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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새로운 ‘나’의 탐구와 시간 경험

고형렬 시집 『김포 운호가든집에서』, 창작과비평사 2001

최정례 시집 『붉은 밭』, 창작과비평사 2001

반칠환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시와시학사 2001

 

 

최현식 崔賢植

문학평론가, 연세대 강사. 주요 평론으로 「꽃의 의미─김수영 시에서의 미와 진리」 등이 있음. chs1223@hanmail.net

 

 

1. 한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에 속하는 사적 경험이나 기억이 얼마든지 재구성되거나 조작되고, 심지어는 외부에서 만들어져 주입될 수도 있다는 가공할 만한 현실은 아직은 공상과학소설 내지 영화 속에서나 접할 수 있는 미래의 일이다. 벤야민(W. Benjamin)은 기술적 복제에 종속된 예술가의 비참한 운명을 “비록 자신의 인격 전부를 바쳐 일을 하긴 하지만 그러나 인격의 분위기(aura)를 포기하면서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라고 영화배우의 예를 통해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신의 권좌를 공공연히 넘보기에 이른 지금의 복제기술은 예술의 차원을 넘어 현실에서 ‘인격’이란 말 자체를 지워내려 하고 있다. 복제된 ‘나(들)’의 출현 앞에 ‘인격’이 함축하는 주체의 고유함과 단일함은 더이상 존립할 수 없다.

지나친 예단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예측이 가능한 현실을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시인에게는 견딜 수 없는 재앙이자 불행이다. 시인이란 인간과 세계 자체, 혹은 그것들의 교섭이 생산하는 어떤 고유한 분위기를 그 누구보다 예민하게 언어로 채굴, 정련하는 자이다. 인간과 세계의 고유성 박탈은 따라서 시와 시인 자체의 박탈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근본적인 위기상황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위기란 그것을 초래한 원인을 제대로 궁리할 때만이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답은 비교적 자명하다. 그것은 이를테면 시의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를 자처하면서도, 그 자신 역시 그 어떤 ‘인격’의 조회도 무력화할 수 있는 고유성과 동일성 생산에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115-277

 

여기서 함께 읽어볼 고형렬·최정례·반칠환의 시는 현재의 자기 동일성에 의문부호를 치면서 새로운 ‘나’의 탐구와 구축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들의 작업은 ‘인격’의 위기상황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 역시 우리와 동시대를 호흡하고 있기에 그런 위기의식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또한 최근의 우리 시단은 자기만의 고유한 개성으로 세계를 진지하게 타진하기보다는, 몇몇의 특정 테마 혹은 경향에 집단 함몰되고 마는 시의식의 누수와 빈곤 현상을 심하게 겪고 있다. 이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인격’의 복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세 시인의 새로운 ‘나’의 탐구가 ‘복제’의 심각한 유통에 일정한 제동을 거는 그런 것이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2. 고형렬(高炯烈)의 『김포 운호가든집에서』를 규율하는 중심원리를 든다면, 단연 “나를 생각하며 나를 모르는 일”(「해인사를 생각하는 날」)이라는 ‘나’에 대한 이중의 자의식일 것이다.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이 무지(無知) 혹은 무식(無識)에의 지향은 죽음의 공포가 초래하는 삶에 대한 아득한 허무감과 완강한 집착 모두를 다스리고 넘어서려는 매우 적극적인 행위이다. 그에게 ‘나를 모르는 일’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그 버린 것들과 ‘처음’ 만나게 되는 그런 것을 뜻한다(『성에꽃 눈부처』〔1997〕 ‘후기’ 참조). ‘버림’ 의식은 따라서 기존의 앎과 삶에 대한 맹목적 부정과는 거리가 멀다.

 

다 사용하고 이울어버린 뒤에도

서로 물고 있는 달은, 밤은

다시 신생이 돋아나도 그 달인 줄 모른다

모두 망가져서 가는 우리는

그 시리디시린 열매 하나씩 달고 있구나

─「靑果」 부분

 

‘버림’은 사멸의 불가피성이 결과하는 새로운 생성의 역설을 삶의 순리로 긍정하는 것이다. “시리디시린 열매”란 따라서 “木之必花! 花之必果”라는 가장 기본적인 자연의 순환원리가 우리 삶의 그것이기도 하다는 뒤늦은 깨침에 대한 회한과 기쁨을 동시에 드러내는 시적 상관물이다. 이번 시집에 두드러진 순환적 시간에 대한 전폭적 긍정과 거기에 기댄 존재의 지속에 대한 확증 노력은 이런 인식의 전환에 따른 것이다.

고형렬에게서 영원성의 시간감각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역시 불교의 윤회설과 인연설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엄격히 말한다면 윤회나 인연은 삶의 영원성보다는 자신이 지은 ‘업(業)’에 따라 유한한 생을 반복해야 하는 우리 존재의 궁극적 고통을 지시하는 개념이다. ‘업’과 시간의 사슬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삶의 영원함을 나타내는 말은 잘 아는 대로 열반 혹은 해탈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의 삶에서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절대관념의 세계이다. 하지만 이런 한계의식이야말로 ‘윤회’를 시간의 순환이라는 유사성을 매개로 하여 삶의 무한한 생성과 지속이라는 영원회귀의 신화로 바꿔 읽게 하는 결정적 요소인지도 모른다.

『김포 운호가든집에서』에서 흥미로운 점은 ‘나’의 지속과 삶의 영원성에 대한 욕망이 곧잘 ‘생식’행위(「인공수정장에서」 「世上」), 또는 ‘성기’로 대표되는 남녀의 성적 요소(「無悲」 「정자가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이상한 性의 나라」 「슬픈 샘의 노래」)에 대한 담담한 관심과 포착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성적 소재와 표현은 그 지향과 감각이 적절하게 조절되고 통제되지 않을 때 비속성의 위험에 쉽사리 노출될 수 있다.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성적 행위에서 가장 물질적인 차원에 속하는 생식행위에 주목한 까닭은 무엇일까. 생식행위는 모든 에로티시즘의 물질적 기초를 이루는 요소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인간적 의미의 근원이자 존재 지속의 가장 확실한 증거물이다. 요컨대 그것은 가장 물질적이지만 가장 신성한, 그리고 순간적이지만 영원한 행위라 할 수 있다.

이런 삶의 지속에 대한 감각 속에서 생의 의욕은 활성화되며, ‘나’와 세계의 조화와 교감은 일상적인 것이 된다. 가령 “나만 데리고 혼자 마포길을/햇살과 바람과 걸어본다”(「서울 2」)라든가 “자운서원에 가서 혼자,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되든지”(「다시 갈 일 없는 문산극장」) 등을 보라. ‘혼자’라는 말은 자연의 리듬에 보폭을 맞추려는, 그럼으로써 삶의 온전한 개별성을 성취하고자 하는 의도된 소외의 표현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어둠속에서 미소를 짓고/나는 이미 누군가의 너무 밝은 생명 속에 가 있었다”(「림프강의 저녁」)는 ‘나’의 충만함에 대한 선언이 쉽게 터져나올 수는 없다.

그러나 ‘혼자’의 감각은 현실기각의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는 이 시집의 마지막 시들인 「겨울, 설악을 보며」 「황조롱이」에서 겨울을 이기는 삶들에 대한 기억과 외경(畏敬)의 필요성을 매우 짧고도 힘있는 단형 서정시의 형식으로 설파하고 있다. 비교적 느릿하고 차분한 호흡으로 비근한 일상 속에서 삶의 지속감을 탐색하던 것과는 꽤나 다른 모습이다. 생명의 영원성은 관념적인 초월의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세계를 통해서만 그 육체를 살찌우고 현실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 일시적인 생명의 황홀이 생명의 박제화나 양식화로 빠져들지 않도록 시의 긴장을 다시 바짝 거머쥘 싯점에 고형렬은 서 있는 것이다.

 

3. 최정례(崔正禮)의 『붉은 밭』은 “모든 대명사들로 흩어지고 다시 거대한 하나 속으로 녹아드는 대명사”(옥따비오 빠스) ‘나’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이런 ‘나’의 추구는 타자(세계)를 오로지 ‘나’를 중심으로 인식, 통합하기를 그치고, 내가 ‘나’ 자신임을 유지한 채로 ‘나’의 타자성 역시 함께 보려는 욕구의 산물이다. 가령 서시(序詩) 격인 「숲」의 “한 나무에게 가는 길은/다른 나무에게도 이르게 하니?/마침내/모든 아름다운 나무에 닿게도 하니?”라는 구절은 타자성의 시학이 도달할 ‘신성한 숲’에 대한 시인의 기대를 충실히 드러낸다.

『붉은 밭』에서 새로운 ‘나’에 대한 기대를 추동하고 현실화하는 힘은 시간과 기억이다. 쉼없이 흐르는 시간은 ‘나’를 파편화시키는 분열의 원리이기도 하지만, ‘나’를 유지하고 지속하는 통합의 원리이기도 하다. 기억은 바로 그런 시간의 원리에 의해 직조되는 ‘나’의 복수성과 타자성을 발견하고, 거기에 구체적 형체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발견의 기억술은 ‘나’의 기원을 이루는 온갖 것들의 느닷없는 출현에 적합한 ‘순간’의 시간의식을 특권화한다. 최정례는 그 ‘순간’을 ‘착란의 시간’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물론 과거의 상기(anamnesis)를 통해 “내가 모르던 나의 실재를 끌어”(시집 ‘후기’)내는 순간 경험하는 강렬하고도 아찔한 의식의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깜빡 잠이 들었었나 봅니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푸른 골짜기 사이 붉은 밭 보았습니다 고랑 따라 부드럽게 구불거리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풀 한포기 없었습니다 그러곤 사라졌습니다 잠깐이었습니다 거길 지날 때마다 유심히 살폈는데 그 밭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붉은 밭」 부분

 

‘붉은 밭’은 ‘붉은 구슬’(「붉은 구슬」)과 더불어 이 시집에서 ‘나’의 타자성을 가장 확연히 드러내는 상징물이다. ‘붉은 밭’의 순간적인 나타남과 사라짐은 다시 체험하기 어려운 그것의 일회적 가치를 충실히 증거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나’에 대한 타자의 완강한 거부, 즉 “무언의/접근하고 하나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거부”(「돌멩이 돌멩이 돌멩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유추는 무엇보다 ‘붉은 밭’이 놓여 있는 위치와 상황에 대한 고려에서 얻어진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네가 나에게 가져다 준/내 속에 있는 너를 닮은/흔들리는 달려 구르는/네 속의 나를 모른 척하고/백천만 번의 잎을 스쳐가네”(「까마득 나무 앞을」)라고 말함으로써 ‘나’와 ‘너’의 무차별적 동화를 늘 경계하는 시인의 분별심에 기댄 것이기도 하다.

이런 ‘모른 척’하는 태도야말로 다른 시간의 옷을 걸친 ‘나’와 타자가 그 개별성과 고유성을 훼손당하지 않은 채 현재의 ‘나’ 속에 기거하게 하는 진정한 힘이다. 『붉은 밭』에서 타자성의 구현은 ‘늙은 여자’와 ‘나무’ 이미지를 통해 곧잘 이루어진다. ‘늙은 여자’와 ‘나무’의 현재는 그것들이 지나온 시간의 흔적과 기억들로 짜여지기에 거의 예외없이 모순적 통합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징그러운/추악하기에 아름다운/늙은 주머니다”(「늙은 여자」)나 “미루나무 미루나무에 얽매여/미루나무를 거절하고/미루나무로 붙들리고/미루나무 시간을 삼키고/구름을 뱉는다”(「미루나무 길」)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서 ‘여자’와 ‘나무’가 일종의 등가관계를 이룬다는 것을 눈치채기는 어렵지 않다. 우리는 ‘늙은 여자’에 대한 ‘아름다운 늙은 주머니’란 비유에서 고목(古木)을, ‘시간을 삼키고 구름을 뱉는 미루나무’의 속성에서 여성의 생산성을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이런 연유로 릴케는 ‘여성’을 “경탄할 만한 나무들, 황홀한 초원을 감지하는/이 아득함, 내게 닥친 모든 놀라움”(「미루나무 길」에서 재인용)이라고 찬양했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나무’들이 조화롭게 키재기하는 ‘신성한 숲’을 찾아가는 최정례의 작업은 철저하게 자기경험을 기초재료로 삼고 있다. 시인의 내면이 매우 투명하게 드러나고 이미지의 실감이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장점들이 시의 전달력과 시에 대한 접근가능성을 자동적으로 높이는 기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그 의미와 정황 파악에 급급하게 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이런 어려움은 아무래도 그가 순간적으로 떠올리는 의식 혹은 기억이 지나치게 사적인 경향을 띠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듯하다. 그것들이 좀더 보편적인 경험으로 끌어올려질 수만 있다면, 최정례 시는 한결 높은 탄력과 호소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4. 반칠환(潘七煥)의 첫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은 제목부터가 시집의 진행방향을 선명히 시사하는 바 있다. 그것은 「노스트라다무스의 별」의 “나는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람”이란 구절을 약간 변형한 것이다. ‘죽은 별’이 문명의 야만 속에 위기를 더해가는 지구, 좁혀 말하면 우리 삶의 현실에 대한 은유라는 것은 자명하다. 나의 ‘사랑’은 따라서 엄정한 문명비판 행위인 동시에 우리 삶을 “곳간 그득 쟁쟁한 소리들이 넘쳐 흐르던/소리의 왕국”(「노스트라다무스의 별」)으로 되돌리려는, 구원과 회복의 절실한 몸짓이다.

반칠환에게 유년기는 ‘소리의 왕국’의 다른 이름이다. 유년의 삶, 더 정확히 말해 유년의 심상은 ‘생애 최대의 풍경’(바슐라르)이란 말마따나, 어떤 역사현실의 간섭과 개입도 거부하는 불변의 원초성을 형성한다. 이런 역사 이전의 성격 때문에 그것은 곧잘 역사를 대체할 새로운 시·공간 모델로 상상되고 동경된다. 가령 ‘지킴이’의 목소리를 빌린 “나는 언제까지나 이들의 유년의 꿈에 귀기울이며, ‘내 탓’을 얹기를 희망할 것이다”(「지킴이의 노래」)란 시인의 말은 유년으로의 회귀가 곧 미래의 건설이 되는 그런 역설적 미래의식을 충실히 대변한다.

그러나 이렇게 절대화된 유년의 심상은 유년의 경험현실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성년의 주체가 성숙한 의식을 토대로 과거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가운데 추체험해낸 일종의 가상이다. 반칠환의 ‘유년’은 그 실상을 말한다면 가난의 수난과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 노동의 권리를 빼앗긴 병든 몸 때문에 스스로 목에 ‘새끼줄’을 걸기도 했던(「아버지 1」) 아버지의 절망과 “대마디 같은 손, 솔거죽 같은 발꿈치, 지게 진 뒷모습”(「아버지 4」)이 일상이 된 어머니의 고난, 그리고 “내남 없이 주려 넘던 보릿고개였으나 사발입보다도 형제들 목구녕이 턱없이 크게 벌어지던”(「지킴이의 노래」) 눈물겨운 풍경은 그 유년의 구체적 실상이다. 이것은 불과 한 세대 전 우리 겨레의 대다수가 처해 있던 삶의 실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현실의 불우와 비극을 더욱 조장하기 십상인 가난의 체험은 어떻게 해서 ‘생애 최대의 풍경’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아래의 강조 부분에 적절히 제시되어 있다.

 

지킴이가 된 나는 연애도 잊고 이 집에 ‘내 탓’을 얹으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가난했으나 스스로 꿈을 세울 줄 알았고, 꿈을 세웠으나 꿈을 위해 남과 다투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도울 수 없는 나야말로 이 집에서 가장 가난한 지킴이였다.

—「지킴이의 노래」 부분(강조는 인용자)

 

우리는 이 구절에서 자립과 절제, 화해와 공생 등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조화와 순응, 그리고 유연의 정신을 본다. 이것이 자연(自然), 즉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세계의 이상적 운행원리에 바로 귀속시킬 수 있는 가치란 사실을 간파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런 정황은 가난의 문화사적 의미 탐구가 주로 가족과 자연 체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대해서도 적잖은 실마리를 제공한다. 순환하는 자연의 자족성과 영원성은 흔히 그것을 인간행위의 모델과 가치평가의 잣대로 삼게 한다. 목적 없는 친밀성으로 결속된 가족은 인륜의 원칙이 최고도로 구현되는 최소의 사회단위이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자연스럽고 인간다운 삶의 본질과 가치를 처음으로 경험하고 터득케 하는 ‘학교’인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그는 “솔뫼 고개 우리 집”을 ‘외딴 유치원’(「외딴 유치원」)으로, 그 집 둘레에서 경험하는 자연환경을 ‘자연의 학교’(「자연의 학교」)로 부름으로써, 자연과 가족에 대한 그런 보편적 인식을 충실히 전개하고 있다.

과거의 삶에 담긴 ‘가난 속의 풍요’를 역설하는 기억의 시학은 대체로 지금의 ‘풍요 속의 빈곤’이란 현실에 대한 안티테제로 제시되는 경향이 있다. 이때 기억의 시학이 빠지기 쉬운 오류는 “욕망부호에 관통당한 개인들을 향해 빈곤의 미덕을 노래하거나 ‘가난했던 과거’의 기억을 환기시켜 그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 회복의 길인 것처럼 설교”(도정일)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가난(과거)을 신비화·미학화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현재를 추상화·신비화하는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상화된 과거의 상(相) 속에서 현실은 늘 부정적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현실의 다양성과 풍부성은 그 탄력을 상실한 채 잘게 부서지고 딱딱해진다. 반칠환의 시 역시 이런 제약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다. 이 시집의 2부 ‘속도에 대한 명상’은 그의 과거회귀가 “부지런히 종말을 완성”(「사라진 동화 마을」)하고 있는 현대문명에 대한 거부와 깊이 연동되어 있음을 분명히한다. 과거는 선, 현재는 악이란 단순명료한 태도는 ‘학교로서의 가난과 자연’이란 테제를 발굴해낸 그의 독특한 유년 탐구마저 복고주의의 혐의에 다가서게 만든다. 그에게 아직은 ‘개성 있는 재능’이란 명패를 흔쾌히 달아주기가 주저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언어를 다루는 세공능력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세계와 현실을 사유하는 태도의 단순성과 소박성 때문일 것이다.

 

5. 존재의 한계이자 존립근거인 시간의 경험은 ‘나’와 타자를 묶어주기도 하지만 독립적 실체로 나누어주기도 한다. 따라서 어떤 개인의 고유한 문양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시간 경험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비록 자세히 검토하지는 못했지만, 세 시인의 새로운 ‘나’의 탐구에서도 시간 경험이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고형렬은 삶의 지속에 대한 관심에서, 최정례는 내 안에 무수한 타자를 풀어놓기 위해, 반칠환은 문명비판과 원초적 감각의 회복을 위해 각기 영원성, 기억과 순간, 성화(聖化)된 과거와 같은 시간의 요소들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이들의 시간 경험이 발하는 ‘아우라’(aura)가 과연 오늘날의 이러저러한 ‘복제’ 경향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지 하는 여부는 매우 녹록찮은 검토와 판단을 요하는 문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에서 시간에 대한 관심은 도대체 불가능한 시간 밖으로의 초월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시간이 초래하는 복잡다단한 삶의 문제들과 씨름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시간에 대한 관심은 삶의 신비화와 세계의 기만에 기여하게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시는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시간 앞에서는 더욱 부지런히 “흩어지고 부서지며 떠”(최정례 「미루나무 길」)다닐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