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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기억상실증의 도시에 날아든 나비
영화 「나비」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이방인」에 이은 문승욱의 두번째 영화 「나비」는, 도시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비록 「나비」의 배경이 가까운 미래 한국의 어느 도시라고 설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영화 속의 공간은 온전히 현재의 것이다. 서울과 부산, 그리고 일본의 코오베 시에서 촬영된 장면들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미래도시의 이미지는 오히려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들─특히 아시아의 근대화된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도시공간에 대한 경험을 지극히 예리하게 반영해내고 있다. 역시 올해 개봉된 윤종찬의 「소름」이 근대적 주거공간의 전형적 예라 할 아파트를 매개로 우리사회의 한 징후를 드러내 보여주었다면, 「나비」는 비대해진 도시공간을 유랑하는 노마드(nomad)들의 혼란스러운 시선에 주의를 기울인다. 한편, 홍상수는 「강원도의 힘」에서 심도깊은 화면으로 관광객들을 응시함으로써 그간 우리에게 익숙하게 여겨졌던 하나의 관광지(라는 근대의 또다른 상품)를 뒤틀리고 낯선 것으로 보이게 만든 바 있다. 이상 언급한 세 명의 감독은 이처럼 공간에 천착함으로써 우리의 모더니티 경험을 돌이켜본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나비」에서 도시는 자동차라는 매개를 통해 이어붙여진 파편화된 공간들의 몽따주로서 제시된다. 계속해서 내리는 산성비, 재개발 아파트단지 주민들의 시위, 위험한 납중독자들과 그들을 쫓는 사람들 등으로 해서 차 밖은 항상 위험천만이다. 이런 와중에 영화에 등장하는 중심적인 세 인물들─망각의 바이러스를 찾아 독일에서 날아온 안나, 그녀의 바이러스 가이드 유키 및 택시운전사 K─의 여정을 이끄는 것은 단 하나, 망각의 바이러스에 대한 지표로서의 나비이다. 그런데 이 나비는 관객에게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혹은 우리의 여정을 방해하기 위해 감독이 파놓은 함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 영화 속의 인물들은 그 누구도 나비 따위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나비란 순전히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불완전하고 헐거운 내러티브를 지닌 영화라고 「나비」를 비난할 수는 없다. 나비는 미껠란젤로 안또니오니의 영화 「정사」(1959)에서의 사라진 여인─이 여인의 이름 또한 안나이다─을 떠올리게 한다. 안나를 찾아 황량한 섬과 도시를 배회하던 인물들은 이제 고스란히 「나비」 속으로 이동해온다. 안또니오니가 건축물들의 기하학적인 구도를 통해 현대적 도시의 풍경을 낯설게 그려냈다면, 문승욱은 디지털카메라의 평면적인 이미지로 포착된 인물들의 표정 속에서 그러한 풍경에 대한 반응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기이할 만큼 ‘느긋하게’ 실종된 여자를 찾아 헤매던 「정사」 속 인물들의 행위와, 상처를 치유한다는 명목으로 바이러스를 찾아다니는 「나비」 인물들의 행위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사실 영화가 보여주는 흥미로운 전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나비」에서 바이러스는 질병의 원인이 아니라 치료제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바이러스를 피해 도시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몰려든다. 알베르 까뮈의 소설 「페스트」에서 망각의 바이러스라는 소재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고 말하는 감독은, 본디 이 영화를 악몽의 미래도시를 빠져나가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담아낸 SF로 기획했다고 밝힌 바 있다. 발상의 전환이 「나비」를 도시공간에 대한 더욱 적절한 탐구로 만들어놓는다. 애타게 자신의 과거와 기억을 찾아 헤매던 SF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은, 자신의 가족을 찾는 이름없는 택시기사 K─카프카의 인물은 이제 어떠한 중심으로도 향하지 않고 완벽하게 탈중심화된 도시공간을 배회하는 존재가 된다─, 남들의 기억을 보관하는 바이러스 가이드 유키, 그리고 결국 자신에게도 이미 잊혀진 과거가 있었음을 깨닫고 오열하는 주인공 안나의 모습 속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의 행위를 특별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망각의 도시’라는 존재이다. 이 도시는 우리의 (무)의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아스라한 연기로 만들어진 거대한 환영에 다름아니다.
한편, 우리는 「나비」를 「소름」과 함께 생각하면서 여기에 김기덕의 「수취인 불명」을 끌어들일 수도 있다. 그러면 「나비」가 문승욱의 전작 「이방인」 및 단편영화 「어머니」와 맺고 있는 관계가 드러난다. 여기엔 해체된 가족과 가족의 재구성이라는 문제의식이 있다. 이것 역시 근대화 이후 우리가 맞닥뜨리게 된 주요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다소 기묘하게도 이러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문승욱이 끌어오는 것은 잉마르 베리만과 따르꼬프스끼이다. 아이를 잃은 과거를 지닌 여인과 그녀보다 어린 다소 철없는 임산부라는 설정은 베리만의 「페르소나」에 등장한 두 인물의 교묘한 변형이다.(「나비」에는 「페르소나」처럼 두 여인의 유사성을 강조하기 위한 시각적 장치들이 다수 배치되어 있다.) 보는 이를 전율하게 만드는 바닷가 출산 장면의 집요함은 분명 따르꼬프스끼의 「거울」의 도입부, 혹은 「노스탤지어」의 마지막 장면의 집요함에 맞닿아 있다.
「이방인」의 태권도 사범 김은 한국을 떠난 이후 13년 동안 많은 도시를 떠돌아다닌 인물이다. 그는 베를린에 딸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찾아가기를 주저한다. 「나비」의 안나는 바로 그 도시, 베를린으로부터 한국으로 날아온 여자다. 물론 여기서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사실일까?). 구태여 두 인물의 혈연관계를 따져볼 필요는 없다. 그 둘이 유사한 상처와 죄의식을 지니고 있음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안나가 K에게 버럭 화를 내고 택시 밖으로 나가버리는 행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안나에게 있어 K는 유산(혹은 낙태)된 아기의 귀환이다. 이는 안나의 배에 난 수술자국과 K의 목에 난 긴 상처 사이의 유사성을 통해 분명히 강조되고 있다. 안나의 상처와 죄의식은 다시 「페르소나」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가 지니고 있던 상처 및 죄의식과 뚜렷한 연관을 갖는다. 「이방인」의 김이 제자 미하우에게 처음으로 격하게 화를 내는 것은, “아빠 노릇이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라는 말이 그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안나와 김은 어쩌면 일생에서 처음으로 진정한(대안적?) 가족의 형성이 주는 기쁨을 맛보았지만 다른(전통적) 가족관계의 회복을 위해 이 기쁨을 포기해야만 한다.
문승욱 감독은 「나비」에서 디지털이라는 매체가 자신을 미장센 강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다고 밝혔다. 디지털카메라 사용에 따른 공간심도의 감소, 채도의 손실은 오히려 감독이 인물의 표정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나비」는 비로소 문승욱의 인물들이 살아숨쉬기 시작한 첫번째 영화이다. 둔중한 육체의 움직임 위로 언뜻 떠오르는 작은 흔들거림, 즉 나비의 몸짓을 인물들에게 부여한 것이야말로 「나비」의 가장 큰 미덕일 것이다. 우리는 숨은 나비를 찾기 위해 인물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영화에서 ‘진짜’ 나비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쉬운 질문이고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감독은 사실 아무런 숨바꼭질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능한 대답 가운데 한가지만 제시하는 것으로 글을 맺기로 하자. 누군들 이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는 풍성한 물의 이미지를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안나는 우리를 위해 대신 울어주기 위해 이 치유불가능한 기억상실증의 도시에 잠시 날아든 한마리 나비이다. 그러니까 「나비」는 그녀가 흘린 눈물을 담은 자그마한 풀(pool)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