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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문화론적 현실주의와 지정학적 현실주의
Z. 브레진스키 『거대한 체스판』, 삼인 2000
이삼성 李三星
가톨릭대 국제학부 교수
탈냉전 직후 미국의 고립주의 논쟁은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끝났다. 50만 대군을 파병한 가운데 미국이 전개한 걸프전 이후의 논쟁은 어떤 종류의 국제주의를 추구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후 미국의 많은 정치적 지식인들은 1940년대 냉전의 형성기에 죠지 케넌(George Kennan)의 「X 논문」이 했던 역할을 탈냉전시대에 재현할 것을 자처하면서 개입주의를 전제한 갖가지 세계경영전략을 제시해왔다. 이 가운데 자유주의와 대비되는 현실주의 경향으로서 쌔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의 문명충돌론은 문화론적 현실주의를, 그리고 『거대한 체스판』(The Grand Chessboard, 김명섭 옮김)에 드러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의 유라시아 경영론은 이를테면 지정학적 현실주의를 담고 있다 하겠다.
헌팅턴이 문명과 문화를 강조한 것은 언뜻 현실주의와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그의 문명충돌론은 미래의 국제질서에서 국가들간의 필연적 갈등과 권력투쟁을 강조한다. 다만 그 국가들 사이의 동맹과 갈등의 편가르기를 결정하는 요소가 문명과 문화라고 주장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브레진스키의 지정학론은 자유주의적 담론으로 적당히 뒷마무리를 했지만 더 전형적인 현실주의 담론이다. 브레진스키 역시 미래의 국제질서의 본질을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국가들 사이의 패권적 야망을 둘러싼 권력투쟁으로 이해한다. 다만 그 권력투쟁에서 적과 우방을 가르는 요소를 문화적 이질성 여부가 아니라 전통적인 의미의 정치경제적·군사전략적 이해관계의 충돌이나 공유(共有)로 보는 점이 다르다.
두 사람의 색깔 차이는 유럽과 중국에 대한 정책처방에서 드러난다. 헌팅턴에게 문명적 이질성은 반영구적이며 그 차이로 인한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유럽 안에서도 진정한 유럽과 사이비유럽은 구분되며, 그 비유럽에 동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과 러시아가 포함된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단결과 효율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같은 유럽문명권에 있는 나라들로 한정되어야 한다. 대서양동맹은 문명안보기구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것은 곧 NATO와 유럽연합의 확대를 반대하는 것으로 통한다.
이 논리는 중국에도 적용된다. 문명적 차이로 미국은 중국과 패권쟁탈 경쟁을 피할 수 없다. 미국의 선택은 장차 아시아에서 중국에 패권을 넘겨주든지 아니면 중국을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미국주도의 동맹질서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는 당연히 후자를 선호한다.
반면에 브레진스키가 주목하는 국가들간의 전통적인 정치·군사·경제적 이해관계의 교차와 착종은 공간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다차원적이고 가변적이다. 전통적 현실주의의 관점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동맹의 대상도 한정하지 않는다. 가능한 한 많은 나라들을 미국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질서 속에 끌어들여야 한다. 여기서 민주주의라는 정치문화적 가치가 공유되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필수적이지는 않다.
그는 문명적 가치의 공유를 전제로 하는 헌팅턴의 귀족주의적 동맹의 논리를 채택하지 않는다. 미국주도 동맹의 전지구적 대중화를 추구한다. 그래서 NATO뿐 아니라 유럽연합을 동유럽 등으로 확대하는 것을 지지한다. 러시아까지도 미국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질서 속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다 미국이 아시아에서 중국, 일본과 삼각안보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이를 유럽 및 러시아와의 협력체제에 접목시키면, 유라시아 전체를 포괄하는 이른바 범유라시아 안보체제를 건설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그의 궁극적인 비전이다.
이 씨나리오는 방대한 자유주의적 플랜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브레진스키 사유의 실체가 아니라 외피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말하는 러시아와 중국의 포용은 미국주도의 질서, 그리고 미국과 가치와 이해관계를 공유한 질서 속에 러시아나 중국이 기꺼이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만일 미국이 이들과 공영을 모색하는 것과 미국중심의 동맹질서를 확고히 유지하는 것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면 미국은 어떻게 할 것인가. 브레진스키의 답은 명확하다. 그는 러시아와의 갈등을 무릅쓰고라도 미국이 주도하는 대서양동맹체제를 확대하고 미일동맹을 공고히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못박는다. 헌팅턴이 서방과 비서방 사이의 구분에 기초해 배제와 장벽을 통한 지배를 주창했다면, 브레진스키는 개입과 확장을 통한 지배를 주장한 것이다.
브레진스키의 현실주의적 교조는 대외정책에서 인권에 대한 고려가 현실적 권력관계를 무시한 것으로 불필요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비판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환경문제와 같은 ‘부차적인 문제들’을 부각시키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미국의 헤게모니를 연장함으로써 국제적 무정부상태를 효과적으로 방지하는 데 방해가 되며,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를 통해 전지구적인 지정학적 안정을 확보하는 데 무익한 잡음들에 불과하다는 인식이다. 그는 또한 말미에서 증대하는 NGO나 유엔의 역할을 언뜻 언급하지만 그것들은 미국주도의 세계질서를 보완하는 ‘부가적인 역사적 혜택’에 불과하다. 헌팅턴은 문명을 들먹이고 브레진스키는 범유라시아 안보체제를 운위하지만, 그들은 다같이 기본적으로는 20세기의 개념으로 21세기의 세계를 보고 있다. 냉전에서의 권력투쟁의 역사적 경험과 그 인식으로 탈냉전 세계의 질서를 관리할 것을 제안하는 셈이다.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전지구적 지배력(global primacy)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것이 왜 미국과 서방에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계에도 좋고 선한 것인지에 대하여 설명할 필요를 거의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전제될 뿐이다. 단지 기회 있을 때마다 미국의 패권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무정부적 야만상태를 강조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는 궁극적인 전지구적 공동안보의 질서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위해 미국이 자신의 무엇을 억지하고 어떤 것을 포기하면서 다른 사회들과 어떻게 공통의 것을 건설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좀더 자기성찰적인 비전은 드러나게 부재하다. 미국중심의 냉철한 경제전략적 이해관계와 동맹의 벽돌들 위에 그가 얹어놓은 이른바 ‘범유라시아 평화질서’라는 상상의 탑은 바빌론의 그것처럼 공허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