모델이나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이 사실상 탈근대주의적 탈식민주의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서구는 이론, 동양은 자료제공이라는 학문적 분업의 틀을 깨자는 창간취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논문에서 이 불균형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책 전체를 통해 가장 빈번하게 동시에 가장 우호적으로 인용되는 이론가가 들뢰즈라는 사실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흔적』은 5개 국어로 동시에 번역되는 잡지인데, 이는 기획과정에서 상당히 치밀한 국제적 조율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독자의 국제적 산포는 주제선정이나 서술형식에서 까다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이런 면에서 준비가 부족했다. 예를 들면, 이번호 특집은 번역과 근대성인데, 일부 논문은 특집의 주제에 맞지 않았으며 각 논문들의 관계도 너무 느슨했다. 한국인 필자의 글은 신식민지 사회 속의 남한 지식인의 과제를 다룬 글 및 김기영의 영화를 중심으로 탈식민주의적 한국영화론 두 편인데, 나 자신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과연 다른 나라 독자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마지막으로, 영어본을 구하지 못해 번역점검을 하지 못했는데, 동일한 용어가 논문에 따라 다르게 번역되는 경우가 여러번 있는 것도 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