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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슬라보예 지젝의 라깡–헤겔–맑스주의
주은우 朱恩佑
미국 캔자스대학 방문연구원. 주요 논저로 『현대성의 시각체제에 대한 연구』 「들뢰즈, 시간의 이미지, 마이너영화」 등과, 역서로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등이 있음.
1. 한 농담의 운명
1991년 영어로 출간된 자신의 두번째 저작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의 서두에서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책의 배경으로서 한 농담이 겪어야 했던 운명에 대해 언급한다. 그것은 2년 전 출간된 자신의 첫번째 영어 저작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라깡적 기표(signifier)의 분열된 주체를 설명하며 인용했던, 라비노비치(Rabinovitch)라는 구소련의 한 유태인에 관한 농담이다.1
라비노비치는 이민을 가고 싶어했다. 이민국 관리가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소. 첫번째는 소련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잃고 반혁명이 일어나 새로운 권력이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모든 비난을 우리 유태인들에게 퍼부을 것이 두렵소. 유태인 학살이 다시 일어날 거고……” “하지만”, 관리가 가로막았다. “이건 순전히 난쎈스요. 쏘비에뜨연방에선 어떤 것도 변할 수 없소. 공산주의 권력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오!” “글쎄”, 라비노비치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것이 나의 두번째 이유요.”
불과 2년 사이에 엄청난 세계사적 대격변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 농담의 농담으로서의 유효성은 상실된 반면,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소련을 떠난 유태인들의 이유는 정확히 라비노비치가 거론한 첫번째 이유였다. 그래서 지젝은 이 농담의 전후 도치를 상상해볼 것을 제안한다.
이민국 관리에게 라비노비치는 이렇게 대답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소. 첫번째는 러시아에서 공산주의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고 여기선 어떤 것도 실제로 변하지 않을 거란 점을 내가 잘 알고 있는데, 이 전망이 나에겐 견딜 수가 없소……” “하지만”, 관리가 가로막았다. “이건 순전히 난쎈스요. 공산주의는 도처에서 해체되고 있소! 공산주의 범죄에 책임있는 자들은 모두 엄중히 처벌받을 것이오!” “그것이 나의 두번째 이유요!” 라비노비치가 대답했다.
바로 이 한쌍의 농담 속에 슬로베니아 라깡학파(the Slovene Lacanian School)의 정치적 배경이 담겨 있다. 그들은 예전에 공산당의 전체주의적 통제에 대항해 진정한 맑스주의적 혁명 기획과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이론적·정치적으로 투쟁했고, ‘현실로 존재했던 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에는 다시 국수주의적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부활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새로운 전체주의의 위협과 서구 자본주의의 무자비한 침공 앞에서 근본적인 다원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지키고 실현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2
이 목적을 위해 역설적으로 사회이론, 특히 정치이론과는 언뜻 무관해 보이기 쉬운 라깡(J. Lacan)의 정신분석학을 이론적 무기로 삼고, 이를 통해 칸트(I. Kant)와 헤겔(G.W.F. Hegel)을 비롯한 독일 관념론 철학을 다시 읽으면서 맑스주의의 혁명적 성격을 새로이 다듬어내려 하는 데 이들의 이론적 특유함이 있다. 류블랴나(Ljubljana)대학을 중심으로 포진하고 있는 슬로베니아 라깡학파는 1970년대 초부터 프랑스 철학을 전유(專有)하기 시작했고 70년대 말 ‘정통’ 라깡주의를 지향하는 ‘이론정신분석학회’(the Society for Theoretical Psychoanalysis)를 창립했는데, 라끌라우(E. Laclau)가 지적하듯이 정신분석의 임상적 차원과는 별 연계를 맺고 있지 않다. 이들 작업의 주요 분야는 앞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계몽주의 철학, 특히 독일 관념론에 대한 라깡주의적 독해, 이데올로기와 권력에 대한 라깡주의 이론의 개발, 대중문화와 예술에 대한 라깡주의적 분석 등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마지막 세번째 분야는 이들이 슬로베니아 바깥 세계에서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하는 데 한몫 단단히 했는데, 여기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물론 지젝이다. 1949년생인 그는 현재 류블랴나대학 사회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있는데, 공산주의 시절 체제가 비판적 지식인과 학생 간의 접촉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연구직에 붙박아둔 조치가 낳은 ‘변증법적 전도’의 덕을 톡톡히 누리면서 슬로베니아와 영미권을 오가며 활발한 작업을 전개하고 있다.3
지젝은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의 서론에서 자기 작업의 이론적 공간을 헤겔 변증법, 라깡 정신분석 이론, 그리고 현대 이데올로기 비판의 세 고리가 형성하는 라깡적인 보로매우스의 매듭(the Borromean knot)4으로 묘사한 바 있다. 세 고리 모두가 에워싸고 있는 장소인 ‘증상(징후)’은 대중문화에 대한 자신의 향유(희열)이며, 라깡의 이론은 다른 고리들을 물들이고 고리들의 관계와 매듭 전체를 틀짓는다.
마지막으로, 그의 독자들을 항상 매료시키는 지젝의 재치(witticism)에 대해서. 지젝 자신은 자신이 이용하는 농담들이 텍스트의 재치와는 달리 자신의 사유의 노선이 가진 근본적인 ‘차가움’과 그 기계적인 전개를 가리는 데 봉사하는 ‘상징적 미끼’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 미끼는 라비노비치에 대한 농담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의 정치적·철학적 (정신)분석들의 겉보기에 비타협적인 황량함을 발랄하고 반어적인 정치적 프로그램들로 의뭉스럽게 변형하는”5 효과를 발휘한다.
2. 라깡에 관해 당신이 항상 알고 싶어했던 모든 것……
지젝과 그 동료들의 이론적 틀이 되는 라깡의 이론은 이른바 후기 라깡의 그것이다. 대체로 ‘정신분석의 윤리’에 대한 쎄미나(1959〜60)를 중심으로 라깡 이론에서는 강조점의 이동이 일어난다. 지젝의 표현에 따르면 욕망의 변증법에서 희열(jouissance)의 불활성(不活性)으로, 암호화된 메씨지로서의 증상(징후)으로부터 희열로 충만된 문자로서의 징환(sinthome)으로, 언어처럼 구조화된 무의식으로부터 그 심장부의 사물(the Thing), 상징화에 저항하는 희열의 중핵으로의 이동. 간단히 말하면 상상계와 상징계의 관계로부터 상징계와 실재계의 단락적 접속으로 이론축이 이동한 것이다. 그리하여 지젝의 라깡주의에서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실재계(the Real)이다.
라깡에 있어 상징계는 기표들의 사슬로서 의미의 그물망을 형성한다. 이 상징적 질서가 언어적 존재로서의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reality)을 구성한다. 항상 미끄러지고 부유하는 기표들은 우연히 정해지는 하나의 주인 기표(‘고정점’point de capiton으로서의 ‘기의 없는 기표’signifier without signified)에 의해 일시적으로 정박(anchoring)됨으로써 소급적으로 의미망을 형성한다. 그리고 상징계는 또한 ‘아버지의 이름’으로서의 법이라는 비인격적인 심급(즉, 주인 기표)에 의해 매개되는 상호주관적 관계의 망이기도 하다.
그러나 상징적 질서로 통합되지 않고 상징화에 저항하는 부분이 항상 남는다. 이 의미화의 사슬을 빠져 달아나는 잔여의 영역이 실재계이다. 실재계는 의미의 영역 너머에 있기 때문에 상징적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며, 쾌락 원칙을 넘어서는 희열, 맹목적인 충동의 등록소이다. 실재계가 표명되는 곳은 의미화의 사슬이 파열되는 곳이기 때문에, 실재계는 상징적 현실의 통합적 외관을 위협한다. 그러나 동시에 실재계는 역설적으로 상징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재계와의 외상(外傷)적인 만남을 통어하려는 상징화의 시도를 통해 기표들의 자동적인 운동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징계는 바로 자신의 불가능성의 조건을 자신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삼으며, 자기 자신 속에 항상 무의미한 실재계의 작은 조각을 포함하고 있다.
‘의미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실재계가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을 통합하는 일관된 상징적 질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라깡의 표현을 따르자면, “큰타자(the Other)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젝이 파악하는 라깡 이론의 급진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젝에 따르면, “오늘날 라깡적 주체는 분할되어 있고, 가로질러 지워져 있으며, 의미화 사슬 속의 결핍과 동일하다는 것은 평범한 말이 되었다. 그렇지만, 라깡 이론의 가장 급진적인 차원은 이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큰타자, 즉 상징적 질서 자체 역시 하나의 불가능한/외상적인 중핵, 하나의 중심적인 결핍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근본적인 불가능성에 의해 빗장 질러져 있다, 가로질러 지워져 있다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6
다른 한편, 평범한 말이 되었다곤 하지만 라깡적 주체 역시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것보다 더 급진적인 차원을 갖고 있다. 라깡적 주체의 ‘탈중심성’은 나는 나 자신에게도 투명하지 않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고, 후기구조주의에서처럼 주체를 주체 위치로 환원하는 것 이상을 뜻한다.
상징적 질서 속의 한 기표에 의해 대리됨으로써 구성되는 주체는 발화의 주체와 발화된 언표의 주체로 분할되어 있다. 마치 식인종을 찾으러 온 백인 탐험가에게 “이 지역에는 더이상 식인종이 없어요. 어제 우리가 마지막 놈을 잡아 먹어버렸거든요”라고 말하는 원주민처럼(라비노비치 농담도 이 분할을 보여준다. 그는 두 가지 모순적인 언표를 발화하고 있다). 이 분할은 주체가 의미와 존재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음의 표현이다. 언어의 질서에 편입될 때 주체는 자기 존재의 상실이라는 댓가를 지불한다. 기표와의 동일시에 의해 자신의 의미의 세계가 창출되는 대신, 의미망에 포섭되지 못하는 자신의 존재는 잔여의 영역인 실재계에 속함으로써 자신이 도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라깡에게 있어 기표는 결코 기의와 만나지 못한다). 자기 존재로부터의 이러한 소외는 주체란 결국 무(無)에 다름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그의 존재의 진실은 실재계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체 자신이 상징계가 무에 기초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그는 큰타자의 결핍, 상징계 속의 실재계적 진공의 자리에 위치하기 때문이다(상징적 동일시의 대상인 주인 기표는 기표들간의 관계에선 결핍의 기표이다).
3. ……그러나 히치콕에게 물어보긴 두려웠던 것
지젝은 예술과 대중문화의 갖가지 장르를 자유분방하게 누비는데, 이는 문화적 생산물들에 대한 정신분석적 독해라는 일종의 ‘응용 정신분석학’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중문화에서 가져온 예들을 이용하여 라깡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들을 정교히 다듬어내려는 작업이다. 그는 “나는 어떤 라깡적 개념에 대해서 내가 그것을 대중문화의 본래적인 저능함 속으로 성공적으로 번역해낼 수 있을 때만 그 개념을 올바르게 파악한 것으로 확신한다”7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중문화 분석의 중요성은 그것이 판타지의 논리를 잘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재계가 큰타자(즉, 상징계, 상징적 질서)의 존재와 주체의 자기 의식을 위협하는 한, 판타지가 필요하다. 판타지는 큰타자와 주체의 결핍을 가려준다. 주체에게 욕망의 좌표를 제공하는 판타지는 따라서 궁극적으로 큰타자의 욕망을 위한 스크린이다(라깡에게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즉, 큰타자의 비존재, 아버지는 이미 죽은 아버지라는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따라서 판타지는 현실을 틀지어준다. 지젝의 라깡 독해에 따르면 현실은 현실 검증(reality test)에 의해 결정된다 하더라도 현실 감각의 궁극적 보증은 우리가 현실로 경험하는 것이 어떻게 판타지 틀에 맞는가에 달려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판타지는 주체의 에고(ego)의 환영을 지탱해주는 버팀대를 제공하는데, 판타지의 내용을 이루는 것은 실현된 욕망이라기보다 욕망이 대상과 관계맺는 방식이기 때문에, 결핍의 자리에 위치하면서 상상적 차원에서 실재계적 사물을 대리하는 ‘대상 a’(objet petit a: 즉, 주체가 상징계에 편입되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분리한 대상, 따라서 자신의 결핍을 채워주리라 오인되는 욕망의 대상-원인)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라깡의 판타지 공식이 주체와 대상 a 간의 빗나간 만남($◇a)을 표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상징계 속의 불가능한 중핵, 이물異物로서의 실재계의 작은 조각 역시 같은 지위에 있다).
지젝이 드는 예를 하나만 보자면, 할리우드 영화에서 여성과 동물(남성)의 성교와 남성과 싸이보그(여성)의 성교에 관한 판타지가 있다. 강한 동물적 상대를 원하는 여성의 백일몽과 자기 상대가 자신의 소원을 모두 충족시켜주는 완벽히 프로그램된 인형이기를 원하는 남성의 백일몽, 이 둘을 함께 상영하면 ‘여성 싸이보그와 성교하는 수컷 원숭이라는 참을 수 없는 이상적 커플’에 도달하는데, 이 판타지는 ‘성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실재계적 진실을 다루는 한 방식이다.
이 판타지의 공간은 역설적이다. 위험할 정도로 실재계와 가깝게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금 거론한 판타지도 성관계의 불가능성을 가리는 동시에 그 자체가 이 불가능성을 증명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실재계의 견고한 중핵에 접근하는 유일한 지점은 꿈이다. 프로이트(S. Freud)가 거론했던, 죽은 아들이 나타나 “아버지, 제가 불타는 것이 안 보이세요?”라고 책망하는 어느 아버지의 꿈은 이 점을 지적한다. 그 아버지는 실재계와 조우하는 위험한 순간의 문턱에서 잠을 깼다(라깡). 즉, 아들의 메씨지의 진실은 “아버지, 제가 희열에 불타는 것이 안 보이세요?”였던 것이다(지젝). 말하자면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꿈속으로 도피한다는 통상적인 생각과 달리, 실재계와의 견딜 수 없는 만남을 피해 꿈에서 현실로 도피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젝이 보여주는 것은, 무덤에서 소생해나온 아버지(자신이 죽은 줄 모르는 아버지), 주체의 배를 가르고 튀어나오는 에일리언(‘나 자신보다 더 내 속에 있는’ 무엇) 등 대중문화의 생산물들에서 우리가 만나는, 갖가지 형상으로 귀환하는 사물이다. 또 히치콕(A. Hitchcock) 영화들에서는 사물적인 부분 대상(partial object)인 응시와 목소리, 아버지의 이름의 도래와 함께 억압되어야 했던 시원적 초자아로서의 어머니-사물을 만날 뿐만 아니라, 그의 영화경력 전체가 점차적으로 성관계의 불가능성을 명확히하는 도정으로까지 읽힐 수 있다.
따라서 대중문화를 통해 라깡의 개념을 다듬는 작업은 정치적 차원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그 판타지 공간은 큰타자의 허구적 존재에 대해 전복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젝은 특히 이전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대중문화,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참조하는 것은 지극히 진보적인 잠재력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지젝 자신의 경험과 관련된 한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날 강연을 끝내고 났을 때 한 미국 학자가 지젝을 공격했다. “맙소사, 당신 나라는 화염 속에 죽어가고 있는데 당신은 히치콕에 관해 말하고 있구려.” 지젝의 대답은 이랬다고 한다. “그렇소, 우리는 히치콕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화염 속에 죽어가고 있소.”8
4.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 헤겔
라깡이 ‘프로이트로의 귀환’을 주장했다면 지젝은 ‘헤겔로의 귀환’을 주장한다. 이는 지젝의 이론적 면모를 가장 독특하게 만드는 점이다. 이 ‘헤겔로의 귀환’은 라깡 정신분석학에 기초한 새로운 독해를 통해 헤겔 변증법을 재활성화하는 것이다. 헤겔에 대한 오늘날의 비판과는 정반대로, 지젝은 오히려 차이와 우연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긍정, 적대들의 승인에 대한 가장 일관된 모델을 헤겔에게서 발견한다. ‘절대적 지식’은 ‘모순’을 모든 동일성의 내적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주관적 위치를 지칭하고, ‘화해’는 모든 현실을 개념 속으로 범논리주의적으로 지양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 자체가 라깡식으로 말해 ‘모두는 아닌’(not-all)이란 사실에 대한 최종적인 동의이다.9
지젝의 라깡적 (재)독해는 헤겔뿐만 아니라 독일 관념론 전체에 적용된다.10 지젝이 보기에 칸트의 선험적 전환이 묘사하는 것은 주체를 (경험적) 존재들의 거대한 사슬 내에, 우주의 전체 속에 위치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칸트의 주체는 병리적(즉, 경험적·실정적實定的) 내용이 완전히 비워내진 텅 빈 주체, 문자 그대로 라깡적인 주체이다. “나는 생각한다”의 이 ‘나’는 현상계(즉, 라깡적 현실, 상징적 질서)와 직관이 다다를 수 없는 ‘물 자체’의 영역(즉, 사물로서의 실재계에 상응하는) 사이의 간극에 위치한다.
여기서 헤겔은 칸트가 현상 너머 물 자체를 어떤 실정적 내용을 가진 실체로 이해하는 것을 비판한다. 지젝에 따르면, 헤겔의 입장은 현상이 이념과 일치하지 않음을 경험할 때, 그 근본적 부정성의 경험은 이미 순수한 근본적 부정성으로서의 이념 자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적 피안은 없으며, 현상계 너머에는 ‘무(無)’만이 있을 뿐이다. 물 자체는 순수한, 근본적인 부정성이다. 그리고 헤겔적 주체는 현상계 너머의 심연 자체(부정적 양식으로 이해된)이다. 따라서 지젝이 보기에 헤겔 철학은 칸트 이전의 형이상학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철저히 칸트적, 칸트보다 더 칸트적이다. 헤겔의 주체는 한계 너머 공간을 채울 어떤 실정적 내용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현상을 제한하는 순수히 부정적인 몸짓이기 때문이다.
지젝에 따르면 헤겔의 변증법적 운동은 이 순수한 절대적 부정성, 자기관계적 부정성으로 요약된다. ‘합(合)’은 ‘반(反)’의 지양이 아니라 정확히 ‘반(反)’과 일치한다. 라비노비치 농담을 다시 예로 들어보자. 라비노비치의 두번째 대답은 관리의 반론과 내용이 일치하면서 장애물(관리의 반론)을 자신의 긍정적 조건으로 바꾼다. 이는 새로운 실정적 내용의 추가 없이 단순한 형식적 전환, 관점의 변화에 의해 이루어진다. 지젝이 볼 때, 헤겔 변증법의 논리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래서, 악명높은 ‘부정의 부정’은 부정성의 대체가 아니라 부정성 자체가 긍정적 기능을 갖는다는 사실의 경험이다.
따라서 정신이나 개념은 변증법적 운동 속에 최종적으로 대립물의 형태 속에서 자기 자신을 만난다. 헤겔의 “정신은 뼈다”란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읽혀야 한다. 그런데 정신과 뼈라는 절대적으로 양립불가능한 두 항의 등치, 주체와 단단한 대상의 전적인 불활성의 이 순수한 부정적 운동은 주체는 상징화에 저항하는 잔존물과 상관적이라는 라깡의 판타지 공식($◇a)의 헤겔판 아니겠는가? 또는 합리적 총체성으로서의 국가는 경험적·비합리적이고 칸트적 의미에서 병리적인 개인인 군주의 신체에 의해 완성된다는 헤겔의 지적은 상징적 질서 속의 불가능한-실재계적 중핵으로서의 라깡의 ‘이물’을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지젝은 라깡의 ‘프로이트로의 귀환’은 “아직 완전히 프로이트주의자가 아니었던 프로이트는 이미 라깡주의자였다”는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지젝의 ‘헤겔로의 귀환’은 ‘칸트보다 더 칸트적이었던 헤겔은 이미 라깡주의자이기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일 터이다. 동시에 그것은 역으로, 명시적 진술 속에서는 헤겔을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사실을 모르는 바로 그곳에서 라깡은 헤겔주의자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11
5.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그리하여 지젝은 헤겔의 『정신현상학』 종결부에서 의식이 자신에게서 실정적 존재의 모든 전제들을 일소하는 순간 도달한 순수한 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다른 이름이며, 이는 라깡의 용어로 “큰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과 같다고 본다.
큰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징적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사회학적으로 보자면 이는 곧 ‘사회’(Society)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라끌라우와 무페(C. Mouffe)가 보여주듯이, 사회는 화해될 수 없고 환원불가능한 다양한 적대들로 분열되어 있으며, 사회의 외관은 이데올로기 장에서 부유하는 기표들의 정박(anchoring)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지속적인 헤게모니 투쟁의 (잠정적인)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적대들로의 분열이라는 사회의 이 실재계적 진실이 가려져야 하며, 이를 위해 이데올로기, 더 정확히는 이데올로기적 판타지가 요구된다. 그것은 곧 ‘사회적 판타지’ ‘사회의 판타지’이다.
판타지가 문제되는 한,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기표의 운동과 호명(interpellation)의 차원을 넘어선다. 따라서 지젝은 이데올로기 비판의 두 가지 절차를 제안한다. 하나는 이데올로기적 텍스트에 대한 담론분석, 징후적 독해이다. 그러나 이를 보충하는 또다른 절차가 필요한데, 그것은 “희열의 중핵을 추출하는 것, 의미의 장을 넘어 그러나 동시에 그 안에서 이데올로기가 판타지 속에 구조화된 전(前)이데올로기적 희열을 함축하고 조작하고 생산하는 방식을 접합해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순수한 화신’이라 할 수 있는 반유태주의 이데올로기를 예로 드는데, 그것의 기본 매트릭스는 간단히 말하면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태인은 사회의 징후(증상)이다”라는 것이다.
담론분석의 수준에서, 유태인 형상에 투자된 상징적 중층결정의 망은 전치(displacement)와 응축(condensation)으로 포착할 수 있다. 계급적대를 비롯해 모든 사회적 적대는 건전한 사회체와 그것을 부패시키는 기생적인 힘으로서의 유태인 사이의 적대로 전치된다. 이런 전치는 유태인 형상에 갖가지 특징들(부당이득 취득자, 음모가, 비밀권력의 담지자, 부패한 반기독교도, 우리의 순결한 여자들의 유혹자……)이 응축됨으로써 지탱된다. 이 수준에서 유태인 형상은 암호화된 메씨지라는 의미에서 징후(증상), 사회적 적대의 왜곡된(disfigured) 표상이다.
하지만 유태인 형상이 사회구성원들의 욕망을 사로잡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선 근본적 불가능성의 텅 빈 장소를 메우는 씨나리오, 즉 판타지의 논리가 도입되어야 한다. 사회적-이데올로기적 판타지의 책무는 사회가 존재한다는 환영, 적대적 분할에 의해 가로질러지지 않고 각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통합된 사회의 비전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런 조합주의적 비전과 사실적 사회분열 사이의 거리를 설명하는 것이 유태인이란 ‘이물’의 역할이다. 그러므로 유태인은 사회의 구조적 불가능성을 부인하는 동시에 체현하는 ‘물신’이며, 이 수준에서 유태인 형상은 결핍을 대리하는(사회의 비존재를 가리는) 타협 형성물로서의 징후, 즉 ‘징환’이다.
큰타자의 결핍의 자리에 위치한 이 유태인 형상은 ‘사물의 수준으로 고양된 대상(a)’이란 의미에서 ‘숭고한 대상’이다. 숭고한 대상은 불가능한 희열에 몸체를 부여한다. 이제 그들이 왜 그토록 격렬한 증오의 대상이 되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불가능한 희열을 즐기고 있다고 상상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 희열은 우리가 상실한 것, 우리에게서 훔쳐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희열의 절도’의 역설은 우리가 한번도 그 희열을 즐겨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희열의 절도를 타자 탓으로 돌리는 것은 “우리에게서 훔쳐간 것이라고 추정되는 것을 우리는 결코 가져본 적이 없다”라는 외상적 사실을 은폐한다.12
6. 누군가 전체주의를 말했는가?
그러므로 판타지로서의 이데올로기는 정확히 물신주의적 부인에 기초한다. 큰타자가 없으면 현실도 없는 것이므로 큰타자의 비존재에 대한 물신주의적 부인은 거의 보편적이다. 그러나 이 부인이 정점에 달하는 전체주의는 그것의 도착(倒錯)적인 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민주주의혁명 이후에 등장하는 전체주의적 ‘지도자’는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오. 난 단지 여러분의 의지의 집행자요”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한다. 여기서 트릭은 그가 자기 권위의 준거로 내세우는 것(인민, 계급, 민족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체 인민은 당을 지지한다”는 스딸린주의식 표어는 동어반복이다. 인민은 당과 그 지도자에 체현되는 한에서만 인민이기 때문이다. 당을 지지하지 않는 자는 이미 인민의 적이다. 마치 “내 약혼녀는 나와의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어요. 약속을 어기는 순간 그녀는 더이상 내 약혼녀가 아니니까요”라고 하는 거나 같은 것이다.
이 전체주의적 지도자는 스스로를 큰타자의 의지(인민의 의지, 역사의 의지 등)를 실현하는 도구-대상으로 위치시킨다. 이것의 리비도(libido) 경제는 싸디스트의 그것과 같다. 라깡의 싸디즘적 도착자의 공식 a◇$는 판타지 공식에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뒤바꾼 것이다. 싸디스트는 스스로 큰타자(“즐겨라!”라고 명령하는, 법의 외설적 이면으로서의 초자아)의 대상이 됨으로써 자신의 분열을 희생자에게 전치한다. 유죄를 고백할 것을 강요받는 스딸린식 공개재판의 피고는 이 분열을 강요받는 것이다.13 그러므로 전통적 지배자가 주인 기표(S1)로서 권위를 행사하는 반면에, 전체주의적 지도자는 초자아의 자리인 지식(S2)에 기대어 권위를 행사한다(지도자의 지혜, ‘역사법칙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 등).
따라서 지젝은 민주주의에 대한 라깡적 정의를 역설적으로 이렇게 제시한다. “인민(the People)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정치적 질서.” 주권은 인민에게 있지만, 그 인민은 권력의 주체들의 집합체일 뿐, 하나의 통일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구조적 이유로, 르포르(Claude Lefort)가 보여주듯이 권력의 장소가 텅 빈 장소인 것이 민주주의 질서이다. 그 자리를 차지하는 자는 그 누구도 오직 일시적으로만 그럴 수 있을 뿐이며, 실재계적인-불가능한 주권자의 ‘대용물’일 뿐이다. 스스로를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실정적 자격을 가졌다거나 ‘알고 있는 주체’로 내세우는 자는 정의상 사기꾼이다. 자꼬뱅의 공포정치를 이끌며 쌩-쥐스뜨(L.A. de Saint-Just)가 말했듯이 “누구도 결백하게 통치할 수 없다.”
권력의 장소가 비었다는 점이 ‘민주주의적 발명’(르포르)을 근본적으로 혁신적인 것으로 만든다. 민주주의 사회는 그 제도적 구조가 사회적 결속이 해체되는 순간, 실재계가 분출하는 순간을 자신의 ‘정상적인’ 재생산의 일부로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가 그것이다. 그것은 실재계적-불가능한 주권자의 선택의 순간이며, 결과는 합리적으로 계산이 불가능하다(선거일 며칠 전의 한 사건이 대세를 뒤집을 수도 있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이 철저히 ‘비합리적인’ 성격을 은폐하려는 것은 헛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배반한다. 실재계적 중핵을 보지 않으려는 시도, 하나의 예외도 인정하지 않는 보편화의 시도는 전체주의로 전락해버린다(현실사회주의의 혁명적 기획이 실패한 원인도 이 점에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남성적인 보편화의 논리가 아니라 여성적인 ‘모두는 아닌’14의 논리를 터득하는 것, 처칠의 과소진술이 담은 교훈을─오직 이런 맥락에서만─배우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가능한 정치체계 중 최악의 것이다. 다만 문제는 다른 것들 중에 더 나은 것이 없다는 점이다.”
7. 유령이 여전히 배회하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은 오늘날의 ‘포스트’ 시대의 전지구적 성찰화(global reflexivization)15는 그 자신의 유령들을 낳고 있다고 갈파한다.16 첫번째는 맑스의 『공산당선언』(오늘날보다 150여년 전 맑스의 전망이 더 잘 들어맞는 때가 또 어디 있었던가!)의 첫구절에 나오는 바로 그 유령, 그러나 과거가 아니라 ‘혁명적 미래의 유령’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유령은 바로 자본 그 자체이다.
맑스가 말하듯 견고한 모든 것을 대기 속에 녹여버리는 자본의 미친 자기고양적 순환, 자본의 냉혹하고 ‘추상적인’ 논리는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체계적 폭력으로서 자본주의의 실재계를 이룬다. 이에 대한 반응의 하나가 구사회주의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권위주의적 민족주의이다. 조합주의적 유혹은 자본주의의 필연적 이면이다. 영구적인 과잉생산과 욕망의 악순환을 낳는 자본주의와 대면해 파시즘의 꿈은 바로 과잉 없는 자본주의, 그것이 야기하는 적대가 없는 자본주의, 즉 자본주의 없는 자본주의였다. 다른 한편, 오늘날 자유민주주의는 자본의 흐름, 그 탈영토화 속으로 자발적으로 복속되고자 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은 이 전체(Whole)냐 구멍(Hole)이냐 사이에서 ‘모두는 아닌(비전체)’으로의 길을 찾아야 한다.
후기구조주의적인 이른바 탈중심화된 주체는 전복적이기보단 오히려 후기자본주의 게임의 일부가 되었고, 뉴에이지를 비롯한 다양한 반계몽주의(obscurantism)가 득세하고 있다.17 이런 상황에서 세번째 유령은 다름아닌 기독교이다. 지젝은 사도 바울에 의해 죄와 법의 악순환을 사랑으로 깨뜨린 것으로 해석된 기독교의 그 외상적 몸짓에서 기존의 상징적 질서에 대한 절대적 거부이자 새로운 질서가 가능한 우연성의 공간을 여는 안티고네적 몸짓으로서의, 라깡이 말하는 ‘행위’(act)의 모델을 본다. 지젝이 자신을 ‘바울적 유물론자’(a Paulinian materialist)18라고 지칭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그러므로 지젝이 제시하는 라깡적 주체는 구조에 종속된 주체가 아니라 실재계적 진공에 자리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자유의 공간을 여는 주체이다. 바로 이것이 지젝이 후기구조주의자들과 정반대로 계몽주의적 주체를 완전히 수용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그가 이해하는 관념론의 초월적인 주체는 필연성의 고리를 중지시키는 ‘자유의 심연’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비판적 지식인은 언제나 실재계의 구멍을 차지해야 하는 의무를 안고 있으며, 철학은 우리가 현실적인 것으로서 만나는 것이 어떻게 또한 가능한가의 질문을 제기하는 순간 시작된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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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농담은 동구권에서 잘 알려져 있던 농담이라고 한다.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Verso 1989, 175〜76면과 Zizek,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Verso 1991, 1〜2면을 볼 것.↩
- 전 유고슬라비아연방의 공식이데올로기는 이른바 ‘자주관리’ 개념에 기초한 것이었지만, 지젝과 그 동료들의 말에 따르면 현실은 소련체제나 다른 동구 사회주의국가들과 별다른 차이 없이 중앙집중식 일당독재체제였고, 이데올로기와 현실제도의 이런 괴리는 국가 또는 당이 이데올로기적으로 (현실의)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 아이러니컬한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슬로베니아는 지리적으로나 종교·문화·경제적으로나 유고연방 국가들 중에서 가장 서방에 가깝다. 또 슬로베니아에서 공산주의체제에 대한 저항은 이념적 성향이 다른 여러 집단들로 나뉘어 진행되었기 때문에, 유고연방 해체 이후 상황은 국수주의적 민족주의 세력이 완전히 헤게모니를 장악한 쎄르비아나 끄로아띠아와는 사정이 약간 다르다.↩
- 슬로베니아의 기존 학계와 정부는 여전히 지젝과 그 동료들에 대해 관대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하나의 학과를 만들지 못하고 있으며, 대중적으로도 슬로베니아 내에서는 자신들의 학문적 작업보다는 정치적 활동으로 더 알려져 있다. 예컨대 지젝은 유명한 정치평론가일 뿐 아니라 1989년 최초로 치러진 대통령(5인으로 구성) 선거에 자유민주당(the Liberal-Democratic Party) 후보로 나서기도 했는데, 라깡학파가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한 것은 민족주의 우파가 정권을 잡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으며, 이들은 어디까지나 맑스주의 좌파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다른 한편, 이들은 생태주의 등 새로운 사회운동에 일관된 지지를 보낸 사람들 역시 슬로베니아 내에서는 자신들 라깡주의자들뿐이었다고 주장한다.↩
- 라깡이 후기 저작에서 심리적 존재의 위상학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것. 실재계·상징계·상상계의 세 고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하나의 고리가 서로 묶여 있지 않은 나머지 두 개의 다른 고리들을 연결시키며, 이 고리들 중 하나를 떼어내면 나머지 두 개의 고리들도 풀리게 되어 있다.↩
- Elizabeth Wright and Edmond Wright, ed., The Zizek Reader, Blackwell 1999의 편집자들의 “introduction,” 4면. 이 절의 내용에 대해서는 같은 「서론」과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 라끌라우가 쓴 「서문」, 그리고 지젝과 그의 동료 레나따 쌀레끌(Renata Salecl)이 잡지 Radical Philosophy에서 가졌던 대담(Peter Osborne, ed., A Critical Sense: Interviews with Intellectuals, Routledge 1996에 수록) 등을 참조하라. 한편, 지젝을 소개하는 글로서 국내에서 발표된 것으론 홍준기 「지제크의 라캉 읽기─『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중심으로」(『문학과사회』 2000년 겨울호)가 있다.↩
-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122면.↩
- Zizek, Metastases of Enjoyment, Verso 1994, 175면. 대중문화 분석은 지젝의 모든 저작에서 종횡무진으로 구사되지만, 특히 여기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Zizek, Looking Awry, MIT Press 1991(국역본: 『삐딱하게 보기』, 김소연·유재희 역, 시각과언어 1995)과 Zizek, Enjoy Your Symptom!, Routledge 1992(국역본: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주은우 역, 한나래 1997)이다.↩
- 지젝이 덧붙이는 말에 따르면, “그것〔히치콕(의 영화)〕은 민족주의에 대한 최상의 해독제이다.”(Peter Osborne, ed., 앞의 책 44면) 히치콕에 대해선 우디 앨런의 영화(「당신이 섹스에 관해 항상 알고 싶어했던 모든 것(그러나 물어보기 두려웠던 것)」)에서 제목을 따온, 지젝이 편집한 Everything You Always Wanted to Know about Lacan(But Were Afraid to Ask Hitchcock), Verso 1992를 볼 것.↩
-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6〜7면. 헤겔에 대한 지젝의 이런 입장은 1988년 프랑스어로 출간한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 헤겔이 통과하다』에서 이미 개진되었다. 헤겔을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라 부른 사람은 라깡이다.↩
- 헤겔과 칸트에 대한 독해는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그리고 Zizek, Tarrying with the Negative, Duke University Press 1993 등을 볼 것. 한편, Zizek, The Indivisible Remainder, Verso 1996 및 Slavoj Zizek/F.W.J. von Schelling, The Abyss of Freedom/Ages of the World, Michigan University Press 1997에서는 셸링을 읽고 있다.↩
- 큰따옴표로 표시된 두 인용문은 각각 Zizek,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224면 주13, 94면 주28. 따라서 지젝의 관점을 받아들일 때, 라깡의 역설은 그가 지극히 헤겔적인 논리로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헤겔을 비판했다는 점이다.↩
- 이상의 내용은 특히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125면 이하; Zizek, Tarrying with the Negative, 123면 이하 등을 볼 것.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은 알뛰쎄르 이데올로기론의 비판적 발전이자 그것을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것이라 볼 수 있다. 1970년대 슬로베니아의 철학적 지형은 당의 공식 이데올로기인 프랑크푸르트학파 맑스주의와, 민족주의와 연관된 저항세력의 하이데거주의(제도권 안에 편입되어 있던), 그리고 제3의 라깡주의자 및 알뛰쎄르주의자로 나뉘어 있었고, 앞의 양세력은 이론적으로 서로 투쟁한 것이 아니라 공히 알뛰쎄르주의를 공격했다. 이는 알뛰쎄르주의가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에서 순수하게 남아 있던 유일한 세력이었기 때문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Zizek, Tarrying with the Negative, 228〜29면.↩
- 스딸린주의의 굴락(수용소)/공개재판은 나찌주의의 강제수용소/홀로코스트와는 논리가 다르다. 이 둘의 비교에 대해선 Zizek, 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 Verso 2001, 2장과 3장을 보라.↩
- 라깡의 성화(sexuation) 공식에서, 남성 공식에선 보편적 기능(모든 x는 기능 Φ에 종속된다)이 예외의 존재(기능 Φ에서 면제되는 x가 적어도 하나는 존재한다)를 함축한다. 반면, 여성의 공식에선 특수한 부정(모든 x가 기능 Φ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이 예외란 없음(기능 Φ에서 면제될 수 있는 x는 없다)을 함축한다. 여기서 기능 Φ는 상징적 거세의 기능을 뜻한다.↩
- 지젝은 여기서 물론 앤서니 기든스(‘탈전통적 질서의 사회’)와 울리히 벡(‘위험사회’) 등의 ‘성찰적 현대화’론을 염두에 두고 있다.↩
- Zizek, The Fragile Absolute, Verso 2000. 이 책은 지구화·정보화에 대한 현국면에서의 지젝의 잠정적인 대답이다. 또 Zizek, Tarrying with the Negative의 뒷부분에서도 이미 동구권의 현실을 중심으로 한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다.↩
- 이에 대해선 Zizek, The Ticklish Subject, Verso 1998 및 Zizek, 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 5장 등을 보라.↩
- The Zizek Reader, ⅸ면. 기독교에 대한 해석은 Zizek, The Fragile Absolute를 볼 것.↩
- Zizek, Tarrying with the Negative, 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