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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창비시선 200’ 기념 특집
고은 高銀
1933년 전북 군산 출생. 195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내일의 노래』 『네 눈동자』 『새벽길』 등이 있음.
하류
저 금강산 내금강이 어디인 줄도 이제 모릅니다
저 태백 황지 한밤중
소쩍새 소리 시냇물이 어디인 줄도 모릅니다
퍽이나 전생다생입니다
그렇게 북한강 남한강으로 각각 흘러오는 동안
그 눈시리게 순결한 숫처녀는
세월의 여러 애옥살이 절로 잠겨
한 쉰살쯤의 묵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흘러 흘러
경기도 파주 오두산 드넓은 앞물에 이르렀습니다
저 대성산 오성산 백암산이 이제 어디인 줄도 모릅니다
그렇게 여러 갈래 물들이 만나고 또 만나면서
한탄강 임진강으로 흘러오는 동안
그 생나무 타는 듯한 총각들은
세상의 여기저기 굽이쳐오며
한 예순살쯤의 늙은이가 되었습니다
망각 속의 아슴푸레한 기억 하나둘 남았습니다
아사녀라 했던가
아사달이라 했던가
그렇게 흘러 흘러
여기 개성직할시 부근 판문군 조강리
가슴 연 조강 앞물에 이르렀습니다
무엇 하나 연연할 것도 없이
흘러온 한 생애 바쳐
다 왔습니다
다 왔습니다
그러나 거기 숙연히 서해 전체의 밀물이
가득히 들어와
어느 물이 어느 물인 줄 모르고
때마침 강화 문주산성 위 커다란 낙조로
온 세상을 울려버리니
그 울음소리 속
누구의 옛 울음소리 하나도 있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저만치 아호비령산맥이나 내각산 골짝에서
황해남북도 먼길 쉬지 않고 흘러온
저문 예성강물이었습니다
지긋이 세상살이 그림자들 스며든 말 없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렇게 두 강물
세 강물로 만나는 울음소리였고
저 난바다 어디쯤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도 아득히 있었습니다
하류는 위대합니다
해지는 강화도 언저리 마구 목메어
그 울음소리들과 더불어
서쪽 바다 쪽으로
조금씩 떠내려갑니다
예감은 하루의 끝에서 적중합니다
연평도 지나
하늘 밑 대청 소청도 지나
백령도 쪽에서도
아니 그 저쪽 장산곶 밖 인당수 쪽에서도
어서 오라고
어서 오라고 손짓합니다
방금 밀물이 썰물로 바뀌는 때
떠내려가는 두 물 세 물과 함께
무슨 영문 모르고
떠내려가는 땅덩어리 울음소리를 맞이하고자
추운 바람 일어나 모든 물마루들 치솟아
돛폭 팽팽하게 높아지고 있습니다
하류와
하류 이후는 위대합니다
향로봉
휘청거리는 것은 하늘만이 아니다
단 한번 망설인 적 없이 뻗어가는
산
산
산
산들의 동서남북이 휘청거린다
다른 것들도 휘청거린다
산 자들
숱한 피범벅 주검으로
널브러진 싸움터였다
50년 뒤
그것으로 무쇠 같은 적막강산이었다
노랫소리 함부로 들리지 말라
저 아래 풀섶에는 삭아버린
군사분계선 푯말
여기서는
강풍 속에서
내 뒤에 있는 사람이 옷자락 펄럭이며 아름다웠다
내려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