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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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석 朴海碩

1950년 전북 전주 출생. 1995년 국민일보문학상 당선. 시집 『눈물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견딜 수 없는 날들』이 있음.

 

 

 

비무장 도시

 

 

아 나는 살고 싶다, 이

도시를 전복시키려는

단풍 쿠데타

낙엽 게릴라

앞에

무장해제당한 채

두 손 높이 들고

쩔쩔매며

단 이틀만이라도

 

 

 

그대 蟹公의 무리를 뒤로 하고

 

 

괴발개발 그려놓은 저 저녁구름이 이쁘다

밴댕이회를 상추에 쑥갓에 싸서 입이 찢어져라 밀어넣으며

찬 참이슬 소주잔에 찰랑찰랑 먼 파도 한자락 띄워 마셨으니

그대와 나의 붉은 얼굴 이쁘다

등대바위라지만 등대는 없고 등대가 없으니 오가는 배가 없고

오가는 배가 없으니 발 아래 길게 펼쳐진 갯벌밖에 없어

물때 맞춰 그대 해공의 무리들 영락없이 바쁘구나 바빠

우리도 해낙낙 갈지자 걸음으로 한통속이 되어볼까

만신창이 진흙이불 둘러쓰고 한바탕 장구채나 휘둘러볼까

너희 게 같은 것들 게새끼들 올데갈데없이 오락가락 삐치며

한사코 발목 빠지지 않으려고 기쓰는 꼬락서니

그것 보고 있으니 이쁘다 구멍이나 구렁이나 구렁텅이나

그런 것들은 그것 한가지로 어디에나 있는 것

바다가 너희를 부르는 시간에 맞춰 우리를 밀어내는 것

그것 또한 이쁘다 이뻐 내남없이 바다 밖으로

떠밀려가며 그대와 나 저무는 노을 바라보노라니

오늘 하루 너희 발톱으로 쌍울타리 치고 “개새끼들!” 욕하지 않아 이쁘다

덤으로 밴댕이 소가지 부리지 않아 더 이쁘다

이뻐 그대 해공의 무리를 뒤로 하고

우리도 우리의 뻘밭을 향해 깊숙이 한발 들었다 내려놓는 것

그것 또한 이쁘다

‘너희는 발이 많아 서럽겠지만 우리는 발이 적어 발발거리며 산단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 또한 이쁘고 이쁘다

 

 

 

모란행

 

 

종점 수서역에서 서울지하철 버리고

국철로 갈아타려고 걸어가는 데 십수년이 걸렸다

성남 모란에서 만나자는 친구의 전화 그 전화

받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한솥밥 먹으며 구두 한 켤레로 꿈을 꾸던 곳

뒤축이 다 닳도록 뿔뿔거리며 서울로 몸 팔러 다니던 길

그 길 아래 길 뚫려 그 길 머리에 이고

전동차 맨 꽁무니칸 올라타니 오후 두 점 반인데도

꾸역꾸역한 인총, 벌써부터 숨이 가빠온다

출입문짝에 등을 기대고 두리번거리니

입성들은 밝아지고 머리털 입술꼬리도 부드러워졌지만

누구도 안중에 없다는 저 무심한 눈빛은 변하지 않았구나

정해진 시간표에 목이 매여 쉽게 떠나지 않는 철머구리차

열몇 정거장 가까운 길인데도 나는 얼마나 멀리 바라보았는가

가닥가닥 누더깃길 마음의 고뿔 안고 콜록거리며

새벽으로 나갔다가 밤늦게 넘던 수진고개

그 고개 그 자리에 말없이 누워 있으련만

제 속살 헐어 평평한 노루목 놓아 나를 끌고 가겠다고

오라고 어서 오라고 부르는 소리

구르는 바큇자락에 깔리며 시난고난 묻혀갈 때

모란시장 어느 어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친구

우리 막걸리 마시던 난전 이 겨울에도 터를 잡고 있을까

모가지마다 줄줄이 사슬에 엮여 발버둥치던 개떼들

그 사이로 으르렁거리며 하루해 날품들을 팔며 짖어대던 곳

귀 멍멍 이빨 아드득 허파꽈리에 독한 담뱃진 뽀글거릴 때

두 집 건너 한 집마다 연탄가스 마시고 팔다리 뻣뻣해올 때

거푸집 쑤세미 머리통들 김칫국물 들고 달려오던 그 골목

아직 거기 있을까 거기 있어 인면수심 얼굴에 철망 덧쓰고

헐떡거리며 산 나그네 오랜만에 발 내딛는 것 받아들여줄까

술 한잔 건네며 곱창 심줄 한번 펴보게 그냥 놔줄까

마음 마냥 바쁘게 더워와도 느릿느릿 속이 타는 모란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