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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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창비시선 200’ 기념 특집

 

나희덕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등이 있음.

 

 

 

도끼를 위한 달

 

 

이제야 7월의 중반을 넘겼을 뿐인데

마음에는 11월이 닥치고 있다

삶의 기복이 늘 달력의 날짜에 맞춰 오는 건 아니라고

이 폭염 속에 도사린 추위가 말하고 있다

11월은 도끼를 위한 달이라고 했던 한 자연보전론자의 말처럼

낙엽이 지고 난 뒤에야 어떤 나무를 베어야 할지 알게 되고

도끼날을 갈 때 날이 얼어붙지 않을 정도로 따뜻하면서

나무를 베어도 될 만큼 추운 때가 11월이라 한다

호미를 손에 쥔 열달의 시간보다

도끼를 손에 쥔 짧은 순간의 선택이,

적절한 추위가,

붓이 아닌 도끼로 씌어진 생활이 필요한 때라 한다

무엇을 베어낼 것인가, 하루에도 몇번씩

내 안의 잡목숲을 들여다본다

 

부실한 잡목과도 같은 生에 도끼의 달이 가까웠으니

7월의 한복판에서 맞이하는 11월,

쓰러지지 않기 위해 도끼 자루를 다잡아보는 여름날들  

 

 

 

벽오동의 上部

 

 

나는 어제의 풍경을 꺼내 다시 씹기 시작한다

6층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아서

앞비탈에 자라는 벽오동을 잘 볼 수 있다

며칠 전만 해도 오동꽃 사이로 벌들이 들락거리더니

벽오동의 풍경은 이미 단물이 많이 빠졌다

꽃이 나무를 버린 것인지 나무가

꽃을 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래도 꽃을 잃고 난 직후의 벽오동의 표정을

이렇게 지켜보는 것도 또다른 발견이다

꽃이 마악 떨어져나간 자리에는

일곱살 계집애의 젖망울 같은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 풍경을 매일 꼭꼭 씹어서 키우고 있다

누구도 꽃을 잃고 완고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6층에 와서 벽오동의 上部를 보며 배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거칠고 딱딱한 열매도

저토록 환하고 부드러운 금빛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이미 씨방이 닫혀버린 벽오동 열매 사이로

말벌 몇마리가 찾아들곤 하는 것도

그 금빛에 이끌려서일 것이다

그러나 저 눈 어두운 말벌들은 모르리라

캄캄한 씨방 속에 갇힌 꿈들이 어떻게 단단해지는가를

내 어금니에 물린 검은 씨가 어떻게 완고해지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