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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주체화의 빛과 그림자

허우성 『근대 일본의 두 얼굴: 니시다 철학』, 문학과지성사 2000

 

 

이정우 李正雨

철학아카데미 원장

 

 

주체는 자기규정을 통해 성립한다. “나는 …이다”(개인 주체) 또는 “우리는 …이다”(집단 주체)의 형식을 통한 자기정체성의 수립을 통해 주체는 형성된다. 삶이란 결국 무수한 주체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관계들의 총체이다. 철수의 주체, 여성 주체, 민족 주체, 계급 주체 등등. 그러나 주체화는 곧 객체화이다. 주체는 자신의 소여(所與)들을 내면화함으로써 주체화된다. 곧 주체화는 한편으로 소여들에 동화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소여들에 자신의 색깔을 입혀 자기화하는 것이다. 주체화는 능동이자 수동이며, 주체 되기이자 객체 되기이다. 인간은 주체화의 두 계기가 갈라지는 경계선상에서 살아간다.

주체화는 빛의 형성이다. 자신의 힘으로 포섭하지 못했던 객관적 소여가 주체 속에 녹아들어감으로써 주체는 자신을 보존하고 확충한다. 그 극단적인 경우는 주체가 겪는 한 순간의 ‘생명사건’을 이데아와 결합하는 경우이다. 로댕(R. Rodin)이라는 한 인간의 개별적이고 우연한 손놀림이 예술적인 이데아를 구현할 때처럼. 니시다 키따로오(西田幾多郞)의 사유는 사건과 이데아(화이트헤드A.N. Whitehead의 경우 영원한 객체, 들뢰즈G. Deleuze의 경우 순수 사건)가 결합하는 한 순간의 ‘생성즉존재(生成卽存在)’를 체현하고자 하는 현재의 사유이다. 그것이 곧 “자기가 자기 안에서 자기를 본다”는 것, “낯섦/불안/어둠의 경험을 친숙함/안심/밝음의 경험으로 전환하는 것”(121면)이다. 이 점에서 주체화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가는 행위이다.

그러나 빛의 형성은 곧 어두움의 형성이다. 객관적 소여를 자기화함은 자신 속에 빛을 확충하는 것이자 객관적 소여를 상대적 어두움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소여들은 주체의 눈길 아래 포섭됨으로써 주체 안에 녹아들어가지만, 그 소여들 하나하나 역시 주체이다. 그들은 눈길 아래 서기보다는 스스로의 눈길 아래 역시 타자들을 포섭하고자 한다. 주체화가 객체화와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삶의 건강성은 무너진다. 객체화가 주체화를 압도할 때 주체는 허위 주체로 전락하고, 주체화가 객체화를 압도할 때 타자들은 억눌린다. 그리고 이 두 과정은 똑같은 한 과정의 두 얼굴이다. 니시다의 전기(前期) 철학은 절대 주체화를 추구했고, 후기 철학은 절대 객체화를 추구했다. 그의 논리체계 내에서 이것은 일관된 것이지만, 바깥에서 보면 반대의 과정이다.

109-381객체화가 주체화를 압도하는 경우는 주체 바깥에 그에 동화되는 길 이외에는 달리 길이 없는 그런 절대 객체가 서 있을 때이다. 스딸린시대의 소련인들은 국가에서 제시하는 ‘철학’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위해를 당했다. 때문에 그들은 바깥에서 주어진 절대 객체에 스스로를 동화시킴으로써 주체화/객체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주체화란 사실상 전적인 객체화이다. 유신체제 시절 대다수의 어린 학생들은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웠고, 그 헌장에 따라 주체화/객체화되었다. 주체화는 비판을 동반하며, 그 비판을 통해 객체들은 때로 받이들여지고 때로 거부된다. 그러나 그런 비판과 거부가 허용되지 않는 공간에서 주체는 객체화됨으로써만 주체화되는 것이다.

니시다의 역사철학은 천황과 국체(國體)라는 절대 객체를 전제한다. 니시다는 전기 철학에서 객관적으로 주어진 소여들에 수동적으로 매몰되기보다 이들을 주체에 녹여넣어 능동적으로 주체화할 것, 한 순간의 생명사건에서 생명의 약동을 느낄 것을 역설했다. 그리고 이 철학을 역사철학으로 그대로 확장해 역사적 사건 속에서 역시 절대 주체가 되기를 역설했다. 그러나 천황과 주체라는 절대 객체에 자기를 던지는 것은 객체화이지 주체화가 아니다. 그것은 주체화로 오인된 객체화이다. 주체화는 자기규정과 더불어 성립한다. 그러나 그 자기규정이 외부에서 주어질 때 허위적 자기규정이 성립한다. 그것은 비판과 거부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동일화일 뿐이다. 니시다의 역사철학은 결국 주체화와 객체화가 맺는 양면적 관계를 보지 못함으로써 대동아공영권의 철학적 앞잡이로 전락했다. 니시다의 모습은 여러모로 유신 시절의 일부 한국 철학자들을 연상케 한다.

니시다의 한계는 결국 한편으로 서구제국주의의 피해자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중국과 한국을 점령한 제국주의라는 일본의 두 얼굴의 한계임을 저자는 역설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내면의 성숙과 사회적 비판 사이에는 일정한 간극이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니시다의 내면철학에서 생명의 약동을 발견하지만, 그의 역사철학에서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철학을 본다. 저자의 이번 노작은 이런 양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아쉽다면 책의 앞부분에 일본 근현대철학사의 지형도가 그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상세하게 조사해보지는 않았지만, 이 책은 일본 철학자를 단행본으로 다룬 최초의 책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아직 우리는 일본철학사의 흐름 자체를 거의 모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의 앞부분에서 일본 근현대철학사의 전반적 흐름과 그 안에서의 니시다의 위상을 그려주었다면, 책의 전모와 의미가 더 분명하게 드러났으리라고 본다. 이 점은 책의 1장에서 니시다 개인의 지적 성장과정을 길게 다루고 있는 점과 대조적이어서 여운을 남긴다. 어떤 책이든 그 책이 출간될 당시의 상황을 어느정도는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책의 말미에서 논의된 ‘역사철학 비판’에서 우리는 니시다의 사유가 자신의 동시대 사상가들 또는 그후에 등장한 사상가들에 의해 어떻게 해석되었고 비판되었는지를 어느정도는 감지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니시다가 부지런히 서구 철학자들을 읽고 그들과의 관련하에서 사유했다면, 과연 이들과의 연계고리와 대립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으리라. ‘이데아’라는 말을 쓴 이상 플라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또 종종 등장하는 칸트(I. Kant), 베르그쏭(H. Bergson) 등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보이지 않아 전반적으로 책이 평면적인 구성에 머문 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