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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창비시선 200’ 기념 특집
조기조 趙起兆
1963년 충남 서천 출생. 1994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낡은 기계』가 있음.
보석
1
가슴속에 무슨 응어리 같은 것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집 뒤로 뻗은 관악산 줄기가 있어서 이따금 오른다
나무와 새들의 노래, 다람쥐, 나비들의 춤, 얇은 바람이
어울려 놀면서도 조용한 오솔길이 있어서다
그 조용한 오솔길엔 긴 나무의자가 있고 그 위에는
작업복 가방을 베고 누운 사내가 있기도 하다
조금 평평한 곳에는 돗자리를 펴놓고 술을 같이 마셔주는
안주 하나 추가하면 노래도 한곡 부를 수 있는
입술을 붉게 그린 돗자리아줌마가 있기도 하다
이들도 오솔길과 함께 어울려 조용하기만 하다
이 한없이 고요한 시간과 풍경 속에서
저마다 단단하게 뭉쳐서 굳어지는 어떤 힘들을 느낀다.
2
누군가의 깨진 병 같은 울분이 할퀴었을까
발정난 짐승의 몸부림이었을까
어쩌면 자신의 확장에서 생긴 생채기이기도 하다
소나무에서 송진이 흐르고 있다
이것 또한 우주의 작은 폭발일진대
수천 수만의 시간을 응결시키는 폭발이다
시간이 공간을 찢고
공간이 시간 속으로 스며들 때
아픔은 아름다운 결정에 이른다.
3
산길을 내려 골목을 접어드는데
여름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노인의 명치께에서
노란 호박 한 덩이가 은근히 그늘을 빨아들이고 있다.
나사 하나
일을 안한 지 너무 오래라고 공구통의 공구들은 말한다 그러는 공구들이 안쓰러워 이따금 꺼내어 닦아줄 뿐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사포로 문지르는 상처에서 붉은 녹이 날린다 이 공구들을 잡고 나는 다시 일을 해야만 할까 일을 할수록 날이 무뎌지고 이가 빠지듯 삶은 더욱 불안하게 지속되는데 나는 또 이렇게 녹슨 공구들을 닦는다 더이상 이 공구들을 위해서 나를 값싸게 팔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나는 생의 불안처럼 잘 지워지지 않는 공구들의 붉은 녹을 벗기고 기름을 발라둔다 풀기 위해서다 이 공구들이 잠근 내 목줄을 조이는 나사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