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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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철 申大澈

1945년 충남 홍성 출생. 196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가 있음.

 

 

 

그냥 돌이라고 말하려다

고비 삽화 4

 

 

“산책 좀 합시다”

고비 노인이 이른 아침부터 서두른다,

 

사막에서 무슨 산책을? 사막에도 갈등이? 하고 말하려다 나는 흔쾌히 따라나선다, 걸어서 한시간 삼십분, 낮을 대로 낮아진 구릉들 흐르다 문득 사라진 곳에 검푸른 바위들 반들거린다,  

 

“운석입니다, 별똥별이지요,

아직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여길 산책하고 나면 살아가는 일이 신비롭습니다,

여기선 무엇이든지 들립니다”

 

무엇을 들었지요? 하고 물으려다 구릉 사이 분지형 바위들을 가리키며 성소 같군요 했다, 내 얕은 탐석체험에 의하면 이 바위들은 경도 5도쯤 되는 변성암이고, 그의 신비체험에 의하면 생의 비의(秘意)가 서린 바위 이상의 장소이리라, 그는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혼자 얼마나 많은 말을 주고받았을 것인가, 수없이 자책하고 포기하고 용서받고 화해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푸른 하늘 아래에서 눈물 흘리고 마음 가벼워졌으리, 그가 성소를 거니는 동안 나는 바위 밑 염분선을 따라 태백으로 철암으로 떠돌다 구문소 부근에서 산비탈에 박힌 삼엽충과 암몬조개를 돌아보았다, 우주적인 시간, 서로 마주칠 때마다 푸른 기운이 돌았다,

 

 

 

천장호수 1

 

 

길 잠겨가고 둑 높아진 후 칠갑산 골안개 품에 넣고 야밤에 고개 넘은 이웃들, 벼루장이 되려고 청라로 들어간 이 석공이 되어 돌아오고 맨몸으로 집을 나간 이 덤프트럭 몰고 와 잠시 고개 위에 머물러 있다, 물 밑바닥 산모퉁이 돌아 논밭 사잇길로 쌀 몇되 꾸어오는 소년과 한강 하류를 전전하다 허리만 굽은 노인이 얼어붙은 수면에서 우연히 얼굴 마주치고 떨고 있는 저녁, 흩날리는 눈발을 내려다볼 뿐 아무도 호수 위를 걷지 않는다,

 

 

 

실미도

 

 

“잠들지 못한 눈 무심히 재우는

일자형 눈썹 같은 산 능선에서

지글거리는 불덩이 가라앉히고

수평선으로 넘어가는 붉은 해를          

어두워진 가슴으로 받아

밀물에 밀려나오는 사람들,

 

실미도는 물안개에 지워지다 다시 떠오른다,

 

바람이 서풍에서 북풍으로 바뀔 때

엉클린 물결 거품 물고

날을 세운다, 날에 날을 갈아

단숨에 날아갈 듯

발뒤꿈치 들어올린 무의도로 달려온다,

 

갈 길 놓친 사람들 사이

국사봉 찌그러진 달빛은 번쩍이고

상처 없어도 누가 쓰러진다,”

 

무시 지나 오늘은 몇매인가?  

모래밭 높이 그어진 물띠에

나뒹구는 갑오징어 뼈,  

휩쓸려 나갈 듯 거듭 떠오르는 수류탄 껍데기,

 

무의도와 실미도 물길에

방향 꺾는 갈매기 날개 같은

휘어진 물줄기들 잦아들면서

갯내 후끈 끼쳐오고

뻘 위에 돋아나는 디딤돌 몇개

 

건너갈 사람 없어도 모세길이 열린다,    

 

나즈막한 산기슭 모래 둔덕엔

갯메꽃 몇송이 피어나 있고

물결 소리 빠져나간 나팔귀에

웅웅거리며 날라리떼 모여든다,  

 

솔숲 그늘에서 물때표를 보던 사람들, 출입금지 팻말을 한바퀴 돌아 뻘로 들어선다, 어느 무인도에서 얼핏 스쳤던 사람들, 개펄 있는 곳은 어디든 배낭 하나 걸머지고 대숙 잡으러 다니는 사람들, 물 빠지기 전에 장화 신고 철벅거리며 들어간다, 모래밭에서 단풍나물 캐며 양식장 지키던 아주머니가 화급하게 말한다, “딴실미는 뭐 하러 가요, 거긴 무서운 곳인데요, 사형수들이 난동부린 곳이에요, 민가도 다 철거되었어요, 버려진 섬이에요,” 그들은 대꾸도 하지 않고 딴실미를 향해 걸어가다 갯구멍 한번 쑤셔보고 정적을 모조리 조개무덤에 묻어놓고 섬 모퉁이를 돌아든다, 그들이 사라지자 어디선가 메아리가 찢어진다, “우리도 살아야지요,”

 

나는 떨면서 머뭇거린다,  

생기 있는 목소리와

살기 띤 공기와

썰물이 당기는 대로?

한발 한발 딸려 들어간다,

 

흰 모래펄로 물오리 새끼들 내려오고, 으깨진 굴껍질이 맨발을 찌른다, 산길은 초입부터 쓰레기 속에 닳고 닳은 채 버려져 있다, 마른 샘 축축이 적시는 녹음 끼고 오르는 길, 솔가지와 거미줄이 서로 얽혀 길을 막는다, 부글거리는 송진 거품, 곤두서는 머리카락, 문득 길이 바뀐다, 꿈자리 사납다고, 고향이 자주 뵌다고, 작전 한번 거르자고, 말 한마디 못하던 전우들 되돌아온다, 철조망을 빠져나온다, 안부 엽서 쓰다 말고 그날, 저마다 불길한 긴장에 둘둘 말려 몸 움츠리고 어둠 기다리고 솔밭 잠복호 속에서 인원 점검, 위장, 쓰다 만 엽서 몇구절 떠올려 수십번 속말로 고쳐놓고 한겹씩 긴장 풀어 탄창 채우는 순간, 난데없는 오발, 안전장치 더듬어보고 숨죽이고

 

북파, 심야방송 끝나기 전에?

북파, 뒤돌아보지 말고?

북파, 저 뒤에서 누가 떠밀어?

 

잎새 후둑이는 산자락에 몸을 맡겨

배낭에 판초 우의 구겨넣고

빗물에 급류를 타던 우리들,

씻겨진 검댕이 얼굴 내놓고

잡히는 대로 풀뿌리에 매달려

남쪽도 북쪽도 아닌 허공에

가라앉는 손 내뻗던 우리들,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암흑 속에서, 북파

얼굴 비비고 뜨거운 손 마주잡고, 북파

빗속에 눈물 감추고 으스러지게 껴안아, 북파

 

얼굴도 이름도 기억할 수 없는 그대들

숨소리와 앙상한 뼈 감촉만

몸속에 품고 돌아설 때

뒤늦게 떨려오던 발걸음들,

 

북쪽은 물안개에 잠겨 실미도 같은 섬들 떠다니고, 펴오르는 안개 누르고 누르던 검은 하늘, 우리는 갈라진 땅 갈라놓고 무슨 생각에 갇혔던가, 산등성을 타고 달려가 푸른 기운 맞이하던 그 새벽에, 조국 잃은 친구까지 숨막히게 불러내던 그 새벽에, 이랴이랴이랴 소 몰고 들판으로 나가던 그 새벽에, 누구를 위해 갈라진 땅 다시 가르고 누구를 향해 자유의 소리 방송을 하였던가,      

 

탁 트인 연병장 터에서

산길은 끝나고 먼 바다에서

불쑥 얼굴 없는 얼굴들이 올라온다,

붉은 딱지 붙어 진학 포기하고

중국집 뽀이가 된 고향의 박아무개,

싸리나무 찾아 양봉에 쫓기던 토종벌 몰고

벌통 옮겨가다 영영 자취 감춘 박아무개 가족,

 

그 사이사이 문신만 남은 그대들은 누구인가

아무 연고자 없이 전과자로

뒷골목으로 감옥으로 전전하다가

실미도로 끌려온 그대들은?

단두대 같은 수평선에 목을 걸고

무엇으로 하루살이 악몽을 넘기고 싶었는가

누구의 조국, 누구의 통일을 위해

그대들의 피를 씻고 씻으려 했는가

디데이 늦춰지고 불안한 나날 속에

대원들 하나 둘 생으로 죽어갈 때

─어, ─어, 종적없이

숨 넘어가는 소리 흉내내는

호랑지빠귀 울음소리에 몸서리치진 않았는가

 

조국의, 민주의, 통일의 이름으로

하루하루 산 채로 처형된 그대들

갈데없는 원혼들은 실미도를 떠돌아다니고 막사 자리는 칡덩굴에 덮여간다, 타다 남은 몽둥이, 무너지는 축대들, 벽돌 하나 구르면 칡덩굴이 죽죽 뻗어나가 감아버린다, 물가 모래땅에 이를수록 소금기에 절여진 악취 배어들고, 피 끓이고, 손잡이만 남은 스텐 국자는 흰 모래에 묻혀 씻기고 있다, 빛에, 바람에, 밀물 썰물에,

 

조류 바꾼 큰 파도에

수평선이 뒤집혔다 출렁, 출렁거린다,

 

✽주민들은 실미도를 ‘딴실미’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