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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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창비시선 200’ 기념 특집

 

장석남 張錫南

1965년 인천 출생.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젖은 눈』 등이 있음.

 

 

 

여름숲

 

 

저만치 여름숲은 무모한 키로서 반성도 없이 섰다

반성이라고는 없는 綠陰뿐이다

저만치 여름숲은 城보다도 높이, 살림보다도 높이 섰다

 

비바람이 휘몰아쳐오는 날이면 아무 대책 없이 짓눌리어

도망치다가,

휘갈기는 몽둥이에 등뼈를 두들겨 맞듯이 휘어졌다가 겨우,

겨우 펴고 일어난다

그토록 맞아도

그대로 일어나 있다

 

진물이 흐르는 햇빛과 뼈를 익히는 더위 속에서도 서 있다

그대로 거느릴 것 다 거느리고 날 죽이시오 하듯이

삶 전체로 전체를 커버한다 조금의 반성도 죄악이라는 듯이

묵묵하다

그건, 도전 以前이다

 

그래도 그 위에 울음이 예쁜 새를 허락한다

휘몰아치는 그 격랑 위의 작은 가지에도 새는 앉아서 운다

떠오르며 가라앉으며 아슬아슬히 앉아

여름의 노래를 부른다

 

새는

쫄아드는 고요속에서도 여름숲을 운다

城보다도 높이, 살림보다도 높이

여름을 운다

 

 

 

살구를 따고

 

 

내 서른여섯살은 그저 초여름이 되기 전에 살구를 한 두어 되 땄다는 것으로 기록해둘 수밖에는 없네. 그것도, 덜어낸 무게 때문에 가뜬히 치켜올라간 가지 사이의 시들한 이파리들의 팔랑임 사이에다가 기록해둘 수밖에는 없네.

 

살구나무에 올라

살구를 따며

어쩌면 이 세상에 나와서 내가 가졌던 가장 아름다운,

살구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손아귀를 펴는 내 손길이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나무 위의 저녁을 맞네

더이상 손닿는 데 없어서

더듬어 다른 가지로 옮겨가면서 듣게 되는

이 세상에서는 가장 오랜 듯한, 내 무게로 인한

나뭇가지들의 흐느낌 소리 같은 것은, 어떤

지혜의 말소리는 아닌가

귀담아 들어본다네

살구를 따고 그 이쁘디이쁜 빛깔을 잠시 바라보며

살구씨 속의 아름다운 방을 생각하고

또 그 속의 노랫소리, 행렬, 별자리를 밟아서

사다리로 다시 돌아와 땅에 닿았을 때 나는

이 세상을 다시 시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 서른여섯살은 그저 어느 저녁

살구를 한 두어 되 따서는

들여다보았다고 기록해두는 수밖에는 없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