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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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창비시선 200’ 기념 특집

 

천양희 千良姬

1942년 부산 출생.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등이 있음.

 

 

 

뒷길

 

 

뒷길은 뒤에 가기로 하고 앞길을 먼저 따라갔습니다 샛길을 끼고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갔습니다 길은 몇갈래 가다가 멈춘 길도 있었습니다 다른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먼저 지평선 하날 당겨 먼 세계를 적었습니다 직선과 직진이 다르지 않았으나 나아가는 것만이 가장 빠른 길은 아니었습니다 나아가려면 우선 물러서라는 말이 進과 退의 처세법임을 그때서야 겨우 알았습니다 곧은 것은 쉽게 부러지나 굽은 것은 휘어진다고 말들 하지만 구부러지면 온전하다는 저 곡선의 유연함 저 내밀함…… 놀라운 것은 감추면서 드러내는 그것이었습니다 길 없어도 세상은 새길을 만들고 사람들은 바쁘게 나를 앞질러 갔습니다 옛길이 언제 새길을 내려놓았겠습니까 가파른 길 내 길처럼 걸어갈 때 나도 그랬을 것입니다 멀리 가야 많이 본다는……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었습니다 모든 생은 자기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길의 모든 것은 걷고 싶지 않아도 걷게 되는 것입니다 들판 너머 길 하나 산 너머 길 바라다봅니다 길의 끝은 멀고 그리고 가파릅니다 고갯길은 힘든 그 어떤 것도 넘겨주질 않습니다 나는 몇번이나 그 길을 넘었습니다 고갯길을 벗어나도 벗지 못하는 업도 있습니다 눈부신 햇살도 모든 어둠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 다시 쓰고 싶은 생이 있겠습니까 앞길밖에 길이 없겠습니까 가다 보면 길이 되는 것 그것이 오래 기다린 뒷길일 것입니다

 

 

 

썩은 풀

 

 

썩은 흙에서 풀이 돋고

썩은 풀이 반딧불을 키운다

썩은 것이 저렇게 살다니

썩은 풀의 소신공양!

썩고 썩은 풀이여, 마음은

너무 빨리 거름이 되는구나

나는 아직

속 썩은 인간으로 냄새를 풍긴다

풀밭은 또 저만치서

썩은 풀을 피운다

 

나에게 썩은 것이 있다면

썩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