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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하기
1958년 경남 울산 출생. 1989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소설집 『완전한 만남』 『은행나무 사랑』, 장편 『항로 없는 비행』 『천년의 빛』 등이 있음. ljy0313@thrunet.com
고추방에 누워
1
언제나 고추방은 내게 어머니 자궁 속같이 아늑하다. 따뜻한 온돌방에 붉은 고추가 마르면서 올라오는 매운 김이 몸으로 스며든다. 추석연휴가 시작되기 이틀 전에 올라왔으니 벌써 엿새째 이 방에 누워 있다. 이 방에서 지낸 지 하루 만에 먼 여행에서 걸려온 독감은 뚝 떨어졌다. 지금 누워 있는 내 모습이 좀 기이하게 보일는지 모른다. 머리맡엔 소주병들이 어지러이 나뒹굴고 있고 나는 두 팔을 벌린 채 방안 가득 널린 고추 위에 누워 있다. 한달 전 회사가 최종 부도처리가 되고 수배가 떨어지자 나는 배낭을 꾸리고 여행을 떠났다.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다가 고향으로 내려와 고추방으로 숨어든 건 추석 이틀 전 밤이었다.
자정이 넘어 고모집 대문을 두드렸다. 고모는 놀란 눈으로 나의 두 손을 덥석 잡고는 주르륵 눈물부터 쏟았다. 고모, 내가 왔다는 걸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돼. 난 고모에게 몇번이고 다짐을 주었다. 고모는 겉으로 보기엔 눈꼬리와 입매가 위로 휘어져 야무져 보이지만 실은 마음이 헤프고 눈도 약간 할개눈이다. 젊은 남편이 죽은 뒤 정신이 폭삭 내려앉아 그렇게 되었다는 말도 있고 아궁이에 불을 때는데 난데없이 시커먼 흑돼지가 불 속에서 튀어나와 놀라자빠진 뒤로 그렇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어쨌거나 고모에게 중요한 말은 재삼재사 다짐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고모, 특히 철상이한테는 내가 왔다는 말을 절대로 해선 안됩니다.”
철상이는 죽마고우지만 경찰이다. 최말단 순경에서 시작하여 승진을 거듭한 끝에 지금은 이곳 Y서에서 경무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고모는 내가 오면 제일 먼저 옆집의 철상이에게 뽀르르 달려가 연락을 취하곤 했다. 하지만 철상이는 그의 성격으로 봐서 오랜 친구라 하더라도 죄가 있다면 법대로 처리할 위인이다.
“윤도는 언제 온답디까?”
“갸는 명절이 닥치면 늘 일찍 내리왔데이. 내일 올 끼다. 효자 아이가.”
“그럼 윤도 올 때까지 멀방에 있을게요.”
윤도는 고모의 아들이고 나에게는 고종사촌이다.
“그 방에 고추를 늘어놔서 매불낀데.”
“괜찮아요. 감기에는 매운 게 그만이죠.”
멀방은 내가 태어난 방이기도 하다. 세월이 흘러도 이 방에 들어올 때면 어머니의 품안에 들어온 듯 아늑하고 편안했다. 멀방, 안채에서 멀리 떨어진 방이라 해서 멀방이라 불렀다. 지붕 천장에 박힌 굽은 소나무 서까래, 방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긴 시렁, 화롯불에 밤을 굽다가 태워먹은 장판지 자국은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 멀방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신행을 보낸 방이고 고모가 친정으로 몸을 풀러 와서 윤도를 낳은 방이기도 하다. 새마을운동으로 양잠 바람이 불었을 때는 누에를 치는 잠실이었고 텃밭 위에 본가를 새로 지은 뒤에는 퇴락하여 고추를 말리거나 쌀자루를 쟁여놓는 헌 창고가 되었다. 그러나 이 방만은 아직도 아궁이에 볏짚과 고춧대를 태워 방을 데우는 온돌방이다. 나는 늘어놓은 붉은 고추를 밀어내고 뜨끈뜨끈한 구들목에 시린 등을 붙이고 눕는다. 춥고 피곤한 여행에서 지친 몸에 온기와 매운 향이 스며들면서 밀린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불땀 좋은 장작이 타는 소리가 타닥타닥 구들 밑 방고래까지 울린다.
가난하지만 꿈 많은 유년기를 보낸 이 방은 미물스런 세상과 아득하게 멀리 떨어진 순수한 영혼의 요람이었다. 바깥세상과는 문을 닫고 따뜻한 어머니의 뱃속 같은 멀방에서, 난 이혼한 뒤 처음으로 수면제와 신경안정제의 사용 없이 깊은 잠에 빠져든다.
2
회사가 부도나자 나는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롯의 아내처럼 소금기둥이 될 것 같은 예감에 뒤돌아보지도 않고 서둘러 도둑촌이라 부르는 P동을 벗어났다. 오래된 집을 떠나는 데 미련이 없을 수는 없었다. 가장 아쉬운 것은 수족관의 금붕어들과 헤어지는 것이었다. 붉은 금붕어들 중에서도 십여년 묵은 홍백색의 비단잉어는 정말 대단한 놈이었다. 두 가닥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정수리에서 꼬리까지 선홍색 붉은 반점을 곤룡포처럼 두르고 유유히 유영하고 있는 그놈을 보면 금붕어의 제왕다운 위엄이 있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한번은 그놈이 도둑놈을 쫓아낸 일도 있었다. 도둑이 현관문을 따고 거실로 침입했을 때 잉어와 물고기떼들이 수족관 안에서 갑자기 튀어올라 용도리질치는 바람에 도둑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우리 부부도 물고기의 퍼드덕거리는 난리법석에 잠이 깼는데 거실의 발자국, 열린 현관문과 대문 등을 종합해보건대 물고기 소리에 놀란 도둑놈이 제 발이 저려 도망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잉어도 필사적으로 지켜낸 그 집을 나는 지키지 못하고 집달리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난 껍질이 터진 고추에서 씨를 받아 방에다 흩뿌려본다. 붉은 고추들이 금붕어떼로 변해 꼬리와 지느러미를 흔들며 우르르 몰려오는 듯하다. 고추씨가 동이 나자 나는 성한 고추를 툭 분질러 씨를 빼낸다.
문이 삐걱 열린다. 문짝이 맞지 않아 문 여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고모가 식혜와 송편 한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문을 닫을 때 주의를 한답시고 한참을 고개를 빼고 바깥 동정을 살피는 게 어설프고 오히려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윤도는 아직 안 왔습니까?”
“차가 막히는갑다. 오늘 저녁답에는 꼭 올 끼다. 자, 단술하고 핀인데 좀 묵어봐라.”
고모는 찬 식혜와 갓 쪄내 김이 모락거리는 송편을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나는 식혜를 막걸리 사발 들이켜듯 죽 들이켜고는 송편을 하나 집어 으적이며 말했다.
“고모, 이렇게 폐만 끼쳐서 미안합니다.”
“야가 무신 범 물어갈 소리를 하노. 이기 남우 집이가? 내사 마 이 집을 니한테 줬시면 얼마나 좋았겠노 후회한다. 이 집이 내 명의가 된 뒤로 명절에 아무도 안 와 아무 재미도 없고…… 고추냄새는 안 매분가? 조카, 고추 말리는 방법을 말해주랴? 그건 먼저 응달진 곳에서 시들가서 말린데이, 응달진 곳에 시들구는 기 예삿일이 아이다. 메주나 곶감이 햇빛만 받으면 좋은 것 같아도 음기를 받지 않으면 공연히 곰팡이가 슬고 짓물러지는 벱이다. 남녀간에도 음양이 조화를 이뤄야 잘 사는 벱인데 너거 부부는 와 그렇게 됐노? 명절날에 와서도 쌈닭처럼 싸우더니 겔국 그렇게 되고 말았구나.”
고모는 촛점이 약간 옆으로 빗나간 할개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고모는 조금 긴 말을 하면 뭔가 맥락을 잃어버리고 고모의 눈동자처럼 촛점이 약간 빗나가게 된다. 하지만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회사가 부도나기 전에 가정이 먼저 파탄났다. 채권자들은 부도 직전에 우리가 이혼을 한 건 재산을 빼돌리려는 위장이고 악질적인 사기극이라고 성토했지만 우연의 일치일 뿐 일년 전부터 우리 부부는 실질적인 별거에 들어가 있었다. 내가 회사일에 매달리느라 가정에 소홀히한 건 이혼법정에서도 인정했다. 하지만 아내가 아들놈의 가정교사와 불륜을 범한 건 도무지 용납하기 힘들었다. 난 쇠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멍했지만 아내와 결별할 생각은 없었다. 자식을 생각해서라도 절름거리며 함께 살기로 했다. 그러나 아내 쪽에서 완강하게 이혼을 요구했다. 증오의 감정을 식히는 냉각기를 가졌으나 말 그대로 냉각기는 마지막 남은 정마저도 싸늘하게 식혔다.
이혼을 한 뒤 한동안 자유로웠다. 난 끝말잇기를 하듯 아귀찜을 먹고 찜질방으로 갔다가 룸쌀롱에 가기도 했다. 때론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 교회와 사찰과 성당을 순례하기도 했으나 나에 대해 내린 결론은 허무한 낙오자라는 생각이었다. 회사마저 급속하게 내리막을 치닫고 있었으니.
3
나는 마치 악마의 주술에 포박된 듯 백제의 고도 부여를 향했다. 백제가 망할 때 삼천 궁녀가 꽃처럼 떨어져 죽었다는 그곳, 삼천 사람이 떨어져 죽은 곳이라면 삼천 한번째 사람도 실수 없이 떨어져 죽을 것이다. 더욱이 부여 길은 초행길이라 저승길을 걷는 듯했다. 이 길을 걷고 걸어 그대로 황천을 건너가리라. 아내, 아니 전 아내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낙화암으로 가기 위해 백마강 구드래 선착장으로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도대체 당신 거기 어디예요? 오늘도 경찰이 다녀갔어요. 정말 미치겠다구요. 당신과 내가 이제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렇게 괴롭히는 거예요. 경찰보다 빚쟁이들이 더 지긋지긋하다구요. 당신 혼자만 살려고 도망다니지 말고 제발 빨리 자수하라구요.”
법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전 남편 때문에 진저리를 치는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돌아서면 남남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한때 부모 형제와도 나눌 수 없는 은밀한 비밀을 공유하며 살던 사람이 아닌가. 난 말없이 핸드폰을 닫고 백마강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안달복달하지 말라구.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편안하게 해줄 테니.
일몰이 깔리는 구드래 선착장에는 유람선 서너 척이 젖은 몸을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구드래라는 생소한 말은 스스로 더워지는 자온대(自溫臺) 바위인 구들에서 나왔다고도 하고 일본어로 백제를 가리키는 말인 구다라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저녁 노을이 엷게 깔리는 백마강 위로 배는 한마리 고니처럼 강물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갔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죽음이란 달콤한 관념에 한번 몰입하면 마약처럼 헤어나오지 못한다. 이 세상의 온갖 복잡한 수치에 0을 곱해버리는, 절대적 무화(無化)의 힘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스스로 죽겠다는 생각은 어릴 때에도 이따금씩 했다. 어려서부터 난 본의와 다르게 잔도둑질에 능숙한 아이로 오해받으며 자랐다. 내 생애 몇번의 우연한 실수를 할 때마다 곁에서 지켜본 철상이, 철상이는 임자라 할까, 나에게 천적과 같은 친구였다.
먹을 것이라곤 없는 핍색한 시절에 갓 낳은 따뜻한 달걀은 귀한 먹거리였다. 우리 마을에선 닭장에서 닭을 키우지 않았다. 닭의 잠자리로는 헛간에 대시렁을 걸쳐놓으면 그만이고 암탉은 마당을 돌아다니면서 아무데서나 알을 낳았다. 철상이 집인 풍납댁의 암탉 중 한두 마리는 낮은 돌담을 넘어와 우리집 등겨섬이나 멱등구미 위에서 알을 낳곤 했다. 경우가 바른 우리 부모는 그 알이 보이는 족족 풍납댁에게 돌려주었지만 나는 그게 자못 불만스러웠다. 우리집에서 낳은 알은 우리 것 아이가? 난 이런 생각을 하며 별 죄의식 없이 달걀을 깨뜨려 먹었다.
다른 집은 닭도 키우고 소도 키우는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집만은 강아지나 병아리 새끼 한마리도 키우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저 틈만 나면 막걸리를 마시고 마실을 다닐 뿐 가산을 늘리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나 의욕이 없었다. 언젠가 내가 ‘아버지, 우리는 왜 맨날 거끌거끌한 보리밥만 먹고 살아요?’ 하고 물었더니 아버지는 ‘인석아, 쌀밥 마이 먹고 집냐? 풍납댁 머슴을 살면 실컷 배불리 묵을 기다’라는 기이한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저 주어진 운명대로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조상 전례의 삶을 답습하며 사는 데 만족하는 분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경제학개론 시간에 아시아적 정체성에 관해 배울 때 난 우리집을 생각했다. 멍석 위에서 아버지는 막걸리를 마시고 어머니는 묵묵히 맷돌을 돌리는 장면이 그 단원 내내 뇌리에 떠올랐다.
난 늘 단배를 곯리고 있었고 우물물로라도 허기진 배를 채우고자 했다. 아주 어렸을 때 나의 별명이 묵고지비였단다. 어른들이 뭘 먹고 있으면 꼭 옆에 가서 묵고 집다고 말해 민망한 어른들은 손에 든 게 떡이든 고기든 한점씩 떼어주었다고 한다. 물론 우리집에서 발견되는 날달걀도 나의 주린 배를 달래어주는 좋은 요깃거리였다. 그것만으로 족할 것을, 배가 고픈 날이면 돌담 너머 풍납댁 짚단더미에 낳은 알도 몇개씩 집어먹었다. 그곳은 양지바른 곳인데다 사람의 발길이 잘 미치지 않는 외진 곳이어서 닭들이 자주 알을 품는 곳이었다.
그날은 입춘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풍납댁 대문에 한자로 쓴 지방이 붙어 있을 때였으니까. 난 돌담을 딛고 풍납댁 짚단더미 속에 있는 계란을 집어서 내려오려 했다. 누군가 불쑥 나타나 내 다리를 잡았다.
“우택아, 니 또 우리집 개랄 훔치가나?”
철상이었다. 난 놀라서 얼떨결에 변명했다.
“아이다. 나, 안 훔칬다. 여기 개랄이 있길래 갖다줄라 한 기다, 자.”
철상이는 얼굴에 비웃음기를 띠고선 내가 내민 계란을 받지도 않고 돌아가버렸다. 난 들고 있는 달걀 한 알이 그렇게 무거운 줄 몰랐다. 마치 무거운 바위를 들고 벌을 서는 것처럼 진땀이 났다. 그걸 들고 어찌할 바를 몰라 돌아다니다가 우리집 굴뚝 속에 집어넣어버렸다. 아버지가 저녁에 집에 오자마자 낮은 굴뚝 속으로 손을 밀어넣어 시커멓게 된 달걀을 꺼냈다. 그러고는 검은 달걀을 두 손으로 번쩍 들게 하고 다짜고짜 지겟작대기로 나의 등짝 엉덩이 종아리 가릴 것 없이 마구 후려치기 시작했다.
“이 빌어묵을 놈아, 도대체 니가 개랄을 얼마나 훔쳐먹었길래 풍납댁 어른이 저번에 족제비가 물어간 닭까지 우리가 잡아묵은 줄로 생각하노 말이다! 내가, 없는 사람일수록 행동을 잘해얀다고 그쿠 안카더나? 있는 자식이 밥을 마이 묵으면 복시럽다고 카고 없는 자식이 밥을 마이 묵으면 게갈시럽다 카는 세상인 기라, 이 문디 자식아!”
나는 아버지의 매질을 견디지 못해 들고 있던 달걀을 마당에 내동댕이치고 삽짝 밖으로 도망쳤다. 낙동강 수문에서 해가 저물도록 풀따기를 했다. 풀 이파리가 소용돌이에 맴돌다 하염없이 빨려들어가는 걸 보면서 나도 풀 이파리처럼 저 맴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낙동강 수문이나, 부지런히 오른 낙화암에서도 끝내 뛰어내릴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죽음에의 용기나 삶에 대한 공포가 부족했기 때문은 아니다.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줄기차게 공격해온 죽음의 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 순간에 뒷덜미를 낚아올리는 거짓 희망 때문이었다. 그래, 하루만 딱 더 살아보자.
4
“달자도 발써 내리왔데이. 아까 철상이하고 두내미로 가면서 우택이는 안 내려왔느냐고 묻더라. 달자는 우째 나이를 묵어도 달처럼 곱은지.”
달자는 지금 민주노련의 핵심간부로 있다. 80년대에 감옥에 갔다온 뒤 결혼도 미룬 채 맹렬하게 노조활동을 해왔다. 작년 노련의 후원으로 일년간 독일 전역을 다니며 독일의 노동정책을 연구하고 돌아왔을 때 나는 ‘내 신세보다 나은 노동귀족이 됐군’ 하며 빈정거리기도 했다.
고모는 달자가 자꾸만 내 안부를 묻고 또 묻기에 이번 추석에는 내려오지 않았다고 ‘확실하게’ 대답을 해주었다고 한다. 난 오히려 그 ‘확실하게’라는 말 때문에 더 불안했다. ‘우택이는 정말로 안 내려왔데이. 내 말 진짜데이’ 하는 식으로 대답했다면 오히려 내려온 것으로 의심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두내미는 아직 안 헐렸습니까?”
“반틈은 깎이고 궁디 반쪽만 남아 있다 아이가. 보면 참으로 흉허지야.”
김해평야 지대 한가운데 봉긋하게 솟아오른 두내미 언덕이 깎이다니. 우리의 추억마저 깎여서 사라지는 듯하다. 이제 고향마을은 소를 먹이는 한적한 시골이 아니다. 풍경 좋은 낙동강을 타고 올라오는 아파트 개발 바람이 Y군 둔암동까지 밀려올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둔암동 일대는 이미 대규모 아파트 택지가 조성되어 보상까지 끝났다. 이번 추석명절을 쇤 뒤로 옛 둔암동 마을은 수몰지구보다 더 깨끗하게 지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둔암동에 택지가 조성되면서 고모는 아파트를 분양받은 것 외에도 이주비 등 수억의 보상비를 받았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평생을 착하게 산 고모에 대한 보상이긴 하지만 그 큰돈을 시골 농협에 묵혀두기에는 아까워 보인다.
보상금도 좋지만 두내미 언덕을 깎아낸다는 말이 뜻밖에도 붉은 고추처럼 코 점막을 맵게 한다. 바쁜 삶에 쫓기면서 좀스럽게 닳은 기억만으로 살아온 나에게 유년의 삶이 속속들이 배어 있는 두내미 언덕이 사라진다니 콧날이 시큰했다.
두내미를 휘감고 흐르는 수성천에서 장어와 은어들이 튀어올랐다면 지금 누가 믿어줄 것인가. 여울물은 상류지역에 축사와 농장이 들어선 뒤로 똥물이 된 지 오래됐다. 낙똥강, 지금은 모두가 이렇게 부른다. 여울의 자갈돌을 뒤집으면 가재와 모래무지가 물살을 일으키며 부리나케 도망쳤고 두내미 위 솔가지엔 백로가 하얗게 앉아 있다 보현사의 종소리에 날아올랐다. 이 두내미 언덕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는 둔산팔경은 예로부터 유명한데 원포귀범(遠浦歸帆), 평사낙안(平沙落雁), 서산낙조(西山落照), 보현모종(普賢暮鐘) 등을 이곳에 오르면 한눈에 바라다볼 수 있었다. 두내미 언덕 아래 둔암리에는 50여호가 뒤웅박에 든 씨콩처럼 올망졸망 모여살았는데 저녁이면 밥 짓는 연기가 올라와 산허리에 실안개처럼 감겼다.
김해평야의 넓은 모래톱에 이렇게 두내미 같은 바위 언덕이 솟아 있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향토지에 보면 두내미란 이름은 평평한 평야에 둥근 바위산이 머무르고 있어 둔암(屯岩), 둔산(屯山)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시절 곰방대를 문 토박이 영감에게 들은 말은 또 달랐다.
“두내미가 둔암, 둔산에서 나왔다꼬? 아인기라. 내가 소싯적에 동네어른에게서 들은 바로는 둔암(臀岩), 엉덩이 바위에서 나온 기라, 마.”
두내미는 여자가 엉덩이를 약간 치켜들고 땅을 향해 엎드려 있는 기묘한 형상을 한 언덕으로 보기에 따라 여러가지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바위가 되다 만 퇴적암 언덕은 아이들의 미끄럼틀로 안성맞춤이었다. 우리들은 바위를 지치면서 엉덩이로 광을 냈으며 뜨거운 태양은 둥그런 언덕 거죽을 도자기처럼 반질반질하게 구워냈다. 나는 오래된 유년의 풍경이라고 무조건 미화하고 싶지는 않다. 특히 남루한 유년기를 보낸 나로서는.
추운 겨울밤이었다. 우리들은 두내미에 모여 닭서리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달걀도둑은 비난해도 닭서리에는 비교적 관대한 것은 그것이 수렵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일종의 성인식과 같기 때문이 아닐까. 닭서리나 토끼몰이를 통해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지혜와 담력을 터득해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모든 일에는 항상 최철상, 나, 엄달자가 튼튼한 철의 삼각을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악의 분업과 같은데, 난 철상의 부하가 되고 철상은 달자의 부하가 되고, 달자는 나의 부하가 되어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라고나 할까. 철원 김화 평강의 중심에는 쇠둘레 철원이 있듯 우리의 중심에는 항상 달자가 있었다. 담뱃집 딸 달자는 조숙한데다 괄괄해 웬만한 남자아이와 씨름이 붙어도 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원양어선을 탄다고 했던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소문도 들렸으나 지금까지도 나타나지 않으니 알 길이 없다. 얼굴이 반반한 달자 어머니는 동네 아주머니의 시샘 속에서 담뱃집을 했다. 말이 담뱃집이지 막걸리와 아스피린과 과자 등을 파는, 주막이자 약방이고 상점인 종합가게였다. 담뱃집 딸이라는 게 우리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강 건너 읍마을 대머리 영감집에 닭서리 가자.”
“나릿배를 타고 말이가?”
“어동이 너거 집 나릿배를 타고 가면 된다.”
우리들은 달자의 주도로 닭서리를 모의하고 서로 역할분담을 했다. 그런데 누가 닭을 안아오느냐란 문제로 일사천리로 나가던 작전이 막혀버렸다.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데 철상이가 나를 지목해 말했다.
“우택이, 니가 해라.”
“나는 못한다.”
“와, 니 잘할 낀데, 니말고는 그 일을 해낼 사람이 없다. 할 끼가 안할 끼가?”
철상이는 달걀사건 이후 나를 도둑질에 무슨 이골이 난 놈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만약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자기 집에서 훔친 달걀을 몽땅 물어내라는 말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난 철상이의 말에 꼼짝없이 따라야 했다. 우리는 마치 적진에 침투하는 특공대처럼 어동이네 나룻배를 타고 수성천을 건너갔다. 물새들이 끼르륵거리는 갈대밭에 나룻배를 숨겨놓고 읍 거리에 있는 대머리 영감집으로 스며들었다. 우리들은 먼저 대문 앞 길에 허방을 깊게 판 후 갈대로 덮고 흙을 뿌려 위장했다. 이 일대는 모래흙이라서 허방을 파기 쉬웠다. 만일을 대비해서 우리가 들고 간 작대기와 대나무를 영감이 자는 방문에 단단히 괴어놓고 영감의 신발은 담장 밖으로 내버렸다.
나는 선역이든 악역이든 일단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행동에 옮겼다. 닭이 찬 손에 놀라지 않도록 사타구니에 두 손을 찌르고 손바닥이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고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헛간으로 기어들어가 자고 있던 암탉의 배 밑으로 손을 살며시 넣었다. 암탉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구구거렸다. 난 잽싸게 닭날개를 꺾으며 닭을 안고서 밖으로 뛰었다. 갑자기 닭이 꼬꼬댁거리며 내 눈을 쪼았는데 워낙 정신없이 달리느라고 피가 흐르는 줄도 몰랐다. 지금도 내 얼굴을 자세히 보면 그때 닭에게 쪼인 흔적이 왼쪽 눈가에 흐릿하게 남아 있다. 그 흉터 때문에 될 일도 안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결국 부도가 나고 이런 고생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닭소리에 잠을 깬 영감이 당한 봉변은 우리 사이엔 무슨 전설처럼 두고두고 이야기되었다. 닭소리에 놀란 영감이 뛰쳐나오려고 방문을 열었으나 문 앞에 괴어놓은 작대기와 대나무 때문에 문이 열리지가 않았다. 화가 난 영감은 거의 문짝을 부수다시피 해서 마루로 나왔으나 이번에는 신발을 찾을 수 없었다. 신발을 찾는다고 허둥대다가 맨발로 나선 영감은 대문을 나서자마자 허방다리를 밟고 넘어져 일어나지를 못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 가련한 영감은 발목을 삐어 일주일간을 방안에 누워서 끙끙 앓았다고 한다.
그 닭서리 사건을 통해 달자는 카리스마를 얻었다. 닭을 안아낸 나는 아이들 사이에 약간의 명성은 얻었지만 철상이는 그 일로 나에 대한 어떤 편견을 굳혀가지 않았나 싶다. 마을에선 닭이나 오리, 심지어 돼지도 수시로 없어지곤 하는데 그때마다 나를 바라보는 철상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그날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별도 뜨지 않은 밤이었다. 그런 날이면 두내미 언덕만이 희한하게도 야광물체처럼 하얀빛을 발해 마을 고샅과 여울을 은은히 밝혀주었다. 어머니는 밤늦게 잠자고 있는 나를 깨워 무척 화가 난 목소리로 심부름을 보냈다. 담뱃집에 가서 술 마시는 영감탱구를 잡아오라고. 불이 꺼진 담뱃집 앞을 서성거리고 있는데 달자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버지를 찾자 아버지는 강 건너 읍 거리에 놀러 갔다는 것이다. 우택아, 우리도 놀러 가까? 달자는 각중에 내 손을 잡고서 두내미 쪽으로 갔다. 이 밤중에 두내미는 와? 난 무엇에 홀린 기분으로 달자를 따라 언덕을 올랐다. 쉬, 조용히 해봐. 달자가 손가락을 입에 대는 순간 언덕 뒤편에서 이상한 신음소리 같은 게 들렸다. 우리 둘은 소리의 방향을 따라 가만히 언덕 뒤를 엿보았다. 그때의 놀라운 광경이라니. 달자 어머니의 허연 궁둥이 아래 눌려 있는 사람은 어머니가 잡아오라던 바로 그 영감탱구였다. 나는 놀랍고 부끄러워 까투리처럼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았으나 달자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끄러미 보고 있었다. 얼마 뒤 아버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담배를 한대 물고 언덕 위에 나타났다.
“오늘 용 좋았네.”
“뭘예.”
“아닐세, 오늘 용 좋았네.”
아버지와 달자 어머니는 옷을 추스르며 각각 다른 길로 내려갔다.
우리 둘만이 두내미에 남게 되자 난 어둠속에서도 느껴질 만큼 얼굴이 발개져 고개를 못 들었다. 그러나 달자는 태연히 언덕을 지치며 말했다.
“우택아, 니, 우리 엄마가 너가부지 좋아하는 줄 몰랐나?”
“몰랐다.”
내 말은 시무룩했고 약간의 노기마저 띠고 있었다. 어머니를 배신한 아버지에 대한 분노 같은 것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난 울아부지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단 말이다. 얼마나 잘생기고 멋있는 분인데…… 울엄마 말로는 너가부지가 울아버지를 닮았대.”
달자는 언덕을 타면서 왜 철상이를 싫어하고 나를 좋아하는지 말했다. 철상이 아버지는 담뱃집에 와서 괜히 어머니를 괴롭히고 집적거리는데 우리 아버지는 막걸리에 취해도 태생이 양반이라는 것이다. 그제야 달자가 자기 어머니를 대하는 동네어른의 태도에 따라 우리들에 대한 감정이 달랐다는 사실을 알았다. 달자는 까닭없이 철상이를 싫어하고 나에게는 눈깔사탕을 준다든지 새로 나온 라면도 몰래 갖다줄 정도로 과분한 호의를 베풀었는데 전에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정작 달자에 몸달아 있는 철상이만 속이 탔다. 철상이가 달자를 만나려면 나를 통해야 했으므로 철의 삼각구도는 더욱 공고해졌다.
“우택아.”
달자의 목소리가 평소 같지 않고 은근했다.
“와?”
“우리도 신랑각시 한분 해보까. 난 너가부지보다 니가 더 울아버지를 닮은 것 같은데……”
달자는 옷을 활랑 벗고 나더러 옷을 벗으라고 했다. 내가 당황해하며 꾸물거리자 ‘사내자식이 부끄럼을 타기는’ 하면서 옷을 잡아당겼다. 달자가 이상하게 취해오는 동작에 나는 점점 야릇하고 기이한 흥분에 사로잡혔다. 그날 밤 우린 두내미에 누워 서로에게 무지하고 서투른 장난 같은 애무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난 갑자기 철부지 코흘리개에서 어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5
“윤도는 아직 소식 없습니까?”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추석날 저녁에 오기로 한 윤도가 다음날 오후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매운 김이 올라오는 고추방에 누워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고추는 잘 말라 투명해져 노란 씨가 보이기 시작했다. 고추방에서 나흘째 뒹굴면서 온몸에 고추냄새가 배어들어 나도 한 개의 큰 고추가 된 느낌이었다. 고모도 슬슬 걱정이 되는지 멀방에 들어와 희아리 먹은 고추를 가려내며 말했다.
“그케 말이다. 가가 여태 안 올 아가 아인데……”
“핸드폰도 안 받는다면서요. 오다가 차사고라도 난 거 아인가.”
나는 돈 만지는 사업을 하면서 인간관계에서 수많이 쓴맛을 보아왔지만 윤도만은 믿었다. 원래 이 집은 본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옹색한 집이었다. 철상이의 풍납집 행랑채보다 초라한 것을 내가 집 주위의 텃밭을 사들이고 그 위에다 당시로는 둔암동에서 제일 번듯한 양옥집을 지었다. 시골에 필요 이상의 규모로 집을 지은 것에 대해 마을에서 말들이 많았다. 풍납댁에 대한 콤플렉스라는 둥 우택이가 돈을 좀 벌었다더니 유세한다는 둥 입방아를 찧어댔다. 집은 되었으니 이제 조상의 묘 자리를 넓히고 단장할 일만 남았다고.
추석연휴가 끝나는 날에도 윤도는 내려오지 않았고 윤도로부터 전화나 어떤 메씨지도 없었다. 아이엠에프 전 나는 외제차에 국회의원을 태우고 다닐 정도로 잘 나가는 사업가였다. 우리 회사 브랜드의 제품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본가에 제사와 명절이 닥치면 늘 고모에게 돈봉투를 넉넉하게 챙겨드렸고 필요한 제수를 트렁크 가득 싣고 내려갔다. 특히 윤도의 학비는 대학 졸업까지 내가 다 대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일가의 정리로 한 것이지 댓가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 택지보상금은 고모의 명의로 나왔으나 아들인 윤도가 관리하고 있다. 고모는 그 큰돈을 관리할 만한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고향으로 내려오기 전 전화로 고모에게 솔직하게 얘기했다.
“고모, 한번만 도와주세요. 사실 그 땅의 절반은 내가 산 거라는 걸 고모도 아시지요?”
“알다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헌데 그 돈을 몽땅 윤도가 가지고 있어야. 내가 윤도에게 얘기해서 이번 추석에 가지고 오라고 할 거니까, 걱정 말거라. 그놈이 참으로 효자여. 내가 죽으라문 죽는 시늉도 하는 놈이여.”
고모는 받은 보상금의 절반을 나눠주겠다고 흔연히 말했다. 그 돈이면 다시 한번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윤도에게도 전화했다. 윤도는 내 사정을 잘 아는 듯, “아이고, 형님. 어려우신데 당연히 마련해 드려야죠.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형님 신세를 졌습니까. 어머님이 부탁하신 그 돈은 이번 추석 때 가지고 내려가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추석연휴가 다 끝나도록 윤도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큰돈을 가지고 오다가 무슨 사고라도 난 것이 아닐까. 나는 온갖 상념으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잠이 들었다.
4차선 강변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낙동강 제방과 둔치를 밀어버린 바로 그해 여름 낙동강의 범람이 있었다. 여울가에 살던 집들이 삽시간에 홍수에 휩쓸려 내려갔고 우리 또래의 아이들 중에는 어동이가 죽었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낙동강이 범람하는 걸 보아왔다. 둑가 저지대의 집들은 가재도구를 들고 국민학교나 두내미 고지대의 집으로 대피하기도 했다. 그러나 물이 그렇게 삽시간에 불어난 건 처음이었다. 둑이 터지면서 어동이네와 저지대에 살던 세대들이 순식간에 수마에 휩쓸려 들어갔다. 인민군들과 대치했다는 이 낙동강 두내미 강마을에 6·25 때도 나지 않은 떼송장이 처음으로 났다. 어동이네를 비롯해 떼송장이 난 것은 아무래도 낙동강 수신이 마구잡이로 낙동강을 개발하는 것에 노해서 재앙을 내린 것이라며 무당을 불러 강변에서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떼송장이 난 그해 여름 달자와 나 철상이, 우리 셋은 막걸리통을 메고 두내미에 올라갔다. 강 건너 읍 거리에 들어선 아파트 군락과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때문에 두내미 언덕에서 보는 시원한 눈맛은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낙동강을 따라 형성된 김해평야는 일망무제로 펼쳐져 있었다. 우리 철의 삼각지대가 격렬하게 돌고 돌 때이다. 방직공장에 다니는 달자는 민주노조에 가입한 상태고 철상이는 고향 가까운 지서에 발령을 받아 경찰복을 입고 나왔다. 나는 아직 사회로 진출하지 못한 장발 대학생이었다.
철상이는 두내미를 메기의 언덕이라고 부르며 ‘메기의 추억’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어쩌면 메기는 어릴 때부터 철상이가 마음에 품고 있던 엄달자일 것이다. 말하진 않았지만 나는 오래 전부터 이 언덕은 달자의 언덕이라고 생각했다. 어둔 밤에도 하얗게 빛나던 달자의 엉덩이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술이 한잔 된 달자는 이상하게도 철상이보다 나를 더 거칠게 비난해댔다.
“송충이가 갈잎을 먹으려고 해? 달걀도둑이 부랄자지가 되고 싶다고?”
내가 과연 엄달자의 손가락질을 받을 만큼 그렇게 싹수없는 피폐한 유년기를 보냈던가? 멋모르고 풍납댁 계란을 훔치다 아버지로부터 죽지 않을 만큼 지겟작대기로 두들겨맞았고 닭서리를 비롯해 모든 서리에 앞장을 섰다고 해서 도둑이라도 된단 말인가. 가난한 삶이 싫어 공부를 통해 출세해볼 거라며, 풍납댁 장닭 우는 소리에 일어나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한 게 죄란 말인가. 어쩌면 철상이가 가진 나에 대한 편견이 달자의 눈에 그대로 투사되었는지도 모른다. 달자는 불가능한 욕망의 사다리를 태우라며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럼, 공권력의 말단이 되어 민주운동을 직접적으로 탄압하는 철상이는 왜 문제삼지 않는 거야,라는 나의 항의성 질문에 달자는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철상이는 비록 나와 반대되는 길을 가지만 언젠가 지구 한바퀴를 돌아서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너는 네 길이 아닌 길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거야. 너완 지구 끝까지 걸어가도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거야, 알아?”
난 방직공인 달자를 보면서 베를 잘 짜는 처녀가 아테나 여신과 베짜기 경쟁을 하다 거미가 되고 말았다는 그리스 신화가 떠올랐다. 달자는 아무래도 거미가 되고 말 위험수위에 올라와 있는 것 같았다.
철상이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나에게 시위하는 듯한 달자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때까지 느껴보지 못한 질투의 감정에 사로잡히며 괴로워했다. 이런 심경을 철상이는 근 이십년 동안 달자와 나 사이에서 느꼈을 거라 생각하니 새삼스레 철상이가 다시 보였다. 만취한 나는 그해 여름 수해로 죽은 어동이의 이름을 마구 부르면서 두내미를 내려왔다.
6
이번 추석에는 달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고스란히 맞아떨어졌다. 추석연휴 내내 계속되던 흐린 날씨가 연휴의 마지막날 모처럼 맑아지자 고모는 멀방에서 고추를 꺼내 마당의 멍석에 널었다. 난 어릴 때부터 붉은 생고추 말리는 것을 많이 보고 자랐지만 이 작업이 이렇게나 까다로운 줄은 몰랐다. 태양초로 말리려면 근 열흘 이상이 걸리는데 낮에는 멍석에서 밤에는 온돌방에서 적당한 온도로 말려야 한다. 너무 센 불에 말려도 약한 불에 말려도 안된다. 센 불에는 고추가 하얗게 탈색되어 희아리가 되고 약한 불엔 속이 짓물러지거나 곰팡이가 펴서 변질된다.
기다리던 윤도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근 일주일간 매운 고추김을 쐬어서 그런지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라든가 서운함 따위는 별로 생기지 않았다. 감정의 동요도 복잡한 상념도 사라지는 듯했다.
갑자기 멀방문이 덜컹 열리더니 그림자가 불쑥 들어온다. 난 달자의 모습에 별로 놀라지 않는다. 소주를 몇병이나 깐 채로 고추를 등에 깔고 방 한복판에 대(大)자로 누워 있는 나. 달자는 한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이윽고 내 머리맡에 주저앉았다. 고추를 깔고 앉은 달자의 엉덩이에서 고추 껍질이 터져 씨들이 흘러나왔다.
달자가 다시 말없이 쏟아질 듯한 눈망울로 나의 얼굴을 찬찬히 내려다본다. 옛날 두내미 언덕에서처럼 나의 얼굴에서 자기 아버지의 얼굴을 찾는 것일까.
“우택이, 너 이혼했다며?”
난 고추를 한움큼 쥐어 공중으로 뿌리며 딴전을 피웠다.
“담뱃집 딸은 좋겠다, 출세해서 독일도 갔다오고.”
“넌 잘 나갈 때 세계를 누비고 다녔잖아. 그런데 기가 팍 꺾여서 이 꼴이 뭐야?”
달자는 고추를 한움큼 쥐고 내 배 위에다 수북이 쌓는다.
“상관하지 마. 난 지금 행복해. 너, 철상이가 여기에 가라 해서 왔지?”
“그걸 어떻게 알았어? 네 고모가 가르쳐주던?”
“달자야, 너도 이 고추방에서 한 일주일간 매운 김을 쐬면서 명상을 해봐. 세상 이치가 빤하게 보인다. 나처럼 도사가 돼.”
“그럼,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윤도가 철상이에게 말해준 것도 알고 있겠구나.”
“짐작했던 일이지.”
윤도가 철상이한테 그랬단다. 형님은 도둑놈 심보가 있어요. 땅을 산 건 오랜 전 값이 없을 때였어요. 그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택지개발이 되어 땅값이 오르니까 이제 와서 정신이 올찮은 엄마를 앞세워 보상금을 내놓으라 하니…… 우리 어머니가 숨겨주는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해야죠,라고. 하긴 맞는 말이다. 재산싸움이 나면 형제간에도 칼부림을 하는 마당에 사촌에게 보상금을 나눠달라고 하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런 얘기다. 누굴 원망하랴, 내가 윤도와 입장을 바꿔도 마찬가지 아닐까.
“철상이는 너보고 자수하라고 하데. 안하면 자기 손으로 잡아가겠다고. 감옥, 그거 별거 아냐. 잠시 머리 식혔다 오는 덴 최고야. 참, 그러면서 이 말도 꼭 전하라고 그러더라. 난 우택이 너에게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고. 계란을 훔치고 닭도 훔치고 돼지도 훔치더니 이제 남의 돈까지 훔치는 신세가 되었다고.”
“그건 훔친 게 아냐…… 서리한 거지.”
나는 고추를 달자의 치마 위에 수북이 쌓아올리며 말했다.
“맞아, 나도 널 서리한 거지.”
달자도 소리내어 웃더니 내 옆에 털썩 누웠다. 달자가 눕자 고추의 붉은 껍질들이 터지면서 노란 씨들이 흘러나왔다. 내가 마지막 순간에 고추방을 떠올린 것은 뒷덜미를 낚아올리는 거짓 희망 때문이었을까? 그래, 하루만 딱 더 살아보자.
고모의 말에 따르면 오늘 아침부터 굉장치도 않은 차들이 와서 쿵쿵거리며 두내미의 남은 엉덩이 한 짝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한다. 멀방에서는 태양초 고추의 붉은 껍질들이 납작하게 짓눌려 터지며 황금동전 같은 노란 씨들이 마구 흘러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