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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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都鐘煥

1954년 충북 청주 출생.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로 등단. 시집 『접시꽃 당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부드러운 직선』 등이 있음.

 

 

 

범종소리

 

 

범종소리에도 빛깔이 있다면 맑은 청동빛은 아닐까

 

가수리에서 이제 막 동강으로 들어서며 서서히 넓어지는 지장천 저녁 물소리 그런 노을 물든 빛깔은 아닐까요 납의를 걸친 내세불의 유려한 어깨 곡선을 따라 흘러내리다 施無畏印의 손끝을 떠나 홀연 허공으로 나서는 목소리 옳거든 두려워 말라 그런 음성의 나직하고 포근한 빛깔은 아닐까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발길 돌려 어느 절에 들었는데요 늪에서 건져낸 그 절 미륵부처님 얼굴에 근심 가득 서려 있는 걸 보고 마음 안 좋았는데요 그때 저녁 범종소릴 들었어요

 

종소리 울려퍼지는 동안 나는 내가 열다섯 까까머리 소년이던 무렵 옛 용화사 범종 앞에 앉아서 오후 내내 화폭에 범종을 옮겨 그리던 날이 생각났어요 상대와 하대의 화려한 꽃무늬를 그리고 종의 젖꼭지와 하늘을 날아오르면서 곱게 꿇은 두 무릎 펴지 않은 비천상 그리며 복숭앗빛 엷은 저녁 노을 아래서 나는 잠시 황홀했었는데요

 

스무살 다 가도록 산으로 들어가고 싶은 꿈 끝내 못 이루고 그만 서른 고개 넘기며 삼악도 같은 세상에 때론 廣目天王처럼 눈 부릅뜨고 소리도 지르며 사는 동안 나는 범종을 속깊이 감추었지요 내가 그리고자 하는 범종은 아름다우나 당좌를 쳐도 소리가 나지 않을 것 같아서였어요

 

오늘 저녁 범종소리가 나를 이리로 오게 한 연유를 생각하면서 종소리 속에서 내가 다시 들어야 할 소리를 생각하면서 종소리 속에서 깊어지며 내가 버려야 할 소리들을 생각하면서 범종루 아래에 발이 붙은 채 범종소리가 소리의 끝을 물고 날아가는 서쪽 하늘 바라보았는데요

 

그때 먼 옛날 내가 그려넣지 못한 범종소리가 산허리를 감도는 저녁연기처럼 먼 곳으로부터 내게로 다가오는 게 보였어요 그 소리를 보다가 맑지만 여리지 않은 소리 혼자 울리지만 늘 여럿이 있는 쪽을 향해 가는 범종소리의 연한 청동빛을 떠올렸어요 다른 이들이 받는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는 동안 더 깊이 울려오는 소리의 빛깔을  

 

 

 

양안치 고개를 넘으며

 

 

양안치는 적수공권으로 고향 떠난 아버지 찾아 열몇살 어린 나이에 내가 혼자 강원도 땅으로 들어서며 처음 만난 고개였다 백마령 넘고 목행과 목계 지날 때까지도 겨울 들녘과 나루터 감싸안고 돌아 흐르는 강물이 아름다워 참을 만했는데 소태재 넘으면서 온몸을 조여오는 바람에 몸이 덜커덕덜커덕 소리를 내며 떨렸다 돌멩이를 만지고 있는 듯 딱딱하게 얼어가는 발 발이 시려 발가락 꼼지락거릴 때마다 눈물이 맺혔다

 

고개 옆에는 밤새 쌓인 눈에 큰 소나무 가지들이 뚝뚝 부러져 있었다 소리도 없고 무게도 없는 것이 작은 입김에도 금방 흩어져 날아가버리는 것이 모여 단단한 소나무 가지를 꺾는 걸 처음 보았다 눈 돌리면 아득한 낭떠러지 그때부터 고개를 넘을 때면 몸이 딱딱하게 굳어왔다

 

양안치보다 더 험한 큰양안치고개 넘어야 을씨년스러운 도시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는데 낯선 도시 낯선 사람들 낯선 많은 풍경을 만나고 헤어지며 파산한 아버지를 찾아 떠도는 동안 혼자 참고 혼자 견디고 혼자 낯선 시간을 찾아 들어가는 일에는 익숙하였지만 세상에 익숙하지 못하고 사람에 익숙하지 못한 채 세상의 몇발짝 뒤에서 그림자처럼 혼자 어두워져 제 몸을 흔들어대곤 하였다

 

양안치를 넘은 것이 내 인생에 거센 바람 몰아치는 많은 고개가 있을 것임을 미리 알려주는 첫여행이란 걸 그땐 몰랐다 어렵게 고개를 넘고 나면 또 고개를 만나고 그 고개 다 넘어서 만나는 것 또한 낯설고 차가운 풍경 경계의 눈초리 늦추지 않는 시선 새로 만나는 쓸쓸함과 눈발처럼 날아와 언 몸을 때리는 가난 그리고 끝없는 바람 그런 것들이 될 것임을 그땐 몰랐다 내 생의 남은 날들이 그럴 것임을 그땐 몰랐다

 

그러나 고개 앞에 서면 언제나 큰 싸움을 앞에 둔 사람처럼 주먹이 쥐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결연한 자세로 돌아서고 몸이 먼저 긴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낯선 곳을 떠도는 눈발처럼 허망하고 시리고 쓸쓸한 것들도 저희끼리 모여 단단해지며 나뭇가지를 꺾던 기억이 떠오르고 낯선 곳에도 언제나 낯선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길이 있다는 걸 기억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섬백리향

 

 

경기도 어느 초등학교인가 계시는 선생님께

섬백리향을 선물 받아가지고 와 기르면서

나도 이 꽃처럼 살 수 있다면 하고 생각했다

 

척박한 땅 가리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고

잎 전체에서 나는 향기로 나쁜 벌레 오지 않고

화려하지 않아도 향기가 백리까지 간다는

이 꽃만큼만 살았으면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잎이 마르는 듯 싶어 너무 자주 물을 주고

꽃은 안 피고 줄기가 처지는 듯 싶어

손때를 많이 묻히고 그래서인지

얼마 못 가서 죽고 말았다

 

내 마음 어느 구석에 너무 지나치거나

너무 모자라는 데가 있어서

 

조급하게 자랑하고 싶거나 은근히

내세우고 싶어서 어린 꽃을 힘들게 하다

공연히 꽃만 죽인 꼴이 되었다

 

향기를 가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척박한 땅에 살면서 향기롭게 산다는 게

아무나 되는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