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 ‘창비시선 200’ 기념 특집
문병란 文炳蘭
1935년 전남 화순 출생. 196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땅의 연가』 『아직은 슬퍼할 때가 아니다』 『무등산』 등이 있음.
전라도 젓갈
썩고 썩어도 썩지 않는 것
썩고 썩어서 맛이 생기는 것
그것이 전라도 젓갈의 맛이다
전라도 갯땅의 깊은 맛이다
괴고 괴어서 삭고 곰삭아서
맛 중의 맛이 된 맛
온갖 비린내 땀내 눈물내
갖가지 맛 소금으로 절이고 절이어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맛
소금기 짭조름한 눈물의 맛
장꽝에 햇살은 쏟아져내리고
미닥질 소금밭에 소금발은 서는데
짠맛 쓴맛 매운맛 한데 어울려
설움도 달디달게 익어가는 맛
원한도 철철 넘치게 익어가는 맛
어머니 눈물 같은 진한 맛이다
할머니 한숨 같은 깊은 맛이다
자갈밭에 뙤약볕은 지글지글 타오르고
꾸꾸기 뻐꾸기 왼종일 수상히 울어예고
눈물은 말라서 소금기 저린 뻘밭이 됐나
한숨은 쉬어서 육자배기 뽑아올린 삐비꽃이 됐나
썩고 썩어서 남은 맛 오호 남은 빛깔
닳고 닳아서 타고 타서 남은 고춧가루
오장에 아리히는 삶의 매운맛이다
복사꽃 물든 누님의 손끝에 스미는 눈물
오호 전라도 여인의 애간장 다 녹은
아랫목 고이고이 감춰놓은 사랑맛이다
곰내 팽나무
아직도 젊고 팽팽한 몸뚱어리에
푸른 가지를 죽죽 뻗치고
남해의 푸른 하늘을 끌어안고 서 있는
곰내 팽나무
임진년 난리 때
이순신 장군의 노모 변씨와
그의 부인 방씨가
5년간 기거했다는 내력을 지니고
하나의 역사가 수천 개의 이파리를 달고서
눈부신 6월 햇살 아래
그 미끈한 아랫도리 당당하게 서 있다
팽나무는 그대로
아름다운 조선 역사.
그날의 내력 안으로 간직하고
거대한 상형문자처럼 두 팔 벌려
이 세상 사내란 사내 천하의 모든 수컷들을
죄다 삼키고도 모자랄 듯
천하의 햇살을 모조리 빨아들이고 서 있다
천하 장정들 다 오라
그 넉넉한 무당각시의 품을 열고
아랫도리 성한 왜놈들 한 부대쯤 모조리 삼키고
이 세상 남편과 자식 줄줄이 거느리고
그 수천 수만 개의 남근이 주렁주렁 매달리듯
저 용트림하는 장려한 나무의 풍만한 끼를 보라
내 나이 67세,
아직은 젊고만 싶은 수컷으로
열오른 이마 가까이 다가가 접신하니
신의 계시일까, 내 몸뚱이 속에
일진광풍이 회오리치고
내 어깻죽지 위에 이파리가 돋아나고
꿈틀거리는 아랫도리 속에 가지가 죽죽 뻗어
남해바다 용궁의 훈향내 한줄기 풍겨나면서
6월 한낮의 눈부신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오 싱그러워라, 춤추는 곰내 무당각시나무
눈부신 역사의 오르가즘이여
✽곰내〔熊川〕: 현재 여수시 웅천동 송현리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노모와 부인이 5년간 기거한 곳인데 수백년 묵은 큰 팽나무가 솟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