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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야망의 콩쥐팥쥐형’ 드라마에 비친 자화상
이영미 李英美
대중예술평론가. 연극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책임연구원. 저서로 『한국대중가요사』 『이강백 희곡의 세계』 『서태지와 꽃다지』 등이 있음. ymlee@knua.ac.kr
1. 문제 제기
텔레비전 드라마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지독하게 뻔한 상투형의 반복에 질려버린다. 몇년 동안의 인기드라마들을 되돌아보면 줄거리와 인물을 헷갈릴 정도로 똑같은 작품들, 그나마 만화처럼 단순한 이야기로 엮어가는 작품들이 줄을 이었다. 이런 작품이 좋은 평을 받을 리 만무하다. 표절시비가 줄을 이었고, ‘너무한 짜깁기’1라는 둥 자기복제라는 둥 온갖 악평이 쏟아졌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작품이, 몇년 동안 계속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면서 이른바 트렌디(trendy) 드라마라고 불리는 젊은 감각의 드라마의 주도적 유형으로 자리잡아왔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에 ‘대중에게 인기있으나 질 낮은 작품’이라는 구도로 접근하는 것은, 드라마의 상투성에 못지않은 상투적 비평을 낳는다. 이는 자칫 대중예술을 저급한 취향의 대중들이 향유하는 저급예술로 못박는 엘리뜨주의적인 관점으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대중의 평균적 감수성에 호소하여 최대이윤을 추구하는 대중예술의 상업주의적 성격 때문이라는 교과서적인 지적도 타당하기는 하지만, 이 역시 대중문화 일반론에 불과하여 그 ‘평균적 감수성’이 어떤 질의 것이며 그 질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예술 연구자들의 분석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필자가 주목하는 지점은, 언뜻 생각하기에는 수십년 동안 요지부동으로 반복되어온 듯한 대중예술의 상투형이란 것도, 좀더 세밀히 살펴보면 시기에 따라 현격한 변화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비록 그 변화가 본격예술에서처럼 큰 폭으로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대중예술의 흐름 속에서 보자면 주도적 유형이 확연히 변화하는 양상을 띤다. 이 글과 관련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선한 여자와 악한 여자가 일과 사랑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는 구도의 트렌디 드라마가 90년대 말부터 작년에 이르기까지 집중적으로 나타나 주도적인 경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그 이전에는 나타난 적이 없는 현상이라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물론 단순한 선악구도나, 일과 사랑을 두고 경쟁을 벌이는 이야기는 할리우드 영화나 대중극, 대중소설에 자주 나타나는 익숙한 것이지만, 근자의 드라마는 몇가지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작품의 유사성의 정도가 매우 높고, 경쟁을 벌이는 주인공이 주로 남자가 아니라 여자인데, 이러한 유형은 90년대 초·중반의 트렌디 드라마에서는 발견되지 않다가 1998년부터 2000년 사이에 매우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이다.(90년대 중반 이전의 작품으로는 1984년의 김수현 작 「사랑과 야망」이 유일한데, 이 작품의 폭발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유형은 당시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도적 경향으로 자리잡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형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그 의미는 무엇이고, 그 변화는 언제부터 어떤 이유에서 나타났는가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필자는 이미 여러 글에서, 대중예술의 ‘뻔함’ 즉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일정한 유형을 이루는 것에 대하여 대중예술, 더 나아가 서민예술 일반의 특성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서민대중의 경험과 욕구·욕망, 취향, 예술적 관습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서민대중의 적극적 휴식행위로서의 서민예술·대중예술을 섣불리 본격예술의 창의성이란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본격예술과 예술사적 맥락이 다른 대중예술이나 서민예술의 본질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말하자면 텔레비전 드라마를 비롯한 대중소설·대중영화 등이 두루 지니고 있는 ‘뻔함’이라는 특성은, 전근대의 서민예술인 설화가 상사성(相似性)을 지니면서 일정한 유형을 이루는 점과 비슷한 현상으로 상사성과 유형성의 의미가 분석대상이 되어야 한다. 한 시기에 대중적 인기를 얻는 특정 경향, 특정 양식 등은, 그 시기 수용자 대중이 세상과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느끼는가 하는 것과 조응한다. 대중적 양식의 변화, 양식의 생성·발전·퇴락이란 단지 그 양식의 반복으로 인한 지겨움이 외국 양식의 수입이라는 표면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인간과 세상에 대한 수용자 대중의 생각과 느낌, 수용자 대중의 관심사와 욕구·욕망과 사회심리의 변화가 그 근본적 원인이다. 대중예술은 뻔하기 때문에 분석할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바로 뻔한 것이 그렇게 많이 생산되고 향유된다는 점이야말로 눈여겨 살펴보고 분석해야 할 대목이다.2 이는 상투성의 옹호가 아니다. 상투성의 근거와 존재방식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섣부른 재단에 앞서 체계적인 분석과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 ‘야망의 콩쥐팥쥐형’ 드라마의 특성과 그 세계인식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글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90년대 말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하여 2000년에 전성기의 모습을 보였던, 선한 여자와 악한 여자가 일과 사랑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드라마이다. 설명의 편의를 위해 이를 ‘야망의 콩쥐팥쥐형’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콩쥐·팥쥐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동년배 혹은 자매인 두 여자의 선악구도가 분명한 반면, 두 여주인공 모두 일과 사랑의 성취를 위해 강한 야망을 보이며 적극적인 행동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착하디착한 주인공이 오로지 행운과 왕자의 선택에 의해 계층상승을 이루는 콩쥐팥쥐 설화나 신데렐라와는 다르다. 이 유형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 1998년 「미스터 큐」, 1999년 「토마토」, 2000년 「이브의 모든 것」 「진실」 「비밀」, 2001년 「귀여운 여인」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유형과 몇몇 중요 특성을 공유하는 작품으로는 1997년 「신데렐라」로부터 2000년 「덕이」나 「태양은 가득히」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많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유형이 지니는 내용상의 특성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물론 앞에서 열거한 모든 작품이 아래에서 지적하는 모든 특성을 완벽하게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약간씩의 변이는 존재한다.
① 같은 회사(업종 혹은 학교)에서 일하는 동년배 여주인공 두 명은 어렸을 때부터 경쟁심리를 지닌 라이벌이다.
두 명의 여자주인공은 동일한 직종의 같은 나이의 동급생이거나 동년배의 자매로, 강한 경쟁심리를 가지도록 설정되어 있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경쟁심을 키워왔는데, 대개 악한 인물이 선한 인물보다 더 강한 경쟁심리와 열등의식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설정된다.
② 하나는 선하고 다른 하나는 악하다.
선명한 선악구도야말로 ‘야망의 콩쥐팥쥐형’의 뚜렷한 특성이며 작품을 끌어가는 핵심적인 요건이기도 하다. 악한 인물은 집요하게 선한 인물을 공격하여 곤경에 빠뜨리지만 결국 그러한 악덕 때문에 파멸한다. 악한 인물은 선한 인물에 비해, 업무능력이나 도덕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지만 훨씬 더 강한 계층상승 욕망을 지니고 있으며 음모와 처세술에 탁월하여 선한 인물을 곤경에 빠뜨리는 경우가 많다.
③ 여자주인공들은 전문직 여성으로 그 직종에서 최고가 되는 것이 꿈이다.
주인공의 직업으로 가장 빈번하게 설정되는 것은 디자이너이다. 「미스터 큐」에서는 속옷 디자이너, 「토마토」에서는 구두 디자이너, 「비밀」에서는 여성복 디자이너, 「귀여운 여인」에서는 가방 디자이너이다. 「이브의 모든 것」에서는 방송국 아나운서로 설정되어 있다. 이들 직종은 젊은 여성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일을 하는 전문직이면서 돈과 화려한 명성이 함께 보장되는 동시에, 이른바 ‘여성적 매력’까지 유지할 수 있는 직종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트렌디 드라마의 수용층인 젊은 여성들의 욕망과 조응하는 설정이다.
④ 남자주인공은 여주인공들이 다니는 직장의 고위직이거나 실력자이다.
남자주인공들은 대개 사주의 아들·양아들 혹은 후계자이다. 그와의 사랑의 성취란 일에서의 성공과 계층상승을 한꺼번에 이룰 수 있는 지름길이다.
⑤ 악한 인물이 선한 인물의 행운을 가로챈다.
「토마토」에서는 크게 다친 남자주인공을 선한 여자주인공이 구해주나 이 공을 악한 여자주인공이 가로채며, 「비밀」에서는 악한 여자주인공이 여성복회사 사장의 진짜 딸이 자신의 언니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도 이를 밝히지 않고 자신이 딸 노릇을 계속한다. 이는 악한 인물에게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 역할을 하는 듯하나, 궁극적으로 그를 파멸시키는 요건이 된다.
⑥ 악한 인물과 선한 인물은 빈부·직급의 차이가 현격하거나, 우연한 기회로 인해 현격한 빈부 차이가 생겨난다.
「미스터 큐」 「귀여운 여인」 「비밀」에서 악한 여주인공은 선한 여주인공의 직속 상사로 회사 실력자(사장 혹은 전무)의 딸이다. 「토마토」에서 악한 여주인공은 사주의 딸인 유학파 디자이너이며, 선한 여주인공은 전문대를 졸업하여 영업매장과 제작실에서부터 일을 배운 자수성가형의 인물이다. 「진실」에서 선한 여주인공은 악한 여주인공 아버지의 운전사 딸이다. 대개 악한 인물이 부유하거나 직급이 높으며, 선한 인물이 가난하거나 아래 직급인 경우가 많다. 단 「이브의 모든 것」에서만 예외인데, 어떤 경우이든 선한 인물과 악한 인물 사이의 빈부·직급의 격차는 매우 크다. 「비밀」에서는 두 주인공이 애초에 같은 집에서 자매처럼 성장했지만, 악한 인물이 여성복회사의 사장 딸이 됨으로써 현격한 빈부와 직급의 차이가 생겨나게 된다.
⑦ 선한 인물이 지닌 일과 사랑에서의 능력이 정당하게 발현되는 것을 악한 인물이 의도적으로 방해하거나 그 성과를 자신의 것으로 가로채, 선한 인물을 곤경에 빠뜨린다. 선한 인물은 선한 성품과 도덕성 때문에 악한 인물을 의심하거나 반격하지 않으며, 심지어 악한 인물을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자신에게 중요한 정보를 자주 노출시킨다. 경영자와 남자주인공에게 선한 인물의 진심이 전달되지 않고, 이들은 악한 인물의 유혹과 음모에 종종 넘어가 선한 인물의 진심을 오해한다.
작품 중간 부분의 사건 진행이 주로 이러한 내용으로 채워진다. 대개 악한 인물이 선한 인물의 디자인을 빼돌려 상대편 회사에 넘긴다거나, 컴퓨터에 있는 중요한 자료를 지워버린다거나, 선한 인물에게 도둑 누명을 씌운다거나, 중간에서 주문내용을 바꾸어 일을 망쳐버린다거나 하는 식이다.
⑧ 남자주인공은 선한 인물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를 도와주려 하는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선한 인물과 남자주인공과의 만남·사랑의 기회가 우연히 또는 악한 인물의 음모에 의해 자주 어긋남으로써 관계의 발전이 지체된다.
앞의 ⑦의 내용과 함께 사건 진행을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내용이다. 우연한 어긋남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사랑의 지체로 선한 인물이 빨리 승리하지 못한다.
⑨ 악한 인물은 남자주인공을 차지하기 위해 현재의 애인을 가차없이 버리고 때때로 이용한다.
악한 인물은 현재 자신을 사랑하는 애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와 명예를 갖춘 남자주인공에게 적극적인 공세를 펴서 그를 통해 부와 명예와 사랑을 모두 얻고자 한다. 두 남자를 저울질하여 애인을 버리는 과정은 계속된 거짓말과 비정한 배신으로 그려지는데, 남자주인공과의 사랑 가능성이 적어지게 되면 옛 애인의 사랑을 이용하여 위기를 극복하는 야비함을 드러낸다.
⑩ 악한 인물이 쌓아온 온갖 거짓말과 악행이 극에 달해 결국 하나하나 드러나며 몰락하고, 선한 인물은 일과 사랑에서 성공한다.
이 유형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선한 인물의 패배로 귀결되는 경우는 아직 없다. 「이브의 모든 것」에서처럼 악한 인물이 스스로 자신을 파괴하여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고, 「토마토」에서처럼 일의 경쟁에서의 확연한 패배로 대단원을 내리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이든 권선징악적인 해피엔딩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글에서 다루는 작품이 위의 열 가지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변이의 폭은 매우 좁아서 처음을 보면 거의 끝이 보일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선한 여주인공의 성공과 악한 여주인공의 몰락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게 된다. 작품이 흥미진진해지는 이유는, 한편으로 작위적이고 극단적인 설정으로 인해 극적 긴장이 매우 높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작위적인 설정과 극적 갈등이 수용자 자신들의 어떤 체험과 욕망의 어떤 부분을 강렬하게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평론가뿐 아니라 일반 시청자들 역시 만화처럼 현실성 없는 드라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그런 생각이 그 드라마에 대한 흥미와 시청욕구를 꺾지는 못한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이들 작품에서 본격예술에서와 같은 방식의 현실성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실망 역시 크지 않다.
그렇다고 이들 드라마의 재미가 순전히 형식적인 극논리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수용자 대중은, 리얼리즘의 잣대로 설명되지 않는 설화를 수용할 때처럼, 드라마의 비현실적이고 단순화된 인물과 사건의 핵심에 수용자 자신의 체험과 욕망, 세계인식과 세계감정을 투영하여 정서적 리얼리티를 확인한다. 수용자들은 이들 드라마가 지니는 특정 구조와 정서적 경향이 현실성이 있다고 받아들이면서 이를 반복해서 환기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이전의 다른 유형의 드라마와 이들 드라마의 변별점은, 이들 드라마를 수용하는 대중들의 세계인식과 욕망의 변별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다음 몇가지 점이 주목된다.
첫째, 이들 드라마에서 그려내는 세상은 극단적인 써바이벌게임과 같은 세상이다. 드라마라는 허구 공간 속에서의 써바이벌게임 체험이야말로 이들 작품의 핵심이라고 할 만하다. 이들 드라마는 대부분의 시간을, 선한 주인공이 우연히 혹은 악한 주인공의 음모와 악행에 의해 성공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아슬아슬한 사건들에 할애하고 있다. 인물들에게 성공이란 돈과 지위를 얻는 계층상승이며, 이를 위해 남을 짓밟으면서 성공으로 나아간다. 남을 이긴다는 것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이며,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써서든 남을 이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늘 당하고 산다. 이들 작품 속의 경쟁은, 인물의 매일의 삶이 거의 전쟁이라고 할 만큼 극단적이고 격렬한 양상을 띠고 있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작품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강박관념은 우리 텔레비전 멜로드라마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전의 텔레비전 멜로드라마에서 나타나는 경쟁이란, 여자주인공이 남자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가족 등 사적 관계의 테두리 안에서 일으키는 것이었으며, 학교·직장을 배경으로 한 사회적 성공과 계층상승에 대한 욕망은 거의 나타나지 않거나 부차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경쟁의 양상 역시 이토록 그악스럽지 않았고, 남성에 비해 여성은 적극적 행동 가능성이란 점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으며(그 제한성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경우, 버림받은 미혼모가 애인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를 다룬 「청춘의 덫」처럼 보수적 사회의식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았다), 대개 남자의 잘못된 선택에 희생자가 된 불쌍한 여주인공의 비애의 형상화가 중심이었다. 이에 비해, 여주인공들이 적극적으로 계층상승과 일에서의 성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경쟁한다는 ‘야망의 콩쥐팥쥐형’의 설정은 최근 수용자 대중의 변화된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선명한 선악구도란, 수용자들의 단순한 세계인식을 반영한다기보다는, 극단적인 경쟁과 무조건적 승리에 대한 강박증과 피해의식의 괴로움을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의 보수적 한계와 수용자 자신의 순진한 윤리성을 크게 뒤흔들지 않으면서 위로받을 수 있는 편한 형상화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수용자들이 극명한 선악 이분법의 비현실성을 자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작품을 수용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경험과 욕구·욕망을 강렬하게 반추하고 자극하면서 윤리적 안정감을 갖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수용자 대중들은 현실 속에서 드라마 속에서 못지않은 비윤리적인 경쟁을 경험하고 있고, 양자의 욕망을 다 지니고 있다. 즉, 대중들은 한편으로 악한 인물처럼 극악무도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남에게 이기고 싶은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선한 인물처럼 사는 게 옳다는 윤리의식을 지니고 있다. 생활 속에서 이렇게 살벌한 경쟁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대중들은, 작품 속의 선한 인물을 보면서 자신도 저렇게 순진하고 착하기 때문에 능력이 있지만 행운을 빼앗기고 성공하지 못한다는 위안을 갖게 된다. 또한 악한 인물을 보면서는 ‘사실은 나도 저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너무 비윤리적이어서 하지 않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며 자위하게 된다. 이러한 현실 속의 극단적 경쟁의 강박증을 강렬하게 반추하기 위해서는 권모술수와 거짓이라는 설정이 반드시 필요한데, 모든 연령층이 함께 시청하는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의 한계 내에서 형상화가 그다지 용이한 것은 아니다. 마치 현실에서처럼 모든 인물이 어느정도의 악덕을 저지르거나 이를 욕망하는 것으로 설정하면, 텔레비전 방송에서 관철되는 보수적 사회의식과 충돌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를 쉽게 피해가는 길은, 악한 욕망과 행동의 가능성을 악한 인물형에게 전부 모아주고 그를 패배시켜버리는 방법이다. 그럼으로써 방송심의도 무리없이 통과하고, 수용자 대중들의 보수적인 윤리의식에도 충격을 덜 주게 되는 것이다.
둘째, 이들 드라마에서는 인물들이 명확한 상하관계 속에 놓여 있는데, 상하의 의사소통은 거의 단절되어 있다. 이들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전문직임에도 불구하고 프리랜서이거나 독립적인 기획실 운영자가 아니라 항상 피라미드형 상하관계가 명확한 기업체 속의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인간관계의 기본적인 구도가 이러하므로, 극적인 성공이란 급격한 계층상승으로 설정되고 사랑과 결혼 역시 이 구도 속에 배치된다. 이 점은 90년대 초반의 트렌디 드라마와 크게 변별되는 지점이다. 90년대 트렌디 드라마의 장을 열었던 「질투」(1992)는 뮤직비디오나 광고에 버금가는 화려한 영상으로 눈을 즐겁게 한다는 점에서는 요즈음의 트렌디 드라마와 같지만, 작품 속에서 상하관계와 계층상승의 강박증이 ‘야망의 콩쥐팥쥐형’ 드라마에 비해서는 물론 80년대까지의 드라마에 비해서도 훨씬 줄어들어 있다. 특정 직업세계에서의 성공담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승부」(1994)도 제목에서처럼 최고 강자가 되기 위한 치열한 ‘승부’가 그려지지만 인간관계는 층층시하도 아니고 수평적 의사소통이 단절되어 있지도 않으며 한꺼번에 뛰어오르는 계층상승을 꿈꾸지도 않는다. 층층시하의 직장과 급격한 계층상승 이야기는 「사랑을 그대 품안에」(1995)의 인기에 힘입은 바 큰데, 신세대적 소심함을 지닌 남녀 주인공이 계층격차에도 불구하고 솔직한 감정으로 사랑을 이루고 무엇보다도 계층상승·성공의 야망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야망의 콩쥐팥쥐형’ 드라마와 차이를 보인다. 「질투」와 같은 일상적이고 사소한 이야기들에 촛점을 맞춘 작품들의 신세대적 가벼움이,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서는 선 굵은 갈등과 시원스러운 극적 사건을 복원하는 대신 인물·사건의 희극적·만화적 형상화로 전환된다. 그러나 생사를 건 생존게임이나 계층상승은 그다지 강박증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급격한 계층상승 이야기가 상하관계와 계층상승의 강박증이라는 독특한 양상으로 전면화되는 것은 ‘야망의 콩쥐팥쥐형’ 드라마에 이르러서 확연해지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야망의 콩쥐팥쥐형’ 드라마에서 중요한 사건들은, 이러한 상하관계 속에서 펼쳐진다. 극단적인 음모와 권모술수, 거짓이 횡행하는 것은 그것이 통하기 때문이다. 전문직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노력에 의해 개척할 수 있는 영역은 매우 좁고 층층시하의 상하관계 안에서 윗사람에게 인정받음으로써만 모든 성공이 이루어진다. 전문직이라는 설정이 수용자 대중들의 꿈을 반영한 것이라면, 윗사람에게 인정받아야만 살 수 있는 층층시하의 상하관계의 직장이란 설정은 대도시 주민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사무·전문직 대중의 현실 체험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층층시하에서 하급자가 아무리 노력하여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봤자 상급자의 인정이 없이는 성과나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윗사람은 악한 인물의 음모와 거짓에 잘 속거나 능력 있는 하급자를 시기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주인공과 일상생활을 함께 하는 중간직급 인물은 하급자인 주인공의 행운이나 능력·승승장구를 시기어린 눈초리로 경계하며,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경영자급의 상급자는 악한 인물의 거짓과 음모에 영락없이 속아, 하급자 주인공의 진정성이나 능력을 인정하지 못한다. 게다가 층층시하에서 상하간의 의사소통은 거의 완벽하게 단절되어 있다. 하급자인 선한 인물은 거짓과 음모로 인해 벌어진 문제상황에 대해 상급자에게 거의 아무런 해명도 하지 못한다. 상급자에게 중요한 것은 결과일 뿐이고, 선한 인물의 진정성이나 악인의 음모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줄 여유는 거의 없어 보인다. 의사소통이 단절되어 있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다는 답답함과 안타까움은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주요한 정조의 하나이다.
셋째, 성공과 실패에 우연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며, 종종 어찌할 수 없는 태생의 문제와 연결되기도 한다. 이는 수직적 상하관계, 상하간 의사소통의 단절, 윗사람이 주인공의 성공의 열쇠를 쥐고 있는 상황 등과 관련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주인공의 성공이란 윗사람과의 좋은 관계와 그의 인정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가능해지는 것이 된다. 일의 성과와 달리, 호감과 관계란 업무의 엄밀함을 넘어선 인간적 만남을 통해 정서적으로 구축되는 것인데, 그 대목에서 우연이 개입할 여지가 많아진다. 선한 여자주인공이, 그녀를 결정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남자주인공과 우연히 길이 엇갈리고 사소한 오해로 관계가 소원해지는 내용(같은 장소에서 남녀가 아슬아슬하게 엇갈려 만나지 못하는 장면이야말로 이런 드라마에서 매우 자주 배치되는 인상적 장면이다), 사고당한 부잣집 아들딸의 생명의 은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우연에 의해 뒤바뀌거나, 우연에 의해 부모자식 관계가 뒤바뀌어 부잣집 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거나 하는 식의 설정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인생의 성패가 우연과 인간관계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말하자면 ‘야망의 콩쥐팥쥐형’ 드라마에서의 우연의 남발이란, 단지 극작술 미숙에 의한 사건전개의 필연성 미달이라기보다는, 극의 핵심을 관철하는 세계인식과 관련있는 좀더 본질적인 것이다.
이들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태생과 가문(혹은 가정환경)에 대한 집착은, 우연에 의해 인생의 중대사가 결정된다는 생각이 단숨에 높은 계급으로 도약하고 싶다는 강박증적 욕망과 결합한 양상이다. 예컨대, 남자주인공이 사주의 젊은 아들(대개는 외국유학에서 갓 돌아온)인 핵심부서 책임자로, 악한 여주인공이 회사 사주(혹은 실세의 고위직)의 딸로 설정되어 있는 식이다. 이들이 자신의 나이·능력이나 노력에 비해 빨리 높은 위치에 오른 이유는 운좋은 태생 때문이다. 이런 운을 타고나지 않은 인물이 급격한 계층상승을 이룩하는 방법이란 난데없이 상속자가 나타나는 것뿐이다. 「비밀」에서는 고아인 줄 알고 가난하게 자라난 아이가 부자인 생모를 만나게 되는데, 이 행운이 우연히 악한 주인공에게 잘못 주어지거나 악한 주인공이 이를 의도적으로 가로챈다는 설정 속에는, 부모라는 배경을 업고 단숨에 최고에 도달하고 싶은 욕망과, 그런 배경이 없이 개인의 능력만으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방법에 대한 지독한 회의가 배어 있다.
넷째, 앞서 지적한 바 있는 야망을 가진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인데, 이는 ‘야망의 콩쥐팥쥐형’ 드라마의 매우 중요한 특성이다. 우리나라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여자주인공들이 사랑만이 아니라 직업세계에서 계층상승의 야망을 불태우며 격렬한 경쟁을 벌이는 이야기가 이토록 대중화된 경우는 전무하다. 이 현상은 드라마의 수용자인 젊은 여성들이 이전과는 달리 현모양처형의 전업주부가 아니라 사회적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이 가능한 직장생활과 그 속에서의 성공을 희망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역사에서, 수동적인 신파적 여상상으로부터 사회적 야망을 불태우는 여성인물형으로의 변화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80년대 김수현과 홍승연 등의 작품(「사랑과 야망」 「성난 눈동자』 등)에서 나타나는 여성인물의 성격변화에서 이미 이러한 조짐이 드러났고, 90년대 초 트렌디 드라마는 신파적 청승기와 패배주의를 확실히 떨어낸 구김살 없이 발랄하고 능동적이며 당찬 여성상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 유형의 드라마가 형성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발휘한 「사랑을 그대 품 안에」는 가난하지만 순진하고 발랄한 ‘캔디’형 여주인공의 전형을 만들어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 안에서의 선악 경쟁은 남자주인공들이 맡고 있고 여자주인공들은 사회적 지위 향상이나 사랑에 대해 수동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야망의 콩쥐팥쥐형’과 다르다. 사회적 성공을 놓고 격렬한 경쟁을 벌이는 여주인공은 라이벌 자매의 성격화가 돋보였던 1997년 「신데렐라」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나는데, 이 작품의 성공은 라이벌 두 여자를 선악인물로 단순화해놓은 ‘야망의 콩쥐팥쥐형’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물론 요즘 트렌디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이 중심이 된 작품이 없지는 않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야망의 콩쥐팥쥐형’의 구도를 그대로 남녀 성별만 바꾼 형태가 2000년에 방송된 「뜨거운 것이 좋아」 「신귀공자」 「태양은 가득히」(이 작품은 트렌디 드라마로 분류되기는 힘들지만 인물 구도는 동일하다) 등이다. 그런데 이렇게 두 남자가 부잣집 딸과의 결혼, 출세의 기회를 놓고 경쟁을 벌이는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는, 그다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야망을 가진 남성 이야기는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라서 신선함을 느끼게 하지 못하기 때문인 듯하다. 이 시대 ‘야망의 콩쥐팥쥐형’이 지닌 신선함이란, 그 야망의 주인공이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야망의 콩쥐팥쥐형’ 드라마는, 여태까지 설명한 몇가지 특성·요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 중 몇가지 요소가 다른 유형의 드라마로 전이되거나 단독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사랑을 그대 품 안에」나 「신데렐라」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야망의 콩쥐팥쥐형’ 드라마가 본격화되기 이전 단계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부잣집 수양딸로 들어갈 기회를 쌍둥이 동생으로부터 가로채는 화소를 사용한 「덕이」나, 라이벌에게 시계 도둑질의 누명을 씌워 곤경에 빠뜨리는 화소를 쓴 「가을동화」 등 2000년에 방영된 작품의 경우는 ‘야망의 콩쥐팥쥐형’ 드라마가 최고 인기에 이른 시기에, 몇가지 인기 화소를 가져다 쓴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선악 인물의 써바이벌게임 같은 극단적인 경쟁, 수직적인 사회 속에서의 급격한 계층상승에의 집착, 우연한 행운과 태생에 의해 달라지는 인생 등의 특성은, ‘야망의 콩쥐팥쥐형’ 드라마가 만화나 고소설과 흡사하다는 느낌을 준다. 정상적 의사소통이 단절되어 있는 수직적 인간관계 안에서의 권모술수와 그에 속는 윗사람이라는 설정은 마치 ‘중립적 임금과 충신·간신’ 혹은 ‘중립적 아버지와 현모양처·악첩’의 삼각구도와 흡사하며, 부와 지위의 대물림과 결혼을 통한 계층상승 등은 왕자·공주의 결혼 이야기의 변형태로 보인다. 특히 여성이 야망의 주인공으로 설정된 점 역시 순정만화와 흡사하다는 느낌을 주는데(최근의 순정만화는 이러한 구도에서 탈피하고 있으므로 80년대까지의 순정만화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이는 성인 수용자를 위한 극영화나 방송극이 사랑만을 위해 사는 수동적인 여성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을 때에도 어린이용 순정만화에서는 사회적 성공(그 성공이란 것이 발레리나나 피겨스케이팅 선수 등 매우 한정적인 직업에 불과하기는 했지만)을 위해 노력하는 여성주인공이 자주 등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야망의 콩쥐팥쥐형’ 드라마가 만화에서 적잖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인데, 이 유형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보이는 「미스터 큐」의 원작이 허영만 만화이며 이후 많은 작품이 일본 만화의 표절시비를 겪은 것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이들 작품이 만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드라마가 선 굵은 사건 흐름이나 선명한 갈등축을 지니는 것은 극예술의 본질에 비추어 당연한 지향의 하나일 수 있지만, 그것이 이런 식으로 정리된 것, 특히 감정표현이나 인물유형이 단순해진 데는 만화가 미친 영향이 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체험과 정서의 리얼리티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성인 수용자에게 만화 같다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이들 드라마가 높은 인기를 유지한 것은, 당대 현실 속의 생활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정서의 리얼리티와 욕구·욕망의 절실함이 매우 크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3. 경제불황의 절망감과 극단적 야망
‘야망의 콩쥐팥쥐형’ 드라마는 늘 유행했던 것이 아니라, 1998년부터 본격화되어 2000년에 가장 극성한 유형이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시기에 이러한 특성을 지닌 드라마들이 대중적 인기를 끌었을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시기 우리 사회와 대중예술 전반의 변화로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1997년 하반기와 1998년은 90년대 대중예술의 흐름이 확연한 변화를 보이는 시기이다. 1992년부터 본격화된 90년대 대중예술의 새로운 흐름은, 서태지라는 스타와 신세대문화라는 세대담론을 온 사회의 관심거리로 만들면서 90년대를 문화의 시대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90년대 대중예술은, 1인당 국민소득 1만불 시대의 자본주의적 풍요로움, 문민정부 시대에서 비롯된 상대적인 정치적 여유로움과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의 태도, 사회주의권 몰락과 세계화 이데올로기로 만들어진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배타적 믿음 등을 바탕으로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었다. 합리성·일관성과 윤리성이라는 틀에 매이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고자 했고, 여태껏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어 사고의 주변에서 맴돌았던 일상의 삶들에 적극적으로 눈을 돌리게 되며, 영화에서 코미디가, 드라마에서 트렌디 드라마가, 대중가요에서 댄스뮤직이 주도적인 흐름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들 새로운 작품은, 단정하게 꾸며진 연기 대신 일상적인 어투와 속도를 지닌 대사, 화려하게 꾸며진 무대의상이 아닌 자연스러운 반바지와 야구모자, 논리적 필연성이 떨어지지만 현실에서는 늘 일어나는 사소한 사건들로 채워져 있다. 순수하고 영원한 순정적 사랑 이데올로기가 부정되고, 젊은 남녀는 서로 어쭙잖은 자존심을 세우거나 사소한 일로 다퉈 우스꽝스럽게 헤어지기도 하며, 오랜 연애나 사랑의 결실인 듯한 결혼이 사실은 지루함과 관성을 만들어낸다는 사실도 서슴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새로운 인식과 태도를 지닌 젊은 세대들의 동류의식이 돋보인다. 90년대 초·중반 젊은 감각의 로맨틱코미디 영화들은 이전처럼 가족이나 사회적 환경에 그다지 영향받지 않는 젊은 인물들이 순전히 자신들의 감정이나 자존심, 사소한 오해 때문에 투닥거리며 싸우다 화해하는 이야기들이다. 텔레비전의 트렌디 드라마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질투」는 친구인지 연인인지 자신들조차 헷갈리는 두 주인공의 자연스러운 사랑이 돋보이며, 삼각관계가 형성되어도 라이벌에 대해 악감정을 드러내지 않아 같은 세대끼리의 수평적 친밀감이 매우 두드러진다. 여기에 여주인공의 어머니는 어린 딸보다도 더 철없고 순진해 보일 정도로 권위적이지 않아 딸과 친구처럼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신세대적인 수평적인 친밀감을 강화해주고 있다. 「마지막 승부」도 스무살 또래 청소년들이 몸을 부딪치면서 나누는 우정과 사랑이라는 수평적 관계가 극의 중심에 배치되어 있다. 이해득실을 따지는 어른들의 세계와 젊은 세대들의 풋풋한 갈등이 대비되어 드러나며, 그 젊은 세대끼리의 갈등은 젊은 땀을 함께 흘리는 동류의식으로 원만히 해결된다.
그러나 이러한 90년대 신세대문화의 상승기류는 1995년을 계기로 안정화·속류화의 방향으로 선회하다가, 1997년 하반기 경제불황이 확연해지면서 90년대 초반의 작품경향으로부터 결별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대중가요계에서는 댄스뮤직과 사회비판적인 얼터너티브록의 기세가 꺾이고 서정적인 발라드가 부활하기 시작했으며(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의 인기에서부터 세기말 최고 인기가수로 부상한 조성모의 발라드에 이르기까지), 영화계에서는 비현실적·비일상적 공간에서 시공을 초월한 순정적 사랑의 서정성이 부활하고(「접속」 「편지」로 시작하여 올해 「번지점프를 하다」 「선물」에 이르기까지), 최근 엄청난 인기를 모은 「친구」에서 확인되듯 폭압적인 학창시절이나 폭력조직의 가학·피학을 함께 겪는 남성적 우정과 힘에 대한 그리움이 강하게 드러난다. 90년대 초·중반과 달리 먹고사는 문제가 다시 절박한 문제로 다가왔고, 따라서 90년대 젊은 세대들이 보여준 변화를 수용할 여유가 생기지 않는 사회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대중들은 이전에 의심하고 부정했던 순정적 사랑이나 인간적 의리에 기대어 위로받으며 감상적이나마 눈물로 삶의 불안함을 해소하고 싶어진 것이다.
1998년부터 시작된 ‘야망의 콩쥐팥쥐형’ 드라마의 인기는 바로 이러한 경제불황의 사회분위기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90년대에 고삐가 풀려버린 자본주의적 욕망이 결코 줄어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997년 이후 명예퇴직·정리해고의 가능성이 목줄을 죄고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막막할 정도로 취업난이 심화된 시기에, 이제는 평생직장이 있을 수 없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긴장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세계화 시대의 무한경쟁 이데올로기는 사회 전체를 강퍅하게 만들었다.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찍어누르지 않으면 안되며, 그것을 위해서는 악마에게 영혼이라고 팔고 싶다는 극단적인 약육강식의 생존경쟁 태도와 이런 세상으로부터 난자당한 마음의 상처들이, 바로 이러한 ‘야망의 콩쥐팥쥐형’으로 주조되어 드러난 것이다. 즉 이 시대의 대중들은, 오금이 저릴 정도의 극악한 써바이벌게임 같은 직장생활의 스트레스, 오로지 승자가 되는 것 이외의 다른 길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윗사람에게 자신의 노력과 진정성이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는 억울함 등을 형상화한 이런 드라마에 공감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가슴 조이며 사는 것이 꼭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의 부족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태생적 한계나 악인의 위해 때문이라는 위안을 얻으며, 환상인 줄 알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구원자를 만나 행복하게 잘 사는 꿈을 잠시나마 꾸어보는 대리만족감을 갖고 싶은 것이다. ‘야망의 콩쥐팥쥐형’ 드라마가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이 사회 대중들의 이러한 사회심리와 체험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야망의 콩쥐팥쥐형’ 드라마와 같은 시기에 또 한 유형의 드라마가 함께 유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육남매」로 본격화되어, 「국희」 「덕이」로 이어지고 있는, 중장년층의 어린 시절인 5,60년대를 배경으로 하여 ‘가난했지만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상투적 명제에 꼭 들어맞는 내용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그것이다. 끼니 걱정을 할 정도의 상황에서 억척스레 일하여 가난을 극복해내는 고생담·성공담으로 ‘이렇게 어려운 시절을 거쳐왔는데 이 정도 고생에서 주저앉을 수 없다’는 투지를 불러일으키면서 그래도 지금보다 따뜻한 인간적 믿음에 위로받는 효과를 발휘함으로써, 살벌한 현재의 삶을 순정만화적으로 주조해낸 ‘야망의 콩쥐팥쥐형’과 환상의 콤비(?)를 이루고 있다.
같은 시기 대중영화의 변화양상과의 대비도 흥미롭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비해 영화에서는 작품경향이 훨씬 다양하여 섣불리 단순화하면 안되지만, 이 시기의 대중적 영화에서 두드러진 양상은 순수한 사랑을 다룬 서정적 작품이나, 조직폭력배를 다룬 액션물의 유행이라 할 수 있다. 전자가 보수적 여성성을, 후자가 보수적 남성성을 잇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지만, 특히 두 부류 모두 텔레비전 드라마에 비해 훨씬 환상적이고 비일상적인 설정을 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순수한 사랑을 다룬 서정적인 극영화들은, 현실 속에서 이미 깨어져버린 순정적 사랑의 영원함을 형상화하기 위해 이승과 저승, 혹은 전생과 현생 등을 잇는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설정을 하거나, 주인공 중 하나가 죽음을 맞는다는 극단적인 설정,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한적한 소도시의 서정적인 풍경, 깔끔하게 다듬어진 미장센 등을 통해 현실적·일상적 감각을 제거해버리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3 조직폭력배라는 설정 속에서 남성적 힘과 인간적 의리·우정을 형상화한 작품 역시, 현실적·일상적 공간에서 벗어난 설정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4 경제불황 속의 불안한 대중심리에 대한 대중영화적 대응이 이렇게 비현실적·비일상적 시공간에서의 위안인 것에 비해, 텔레비전 드라마의 대응은 과거의 고생담이든 현실의 써바이벌게임 같은 이전투구든, 경쟁과 실업난에 찌든 현실 속 고통의 체험을 좀더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는 영화관람 행위가 일상으로부터 조금 벗어난 일종의 스페셜 이벤트의 성격을 지니는 것에 비해, 텔레비전 드라마의 시청 행위는 매일의 노동과 휴식의 싸이클 속에 들어 있는 일상적인 것이라는 점과 관련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서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심정은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을 정도로 착잡하다. 기본적인 윤리와 원칙이 무시되는 경쟁, 전근대적인 층층시하의 인간관계, 공사 구별이 되지 않는 기업경영, 태생과 정리(情理)에 의존한 출세, 출세에 매달리는 인물들이 뿜어내는 독기 등은, 만화 같은 유치함과 단순함으로 재정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을 정도로 현실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경제불황의 팍팍한 생활이, 대중들이 좀더 성숙하게 삶을 성찰하고 느낄 여유를 가질 수 없도록 하여 만화 같은 단순함으로 대중을 몰아넣은 것일 수도 있다. 올 중반기의 새로운 주류 경향으로 부각된 사극 역시, ‘야망의 콩쥐팥쥐형’의 핵심이었던 극단적인 써바이벌게임과 정치 9단들이 벌이는 지략싸움이 정치판이라는 배경 속에서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것이어서, 그 착잡함은 더하다. 만화처럼 유치한 상투적 드라마라고 한마디로 정리하고 머릿속에서 치워버리면 마음은 편안해질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수많은 수용자 대중들이 바로 이런 현실 속에서 이런 드라마에 공감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이며, 그것이 이러한 드라마를 평가에 앞서 차분히 설명해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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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진 「드라마 ‘토마토’ 너무한 ‘짜깁기’ 」, 『문화일보』 1999.5.7.↩
- 『한국대중가요사』(시공사 1998) 13~35면과 「대중가요 연구에 있어서 균형 잡기」, 『인문과학』 31집(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1)에서 대중예술·서민예술의 본질을 고려한 연구방향에 대한 필자의 입장과 관점을 정리한 바 있다.↩
- 이영미 「사랑의 신화, 죽음의 유혹-‘가을동화’와 조성모」, 『사회비평』 2001년 봄호 참조.↩
- 가끔 텔레비전 드라마 중에서도 영화에서와 같은 작품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가을동화」나 「왕초」 같은 작품이 그러한데, 이런 작품은 드라마로서는 보기 드물게 영화적으로 잘 계산된 미장센과 화면의 명암구도를 보여주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아직 이런 작품은 이 시기의 주류 경향이라고 보기는 힘들며, 공중파의 방송심의나 제작비, 평면적 내러티브 등의 텔레비전 드라마의 관행으로 미루어보아, 앞으로도 주류 경향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