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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1968년의 정치적 달력

타리크 알리·쑤전 왓킨즈 『1968』, 삼인 2001

 

 

임선기 林善起

시인·연세대 불문학과 강사 jaihopierre@hanmail.net

 

 

‘68혁명’(이하 ‘68’로 약칭)이 서른 돌을 맞던 지난 1998년에 1968: Marching In the Streets라는 원제로 출간된 이 책은, 우선 ‘68’은 과연 무엇이었나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들의 답변으로 읽힐 수 있겠다. 그 질문은 ‘68’의 지도자들 중 한사람이었던 저자 타리크 알리(Tariq Ali, 현 『뉴 레프트 리뷰』 편집위원)와 쑤전 왓킨즈(Susan Watkins)가 자신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한데, 저자들이 제출한 답변의 형식이 좀 독특하다. 그 형식이란 달력의 형식이다. 68년의 많은 날들 중에서 ‘정치적인’ 날들을 선택한 후, 그 날들을 중심으로 어떤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는가를 저자들은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68’에 대한 연구서라기보다는 68년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지면 위에서 전개되는 이 다큐멘터리는 그러나 전혀 밋밋하지 않다. 당시의 상황을 기술하는 저자들의 붓은 카메라와 같아서 한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어 보여주는 듯하다. 다양한 그림과 사진, 그 당시 민중들의 생각을 고스란히 들려주는 증언 등이 저자들의 내레이션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현장감마저 느껴질 정도다. 이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것은 68년에 전지구적으로 일어난 급진적 움직임들이다. 1월 말 구정(舊正)을 기해 베트남에서 전개된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의 공세, ‘68년의 전형적인 이미지로 자리잡은 프랑스의 5월 혁명’ ‘프라하의 봄’, 올림픽 개최지 멕시코씨티 등에서 타오른 반정부 시위 등 이루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움직임들을 다루고 있다.

저자들은 이러한 급진적 움직임들을 보여주면서 ‘68’에 대한 몇가지 해석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해석에 크게 새로울 것은 없어 보인다. 베트남전쟁이 68년의 다른 급진적 움직임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해석은 가깝게는 카치아피카스(G. Katsiaficas)의 『신좌파의 상상력』(이후 1999)을 통해 접해본 터이고, ‘68’의 특징 중 하나가 그 전지구적인 외연에 있다는 점 역시 아리기(G. Arrighi), 홉킨즈(T.K. Hopkins), 월러스틴(I. Wallerstein) 공저의 『반체제운동』(창작과비평사 1994) 등에서 강조된 바 있어 조금은 진부하기조차 하다.

113-379사실 이 책은 ‘68’에 대한 기존의 해석에 새로운 무엇을 더해보겠다는 의도의 산물이 아니다. 저자들의 의도는 오히려 “가라앉은 대륙”(31면)일 수 있는 68년을 다시 물위로 끌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인양작업’의 동기는 무엇보다 이 책이 나온 1998년 무렵의 현실 비판에 있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고난받는 지구촌 곳곳의 민중들에게 ‘68’이 하나의 희망일 수는 없을까 하는 고민도 그 작업의 시발점에 들어 있는 듯싶다. 이러한 고민이 이 책의 저자들의 것만은 아니며, 세계화의 급류에 정면충돌한 후 그 대안 찾기에 골몰하고 있는 우리의 고민이기도 하다는 점에 이 책의 현재성이 있다. 우리는 번역자(안찬수·강정석)들과 함께 이렇게 자문할 수 있겠다. ‘68’의 정신은 과연 세계화라는 급류 속을 사는 우리에게 ‘변화를 위한 행동의 기반’이 될 수 있을까?

책의 말미에서 적고 있듯이 이 질문에 대한 저자들의 답변은 낙관적이지 않다. ‘68세대’의 구성원들 대부분에게 ‘68’은 왕년의 무용담까지는 아닐지언정 더이상 현재의 문제는 아닌 듯하고, “MTV에 열광하는 ‘걱정하지마, 행복해질 거야’(Don’t worry, be happy) 세대”(344면)는 “마약과 음주, 과소비와 영상문화”라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감추는 마취제”(345면)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감이 있다. 더구나 소련의 붕괴 이후 명실공히 ‘전지구적으로’ 그 위세를 떨치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비판정신의 모체인 인문학에마저 편입을 요구하는 작금의 현실에서야.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에게 ‘68’은 일종의 후일담으로 그칠 공산이 크다.

‘68’이 어떤 동기에서 시작되었든지간에 그것은 커다란 상징이다. 그것은 구좌파에 대한 조종(弔鐘)이었으며, 아이러니컬하게도 구좌파의 붕괴와 함께 다가올 전지구적 자본주의체제 혹은 세계화를 예견케 하는 예종(豫鐘) 같은 것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68’의 성공과 실패를 말할 수 있겠으나, ‘68’처럼 다양한 측면을 지닌 혁명의 경우 자칫하면 어느 한 면의 실패를 전체의 실패로 규정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우려가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68’은 정치적으로는 실패하였을지 몰라도 적어도 교육·문화·일상언어 등에서 가히 ‘혁명적’이라 할 변화를 낳았다. 1969년 3월에 파키스탄의 민중은 아유브 칸(Ayub Khan)의 군부독재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저자들도 지적하고 있듯이 ‘68’의 “가장 확실한 성공”을 이루었다(31면). 여성해방운동이 “공개적인 저항운동”으로 자리잡은 일 역시 ‘68’의 빛나는 성과 가운데 하나이다(254면).

아쉽게도 번역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에게 68년은 베트남 특수를 누리던 시절이었다(11면). ‘68’의 대척점에 서 있던 우리의 68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라는 과제가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다른 한편으로 ‘68’의 정신과 우리의 반(군부)독재운동의 정신이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만나지 않는지 공구(功究)해볼 필요가 있다. 이 두 가지 일에서 우리가 구할 바는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그것은 오늘을 사는 지혜일 것이다.

오늘의 우리가 68년의 급진적 움직임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또 무엇인가? 모든 억압에 대한 저항과 (국제적) 연대의 정신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일반적인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세계화의 급류를 타고 넘는 묘수가 ‘68’의 한 구호인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145면) 속에 들어 있다 말한다면 그 또한 지나치게 모호한 이야기이겠다. 존대법 폐지와 같은 언어의 변화를 통해서도 자유와 해방이 이루어진다(아니 혁명은 차라리 언어 속에서 완성된다) 함은 ‘68’에서 듣는 구체적인 소리의 일례이다. 저자들의 말처럼 역사에 반복되는 요소가 있는 것이라면(19면), ‘68’의 어느 부분이 우리 역사의 혼에 불을 지피는 일도 때로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오늘의 우리 역사가 다른 지역에서 일어날 어떤 실천의 영감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니, 넓게 보면 우리 역사가 우리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 또한 ‘68’에서 얻는 지혜이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문장들(36면 열세번째 줄 문장, 50면의 인용문), 부정확한 지식에서 오는 실수들(154면: 국립 중고등학교 Lycées→고등학교, 185면: 뱅상느→뱅쎈느)은 시의적절하고 전체적으로 다가가기 쉬운 번역에 섞인 티들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