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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페넬로페의 복화술

공선옥 장편소설 『수수밭으로 오세요』, 여성신문사 2001

천운영 소설집 『바늘』, 창작과비평사 2001

윤성희 소설집 『레고로 만든 집』, 민음사 2001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이 있음. llauper@hananet.net

 

 

1. 그리스 신화에서 페넬로페(Penelope)의 옷감짜기에 얽힌 이야기는 서구의 페미니스트들에게 자주 인용되는 문학적 비유이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던 페넬로페는 시아버지의 수의를 짜는 일이 끝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남자들에게 약속한다. 낮에는 수의를 짜고 밤에는 남몰래 그 수의를 풀어버린 페넬로페의 모습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적 서사의 상징을 읽어낸다. 페넬로페는 밤동안 아무도 모르게 그녀의 수의를 풀어버린다. 그녀는 자기의 본심이 담긴 진술을 숨겨둔 채 늘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페넬로페처럼 오랜 시간 동안 여성작가들은 자신의 경험과 삶을 진술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의미가 감추어진 텍스트 속에서 여성적 목소리를 창조적으로 읽어내야 하는 지난 시대의 작품들에 비한다면 근래 여성작가들이 전면화하는 성(性)과 사랑, 가족의 테마는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페넬로페의 후손들은 자신이 밤새 수의를 풀어버렸노라고 당당히 고백한다. 권위적인 아버지와 강인한 어머니의 담론을 넘어서 변화해가는 여성적 서사의 새로운 양상은 거침없는 자기노출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외형과 달리 여성적 글쓰기의 내부에는 여전히 모순과 균열이 존재한다. 문화상품이 넘쳐흐르는 이미지의 시대에 여성의 글쓰기는 육체와 욕망의 담론만큼이나 빠르게 번성해왔으며 그만큼 쉽게 오해되고 왜곡되어왔다.

 

115-287

 

공선옥의 『수수밭으로 오세요』와 천운영의 『바늘』, 윤성희의 『레고로 만든 집』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여성적 글쓰기의 양상도 단일하지 않다. 이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기존의 가족서사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여성적 정체성의 탐구다. 공선옥 소설에서 탐구되는 모성은 전통적인 가족 형태와 힘겨운 싸움을 예고하는 갈등의 서사로 드러나며, 천운영 소설이 탐색하는 욕망의 담론은 여성 육체에 대한 새로운 미학적 탐색을 예고한다. 윤성희의 소설은 얼굴이 지워진 타자의 희미한 씰루엣 속으로 여성을 이끌고 간다. 또한 공선옥의 소설이 고백적인 서사에 가까이 가 있다면 천운영과 윤성희의 소설은 사적인 기록이나 근거를 배제한 글쓰기를 시도한다. 이들의 소설은 생존의 보호막이 파괴된 폐허의 현실 속에서 움트는 다양한 여성적 글쓰기의 형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고찰을 유도한다.

 

2. 공선옥(孔善玉)은 가난과 사회적 소외를 여성의 생존방식과 연결짓는 보기 드문 작가다. 80년대 광주체험의 여진 속에서 남은 가족을 부양하는 힘겨운 여성 가장의 삶은 공선옥의 초기작에서 자주 나타나는 소재였다. 소설집 『피어라 수선화』(1994)와 『내 생의 알리바이』(1998), 장편소설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1993)과 『시절들』(1996)에서 드러나는 생의 절박한 몸부림은 공선옥 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신작소설인 『수수밭으로 오세요』에서 공선옥은 경험적 어머니의 세계를 본격적인 장편 형식으로 풀어놓았다. 주인공 필순이 전 남편의 아이 한수를 데리고 이섭을 만나 아이를 낳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다가 다시 ‘홀로어멈’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이야기의 뼈대가 된다. 새로운 가족의 탄생과 해체를 소재로 한 이 소설은 기존의 여성소설에서 보기 힘든 재혼의 문제, 의붓아버지의 존재, 핏줄이 섞이지 않은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가족 개념을 골고루 다룬다.

공선옥의 소설답게 가장 실감나게 묘사되는 부분은 아이를 건사하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는 아이들을 달래고 씻기고 먹이는 고단한 일상은 공선옥의 이전 소설에서도 익히 보아온 장면들이다. 필순이 친구 은자의 아이들인 소정과 소란을 데려와 자신의 아들 한수·산이와 함께 키우는 어머니로서의 일상은 공선옥 소설에서만 풍기는 삶의 훈기를 느끼게 한다. 한번도 본 적 없는 남자가 필순에게 찾아와 여동생 필례의 아이라고 봄이를 맡기고 가는 장면도 가슴을 찡하게 한다. “누구의 아이면 어떠랴 싶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눈물이, 제 가슴 가득, 눈물이 어룽져서 만들어낸 무늬가 사방 연속무늬의 도배지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는 것, 봄이를 놓고 가라 말한 그때 제 가슴 가득 눈물의 무늬가 어룽졌다는 것”(187면)이라는 필순의 고백은 핏줄을 넘어서 어린 생명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심정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어머니 노릇에 대한 세부의 묘사가 자신감을 띤다면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사는 남편과 아내가 겪는 갈등은 다분히 일방적인 서술로 그려진다. 필순의 눈으로 바라본 재혼가정의 갈등은 아버지 노릇을 거부하며 가난과 고통의 실체를 모른 채 지식인적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이섭에게 책임이 있다. “아버지는 아저씨였을 때 참 좋았다가 아빠였을 때부터 싫어졌고 아버지라고 부를 때부터는 무서워졌다”(87면)는 한수의 고백은 필순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는다. 이섭은 핏줄이 아닌 한수에게 종내 서먹함을 버리지 못하며 자신이 속한 지식인사회에 쉽게 편입하지 못하는 아내를 경원시한다. 그가 필순에게 안겨주는 소외감은 “자기 같은 사람으로서는 닿을 수 없는 아주 먼 세상 사람 같기도”(같은 곳) 한 느낌이다.

따뜻한 모성과 비정한 부성의 대립적인 구도는 필순과 이섭의 환경적 차이에서 오는 모순을 단순하게 만든다. 가난한 자/부유한 자, 지식인/노동자, 부성/모성으로 이분화된 갈등구도는 필순과 이섭이 처음부터 평안할 수 없는 관계였음을 암시한다. 이섭이 언젠가부터 멀어지게 된 것은 부모를 잃은 가엾은 ‘새끼’를 대책없이 떠맡는 필순의 행동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들은 계층적인 환경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결별하고 만다. 이섭의 어머니와 형수는 필순을 무시하기 일쑤며 이섭 역시 그것을 변명하려 하지 않는다.

소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되는 필순의 고백적 서술이 어느 대목에 이르러 공평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를 긍정적인 ‘어머니 되기’의 방식으로 돌파하려는 데 있다. 아이들과 어머니가 이루는 친근한 풍경과, 지식인들의 허구적 욕망에 대한 씨니컬한 묘사는 불협화음을 이루며 계속 삐걱거린다. 이섭으로 대표되는 아버지의 모습은 어머니인 필순의 관찰적 시선에 의해 이기적이고 허약한 사람으로 형상화된다. 이섭의 동료로 등장하는 전병순 일가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가난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가난하고 소박한 삶을 살겠다는 지식인들의 행태는 필순의 눈에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으로 포착된다. 한때 은자에게 책읽기를 권유하며 진정한 아름다움은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설교했던 속셈학원 원장이 졸렬한 바람둥이였다는 사실은 작가가 보는 ‘돈있고 배운’ 사람들의 형편없는 작태를 표현하기에 충분하다.

필순의 분노는 아이를 키우며 먹고살기에 발버둥쳤던 자신의 진실한 과거에 대해 끝까지 냉담한 이섭의 모습에서 비롯된다. 필순은 어머니와 아내 사이를 동동거리며 오가다가 자신의 온전한 의지와는 상관없이 ‘홀로어멈’의 입장으로 되돌아온다. 그것은 세상의 미물을 껴안는 ‘어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비정한 경쟁체제 사회에 대한 분노로 향한다. 결국 이 소설에서 모성은 지극히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가치로 정리된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겪는 심리적 소외감과 계층적 콤플렉스를 견디는 유일한 출구가 바로 모성인 것이다.

‘어미’와 ‘새끼’는 공선옥 소설의 핵심을 보여주는 단어지만, 모성이란 단순히 힘없고 가엾은 어린 자식들을 껴안는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성은 절대적인 헌신과 희생의 자질만이 아닌, 갈등하고 좌절하는 삶의 흡수라는 점에서 힘을 가질 수 있다. 『수수밭으로 오세요』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어머니 되기의 과정은 이러한 복잡한 감정의 굴곡을 포착하는 데는 다소 미흡한 부분을 보여준다. 소설에서 부각되는 것은 거친 노동과 가난을 다시 끌어안는 억척스러운 모성의 모습이다. 재혼가정의 위기와 갈등이라는 상황이 주인공의 경험적 모성의 확인이라는 다소 관습적인 결말로 향한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성적 서사의 새로운 설정은 고심하고 다루어야 할 또다른 주제로 작가에게 남은 것 같다. 그것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행위가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차원으로 규정되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성적 현실을 역설적으로 알려주는 일이기도 하다.

 

3. 천운영(千雲寧)의 첫 소설집 『바늘』은 인물들의 내면에 숨겨진 어두운 욕망의 세계와 억압된 야생적 성의 세계를 끄집어내는 데 힘을 발휘한다. 천운영 소설의 독특한 인물 설정은 문신술사, 횟집 주방장, 가축도살업자, 고물상 등의 특정한 직업이라든지 추하고 그로테스크한 외모 속에 공격적인 성과 야수성을 숨겨둔 모습으로 드러난다. 인물들이 한결같이 육식에 대한 강박적 집착을 보이는 것도 공통적인 특징이다. 육식에 대한 갈망은 금기시된 욕망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욕구를 상징한다. “손가락 두께로 썰어서 피가 살짝 날 정도로 구운 쇠고기나 마늘과 양파를 많이 넣고 삶은 돼지고기를 좋아”(「바늘」 17면)하는 소설의 주인공들은 뜨거운 피가 흐르는 날것의 세계를 그리워한다. 천운영의 소설에서 식욕과 성욕은 궁극적으로는 혐오와 공포, 전율이 아닌 철저히 미학적인 아름다움으로 탐구된다. 지극히 정제된 묘사와 상징은 비루한 욕망의 세계를 예술적 세계로 변화시킨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을 효과적으로 미학화하는 천운영의 소설기법은 일상의 삶을 순간적인 판타지로 전이시킨다. 「유령의 집」에서 낡은 철제의자에 앉아 있는 그로테스크한 여성의 존재는 천운영의 소설세계가 인도하는 초월적 판타지의 영역을 암시한다. 고단하고 어두운 일상사에서 한걸음 나아가 비밀의 문을 열게 되면 우리가 알지 못하던 놀랍고 무서운 욕망의 세계가 드러난다. ‘심장 속에서 핏줄을 옭아매는 두려움’의 세계야말로 작가가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고통과 아름다움의 세계다.

“고통을 이겨내는 사람만이 협각류의 외피를 얻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바늘」 12면)라는 전언에서 감지되듯이 천운영의 소설에서 고통과 쾌락, 미와 추, 증오와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추함과 고통스러움은 아름다움과 쾌감으로 전도된다. 이러한 전도의 미학은 소설 속에 존재하는 가족의 형상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천운영의 소설에서 가족관계는 욕망에 대한 억압이 발생하는 근원적인 곳이다. 가족은 사회적인 애착관계라기보다 삶의 본질을 지배하는 숙명적이고도 윤회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부모의 삶이 자식의 생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운명론적인 설정은 여러 작품에서 반복된다. 특히 소설에서 전적으로 부상되는 것은 어머니와 할머니, 아내와 연인으로 이어지는 여성의 가계다.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의지를 분출하는 천운영 소설의 여성들은 다른 소설에서 보기 힘든 강렬한 이미지를 선사한다. 어머니나 할머니가 표현하는 소비적이고 왕성한 욕망의 세계는 그것을 바라보는 자식들을 제압하기에 충분하다. 「바늘」의 딸은 어머니가 현파스님에게 품었던 집착과 살의를 읽어내고 경악한다. 「월경」의 주인공을 휘감는 기억은 자신을 잉태한 어머니에 관한 것이다. 「눈보라콘」에서 “한입 베어문 아이스크림처럼 목젖을 간질이며 내 속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88면)오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소년의 욕망을 지배한다. 「숨」에서도 싱싱한 소골을 찾는 할머니의 탐욕스러운 식욕은 손자를 위축시키기에 충분하다. 어머니의 이미지는 때로 아내와 연인의 이미지로 대체된다. 「등뼈」에서 육식에 탐닉하던 애인이나 「행복고물상」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아내의 모습이 그 예다.

야성적이고 폭력적인 욕망의 세계는 불구화되고 황폐한 욕망의 세계와 짝을 이룬다. 「숨」의 노쇠한 육체나 「바늘」 「월경」 「포옹」의 그로테스크한 육체, 「행복고물상」의 불임의 이미지는 좋은 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존재에 억눌린 딸과 손자, 혹은 남편과 연인이 꿈꾸는 보상심리는 타인과의 접촉으로 드러난다. 「바늘」에서 화자는 남자들의 육체에 문신을 새겨주면서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결핍심리를 해소한다. 그녀는 문신을 할 때마다 섹스를 한 것 같은 깊은 피로를 느낀다. 「월경」에서 딸이 갈구하는 모태의 이미지는 야생의 분위기를 지닌 떠돌이 젊은 ‘계집’의 존재로 대체된다. “두려움에 떠는 날짐승의 냄새”(68면)가 나는 웅크린 ‘계집’의 몸을 만져보는 딸의 처연한 모습은 모태로 회귀하고 싶은 욕구를 드러낸다. 「숨」에서 할머니가 뿜어내는 공격적인 식욕을 혐오하는 손자는 애인 미연과의 ]스에서 심리적 위로를 얻는다. 「눈보라콘」에서 ‘점집 가시나’와 ‘눈보라콘’ 역시 어머니의 존재를 대리하고 보상하는 상징이다.

천운영 소설에서 욕망은 현실을 건너 환상의 세계로 진입함으로써 미학화된다. 핏줄의 관계로 맺어진 운명론적인 인연은 이 환상을 강화한다. 천운영 소설에서 표현되는 여성적 욕망의 세계는 인간의 욕망에 잠재한 보편적 양태로 읽힌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남성의 욕망으로도 표현될 수 있는 세계의 것이다. 어머니와 할머니—딸의 가계가 사회적인 의미를 갖기 위해서 필요한 구체적인 서사는 때때로 작가가 부여하는 운명론적 틀에 의해 고착된다. 그녀의 소설에서 인물의 클로즈업 효과는 강한 개성을 보여주지만 일상의 서사로 전이하는 순간 힘을 잃곤 한다. 「포옹」과 「당신의 바다」가 일상적인 스토리를 동원함에도 불구하고 「숨」이나 「바늘」 같은 완성도를 보이지 못하는 것도 이와 관련있다. 여성적 욕망에서 원초적인 야생성과 탈주욕구를 도출하려는 방법론적 도식이 인물의 캐릭터를 단일한 것으로 만드는 함정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작가도 이를 의식한 듯 최근의 작품에서는 변화의 시도를 모색하고 있다. 「눈보라콘」이 어머니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 사회적인 성장의 단계로 접어드는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이 소설은 「바늘」이나 「숨」만큼 강렬한 개성을 보여주지 않지만 작가가 고민하는 부분을 절실하게 드러낸다. “나는 어머니만 있으면 된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어머니의 품에서 잘 수만 있으면. 내게 필요한 것이 더 있다면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를 닮은 부라보콘뿐이다”(100면)라고 고백하던 소년은 자신을 둘러싼 욕망의 세계가 이미지로 둘러싸인 가짜 세계일 수 있음을 인식한다. 그가 사로잡혔던 소녀의 ‘부라보콘’은 알고 보니 그의 유사품인 ‘눈보라콘’이었다. 결국 소년은 어머니의 재혼소식을 듣고 자신의 욕망을 돌아보는 계기를 갖는다. 한밤중에 복천사에 가서 돌부처 머리에 오줌을 누고 돌아오는 소년은 비로소 자신을 강박하는 욕망으로부터 풀려남을 느낀다. 자신을 붙들어매는 운명론적 서사로부터 풀려나는 성장의 과정 속에서 천운영 소설은 일상세계와의 희미한 소통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의 소설이 일상과 제도로부터 탈주하려는 진정한 월경(越境) 행위를 꿈꾸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 할 수 있다.

 

4. 최근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일상사의 세부적인 묘사는 소외된 인간존재를 표현하는 효과적인 전략이 되어왔다. 내면심리 묘사를 극도로 억제하고 대신에 등장인물을 둘러싼 환경을 관찰자의 시각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윤성희(尹成姬)의 첫 소설집 『레고로 만든 집』에도 잘 드러난다. 윤성희의 소설이 특이한 점은 시각적인 관찰묘사를 기법으로 취하면서도 그 사이에 사람들의 얼굴을 조금씩 끼워넣는다는 점이다. 극단적인 소외의 풍경을 그려놓지만 결국 그의 소설에서 인간적인 온기를 발견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윤성희의 소설이 궁극적으로 가닿는 곳은 자아의 고독한 내면이다. 무심한 일상에 대한 꼼꼼한 기록들을 읽다보면, 작가가 사물적 묘사를 극적인 반전으로 활용하기보다는 인물의 외부에 흘러가는 풍경으로 놓아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인공들은 타인 앞에서 쉽게 입술을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홀로 있을 때만 말하고 움직인다. 그렇게 보면 윤성희의 소설은 여성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시키긴 하지만 특별한 성적인 정체성의 강박감을 표현하지 않는다. 남성/여성의 구분되는 의미 이전에 이들은 ‘타자’라는 소외된 풍경 속에 이름과 나이, 성을 잃고 가라앉아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성차와 역할을 분담하고 교육하는 모든 공동체로부터 주인공들은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다. 이들은 가족의 따뜻함을 그리워하지만 그것을 구성할 적극적인 비전이나 의지를 갖지 못한다.

임시직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며 하루하루의 고독한 삶을 들여다보는 윤성희 소설의 주인공들은 ‘얼굴과 이름이 지워진’ 흔적없는 타자들이다. 등단작 「레고로 만든 집」에서도 소외된 존재의 풍경은 세밀하게 포착된다. 소설에서 화자가 저녁준비를 하며 아버지의 기침소리를 듣는 첫 장면은 오정희의 「저녁의 게임」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레고로 만든 집」의 주인공은 「저녁의 게임」의 주인공처럼 극단적인 소외와 일탈의 충동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녀는 묵묵히 오빠와 아버지의 수발을 들고 직장에서 피곤한 하루의 일과를 보낸다. 그녀에게 삶의 따뜻함은 복사기에 얼굴을 대고 눈을 감는 순간에만 주어진다. 기계의 열기 속에 일상의 고단함을 달래야 하는 그녀의 모습은 현대인들의 소외된 풍경을 새로운 모습으로 전달한다. 초라하고 낯선 자신의 얼굴을 응시하는 이 조용한 침묵의 행위는 윤성희의 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탈주의 표현이다.

윤성희 소설의 ‘침묵하는 타자들’은 운명적 동일성을 가진 외로운 이들을 통해 삶의 위로를 받는다. 침묵하는 주인공들은 자신과 유사한 대상을 찾아 끊임없이 고독을 투영한다. 타인의 행위를 흉내냄으로써 그 사람의 욕망 속에 스며들어 간접적인 소통의 욕구를 표현하는 행위는 윤성희의 소설에서 반복적이고 강박적으로 드러난다. 「이 방에 살던 여자는 누구였을까?」에서 주인공이 이전에 그곳에서 살던 여인 은오에게 갖는 호기심은 결국 은오를 흉내내는 상상으로 변한다. 「서른세 개의 단추가 달린 코트」에서 기억 속의 은오를 떠올리려 애쓰는 주인공의 모습 역시 타인의 정체성에 자신을 대입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당신의 수첩에 적혀 있는 기념일」에서 주인공은 가난한 자들의 소외감과 울화를 ‘허공에 대고 총쏘기’를 흉내내며 해소한다. 「악수」에서 눈먼 할머니가 허공을 향해 누군가와 악수하는 장면을 흉내내는 주인공의 모습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타인의 욕망으로 스며드는 동일화의 행동은 종종 동시적 탄생이라는 운명론적인 설정을 동원하기도 한다. 가족서사의 운명론은 거부하면서도 오히려 타자들간의 운명적인 동일성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윤성희 소설만의 특징이다. 「계단」과 「모자」에서 등장인물들이 같은 ‘생일’을 공유하는 것은 그 흥미로운 예이다. 「모자」에서 생일을 모르는 E는 H의 생일로 자기 생일을 대신할 정도로 H와 친하게 지낸다. 결국 E가 H의 돈을 훔쳐 도망가긴 했지만 H는 E를 미워하지 못한다. 이들은 혼자 남겨진 운명에 대한 본능적인 연민을 서로에게 갖고 있는 것이다. 「계단」에서 두 남자는 ‘물고기 자리’라는 동일한 탄생의 별자리를 지녔다. 아내가 남긴 흔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504호 남자와 어머니의 자취를 견디기 힘들었던 104호 남자는 서로의 집을 바꾼다. 이들은 타인이 남긴 존재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자신들의 운명적 동질성을 느낀다. 결국 놀이동산에 같이 놀러 가서 바이킹을 타는 두 남자의 모습은 윤성희의 소설이 꿈꾸는 아주 작고 소중한 소통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고아가 다른 고아에게 갖는 연민과 이해는 「이 방에 살던 여자는 누구였을까?」에도 나타난다. 주인공은 거처를 마련해준 선배에게 왜 호의를 베푸느냐고 묻는다. 그녀의 대답은 명료하다. “나도 너처럼 세상에 혼자란다”(37면)라는 이 전언이야말로 윤성희 소설의 인물들이 수긍하는 삶의 고통이다. 「그림자들」에서 보험회사 직원이 어머니의 자살을 방조한 혐의가 있는 여자를 묵과하는 행위의 의미도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타인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극단적인 단절과 소외의 풍경이기도 하지만 바꾸어 생각해보면 아무것에도 기댈 것이 없는 외로운 자의 상황에 대한 무의식적인 연민과 동일시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알맞게 촉촉하고, 알맞게 따뜻한 손”(「악수」 126면)과의 만남은 윤성희의 소설이 희망하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교류다. 그들은 어쩌다가 식사를 함께한 상대방에게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는 건, 올해 들어 처음이야”(「그림자들」 144면)라고 중얼거린다. 울음과 고통을 속으로 삼킨 채 자신을 향해 중얼거리는 이 장면은 읽는이의 마음에 오랜 울림을 남긴다.

공동체로부터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타자간의 운명적 동질성의 발견은 윤성희 소설이 희구하는 비전이다. 그러나 ‘닮은꼴’을 통해 발견하는 삶의 아주 미약한 온기는 그것 자체로 위태롭고 아슬아슬하다. “우리들은 모두 닮은꼴”(「터널」 197면)이라는 자의식은 “똑같다는 것만큼 외로운 건 없”(같은 곳)다라는 씁쓸한 감상으로 귀결된다. 고아라는 동일한 운명을 통해 최소한의 허기를 달래는 것은 순간뿐이다. 윤성희의 소설이 더이상 나아가지 않고 머뭇거리는 지점도 여기다. 그의 소설은 단지 바라보고 중얼거릴 뿐이다. 인물들은 간혹 운명의 인연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것은 ‘레고로 만든 집’처럼 단단하고 폐쇄된 자신의 우물에서 맴도는 일시적인 환영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건조한 사물들의 세계에 갇혀 있는 이 인간들에게서 좀더 적극적인 고백을 듣고 싶기도 할 것이다. 그의 소설이 고수하는 침묵의 글쓰기가 ‘자아’를 드러내기 위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궁금하다.

 

5. 여성의 성과 사랑에 대한 무수한 문화적 담론들은 우리가 쉽게 즐기고 향유하는 일상으로 바싹 다가왔지만, 역설적으로 그 풍요로운 세계는 아직도 온전히 입술을 열지 못하는 고립된 자아의 모습을 선명히 보여준다. 공선옥과 천운영, 윤성희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자아의 모습은 새로운 문화담론 속에서 탄생했던 냉정한 나르씨시스트들의 모습과는 변별된다. 이들의 소설은 기댈 곳 없이 홀로 세상에 던져진 사람들이 감당해야 하는 존재의 소외와 결핍을 드러낸다. 공선옥의 소설이 견지하는 모성적 세계와 천운영의 소설에서 시도되는 욕망의 새로운 고찰은 제도화된 현실을 뚫고 나가려는 글쓰기의 의지를 보여준다. 공선옥의 소설이 생물학적인 본능으로 규정되는 제도적 모성의 한계를 끊임없이 의식해야 한다면, 천운영의 소설은 이론적인 명명으로 한정되기 쉬운 욕망의 담론을 계속 고민해야 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윤성희의 소설은 성과 이름이 희미해진 여성의 얼굴들을 그려나가며 보이지 않는 타인들간의 연대를 조심스럽게 모색한다. 그의 글쓰기가 꿈꾸는 작고 소박한 희망들이 세밀한 일상의 풍경에 갇히지 않기를 바란다. 생의 보호막을 일찌감치 상실한 단자들에 대한 기록들 속에서 여성의 글쓰기는 감추어진 무한한 욕망의 세계를 이끌어낸다. 현실적 혹은 운명적인 소외를 견뎌야 하는 진정한 타자들의 기록은 여성적 글쓰기가 개척한 미지의 영역이다. 소외된 타자와 감추어진 욕망을 주시하는 이 섬세한 시도들 속에서 우리는 침묵의 공간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